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죽음의 날이 언제인지 결코 발설되지 않았기에 열정을 지니고 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대개의 인간의 경우 자신이 죽을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에, 죽음이라는 면이 결여된 삶의 모습만을 바라보고 살면서 항상 희망차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먼 미래에는 이루어져 있으리라 꿈꾸는 자신의 희망을 펼쳐 보이면서, 그 꿈을 이루려 노력하며 활기찬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6개월이라는 삶이 운명 지워져 있다. 6개월이라는 기간의 삶은, 평소 내가 꿈꾸던 것들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짧은 삶이다. 평소 꿈꾸던 일과 직업을 가질 수 없는 기간이며, 친한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여 죽음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배움을 얻을 수도 없는 기간이고, 자신의 분신을 낳음으로써 자기의 한 부분이 대를 건너가면서 영속되는 것을 볼 수도 없는 기간이다. 이러한 짧은 기간 동안,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6개월 후에는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세계로 떠나야 하는 여행객으로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책에서 본, 현재 나의 처지와 비슷한 인물의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길가메쉬, 인류 최초의 서사시의 주인공. 그를 구성하는 신체의 2/3은 신이지만, 나머지 1/3은 인간이기에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반신반인으로, 항상 죽음을 벗어나고자 했던 비극의 인물이었다. 죽음은 단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다가가게 마련인 운명이라 생각했던 당시의 길가메쉬는, 괴수 훔바바를 처치해서 후세에 길이 명예를 남기려는 생각으로 가득하였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이었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후에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함으로써 자신에게도 죽음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고부터, 도처에서 자신에게 밀려오는 죽음의 기운에 공포를 느끼게 되는 나약한 인간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영생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며 세상의 끝까지 찾아가나, 눈앞에 둔 불로초를 뱀에게서 어이없게 빼앗기고는 죽음에 굴복하는 인물이었다. 이렇듯 죽음이 눈앞에 가까운 짧은 삶에 저항하고자 하나, 결국엔 죽음에 순종하고 그 길을 순순히 따르게 되는 길가메쉬의 모습에서, 짧은 삶만이 허락된 나의 앞으로의 생의 모습과 겹치는 것이었다. 결국엔 죽어 묻혀져야만 한다는 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깨닫게 된 길가메쉬가 죽음에 대처하는 법에 대해 익히게 되듯이, 나도 나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죽음을 겪어야 할지 알아야만 하였다.
이렇듯 길가메쉬와의 비교를 통해서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하는 중에, 그에 대한 답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눈에 띄는 한 대목이 있었다. 길가메쉬가 영생을 얻기 위한 방황의 여로 중에 만난 여인숙의 안주인 씨두리와의 대화였다. 죽음에서 벗어나려 아등바등하는 길가메쉬의 황량한 몰골을 보고서는, 씨두리라는 여인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영생은 인간에게 주어진 몫이 아니라고 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현재에 충실하라고. 또한 분노에 얽힌 마음을 가지고 죽음에 접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 다. 비록 간략한 대화로 이루어진 대목이었으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고 어떻게 죽어야 할지에 관해서 정확히 꿰뚫어 보인 부분이던 것이었다. 이러한 대화를 읽고 생각하게 되면서 앞으로 나 자신이 6개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나름대로 정하게 되었다. ‘현재에 충실하리라. 6개월이라는 기간에 연연해하지 말고 후회 없이 살리라.’
더 이상 원치 않는 스케줄에 치여 살면서, 일상 속에 묻혀 있는 소소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그냥 지나쳐가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붉게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한 무리 새떼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이름 모를 꽃들이 공원 저편에 만개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창문 너머에서 밝은 햇살이 방 안으로 가득 비쳐왔을 때, 이러한 것들을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쳐버리기보다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할 것이다. 또한 6개월 간 매일 아침마다, 이전에 게을리 했던 개천 산보를 항상 행할 것이다. 이전처럼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홀로 음악을 들으면서 주변과 유리되어 걷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고 동화되어 가면서 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충만하게 느끼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6개월이라는 생존 기간을 늘리기 위하여 아등바등하다 정작 주어진 기간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죽음을 뒤로 미룰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보다, 6개월이라는 기간이 죽음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충분히 긴 시간이 되도록 할 것이다. 6개월은 180여 일, 180여 일은 4320여 시간, 4320여 시간은 259200여 분, 259200여 분은 15552000여 초이다.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한탄하기보다, 15552000여 초라 하는 무한히 많아 보이는 시간 동안 매초 매초를 후회 없이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이처럼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고 흘러가버린 시간에 후회가 없도록 행동함에 있어 충실하도록 할 것이다.
