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자본과 권력의 侍女로서만 존재하려는 反교육의 학교현실을 극복하고자 공교육기관인 소위 공립학교에서 활동하여왔습니다. 그러나 공교육이 公共의 철학적 의미를 資本主利 권력에 매판하는 제도권력의 폭력적 음모를 목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투쟁전선의 다변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교육의 공공성을 찾을 수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습니다.
이에 그 첫 번째로 매판정권에 사직서를 제출하여 공공의 교사로 독립함을 선언합니다.
사직의 변
WTO교육지배, 점수지옥, 우열계측이데올로기, 돈고물 쪼개먹기경쟁, 公私의 혼탁....
이 모든 파도를 전교조가 막으려한다지만 흡수되어 부유하는 스펀치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요?
올 해 신규임용된 교사 가운데 조합원가입비율은 나를 반성하게 합니다.
정보인권수호를 주장하지만 학생의 생활인권 수준은 나로 하여금 죽고싶게 합니다.
당장에 교육,교사권력의 꼭두각시로 사는 학생들에게 자본에 의한 세련되게 지배당하게 될 상황과 그 극복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기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생체인권침해는 소통을 위해 통과해야 할 첫 번째 문인 마음을 닫아버리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유를 주면 마음을 여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학생인권투어를 시작하려 합니다. 학생은 제자일뿐만이 아니라 동지입니다.
학생인권 대장정을 떠나면서
사랑하는 전교조에게 띄웁니다
2003년 상반기는 정보인권사수투쟁을 통해 인권이라는 화두가 전교조 조합원은 물론이고 범국민적 담론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일부 게시판에 전교조 인권사업의 역사를 폄하하는 지적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전교조는 시대가 전교조에게 요구하는 최우선의 과업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비판적 애정은 냉소와 실망, 분노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 성찰
전교조이미지는 참교육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거짓과 반교육이 판치는 현실에서 전교조에게 거는 역사의 기대가 반영된 당위적 개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전교조는 시대가 요구하는 자신의 이미지 그리기에 절박성을 가지고 임해왔는지 돌이켜 봐야만 합니다. 보성초 교장의 자살을 이용한 수구세력의 비열하리만큼 치열한 생존력을 잠재울만한 수권적 이미지를 전교조는 아직 갖추지 못했던 것이고, 이는 우리의 숙제인 것입니다. 그들은 전교조이미지를 권력형 네거티브로만 규정하여 그들도 전교조에 반대할 수 있다는 정당성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전략이 필요한 것일까요? 부조리와 부당한 권력에 대해서는 끝없이 투쟁하는 네거티브이미지와 소외되고 약한 계층에 대한 입장의 동일함에서 출발하는 포지티브이미지 사이의 균형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계층을 전교조의 잠재적 지원세력으로 끌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계층은 바로 우리사회에서 단 한 번도 주체로 서보지 못했지만 너무도 큰 폭발력을 갖고 있고 운동자체가 바로 교육이 될 수 있는 학생입니다. 신규 임용교사의 조합가입비율은 분명 전교조이미지와의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학생이었던 시절의 기억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 우리가 학생의 요구에 귀를 바짝 긴장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까지처럼 대학운동권출신의 유입과 부패권력, 관료주의에 대한 극복의지차원의 가입에 기대기에는 자본에 의한 일상의 식민화가 갈수록 정교해지는 상황이 아닌가요? 전교조의 참교육에 대한 진정성과 학생들의 시대적 요구 사이에 교집합을 찾지 않는다면 전교조는 현안에 밀려 결국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고 부유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현안투쟁에서도 학생들에게 '너희를 위해 우리가 대신 싸워 줄께'보다는 '우리는 동지'라는 입장이 비교될 수 없는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기왕에 정보인권 얘기가 나온 마당에 본격적으로 학생의 생활인권개혁에 혼신을 다 쏟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2. 신호
학생들은 전교조에게 일상 속에서 무수히 많은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전교조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요? 무슨 수로 우리는 동지가 될 수 있을까요?
