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레이챨스 선생

최동석200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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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레이챨스 선생

대(大) 스타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미국 연예게에서도 맹인 가수 레이 찰스만큼 큰 별은 드물 것이다. 거의 20년 동안이나 끊임없이 히트곡을 내면서 가요계에 군림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 연예계 단 하나의 천재를 꼽으라면 나는 레이 챨스를 들지 않을 수 없다'라고 프랭크 시나트라가 격찬했듯이 오늘의 레이 챨스가 있기까지 그가 걸어 온 길은 그의 눈부신 성공 이상으로 감동적이었다. 레이 챨스는 1930년 9월23일, 불경기에 허덕이던 미국 남부의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레이챨스 로빈슨이었는데, 유명한 권투선수 슈가레이 로빈슨과의 혼동을 피해 성(姓) 을 빼 버렸다.) 그가 태어난 지 몇 달 뒤 그의 부모는 조오지아주에서 플로리다주의 그린빌이란 작은 마을로 옮겼다. 아버지는 철도 일로 자주 집을 비웠으므로 어머니가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아이들을 키워야 할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교육을 별로 받지 못하셨지만 아는 게 참 많으셨어요. 무슨 일이든지 거기에 알맞는 우화를 골라 얘기해 주셔서, 나는 아직도 그중 몇개를 충고 삼으며 살고 있답니다." 찰스의 어머니는 살림을 돌보면서 때때로 제재소에서 일했다. 수입은 많아야 일주일에 40달러, 그돈으로 어머니와 챨스, 그리고 한 살 아래 동생이 먹고 살아야만 했다. "그 적은 돈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이웃 사람들 덕이었어요. 아무리 가난해도 뭉쳐 사는 게 시골사람들이 잖아요. 그때 우리 마을 사람들은 한 배에 탄 사람들처럼 서로 돕고 살았습니다." 챨스 일가는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살았지만 행운은 조금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최악의 생애로 치닫는 것 같았다. 1935년 챨스가 다섯살 때 동생이 빨래통에 빠져 죽은 일이 생겼다. 한편 챨스의 눈도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눈꼽으로 눈이 꽉 달라붙어서 한참씩 애를 써야 뗄수 있었다. 때때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오기 도 했다. 시계가 점점 좁아져갔다. 부모들이 동네 의사에게 데려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안과 전문의의 치료가 필요했는데 그들에게는 돈이 없었다. 마침내 일곱 살때 챨스는 장님이 되었다. 후에 의사들 말로는 녹내장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장님이 된 챨스는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며 거지로 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를 구해낸 것은 그의 어머니의 식견과 용기였다. "너는 비록 눈은 멀었지만 바보는 아니잖니" 어머니는 챨스를 타이르곤 했다. "네가 잃은 것은 시력이지 마음은 아니란 말이다." 어머니는 챨스가 긍지있는 인간으로 자라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심지어 마루를 닦고,쓸고 장작을 패는 일까지 시켰다. "어머니는 내가 마음먹고 골똘이 궁리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 내가 널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이다.그러니 너 혼자 뭐든지 할 수 있어야지' 라고 말씀하시곤 했읍니다. 챨스에게는 또 하나의 구원이 있었다. 음악이었다. 피아노를 가진 이웃 사람이 챨스에게 간단한 노래를 작곡하고 또 그걸 악보에 적는 법을 가르쳤다. 그 다음으로 챨스에게 음악적 소양을 키워준 것은 교회였다. "그때 교회에서 우리가 부른 노래는 요즘 우리가 손벽을 치면서 부르는 성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주 느릿느릿 부르는 찬송가였지요. 난 그런 예배가 참 좋아요" 일곱 살이 되어 성 어거스틴 성당에 있는 맹인학교에 입학하자 챨스는 본격적으로 음악적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찰스는 피아노 연주에 재질을 보여 많은 고전 피아노곡을 칠 수 있었다. 그때 찰스에게다시 타격이 왔다. 사랑하는 어머니 - 이제 겨우30대 초반에 접어든 어머니가 죽은 것이다. 챨스는 울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두 주일 동안이나 꼼짝 않고 앉아만 있어 사람들이 억지로 먹여야만 했다. 보다 못한 이웃집 부인이 어느 날 찾아왔다. "네 엄마처럼 착하고 용기 있는 사람은 드물었단다. 그런 엄마가 네가 이렇게 하고 있는 걸 아시면 어떻게 생각하시겠니. 꿋꿋하게 살아나가기를 바랄 것 같지 않니?" 드디어 챨스는 울기 시작했다.이듬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찰스는 또 다시 닥친 시련을 용기있게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내게 강인한 힘을 남겨 주셨어요. 나는 어떻게 하든지 내 혼자 힘으로 살아나가려고 했지요. 구원이란 생각조차 안했으니까요..." 열 여섯 살이 되면서 챨스는 시골을 순회하는 악단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를 치고 편곡도 하면서 그가 하룻밤에 번 돈은 3~4달러에 불과했지만 평생을 음악에 바치겠다는 결의가 몸 안에서 뜰끓어 올랐다. 