또한 내가 그동안 내 주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을 표시할 것이다. 나의 잘못으로 인해 관계가 틀어졌던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차마 표현하기 민망하였던 마음에 고마움을 표시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할 것이다. 사람들 간에 느낄 수 있는 사랑, 애정, 미움 등의 감정들은 결국 그 대상이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품고서, 갈등은 풀고 호감은 표시하면서 인간관계를 차분히 정리하여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평판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인생이라 하더라도, 앞으로의 날들을 종교에 의존해서 살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종교가 제시해 주는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희망을 품고서, 그 세계로의 여행을 준비한다 하면서 남은 삶의 6개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것이다. 내게 있어서 죽음 그 후의 세계란 완전한 무(無)이다. 아니, 무이어야 한다. 사후 세계에서의 안락을 위한 피라미드를 웅장하게 짓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치는 일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일까. 보장되지 않은 저승 세계 때문에 삶 속의 소중한 순간들을 소비하는 것만큼이나 낭비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을 것인가. 고로 나는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을 완벽하게 하기 위하여, 사후 세계를 무로 상정하고 최대한으로 현실을 만끽하리라. 또한, 사후의 심판을 두 려워한 나머지, 평소 원하던 어떠한 바를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죽기 직전에 후회하게 되 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할 순간에 다다랐을 때에, 임종의 고통을 낮추고자 행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내게 시행하게 하기보다, 인간다운 품위를 지니고 죽도록 할 것이다. 단지 짧은 순간의 생의 연장을 위하여 지극히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며 익명성이 강한 공간인 병원에 머무르다가 생을 마감하기보다는, 생명 연장의 희망이 존재치 않는다 하더라도 집이나 호스피스 병원 등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어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에서,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친했던 이의 손을 잡고서 웃으며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다. 6개월이라는 기간동안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관해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그 이상의 삶에 있어서 집착을 보이지 않으며 인간답고 아름답게 웃으면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
그 후에 나의 시체는 장기 기증을 하거나 혹은 여의치 않을 시에 해부 실습 등을 위해서라도 시체를 기증하여,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하는 동시에 그동안에 나의 삶의 동반자였던 신체로부터 일말의 집착을 보이는 바 없이 완전히 해방이 되도록 할 것이다. 빈껍데기에 불과한 시체를 위하여 어떠한 의식을 치르게 하기보다는 기증 등의 좀 더 유익한 방향으로서 쓰일 수 있도록 하여, 뒷사람들로 하여금 의미 없는 빈 무덤의 주인보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타인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으로서 기억하도록 하고 싶다.
실제로 내게 6개월이라는 시한부 인생이 주어졌을 때,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침착하게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내닫는 것은 기실 힘든 일일 것이다. 오히려 좀더 살아보고자 발악을 하면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생각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이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처음에 죽음을 인정치 않으려다가 분노와 타협 등의 관계를 거쳐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야 죽음을 승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러한 태도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올바른 태도가 아님을 알기에,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맞닥뜨려야만 삶의 의미를 다시금 제대로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위에서와 같은 6개월간의 삶을 살고자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죽음을 가벼이 여기며 생활해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사는 삶이 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6개월간의 삶이 주어진 나의 인생.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람들마다 그 생활방식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경우, 6개월 후의 죽음이 주어진 것이 아닌, 6개월이라는 새로운 삶의 기간이 주어진 것처럼 살 것이다. 그리하여 6개월간의 나의 생에 관한 이 글이 6개월 후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서라기보다, 앞으로의 삶에 대하여 자신의 다짐이나 각오를 표명하는 각서가 되도록 할 것이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던 길가메쉬에게 씨두리가 조언했던 바처럼,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면서 죽음에 당당하게 맞서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어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내게 만일 6개월의 삶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자신의 죽음의 날이 언제인지 결코 발설되지 않았기에 열정을 지니고 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대개의 인간의 경우 자신이 죽을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에, 죽음이라는 면이 결여된 삶의 모습만을 바라보고 살면서 항상 희망차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먼 미래에는 이루어져 있으리라 꿈꾸는 자신의 희망을 펼쳐 보이면서, 그 꿈을 이루려 노력하며 활기찬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6개월이라는 삶이 운명 지워져 있다. 6개월이라는 기간의 삶은, 평소 내가 꿈꾸던 것들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짧은 삶이다. 