"저 사람은 스승이라고 하고 나는 제자라는데. 저 사람은 나를 때릴 수도 혹은 때리기까지 하고, 윽박지르고. 가끔은 따뜻한 정을 가장해 억압 하든가 쿨을 가장해 무책임 하든가. 저 사람은 당연히 그 위의 명을 받아 혹은 자발적으로 명령하고 나는 복종만 해야 하고, 하기 싫은 보충수업도, 자율학습도 할 수밖에 없고. 옷도 머리도 신발도 속옷도 악세사리도 그것을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알아듣게 설명하지 못하거나 하기 귀찮아하면서 오래된 인습의 권위에만 의존해서 나에게 강요하는데 나는 그런 그 사람이 오히려 불쌍해 보여. 학생회는 교장이나 학생부장의 2중대일 뿐이야. 주체적 민주시민이 되라면서 시키는 대로만 하래. 홍익인간이라든가 평화, 자유, 인권, 해방, 평등 같은 말은 교과서나 시험문제에서만 볼 수 있지, 현실은 그 이념을 철저히 감추고 시키는 대로, 습관대로 하는 게 편해. 내 옆에 똑똑한 애가 그러는데 교육에서 철학은 없고 습관만 있대. 교육식민이다 정보인권이다 지방직화 같은 것으로는 연가투쟁도 하고 징계까지도 감수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정작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게 뭔지 관심은 갖고있는 걸까? 우리는 이미 무한경쟁이데올로기 속에서 허덕이는데 전교조가 성과급같은 것에 대해 대응했던 조직적 순발력 같은 것에 비교하면 어쩌면, 혹시라도 전교조조차 우리에겐 관심이 없는지도 몰라 "
3. 전략
미제국적 자본주의의 꼬붕 WTO는 'World Take Over'를 선언하고자 남한의 교육을 시장화하라고 요구하고 있고, 정권을 쥔 자들은 표의 향방을 '있는 자'에게 맞출 수 있는 대중논리를 개발하려하고 습니다. 자본의 세계화 파도 속에서 기업생존경쟁이라는 명분아래 효과적으로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 경쟁과 감시시스템을 좀더 확고하게 구축하려 하고 있습니다. 점령군은 자본이 효율적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주먹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한반도의 분단유지 혹은 한반도 전체 점령을 위한 힘의 질서를 펴고 있고 극우 수구세력은 미국을 찬양하여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에 끝내 면죄부를 주려 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류역사상 이처럼 강력하고 정교한 제국을 이뤄본 적이 없는 시대의 식민지 변방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의 지형도를 이 땅의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제국의 지배 시스템과 똑같은 구조가 적용되고 있는 학교문화 속에서 그 문화를 바꾸려는 노력이 학생수준에서 체감되지 못한다면 제국에 대한 우리의 저항노력은 불성실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으며 따라서 설득력을 획득하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자아의 영역이 자신과 가족 혹은 학교 밖을 넘지 못하는 이 땅의 학생의 현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지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권력은 미제국적 자본주의라는 정점이 아니라 바로 현재 우리의 학교와 교사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학교를 비롯한 가까운 우리의 주변부터 개혁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일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누구의 일방적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치는 제국을 무너뜨리는 무기인 동시에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주춧돌입니다. 학교는 인간 개개인이 지극히 존엄한 존재이며 '인간 자체가 목적인 만남'을 경험하는 장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학교생활을 통해 체득되어지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밖을 향해서는 열심히 싸우지만 내부의 적에 대해서는 무관심 내지 불성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싸우기 좋게 편가름을 해놓은 먼 쪽에 대해서만 적의를 갖고 자아의 내부에서부터 습관화된 적을 발견하고 성찰적으로 실천하지는 못하는 일종의 비주체적 기만이거나 방기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4. 결핍
안과 밖을 동시에 개혁해 나갈 수 있는 이념은 무엇일까요? 현재 학생들이 가장 목말라하는 결핍은 무엇일까요?
