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매카시즘 이란..

박주현200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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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즘의 유래와 언론, 그리고 후유증-

 

장호순 (순천향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매카시즘은 2차대전 이후 한때 미국을 휩쓴 반공사상검증을 의미한다. 매카시즘을 주도한 조셉 매카시 연방상원의원과 맞서야 했던 해리 트루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매카시즘을 정의했다.

"매카시즘은 적절한 법적 절차를 포기하는 것이며 애국심과 안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시민들에 근거없는 오명을 씌우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매카시즘은 거짓을 먹고사는 선동정치인이 권좌에 오르는 것이고, 우리사회의 신뢰가 무너지고 공포가 퍼져나가는 것이다."

물론 매카시즘이 매카시 상원의원 한 사람의 작품은 아니다. 매카시즘의 주역들은 매카시나 리차드 닉슨과 같은 기회주의적 우익정치인, 냉전논리를 통해 세계적으로 성장한 미국의 군수산업, 인종차별을 고착화시키려한 백인 우월주의자, FBI와 CIA 같은 공안기구였다. 한편 객관보도란 이름으로 그들의 선동적 메세지를 충실하게 국민들에게 전달해준 언론, 공산주의자의 인권보다는 자신들의 반공이미지 제고에 몰두한 진보-중도 정치세력이 미국 매카시즘의 조역들이었다.

물론 매카시즘에 앞장선 것은 닉슨이나 매카시와 같은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진보적 인사들을 의회 청문회에 소환해,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아 붙임으로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려 들었다. 미국행정부는 소위 충성선서(Loyalty Oath)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진보적, 개혁적 정치이념을 신봉한 교사, 공무원, 방위산업체 근로자 등을 직장에서 몰아냈다. 많은 진보적 학자들이 대학에서 쫓겨났고, 흑백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흑인들을 돕던 백인들도 공산주의자로 몰렸다.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영화를 만든 영화인들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헐리우드를 떠나야만 했다.

1950년대 미국 정치판에서 공산주의 이념이나 공산당 자체가 불법은 아니었지만, 공산주의자로 혹은 공산주의 동조자로 오인될만한 행동을 삼가하는 것이 정치적 생명을 지키는 첫번째 요령이었다. "공산주의에 연약하다(Soft on Communism)"라는 딱지는 정치적 사망신고서와 다름없는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모순을 공격하거나, 사회주의의 장점을 지적하거나, 공산주의와의 평화적 공존을 주장하거나, 반핵을 외치는 것은 "나는 공산주의자요"라고 선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상의 자유나 학문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도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미국의 매카시즘은 매카시의 등장 이전부터, 그리고 1957년 그의 사망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매카시는 단지 반공마녀사냥을 정점으로 이끈 정치인이었을 뿐이다. 당시 국제정세는 매카시의 선동이 먹힐만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2차대전 중 동맹국으로서 미국과 함께 싸운 소련이 동구권을 위성국가로 만들고, 또 미국이 수백억달러의 원조를 보내준 중국이 모택동의 손에 넘어가자 미국인들 사이에 공산주의 팽창에 대한 공포가 팽배해졌다. 소련의 핵무기 보유사실이 알려지면서 제3차대전에 대한 우려가 높아갔다.

그러나 국제적인 공산세력의 팽창에 비해 미국내 공산당 세력은 실로 보잘 것 없었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실시해온 철저한 반공탄압정책 덕분에 미국의 공산당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대공황 시절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 때문에, 2차대전 중에는 소련이 동맹국이 되었기 때문에 공산당에 대한 관용도가 조금 높아진 적도 있었지만, 냉전이 시작되면서 연방수사국의 공산당에 대한 탄압과 감시는 더욱 철저해졌다.

특히 1951년 공산당 최고 간부들의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에 대해 연방대법원이 확정판결을 내리면서 미국 공산당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따라서 1950년대 미국인들이 사냥했던 공산당은 실제로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기력하고 추악한 마녀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우익 정치인들은 미국내 공산주의자들을 미국을 붕괴시킬만한 괴물로 과장했고, 상당수 미국 언론은 이러한 선동을 여과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면서 매카시즘 선풍을 부채질했다.

미국의 매카시즘은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려는 목적보다는 정략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야가 없었다. 1932년 이후 20년동안 야당으로 머물렀던 보수 공화당 의원들은 여당인 민주당 정권을 공격하는데 매카시즘을 적극 이용했다. 한편 민주당 정부는 공화당의 매카시즘 공격을 막기 위해 더욱 강력한 반공정책을 폈다.