평소 꿈꾸던 일과 직업을 가질 수 없는 기간이며, 친한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여 죽음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배움을 얻을 수도 없는 기간이고, 자신의 분신을 낳음으로써 자기의 한 부분이 대를 건너가면서 영속되는 것을 볼 수도 없는 기간이다. 이러한 짧은 기간 동안,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6개월 후에는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세계로 떠나야 하는 여행객으로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책에서 본, 현재 나의 처지와 비슷한 인물의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길가메쉬, 인류 최초의 서사시의 주인공. 그를 구성하는 신체의 2/3은 신이지만, 나머지 1/3은 인간이기에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반신반인으로, 항상 죽음을 벗어나고자 했던 비극의 인물이었다. 죽음은 단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다가가게 마련인 운명이라 생각했던 당시의 길가메쉬는, 괴수 훔바바를 처치해서 후세에 길이 명예를 남기려는 생각으로 가득하였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이었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후에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함으로써 자신에게도 죽음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고부터, 도처에서 자신에게 밀려오는 죽음의 기운에 공포를 느끼게 되는 나약한 인간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영생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며 세상의 끝까지 찾아가나, 눈앞에 둔 불로초를 뱀에게서 어이없게 빼앗기고는 죽음에 굴복하는 인물이었다. 이렇듯 죽음이 눈앞에 가까운 짧은 삶에 저항하고자 하나, 결국엔 죽음에 순종하고 그 길을 순순히 따르게 되는 길가메쉬의 모습에서, 짧은 삶만이 허락된 나의 앞으로의 생의 모습과 겹치는 것이었다. 결국엔 죽어 묻혀져야만 한다는 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깨닫게 된 길가메쉬가 죽음에 대처하는 법에 대해 익히게 되듯이, 나도 나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죽음을 겪어야 할지 알아야만 하였다.
이렇듯 길가메쉬와의 비교를 통해서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하는 중에, 그에 대한 답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눈에 띄는 한 대목이 있었다. 길가메쉬가 영생을 얻기 위한 방황의 여로 중에 만난 여인숙의 안주인 씨두리와의 대화였다. 죽음에서 벗어나려 아등바등하는 길가메쉬의 황량한 몰골을 보고서는, 씨두리라는 여인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영생은 인간에게 주어진 몫이 아니라고 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현재에 충실하라고. 또한 분노에 얽힌 마음을 가지고 죽음에 접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 다. 비록 간략한 대화로 이루어진 대목이었으나,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고 어떻게 죽어야 할지에 관해서 정확히 꿰뚫어 보인 부분이던 것이었다. 이러한 대화를 읽고 생각하게 되면서 앞으로 나 자신이 6개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나름대로 정하게 되었다. ‘현재에 충실하리라. 6개월이라는 기간에 연연해하지 말고 후회 없이 살리라.’
더 이상 원치 않는 스케줄에 치여 살면서, 일상 속에 묻혀 있는 소소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그냥 지나쳐가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붉게 노을 진 하늘을 배경으로 한 무리 새떼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이름 모를 꽃들이 공원 저편에 만개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창문 너머에서 밝은 햇살이 방 안으로 가득 비쳐왔을 때, 이러한 것들을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쳐버리기보다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할 것이다. 또한 6개월 간 매일 아침마다, 이전에 게을리 했던 개천 산보를 항상 행할 것이다. 이전처럼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홀로 음악을 들으면서 주변과 유리되어 걷기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고 동화되어 가면서 나 자신이 살아있음을 충만하게 느끼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6개월이라는 생존 기간을 늘리기 위하여 아등바등하다 정작 주어진 기간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죽음을 뒤로 미룰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보다, 6개월이라는 기간이 죽음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충분히 긴 시간이 되도록 할 것이다. 6개월은 180여 일, 180여 일은 4320여 시간, 4320여 시간은 259200여 분, 259200여 분은 15552000여 초이다.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한탄하기보다, 15552000여 초라 하는 무한히 많아 보이는 시간 동안 매초 매초를 후회 없이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이처럼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고 흘러가버린 시간에 후회가 없도록 행동함에 있어 충실하도록 할 것이다.