이 땅의 정권은 학생들에게 WTO가 그들의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다는 논리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학교가 자유로운 생활공간이 아니라 권력기관으로, 교사가 편한 상담자가 아니라 권력자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학교는 감옥이고 교사는 간수와 다름 아니라면, 아니 정권이 이 상을 더욱 확고히 굳히기 위해 입시를 강화해 간다면 WTO는 확실한 해방군의 이미지로 이 땅에 입성하게 됩니다. 인권과 민주가 전무한 학교현실을 방치한 채 자본에 의해 정교하고 세련되고 화려한 노예가 되는 상황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 말을 받아들어야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명쾌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몸이 묶여있는 상황에선 당장 밧줄을 풀고 싶은 것이 일차적인 욕구가 아닌가요? 전교조가 학생들의 해방군이어야 하고 이 이미지는 전교조의 정체성이고 그 각인된 이미지는 신규교사 조합가입비율과 정서적 지원세력으로 연결되며 역사변화의 주체로 우뚝 서는 길입니다.
5. 굴종의 삶을 떨쳐.....
굴종의 삶을 떨쳐 기만의 산을 옮기고 너와 나의 눈물 뜻 모아 진실을 외친다......
이 노래를 학생의 심정으로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이 땅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기본적으로 자기신체표현의 주체가 본인이 아닌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분열적 상황을 겪어야 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전무한, 말 그대로 형무소 수감자와 동일한 상황을 성장기에 경험한다는 것은 당장 학교생활의 무력감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이후의 삶에 있어서도 자율을 두렵고 어색하게 하고 오히려 타율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식민화의 첫 단계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력감을 느끼면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이제 학생수준에서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우리는 그들과 동일한 입장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경험적으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할 수 없다면 학교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회교육도 있고 학원도 있는데 굳이 공교육기관으로서 학교가 존재해야하는 이유는 사회의 공공적 가치를 지식과 실천의 형태로 발견하고 토론하고 생활하며 체득하기 위한 것입니다. 남한과 미국이 대등하게 대화하지 못하고 일방적 요구에 굴종하는 것과, 교사와 학생이 대등하게 대화하지 못하고 교사의 일방적 명령에 학생은 복종해야하는 상황은 같은 매트릭스인 것이 아닌가요? 교사는 학생보다 지식이 많고 기존 질서에 대해 더 익숙하기 때문에 명령할 수 있는 것을 당연시한다면 미국이 더 무기가 많고 돈이 많고 그것들이 지원하는 학문권력과 문화권력의 우월성 때문에 요구하는 압력도 당연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학교나 교사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기존의 질서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극복과 변화의 생활양식을 만들어갈 수 있는 원리를 체험하게 하는 것에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 엉덩이와 손 발
학생들은 교실만 아니면, 수업만 아니면 다 좋다고 합니다. 일주일 혹은 훨씬 더 오랜 시간동안 준비해서 몇 십분 짜리로 방송하는 프로그램들이 쏟아지는 현실 속에서 아무리 수업을 재미있게 해도 회가 진행될수록 시큰둥해집니다. 이는 교사능력의 유무문제가 아닙니다. 교실에서 교과서로 상징되는 지식중심으로 수업해야하는 학습이 갖고있는 방법의 한계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한 사실들을 화석화된 문자로 설명해야하는 것이지요. 살아있는 지식이란 학습자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정리하고 텍스트화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감의 체험기회를 닫아놓고는 살아있는 지식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최근 들어 현장체험학습이 중시되고있긴 하지만 필요만큼 충분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교육기회가 부모의 재산과 직결된 불평등이 노골화된 사회에서 '있는 자'들의 자녀에 비해 소외된 자들의 자녀는 상대적으로 현격하게 불평등한 교육기회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회의 공공성이 현실적으로 실현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해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사이의 상대적 박탈에서 오는 결과적 차별의 극복차원과 투쟁의 다변화를 통한 공공성실현차원과 원론적 교육정상화차원에서도 현장체험학습의 다양화에 대한 적극적 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7. 봉고차 학교
