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 칭기즈칸

박혜정200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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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칭기즈칸 

몽골제국 창시자(1206∼27). 태조(太祖)이며, 이름은 테무진(鐵木眞, Temüsjin). 몽골 오넌강 상류지방 출생. 출생년도는 1155년·1162년·1167년 등 3가지 설이 있다.   

성장과 정복과정 몽골 명문 칸씨 출신으로, 아버지 예수게이(Yesügei)는 금(金)왕조 지원으로 몽골부족 약체화를 꾀하는 타타르부족과의 전투에서 활약한 부족장 후보자였다. 아버지가 타타르부족 사람에게 독살되는 등 고난이 계속되었으나, 아버지의 맹우(盟友)였던 케레이트부족의 완 칸과 자신의 맹우 자무카의 원조로 세력을 길렀다. 그도 아버지처럼 부족장을 노렸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힘의 증강에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충성으로 봉사하는 노클(從者)을 모집하여 수족으로 삼는 한편, 최대의 대항 세력인 타이치우트씨와 자신을 견제하게 된 자무카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실력자가 되었으며, 1189년 무렵 몽골씨족연합의 맹주로 추대되어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칭기즈란 말은 고대 터키어인 텡키스(바다)가 와전된 것이라고도 하고, 1206년 즉위할 때 5색서조(瑞鳥)가 <칭기즈>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나, 샤머니즘의 <하늘의 아들>이라는 영체(靈體)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력하다. 이로써 그의 지위에 종교적 권위가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에 제국 최고 주술사인 코코츄를 처형한 것처럼, 종교적 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범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날로 세력을 확장하던 그는 1201년 자다란부족의 자무카를, 이어 타타르·케레이트 부족을 멸하고 군제를 개혁한 뒤 다시 서방의 나이만부족을 무찔러 마침내 1204년 몽골 초원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즉위하던 해 국제(國制)인 씨족공동체를 해체, 새로이 군사조직에 바탕을 둔 천호제(千戶制)를 제국 기반으로 삼았다. 또 천호나 백호(百戶)·십호(十戶)의 장(長) 자제 1만 명을 모아 케시크테이라는 친위대를 결성하고 특권을 부여, 몽골유목군단의 최정예부대로 만들었다. 이듬해부터 서하(西夏)를 침공하고(1205, 1207∼1208, 1209∼1210), 1211년 이후 몽골족의 원수 금(金)을 토벌, 그 수도인 중도(中都;지금의 北京)에 입성하였다(1215). 1219년에는 이슬람세계의 패자(覇者) 호라즘국에 파견한 사절이 살해되자 서정(西征)에 올랐다. 자신은 오트랄·부하라 등의 도시를 공략하였고, 제베와 수부타이가 인솔한 별군(別軍)은 호라즘국의 왕 무하마드를 카스피해상의 섬으로 내몰아 굶어 죽게 하였다(1220). 또 카프카스산맥을 넘어 남러시아로 출동, 러시아 각지의 연합군을 하르하강변에서 무찌르고(1223), 크림을 정복한 뒤 본군에 합류하였다. 본군은 앞서 발흐를 점령하고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웃딘과 인더스 강변에서 싸워 격파하였다(1221). 이런 과정에서 제국 영토는 급격히 확대되었다. 그러나, 혹서를 이기지 못해 철군을 결정, 차가타이·오고타이군과 합류하여 귀국하였다(1225). 이때 이슬람교도의 공예가 등 장인(匠人)기술을 높이 평가하여 포로로 데리고 왔다. 그는 정복한 땅을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어 후일 4한국(汗國)의 기초가 되게 하였고, 몽골 본토는 막내 툴루이에게 주었다. 그러나 20여 년에 걸친 몽골군의 살상과 약탈은 유럽·아시아 각지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같이 잔혹한 행위의 원인을 단순한 복수나 다른 문화에 대한 가치 부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격언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몽골인은 수렵과 전쟁을 동일시하여 전쟁에서의 살상을 사냥감으로 간주하는 데에도 있었다.   

업적과 평가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서정 참가를 거부하였던 서하(西夏)를 응징하려다 낙마(落馬)로 부상하여 중국 육반산(六盤山) 남쪽 땅에서 죽었다는 설, 서하의 수도 닝샤[寧夏(영하)]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甘肅省(감숙성)] 칭수이현[淸水縣(청수현)] 시장강[西江(서강)] 부근에서 병사하였다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업적으로는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비단길(Silk Road)을 다시 열고, 마르코 폴로와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로 하여금 아시아를 왕래할 수 있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동서양의 문화교류는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위구르문화를 사랑하여 아들들에게 위구르문자를 배우게 하였고, 국자(國字)로 채용하였다. 이 문자를 바탕으로 몽골문자와 만주(滿洲)문자가 만들어졌다. 1206년에 만든 법전(jasash;the Great Yasa)은 상당한 권위를 지닌 것이었으며 몽골법과 통치방식은 초기 러시아 제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비록 여러 문화를 파괴하였지만, 종교나 소수 민족 문제 등에는 관대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相反)될 수 있다.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는 그를 비난하지만, 몽골에서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서 추앙하고 있다.  (야후 사전 발췌)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참조) http://blog.naver.com/romance76.do 감성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