그는 뉴욕이나 시카고에 도전하는 게 두려웠다. 그는 친구에게 지도를 보고 잭슨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마땅한 중소도시를 골라 달라고 부탹했다. 시애틀이 결정되었다. 1948년 열 여섯 살이 채 못된 챨스는 몇년 동안 벌어 모은 6백 달러를 가지고 버스에 올랐다. 닷새 후 시애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지치고 허기져 있었다. 그는 작은 호텔에 들자마자 21시간 동안이나 계속 잤다. 새벽2시, 잠에서 깨어난 그는 호텔 숙박계 여자에게 음식점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녀는 혹 이웃에 있는 나이트클럽에 가면 음식을 팔지 모르겠다고 일러주었다. 챨스는 그 집 문을 두드렸다. "젊은이. 왜 왔소?" "음식을 사 먹고 싶습니다" "안돼요. 오늘밤 여기선 나이트클럽에서 일할 음악인들을 뽑는단 말이요" 챨스는 기회가 온 걸 깨달았다. 그는 자기도 노래를 부르고 피아노 연주를 한다고 했다. 그 사람은 챨스를 쫓아내려 했지만 그의 끈질긴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들어오게 했다. 다른 지망자들이 다 떠난 후 찰스는 피아노로 인도받아 노래를 불렀다. 스스로 피아노 반주를 하며 부른 블루스곡이었다. 누군가가 무대에서 내려오는 그를 세웠다. "나는 엘크스 클럽에서 왔소. 트리오의 멤버로 와서 일하시오"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그는 자기가 걷는 길을 한번도 되돌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몇년 동안 보수가 형편 없고 또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마음이 맞지 않아 속상하거나 떠돌이 연주생활이 고달프게 생각된 적이 때때로 있었지만 젊은 그는 자기가 이룬 조그만 성공에 흥분하고 있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그에게 다른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돈엔 별로 욕심이 없었어요. 난 가장 훌륭한 음악인으로 인정받기만을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서부에서 몇몇 악단과 일하는 동안 그는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마침내 1954년 '애틀란틱 레코드'에서 그와계약을 맺고, '나는 여인을 얻었네(I got a woman)'란 곡을 취입했다. 대 히트였다. 이 곡은 미국 대중 음악사에서 중요한 계기를 이룬 곡이었다. 절절하게 심금을 울리는 '불랙 사운드'가 널리 대중의 호응을 얻은 것은 이곡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곡을 시작으로 오늘날 미국 대중음악계세스는 소위 '소울' '리듬앤드 불루스'로 불리우는 노래들이 쏟아져 나왔다. 첫 취입곡이 히트를 한이래 찰스의 생활이 순탄하게 풀린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마약 중독자가 된 것이다. 찰스는 구속되었다가 치료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집행유예기 되었다. 마약을 끊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나 챨스는 꼭 1년 후에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연달아 히트곡이 나왔다. 고전적인 노래로 아직도 그가 공연할 때마다 부르는 '내마음의 고향 조오지아(Georgia on my mind)' 로 부터 '끝없이 사랑하리 (I can`t stop loving you)'에 이르기 까지 레이 찰스가 취입한 레코드는 여지껏 통털어서 2억장 정도 팔렸으리란 추측이다. 히트곡에 이어 상도 쏟아졌다. 미국 가요부문의 아카데미상격인 '그래미상'을 열세 번, 그리고 '국제 재즈 평론가 인기 투표'에서 뽑는 최우수 남자 가수상을 수차례에걸쳐 연달아 받았다. 레이 챨스가 이처럼 오랬동안 폭발적 인기를 끄는 마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가 뛰어난 음악적 센스, 완벽한 박자감, 그리고 철두철미한 전문가 정신을 지니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밖에도 그에겐 그 이상의 것이 있지 않을까. 저명한 재즈 평론가 위트니 밸리엘의 말을 빌면, '그의 솔직하고도 박력있는 매너는 루이 암스트롱과 같은 수준이다. 그는 어느계층, 어느인종, 어느 종파의 사람들에게서도 한결같은 아낌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감정에 흐느끼는 듯이 호소하는 힘이 있으니까......'라는 것이다. 찰스는 스스로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참모습을 이해하도록 내 영혼을 온통 드러내 보이며 노래 부릅니다. 내가 절실하게 겪었던 것만을 노래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믿도록 노력할 뿐이지요" 재혼한 아내 델라, 세 아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는 그는 사업면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일해 두 개의 악보회사 한 개의 레코드회사를 갖는 등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업상 일년에 아홉 달은 길에서 보낸다는 챨스지만 그는 어디를 가든지 소년시절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찬송가를 부르는 작은 교회를 찾아간다. 찰스의 히트곡 중에는 스스로 작사한 '미국' 오 아름다운 나라여! (America the beautiful)" 이 노래에서 자기를 키워준 조국에 감사하는 마음을 잘 그리고 있다. 많은 음악팬들의 심금을 울렸던 그도 2004년 6월 10일 간 질환 합병증으로 하나님의 곁으로 부르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