소형버스 한 대가 하나의 학교가 되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자연과 사회에 대한 놀이적 접근의 학습이 필요한 초등학교 단계에서는 산골체험, 별나라체험, 갯벌탐사, 맛 기행 등(수 없이 많을 수 있음)이 있을 수 있고 자연과 세계의 원리에 눈을 뜨는 중등단계에서는 주제( 권력을 따라, 여성의 생활, 도시의 구조, 자본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노동의 세계, 전쟁과 평화, 개발과 행복 등)를 따라 체험여행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충분히 널려있는 현장(천문대, 갯벌, 공장, 병원, 도시, 산맥, 시장, 관공서, 매춘굴, 교도소, 항구, 벌집, 부자동네, 연예인, 시민사회단체, 농민회, 노동조합, 시위현장 등의 국내와 분쟁지역, 기아지역, 생태적 대안운동지역, 국제적 NGO단체 등의 해외)과 함께 전국 각 시도지부에서 폐교를 활용한 특성화된 학습공간을 만들어 결합되면 움직이는 학교의 물리적 인프라는 구성되어지는 것입니다. 프로그램 역시 봉고차 교사가 준비할 수도 있고 학생들의 요구에 맞춰 준비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며 시기와 기간도 방학이든 학기중이든, 장기든 단기든 상관없이 연중 가능할 것입니다.
8. 전교조의 정체성과 흘려야할 땀의 경제성
움직이는 학교나 참교육과정 혹은 또 다른 형태의 개혁도 공염불로 끝날 공산이 크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교육정책이라는 것은 사회 모든 계급 계층의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해 WTO는 대중에게 결코 혐오스런 괴물의 모습 하나만으로는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예쁘게 분으로 단장한 매력적인 모습에서부터 생존의 절박한 모습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유혹해올 것입니다. 장기전으로 가면 갈수록 문화적으로 좁아진 활동가들의 끈을 끊으려할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신규교사의 조합가입비율은 이 싸움이 이미 시작되어 저만큼 진행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일 수 있습니다. 학생인권사업의 주체로 전교조가 나서지 않는다면 냉엄한 역사 앞에서 사상을 이어가지 못한 죄를 받게될 수 있습니다.
전교조가 학생을 '교사의 지도를 일방적으로 받아야하는 미숙한 존재'로 보는 것을 조직적으로 절박하게 거부, 극복하지 않는 한 전교조는 보수가 될 수밖에 없고 역사는 전교조를 버릴 것입니다.
반면 학생을 지원군으로 참여하게 할 수만 있다면 현실적으로 닥치게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내 역사의 승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조합원 개개인, 활동가 개개인의 내부적 고민과 자기습관에 대한 실천적 극복을 조직적으로 설계해야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나 하나가 변하면 역사가 변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은 너무 어려워서 피하기만 했던 길을 역사가 우리 앞에 다시 던지는 것이고 또 피한다면 역사는 그만큼 후퇴하는 것이 되겠지요. 땀을 경제적으로 흘리지 못하는 조직은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저는 곧 남한의 전역을 걸어서 각 지회들을 방문하여 교사동지와 학생동지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학생들의 발언이 기존의 언론방송매체들에 의해 재단, 각색, 편집되지 않고 모아지고 소통될 수 있는 자발적 언로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희망의 그림은 전교조가 있었기에 그릴 수 있었으며 더욱 발전하는 조직이 되길 기원합니다.
윤여관 선생님의 사직서
윤여관 선생님의 사직서
저는 자본과 권력의 侍女로서만 존재하려는 反교육의 학교현실을 극복하고자 공교육기관인 소위 공립학교에서 활동하여왔습니다. 그러나 공교육이 公共의 철학적 의미를 資本主利 권력에 매판하는 제도권력의 폭력적 음모를 목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투쟁전선의 다변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교육의 공공성을 찾을 수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습니다.
