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1분, 밑천이 드러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권윤희2006.04.28
조회119
[펌]1분, 밑천이 드러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1분, 밑천이 드러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마음을 괴롭히는 건 ‘괜찮은 인간’이란 자부심이 무너지는 소리였습니다. 예쁘고 착해보이던 아이가 불량스럽고 엉망인 녀석으로 보이기까지는 딱 1분이 걸렸습니다. 아울러 그 1분은 인격의 밑천이 드러나는데 걸린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웃기십니까? 말하는 저도 역겹습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제가 뭘”이라고 겸양을 ‘떨면서’ 속으로는 ‘그래 이만하면 나도 썩 괜찮은 놈이지’라는 환상 속에 빠져 지냅니다.



아직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은 나라들을 여행할 때면 그런 착각이 부쩍 심해집니다. 거리에서 싸구려 볼펜을 내밀며 구걸하는 아이에게 몇백 원쯤 쥐여주며 물건을 마다할 때, 그 아이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떠오르는 걸 볼 때, 쓰레기투성이인 거리를 걸으며 한사코 휴지통을 찾을 때, 일행이 쇼핑센터에 간 사이에 혼자 박물관을 찾았을 때, 몇 안 되는 전시품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전문가 흉내를 낼 때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름다운 섬 사이에 낀 아이들
하노이에 머무는 동안에도 내내 그런 착각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처음부터 잠시 머물다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들이 장소도 하롱베이 한 곳으로 한정했습니다. 소문만큼 아름답더군요. 물빛은 푸르고 깊었습니다.
아침 안개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섬들에다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용선들까지 어우러져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여 분쯤 지나면서부터는 자꾸 그 곳에 머물러 사는 이들에게로 눈이 돌아갔습니다.
관광객을 태우고 돌아다니는 유람선마다 중학생 또래의 아이들이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바닥에 차오르는 물을 퍼내기도 하고, 물병을 나르기도 하고, 페인트 통을 들고 다니며 덧칠을 하기도 하고, 공구 심부름을 하기도 했습니다. 배 안에서 일하는 아이들은 그나마 양반이었습니다. 풍광 좋은 곳에 배가 멈출 때마다 어디선가 몰려온 아이들은 뱃전에 들러붙어 도움을 청했습니다. 입을 만지고 배를 쓰다듬은 다음 손을 내미는 몸짓을 되풀이하며 동전이라도 던져주길 기다렸습니다. 아이들이 타고 있는 건 뗏목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나무토막 꿰미거나 스티로폼 나부랭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사소한 물건들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사탕도 몇 개 던져주고, 볼펜도 건냈습니다. 그것도 자선이라고, 무언가를 베풀고 있다는 생각만큼은 록펠러나 빌게이츠에 못지않았습니다.
‘수많은 관광객 가운데 동전이나마 던져 주는 건 몇 안 되잖아? 어쩌면 저렇게 몰인정할 수 있지? 하여튼 수양이 모자라는 인가들이 문제라니까.’




깊어지는 착각, 과장된 평가
타오르는 착각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건 숙소에서 일하는 열일곱 살짜리 사내아이였습니다.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눈빛이 살아있는 아이였습니다. 아이는 하루종일 정신없이 움직이면서 혼자 여러 사람 몫을 해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는지 처음에는 주인집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밤늦게 수건을 바꿔주러 온 아이를 붙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혼자 하노이에 나와 살면서 뼈 빠지게 일해 번 돈으로 시골에 사는 부모와 세 여동생을 부양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영어를 익혀서 수입이 훨씬 나은 관광 안내원으로 일하는 게 아이의 꿈이었습니다. 아이에게 공부할 때 쓰라고 볼펜 대 여섯 개를 선물했습니다. 일부러 돈 주고 산 건 아니고, ‘아무개 슈퍼 오픈 기념’ 따위의 문구가 찍힌 사은품들이었습니다. 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두 손으로 정중하게 받아 들었습니다.



아이와 기분 좋게 작별한 다음날 새벽,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나갔습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창가 쪽 자리를 청하고 기다리는데, 직원의 표정이 이상했습니다. 한 달 뒤의 날짜로 발행된 항공권이라는 겁니다. 어제 아이에게 맡겨서 끊어온 항공권이었습니다. 관광 안내원이 되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훈련 기회를 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킨 일이었는데, 무언가 착오가 생긴 모양입니다.
이미 놓친 비행기는 어쩔 수 없다해도 오늘 안에 떠나지 못하면 일정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 입니다. 도착지 공항에서는 친구가 하릴없이 기다리다 돌아갈 것이고, 숙소에 걸어둔 예약금도 날아갈 것입니다.




드러나는 밑천, 커지는 허탈감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났습니다. 당장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보자마자 무섭게 다그쳤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선뜻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꼴이 더욱 얄미웠습니다. 티켓을 부탁할 때 적어준 쪽지를 디밀고 나서야 잘못을 인정했지만, 아이는 오히려 왜 받을 때 점검해보지 않았느냐고 되받아 쳤습니다.



두어 시간 길길이 뛴 뒤에야 문제가 해결됐습니다. 여관 주인은 아이에게 무슨 메모지인가를 들려주며 함께 공항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공항까지 가는 택시비도 고스란히 내 몫이었습니다.
여관 주인이 취해준 조처는 탑승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준 게 전부였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다음 비행기마저 못 탔더라면 한바탕 더 큰 소동이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서서, 출국장 안으로 사라지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얄미웠던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떠나 공중에 떠오르자마자 피로감과 허탈감이 몰려왔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오후 4시까지 뛰어다녔으니 피곤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더욱 마음을 괴롭히는 건 스스로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자부심이 무너지는 소리였습니다. 신경질을 내는 대신 좀 더 침착하게 대응할 수는 없었을까? 아이의 마처럼 티켓을 받을 때 좀 더 자세히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았을까?



예쁘고 착해 보이던 아이가 불량스럽고 엉망인 녀석으로 보이기까지 딱 1분이 걸렸습니다. 티켓이 잘못됐다는 선언을 전후로 아이에 대한 평가가 180도 달라졌으니까요. 아울러 그 1분은 인격의 밑천이 드러나는데 걸린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여행작가 최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