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현석2006.04.11
조회54

(2005. 6. 3.)

 

1. 

 

어제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그런 날이었다. 비가 온다든지, 구름이 잔뜩 끼었다든지, 눈이 온다든지, 심지어 유난히 화창하지도 않은 날이었다. 그래서 여느 날 같았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헐겁게 끼워져 있던 기억 속에서 툭하고 떨어져 나올 것만 같은 날이었다. 그녀의 집착과 휘황한 똑똑한 척에 질릴 만큼 질렸던 나는 이쯤에서 그만두자는 말을 했다. 의외로 마무리는 덤덤했다. 우리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까페를 나와서 각자 걸어온 길을 걸어가면서 헤어졌다. 공원으로 걸어 나오면서 꽃가게의 꽃바구니를 봤다. 노란 장미라도 한 송이 주면서 끝내자고 할 걸 그랬나? 달콤하고 화려한 고백과 알록달록한 사탕 한 통으로 시작된 연애는 석 달도 채 되지 않아 시큰둥하게 끝났다. 

 

 

문자 한 통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것은 집에 들어온 후 가방에서 볼펜과 노트, 그리고 손전화기를 집어들었을 때였다. 얘도 이러네. 왜 여자들은 마침표를 찍은 후에도 점을 더 찍어 말줄임표를 만들려고 하는 걸까? 폴더를 열고 두 번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미안했어 좋은 여자가 아니라서. 행복해]  

 

 

피식. 웃고는 배터리를 뽑아 충전기에 꽂았다.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늘 그랬듯 무척 뜨겁게 튼 다음 서서히 찬 쪽으로 돌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상태의 온도를 만들고 나서야 몸에 뿌리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머리를 감았다. 거품수건에 바디샴푸를 조금 뿌리고 몸을 씻었다. 마지막으로 헹군 다음 내 키 만한 수건으로 온몸을 휘감듯이 물기를 닦아냈다. 발바닥을 마저 닦기 위해 욕실 문을 열고 수건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그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꺽꺽 울기 시작했다. 원하던 이별이 말끔하게 끝나서 속이 시원했음에도 그저 눈물이 차 올랐다. 반쯤은 욕실에 반쯤은 문밖에 걸쳐진 발가벗은 나는 그다지 낭만적이지도, 비장하지도, 아름답지도, 멋있지도 않은 모양으로 쓰러져 울기만 했다. 

 

 

 

 

 

2. 

 

술자리에서, 특히 호젓한 바에서 입에 오르내리는 연애담은 행복에 겨워 허공을 날아다니는 이들의 실시간 방송이기보다는 지나간 사랑에 대한 곱씹음이 주를 이룬다. 그때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이 연애담이 아니라 이별담이 아닐까 생각한다. 굳이 이별의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어쩌다 보니 헤어졌어'라고 말한다해도 왠지 모르게 연애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느껴지기보다는 이별에 관해 이야기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은 분명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잡다한 에피소드들이지만, 이미 헤어졌다는 공허한 전제 아래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들의 눈에는 이별의 진한 흔적이 그대로 되살아 오는 듯하다. 을 같이 본 그 친구의 눈에도 그것은 있었다. 동네 바에서 얼마 전에 헤어진 남자와의 시시콜콜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던 그 친구는 내일 시간이 있냐고 물었고, 너라면 없고 싶은데 사실은 있다는 나의 대답에 영화나 같이 보자고 했다.  

 

 

재미있는 제목이었다. . 영화를 보기 한 시간 전쯤에야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들을 수 있었다. '조제'는 여자주인공의 애칭, '호랑이'는 조제가 싫어하는 것, '물고기들'은 조제가 좋아하는 것. 말하자면 , 뭐 이런 풍의 제목이었던 셈이다. 친구가 물었다. 

 

 

-뭘 의미하는 것 같아? 

 

-글쎄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런 거 아닐까? 헤어지고 난 후에 남는 파편화된 잔상들 말이야. 

 

-아련해지는 기억들이란 말이지? 

 

-그렇지.  

 

-왠지 너 단단히 벼르고 보는 것 같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別れの理由はまらいろいろって言うにことになっる. 

헤어진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でも本當は一つだ. 

아니 사실은 한 가지였다. 

 

ボクが逃げた. 

내가 도망쳤다. 