이에 그 첫 번째로 매판정권에 사직서를 제출하여 공공의 교사로 독립함을 선언합니다.
사직의 변
WTO교육지배, 점수지옥, 우열계측이데올로기, 돈고물 쪼개먹기경쟁, 公私의 혼탁....
이 모든 파도를 전교조가 막으려한다지만
흡수되어 부유하는 스펀치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요?
올 해 신규임용된 교사 가운데 조합원가입비율은 나를 반성하게 합니다.
정보인권수호를 주장하지만 학생의 생활인권 수준은 나로 하여금 죽고싶게 합니다.
당장에 교육,교사권력의 꼭두각시로 사는 학생들에게 자본에 의한 세련되게 지배당하게 될 상황과 그 극복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기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생체인권침해는 소통을 위해 통과해야 할 첫 번째 문인 마음을 닫아버리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유를 주면 마음을 여는 이치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학생인권투어를 시작하려 합니다.
학생은 제자일뿐만이 아니라 동지입니다.
학생인권 대장정을 떠나면서
사랑하는 전교조에게 띄웁니다
2003년 상반기는 정보인권사수투쟁을 통해 인권이라는 화두가 전교조 조합원은 물론이고 범국민적 담론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일부 게시판에 전교조 인권사업의 역사를 폄하하는 지적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전교조는 시대가 전교조에게 요구하는 최우선의 과업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비판적 애정은 냉소와 실망, 분노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 성찰
전교조이미지는 참교육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거짓과 반교육이 판치는 현실에서 전교조에게 거는 역사의 기대가 반영된 당위적 개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전교조는 시대가 요구하는 자신의 이미지 그리기에 절박성을 가지고 임해왔는지 돌이켜 봐야만 합니다. 보성초 교장의 자살을 이용한 수구세력의 비열하리만큼 치열한 생존력을 잠재울만한 수권적 이미지를 전교조는 아직 갖추지 못했던 것이고, 이는 우리의 숙제인 것입니다. 그들은 전교조이미지를 권력형 네거티브로만 규정하여 그들도 전교조에 반대할 수 있다는 정당성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전략이 필요한 것일까요? 부조리와 부당한 권력에 대해서는 끝없이 투쟁하는 네거티브이미지와 소외되고 약한 계층에 대한 입장의 동일함에서 출발하는 포지티브이미지 사이의 균형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 계층을 전교조의 잠재적 지원세력으로 끌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계층은 바로 우리사회에서 단 한 번도 주체로 서보지 못했지만 너무도 큰 폭발력을 갖고 있고 운동자체가 바로 교육이 될 수 있는 학생입니다. 신규 임용교사의 조합가입비율은 분명 전교조이미지와의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학생이었던 시절의 기억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 우리가 학생의 요구에 귀를 바짝 긴장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까지처럼 대학운동권출신의 유입과 부패권력, 관료주의에 대한 극복의지차원의 가입에 기대기에는 자본에 의한 일상의 식민화가 갈수록 정교해지는 상황이 아닌가요? 전교조의 참교육에 대한 진정성과 학생들의 시대적 요구 사이에 교집합을 찾지 않는다면 전교조는 현안에 밀려 결국 시대의 조류에 휩쓸리고 부유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현안투쟁에서도 학생들에게 '너희를 위해 우리가 대신 싸워 줄께'보다는 '우리는 동지'라는 입장이 비교될 수 없는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기왕에 정보인권 얘기가 나온 마당에 본격적으로 학생의 생활인권개혁에 혼신을 다 쏟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2. 신호
학생들은 전교조에게 일상 속에서 무수히 많은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전교조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요? 무슨 수로 우리는 동지가 될 수 있을까요?