공화당은 민주당을 공격하기 위해, 민주당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들과 무관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여야가 함께 적극적으로 마녀사냥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사냥감은 많지 않았다. 실제 공산주의자들은 불과 수천명에 불과했고, 이들은 연방수사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보다는 과거 공산주의자들과 교류를 했던 사람들이 주된 사냥감이 되었고, 그들은 대부분 진보적이고, 개혁적이고, 비판적인 지식인들이었다.



매카시가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한 것은 1950년 2월 9일이었다. 공화당 선거 지원 유세차 전국을 순회하던 매카시는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휠링이라는 작은 도시에 들러 이 지역 공화당 부녀회원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다. 이 자리에서 매카시는 미국 국무부에 205명의 공산당원이 숨어있고, 자신이 그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충격적인 발언은 AP통신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다. 트루만 대통령은 매카시의 주장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일축했지만 그는 전국을 유세하면서 거듭 기자들을 불러 자기가 정부내 반역자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 매카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평범한 초선 연방상원의원이었다. 위스콘신 출신의 매카시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했고 큰 관심도 없었다. 1952년 재선을 치러야했던 매카시는 그의 의정활동이 선거구민의 주목을 받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휠링에서 시작한 반공선동이 전국적 이목을 끌자 매카시는 반공선동정치가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로 결심했다.

매카시가 기존의 우익 정치인들과 다른 점은 언론의 속성을 잘 알고 능숙하게 이용했다는 점이다. 어떤 것이 기자들의 주목을 받는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매카시는 기자들이 자기의 주장을 확인할 시간이 없도록 교묘하게 마감시간에 맞춰 보도자료를 내보내거나 기자회견을 했다. 매카시는 또 계속적으로 선동적 발언을 함으로서 이전의 그의 주장을 기자들이 확인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물론 많은 신문들이 매카시가 주장한 것보다 부정확하거나 왜곡되게 부풀려 보도했다. 반면 매카시의 주장을 반박한 국무부의 발표나, 매카시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기사들은 전혀 보도되지 않거나 매카시의 주장보다 훨씬 작은 지면을 차지했다.

매카시의 선동적 행태를 비난한 정치인이나 언론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저명한 컬럼니스트들은 거의 일제히 매카시를 비난했다. 당시 언론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논객이었던 드루 피어슨은 자신이 20년이상 국무부를 취재했고, 가장 강력한 반공언론인으로 자부하지만 매카시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세인트 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 워싱턴 특파원이었던 마르키스 차일스는 "실제 이름이 밝혀지지도 않고 사실확인도 되지 않은 채 매카시의 주장이 전파되는 것은 단지 의심과 공포의 분위기를 키우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미국의 안보에도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매카시는 순식간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 되었고, 격려편지와 공산주의자들을 고발하는 편지가 하루에 25,000장씩 날라왔다. 정치자금도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1952년 총선거에서 공화당이 행정부와 상하양원을 모두 장악하면서 매카시는 상원 정부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까지 눈치를 보는 정치적 실력자가 된 매카시는 기존의 진보적 성향이 있는 인사들 뿐만아니라 기독교 목회자, 중앙정보부, 심지어 군부로까지 공산주의자 색출 범위를 넓혔다.

그러나 매카시의 지지도는 1952년 대선을 고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선 매카시의 반공선동은 보수 공화당이 집권함으로써 그 효용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20년만에 정권을 잡은 공화당에게 매카시의 반공사상검증은 더 이상 큰 정치적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매카시의 무분별한 사상검증 공세는 공화당 행정부에 부담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매카시에 정면대항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갔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공화당내에서도 매카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부 공화당의원들은 "양심선언"을 통해 매카시의 술책을 "공포와 아집과 무지와 불관용의 이기적인 정치적 이용" 라고 비난하면서,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하에 독재자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개탄했다. 연방대법원도 기존의 판례와 달리 국가안보보다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판결을 내리기 시작하면서, 미국인들에게 인권의 중요성을 깨우쳐주었다.