또한 내가 그동안 내 주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을 표시할 것이다. 나의 잘못으로 인해 관계가 틀어졌던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차마 표현하기 민망하였던 마음에 고마움을 표시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할 것이다. 사람들 간에 느낄 수 있는 사랑, 애정, 미움 등의 감정들은 결국 그 대상이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게 해 줄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품고서, 갈등은 풀고 호감은 표시하면서 인간관계를 차분히 정리하여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평판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인생이라 하더라도, 앞으로의 날들을 종교에 의존해서 살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종교가 제시해 주는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희망을 품고서, 그 세계로의 여행을 준비한다 하면서 남은 삶의 6개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것이다. 내게 있어서 죽음 그 후의 세계란 완전한 무(無)이다. 아니, 무이어야 한다. 사후 세계에서의 안락을 위한 피라미드를 웅장하게 짓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치는 일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일까. 보장되지 않은 저승 세계 때문에 삶 속의 소중한 순간들을 소비하는 것만큼이나 낭비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을 것인가. 고로 나는 살아가는 그 순간순간을 완벽하게 하기 위하여, 사후 세계를 무로 상정하고 최대한으로 현실을 만끽하리라. 또한, 사후의 심판을 두 려워한 나머지, 평소 원하던 어떠한 바를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죽기 직전에 후회하게 되 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할 순간에 다다랐을 때에, 임종의 고통을 낮추고자 행하는 일련의 행위들을 내게 시행하게 하기보다, 인간다운 품위를 지니고 죽도록 할 것이다. 단지 짧은 순간의 생의 연장을 위하여 지극히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며 익명성이 강한 공간인 병원에 머무르다가 생을 마감하기보다는, 생명 연장의 희망이 존재치 않는다 하더라도 집이나 호스피스 병원 등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어 마지막 순간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에서,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친했던 이의 손을 잡고서 웃으며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다. 6개월이라는 기간동안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관해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그 이상의 삶에 있어서 집착을 보이지 않으며 인간답고 아름답게 웃으면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
그 후에 나의 시체는 장기 기증을 하거나 혹은 여의치 않을 시에 해부 실습 등을 위해서라도 시체를 기증하여,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하는 동시에 그동안에 나의 삶의 동반자였던 신체로부터 일말의 집착을 보이는 바 없이 완전히 해방이 되도록 할 것이다. 빈껍데기에 불과한 시체를 위하여 어떠한 의식을 치르게 하기보다는 기증 등의 좀 더 유익한 방향으로서 쓰일 수 있도록 하여, 뒷사람들로 하여금 의미 없는 빈 무덤의 주인보다는 마지막 순간까지 타인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으로서 기억하도록 하고 싶다.
실제로 내게 6개월이라는 시한부 인생이 주어졌을 때,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침착하게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내닫는 것은 기실 힘든 일일 것이다. 오히려 좀더 살아보고자 발악을 하면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생각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이 죽음을 수용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처음에 죽음을 인정치 않으려다가 분노와 타협 등의 관계를 거쳐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야 죽음을 승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러한 태도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올바른 태도가 아님을 알기에,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죽음을 맞닥뜨려야만 삶의 의미를 다시금 제대로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위에서와 같은 6개월간의 삶을 살고자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죽음을 가벼이 여기며 생활해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휩싸여 사는 삶이 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6개월간의 삶이 주어진 나의 인생.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사람들마다 그 생활방식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경우, 6개월 후의 죽음이 주어진 것이 아닌, 6개월이라는 새로운 삶의 기간이 주어진 것처럼 살 것이다. 그리하여 6개월간의 나의 생에 관한 이 글이 6개월 후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서라기보다, 앞으로의 삶에 대하여 자신의 다짐이나 각오를 표명하는 각서가 되도록 할 것이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던 길가메쉬에게 씨두리가 조언했던 바처럼,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면서 죽음에 당당하게 맞서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어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MEMENTO MORI & Carpe Di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