"저 사람은 스승이라고 하고 나는 제자라는데. 저 사람은 나를 때릴 수도 혹은 때리기까지 하고, 윽박지르고. 가끔은 따뜻한 정을 가장해 억압 하든가 쿨을 가장해 무책임 하든가. 저 사람은 당연히 그 위의 명을 받아 혹은 자발적으로 명령하고 나는 복종만 해야 하고, 하기 싫은 보충수업도, 자율학습도 할 수밖에 없고. 옷도 머리도 신발도 속옷도 악세사리도 그것을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알아듣게 설명하지 못하거나 하기 귀찮아하면서 오래된 인습의 권위에만 의존해서 나에게 강요하는데 나는 그런 그 사람이 오히려 불쌍해 보여. 학생회는 교장이나 학생부장의 2중대일 뿐이야. 주체적 민주시민이 되라면서 시키는 대로만 하래. 홍익인간이라든가 평화, 자유, 인권, 해방, 평등 같은 말은 교과서나 시험문제에서만 볼 수 있지, 현실은 그 이념을 철저히 감추고 시키는 대로, 습관대로 하는 게 편해. 내 옆에 똑똑한 애가 그러는데 교육에서 철학은 없고 습관만 있대. 교육식민이다 정보인권이다 지방직화 같은 것으로는 연가투쟁도 하고 징계까지도 감수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정작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게 뭔지 관심은 갖고있는 걸까? 우리는 이미 무한경쟁이데올로기 속에서 허덕이는데 전교조가 성과급같은 것에 대해 대응했던 조직적 순발력 같은 것에 비교하면 어쩌면, 혹시라도 전교조조차 우리에겐 관심이 없는지도 몰라 "
3. 전략
미제국적 자본주의의 꼬붕 WTO는 'World Take Over'를 선언하고자 남한의 교육을 시장화하라고 요구하고 있고, 정권을 쥔 자들은 표의 향방을 '있는 자'에게 맞출 수 있는 대중논리를 개발하려하고 습니다. 자본의 세계화 파도 속에서 기업생존경쟁이라는 명분아래 효과적으로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 경쟁과 감시시스템을 좀더 확고하게 구축하려 하고 있습니다. 점령군은 자본이 효율적으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주먹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한반도의 분단유지 혹은 한반도 전체 점령을 위한 힘의 질서를 펴고 있고 극우 수구세력은 미국을 찬양하여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에 끝내 면죄부를 주려 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류역사상 이처럼 강력하고 정교한 제국을 이뤄본 적이 없는 시대의 식민지 변방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의 지형도를 이 땅의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제국의 지배 시스템과 똑같은 구조가 적용되고 있는 학교문화 속에서 그 문화를 바꾸려는 노력이 학생수준에서 체감되지 못한다면 제국에 대한 우리의 저항노력은 불성실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으며 따라서 설득력을 획득하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아직은 자아의 영역이 자신과 가족 혹은 학교 밖을 넘지 못하는 이 땅의 학생의 현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지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권력은 미제국적 자본주의라는 정점이 아니라 바로 현재 우리의 학교와 교사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학교를 비롯한 가까운 우리의 주변부터 개혁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일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누구의 일방적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치는 제국을 무너뜨리는 무기인 동시에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주춧돌입니다. 학교는 인간 개개인이 지극히 존엄한 존재이며 '인간 자체가 목적인 만남'을 경험하는 장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학교생활을 통해 체득되어지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밖을 향해서는 열심히 싸우지만 내부의 적에 대해서는 무관심 내지 불성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싸우기 좋게 편가름을 해놓은 먼 쪽에 대해서만 적의를 갖고 자아의 내부에서부터 습관화된 적을 발견하고 성찰적으로 실천하지는 못하는 일종의 비주체적 기만이거나 방기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4. 결핍
안과 밖을 동시에 개혁해 나갈 수 있는 이념은 무엇일까요? 현재 학생들이 가장 목말라하는 결핍은 무엇일까요?