 

 

 

영화는 담백했지만 녀석은 그다지 담백하지 못한 소리를 내며 훌쩍이고 있었다. 아마도 조제가 혼자 전동차를 타고 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장면에서부터 마스카라를 조심조심 문지르는 듯 했다. 관객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때문에 화장실도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간 그녀는 함흥차사였다. 민망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전화도 못하고 있었는데, 한참 후에야 그 친구는 깔끔하게 화장을 고친 얼굴로 재등장했다. 확실히 벼르고 온 것이다. 밖으로 나와 가까운 까페에 가서 푹신한 소파에 각자의 몸을 쑤셔 넣었다. 

 

 

-겁쟁이 자식. 재수 없어. 그렇게 떠나다니. 

 

-응, 재수 없는 건 맞는데.. 왠지 나라도 그럴 거 같아. 

 

-너도 남자다 이거지? 

 

-아니. 남자고 여자고 떠나서.. 그냥 그래. 

 

-너무 비겁하지 않아? 

 

-'너무'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비겁하고 이기적이야. 10명 중 9명은 그런 선택을 했겠지만. 그런 식으로 무던하게 이별을 했다고 해도 왠지 울고 싶어질 것 같아. 

 

-그래? 차 버린 주제에 청승까지 떨었단 말이지? 

 

-정확한 말씀. 영화가 아기자기해서 칼을 드러내 놓지는 않았지만 츠네오가 막연하게 흘린 눈물은 위선적인 동시에 자조적이야. 그렇다고 조제가 불쌍한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아. 스스로 인정했듯이 조제는 장애를 무기로 사용한 거 아냐? 그런 조제의 자활을 보여주는 마지막 부분이 왠지 모르게 작위적으로 느껴졌어. 

 

-넌 항상 그래. 너무 리얼리즘을 중시한단 말이야. 예술은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이 아닌 솜사탕 같은 환상도 보여줄 의무가 있는 법이야. 확실히 지금 내 상황에서 보니깐 지나칠 정도로 감정 이입이 되더라. 그렇게 아기자기한 사랑이라도 결국 헤어지고 나면 이라는 제목처럼 분절되고 파편화 되는 것 같아. 

 

-내 참. 누가 들으면 헤어진 지 3년은 족히 된 줄 알겠네. 

 

 

 

 

 

3. 

 

확실히 이별 후에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자잘한 기억들이 사라진다. 심지어 얼굴조차 흐릿해져 길을 가다 마주쳐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무심결에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아직 그럴 정도의 심한 망각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공적인 업무와 관련해서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을 때 전화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아 적잖이 당황한 적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의 말대로 이 영화가 파편화된 연애의 기억이라고 평한다면 '뭔가 적당하지 않은 구석이 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찜찜한 마음을 품고 있던 차에 극장에서 가져온 영화 선전 전단을 다시 보면서 무엇인가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 이 영화의 원제는 로 한역 제목이 주는 분절적 뉘앙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번역자가 조금 더 영화를 세련되어 보이게 하기 위해 영화의 영문 제목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and'를 '와'로 번역하지 않고 '그리고'로 번역한 모양이었다. 명백히 우리의 오해는 번역의 잘못에 있었다. 영화는 파편화된 사랑의 재조합일 수는 있다. 하지만 파편화된 연애의 부분 부분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흐려지고 닳아진 기억이라 해도 그것이 여전히 눈썹 위에 매달려 있고 혀끝을 맴도는 한 우리는 기억의 조각들을 통해, 우리의 이별이 가지는 총체적 모습을 목격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 영화가 1시간 40분간의 연애 소품 종합세트였다면 일본 연애 영화에 그다지 관대하지 못한 내가 이 영화를 보며 깊숙한 곳에서의 울림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정하게 지나가는 필름 위로 영사되는 담담한 사랑의 파편들은 연애담의 일부가 아니라 이별담의 일부였다. 키스와 포옹으로 무책임하고 성의 없게 끝내는 해피앤드가 아니라, 이별의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영화는 사랑의 전과정이 아닌 이별의 전과정을 보여줬다. 고 생각했으며,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막 자기 전에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대화 도중 이러한 발견에 대해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로 간략하게 이야기했지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말이 그거잖아. 

 

 

 

4. 

 

결국 그녀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녀가 두 다리 멀쩡한 조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끔씩 했다. 자신의 주관이 강하고, 박식해 지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다 여의치 않으면 똑똑한 척이라도 하려고 하고. 똑똑한 척만 하면 귀여운데 내가 수긍할 때까지 우기고 계속해서 고집 피우고. 피곤하고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녀와 사귀기 시작한 지 석 달도 되지 않아 헤어진 것은 아무래도 그런 성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난 추하게 울었다.    화장실에 반쯤 몸을 걸쳐놓고 말이다.         츠네오라고 했던가?    나는 너를 이해한다.

 

 

 

 

 

/반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