매카시에 대한 언론의 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매카시의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954년 3월 9일 CBS에서 방영한 에드와드 머로우의 라는 30분짜리 시사프로그램이었다. 머로우는 미국사회에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했다는 매카시의 거듭된 주장이 모두 거짓인 것으로 판명되었음을 화면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머로우는 매카시가 무책임한 거짓말 장이라는 것을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미국인들에게 매카시와 맞서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가 방송된 후 하룻동안 CBS에 접수된 12,000건의 전보와 전화중 머로우를 지지하는 비율이 15대 1이었다. 경쟁방송국인 NBC까지 모로우가 정면으로 매카시에게 도전하여 그의 거짓주장과 논리적 모순을 지적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카시의 마녀사냥은 멈추지 않았다. 매카시는 육군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한다며 청문회를 열었다. 그리고 소환된 육군장성들에게 "군복입을 자격이 없다, 다섯살 난 아이의 지능만도 못하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누구보다도 군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매카시가 군을 모욕하는 것에 대해 격분했고, 군장성들에게 반격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미육군은 매카시가 입대한 자신의 보좌관들에게 불법적인 특혜를 요구해온 사실을 폭로했다. 54년 4월 연방상원은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었다. 궁지에 몰린 매카시가 감정적 억제를 잃고 고함을 치고 협박을 하며 청문회 진행을 방해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중계되었고, 매카시 청문회의 종결과 더불어 그의 정치생명도 사실상 끝이 났다.

그후 6개월만인 1954년 12월, 연방상원은 상원의 권위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매카시의 징계를 결의했다. 67-22로 통과한 이 결의안은 아무런 구속력도 없이 단지 그의 행동을 꾸짖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결의안이 매카시에게는 정치적 사망진단서와 다름이 없었다. 매카시는 그후에도 계속 반공 사상검증 시비를 일으켰지만,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후원자들의 숫자는 격감했다. 1957년 5월 2일 매카시는 쓸슬히 사망했다. 과도한 음주로 인한 간기능 장애가 사망원인으로 발표되었다.



정치인으로서 매카시가 미국사회를 풍미했던 기간은 불과 5년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매카시는 미국사회에 실로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메카시즘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절 뉴욕타임스 논설위원인 존 비 오크스는 편집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매카시즘은 우리 모두의 말과 글과 사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어디에 참여할 때에 전보다도 훨씬더 조심하게 되었다. 우리의 행동이 극우보수주의자들에 의하여 장차 공격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시발점을 변경했다. 따라서 만약 오늘 매카시가 사라진다해도 그는 미국사회의 지적분위기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이 제대로 회복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오크스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매카시는 단 한명의 공산당원도 색출해 내지 못하였지만, 그가 남긴 매카시즘의 유산은 미국민 전체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다. 프린스턴 대학의 엘렌 슈레커 교수는 94년에 발간된 저서 "매카시즘의 시대(The Age of McCarthyism)"에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약 1만명정도의 미국인들이 반공사상검증 때문에 직장을 잃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슈레커 교수는 매카시즘에 의한 개인적 희생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 사회적 희생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사회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보완하기 위해 1930년대부터 추진해왔던 뉴딜 개혁조치가 1950년에 와서 좌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매카시즘 때문이라는 것이다. 매카시즘은 미국사회가 절실히 필요했던 사회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미국의 외교정책이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했고, 자본을 견제할 노조가 조직되지 못했고, 진보적 사상을 소개하는 책들이 쓰여지지 못했고, 사회비판적인 영화가 만들어지지 못했다. 매카시즘이 자유로운 학문활동, 표현활동, 정치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이 미국사회에 가져온 가장 큰 후유증은 월남전 개입이었다. 공산주의 세력에게 패배하거나 양보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동조한다는 것으로 인식되던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신중한 정책적 고려없이 무조건 부패한 월남 우익정권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은 60년대에 접어들어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는 월남전의 수렁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고, 미국사회는 파국 직전의 균열양상을 보였다. 월남전의 명분과 의미를 찾을 수 없던 많은 미국 청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반전데모를 벌였다. 흑인인권보장, 빈곤퇴치를 위해 사용해야할 정부예산이 월남전에 소모되자, 미국 민중들의 불만과 저항은 폭동으로 이어졌고, 그들의 절망은 마약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현재 미국 사회를 짓누르는 인종차별, 빈부격차, 마약과 범죄등의 심각한 문제들의 이면에는 매카시의 광기가 아직도 배어있다. 미국 현대사는 사상검증이라는 것 속에 얼마나 치명적인 독소가 담겨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매카시즘이 날뛰는 사회에서 개혁이란 불가능함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