이 땅의 정권은 학생들에게 WTO가 그들의 자유를 보장해줄 수 있다는 논리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학교가 자유로운 생활공간이 아니라 권력기관으로, 교사가 편한 상담자가 아니라 권력자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학교는 감옥이고 교사는 간수와 다름 아니라면, 아니 정권이 이 상을 더욱 확고히 굳히기 위해 입시를 강화해 간다면 WTO는 확실한 해방군의 이미지로 이 땅에 입성하게 됩니다. 인권과 민주가 전무한 학교현실을 방치한 채 자본에 의해 정교하고 세련되고 화려한 노예가 되는 상황을 설명한다는 것은 그 말을 받아들어야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명쾌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몸이 묶여있는 상황에선 당장 밧줄을 풀고 싶은 것이 일차적인 욕구가 아닌가요? 전교조가 학생들의 해방군이어야 하고 이 이미지는 전교조의 정체성이고 그 각인된 이미지는 신규교사 조합가입비율과 정서적 지원세력으로 연결되며 역사변화의 주체로 우뚝 서는 길입니다.
5. 굴종의 삶을 떨쳐.....
굴종의 삶을 떨쳐 기만의 산을 옮기고 너와 나의 눈물 뜻 모아 진실을 외친다......
이 노래를 학생의 심정으로 부르면 눈물이 납니다. 이 땅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기본적으로 자기신체표현의 주체가 본인이 아닌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분열적 상황을 겪어야 하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전무한, 말 그대로 형무소 수감자와 동일한 상황을 성장기에 경험한다는 것은 당장 학교생활의 무력감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이후의 삶에 있어서도 자율을 두렵고 어색하게 하고 오히려 타율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식민화의 첫 단계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력감을 느끼면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이제 학생수준에서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우리는 그들과 동일한 입장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경험적으로 교육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할 수 없다면 학교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회교육도 있고 학원도 있는데 굳이 공교육기관으로서 학교가 존재해야하는 이유는 사회의 공공적 가치를 지식과 실천의 형태로 발견하고 토론하고 생활하며 체득하기 위한 것입니다. 남한과 미국이 대등하게 대화하지 못하고 일방적 요구에 굴종하는 것과, 교사와 학생이 대등하게 대화하지 못하고 교사의 일방적 명령에 학생은 복종해야하는 상황은 같은 매트릭스인 것이 아닌가요? 교사는 학생보다 지식이 많고 기존 질서에 대해 더 익숙하기 때문에 명령할 수 있는 것을 당연시한다면 미국이 더 무기가 많고 돈이 많고 그것들이 지원하는 학문권력과 문화권력의 우월성 때문에 요구하는 압력도 당연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학교나 교사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발적이고 창의적으로 기존의 질서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극복과 변화의 생활양식을 만들어갈 수 있는 원리를 체험하게 하는 것에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6. 엉덩이와 손 발
학생들은 교실만 아니면, 수업만 아니면 다 좋다고 합니다. 일주일 혹은 훨씬 더 오랜 시간동안 준비해서 몇 십분 짜리로 방송하는 프로그램들이 쏟아지는 현실 속에서 아무리 수업을 재미있게 해도 회가 진행될수록 시큰둥해집니다. 이는 교사능력의 유무문제가 아닙니다. 교실에서 교과서로 상징되는 지식중심으로 수업해야하는 학습이 갖고있는 방법의 한계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한 사실들을 화석화된 문자로 설명해야하는 것이지요. 살아있는 지식이란 학습자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정리하고 텍스트화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감의 체험기회를 닫아놓고는 살아있는 지식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최근 들어 현장체험학습이 중시되고있긴 하지만 필요만큼 충분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교육기회가 부모의 재산과 직결된 불평등이 노골화된 사회에서 '있는 자'들의 자녀에 비해 소외된 자들의 자녀는 상대적으로 현격하게 불평등한 교육기회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회의 공공성이 현실적으로 실현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해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사이의 상대적 박탈에서 오는 결과적 차별의 극복차원과 투쟁의 다변화를 통한 공공성실현차원과 원론적 교육정상화차원에서도 현장체험학습의 다양화에 대한 적극적 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7. 봉고차 학교
소형버스 한 대가 하나의 학교가 되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자연과 사회에 대한 놀이적 접근의 학습이 필요한 초등학교 단계에서는 산골체험, 별나라체험, 갯벌탐사, 맛 기행 등(수 없이 많을 수 있음)이 있을 수 있고 자연과 세계의 원리에 눈을 뜨는 중등단계에서는 주제( 권력을 따라, 여성의 생활, 도시의 구조, 자본이란 무엇인가?, 다양한 노동의 세계, 전쟁과 평화, 개발과 행복 등)를 따라 체험여행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충분히 널려있는 현장(천문대, 갯벌, 공장, 병원, 도시, 산맥, 시장, 관공서, 매춘굴, 교도소, 항구, 벌집, 부자동네, 연예인, 시민사회단체, 농민회, 노동조합, 시위현장 등의 국내와 분쟁지역, 기아지역, 생태적 대안운동지역, 국제적 NGO단체 등의 해외)과 함께 전국 각 시도지부에서 폐교를 활용한 특성화된 학습공간을 만들어 결합되면 움직이는 학교의 물리적 인프라는 구성되어지는 것입니다. 프로그램 역시 봉고차 교사가 준비할 수도 있고 학생들의 요구에 맞춰 준비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며 시기와 기간도 방학이든 학기중이든, 장기든 단기든 상관없이 연중 가능할 것입니다.
8. 전교조의 정체성과 흘려야할 땀의 경제성
움직이는 학교나 참교육과정 혹은 또 다른 형태의 개혁도 공염불로 끝날 공산이 크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교육정책이라는 것은 사회 모든 계급 계층의 이해가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해 WTO는 대중에게 결코 혐오스런 괴물의 모습 하나만으로는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예쁘게 분으로 단장한 매력적인 모습에서부터 생존의 절박한 모습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유혹해올 것입니다. 장기전으로 가면 갈수록 문화적으로 좁아진 활동가들의 끈을 끊으려할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신규교사의 조합가입비율은 이 싸움이 이미 시작되어 저만큼 진행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일 수 있습니다. 학생인권사업의 주체로 전교조가 나서지 않는다면 냉엄한 역사 앞에서 사상을 이어가지 못한 죄를 받게될 수 있습니다.
전교조가 학생을 '교사의 지도를 일방적으로 받아야하는 미숙한 존재'로 보는 것을 조직적으로 절박하게 거부, 극복하지 않는 한 전교조는 보수가 될 수밖에 없고 역사는 전교조를 버릴 것입니다.
반면 학생을 지원군으로 참여하게 할 수만 있다면 현실적으로 닥치게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내 역사의 승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조합원 개개인, 활동가 개개인의 내부적 고민과 자기습관에 대한 실천적 극복을 조직적으로 설계해야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나 하나가 변하면 역사가 변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은 너무 어려워서 피하기만 했던 길을 역사가 우리 앞에 다시 던지는 것이고 또 피한다면 역사는 그만큼 후퇴하는 것이 되겠지요.
땀을 경제적으로 흘리지 못하는 조직은 생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저는 곧 남한의 전역을 걸어서 각 지회들을 방문하여 교사동지와 학생동지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학생들의 발언이 기존의 언론방송매체들에 의해 재단, 각색, 편집되지 않고 모아지고 소통될 수 있는 자발적 언로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희망의 그림은 전교조가 있었기에 그릴 수 있었으며 더욱 발전하는 조직이 되길 기원합니다.
모든 어린것들의 생명력을 향해 경의를.....
2003. 9. 1
윤여관 올림
너무 빨리 쓴 글이라서 거칩니다만 진심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