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Auster의 소설은 언제나 숨가쁘게 읽힌다. 책의 끝부분 역자의 감상처럼 사건의 다음 전개가 궁금해서 도저히 한 번 잡은 책장을 놓치 못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장을 넘긴 다음 막막하고 복잡한 심경을 안겨주곤 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항상 흔한 일상이 담담하게 묘사되다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우연과 기이한 사건이 평온을 파괴하고, 인물은 운명의 거친 손아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가운데 순례자로서 길을 떠난다. 길 끝에서 인물이 맞닥뜨리는 것은 대개 가냘픈 희망보다 암담한 절망, 평화로운 안주보다는 창조적인 파열이며 그 즈음 이미 플롯과 스토리는 어떤 추리장르의 그것들보다 복잡다단한 가운데 의미의 심화를 거듭하며 보다 높은 차원의 의미로 승화되기도 한다.
Paul Auster
처녀작 '스퀴즈 플레이(Squeeze Play)'를 제외하고 가열차게 순수문학에서의 깊은 발견을 고집해 온 그의 소설이 일단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는, 모든 이야기가 그럴 듯한 허구에서 있음직하지 않은 허구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직적이고 간명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패기를 읽지 않고 문체의 독창성과 기교를 자유자재로 펼쳐내는 그의 천재성이겠지만, 팔려야 더 쓸 수 있다는 중압감 속에서도 폴 오스터가 일독한 독자들에게 재독을 강권하듯 흥미로운 이야기 내부에 인간과 삶의 연관성에서 우러나오는 의미들을 깊게 탐구하게 만드는 미로를 심어놓는 것은 문학적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의 고뇌를 진전시키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큰 행운이다. 그래서 다시 폴 오스터를 밤새워 읽었다. 고급 독자가 되겠다는 야망의 발로가 아니라 문학으로 고뇌하는 방법의 실마리를 나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작가들에게 가장 부담없는 1인칭 시점이 사실은 3인칭 시점보다 더욱 작가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기회를 내포하고 있음을 주장이라도 하듯 '거대한 괴물' 역시 이야기는 '나'에게서 시작된다. 두번째 소설을 낸 후 어느 정도 문명을 얻어가던 피터 아론은 몇 년 동안 소식조차 몰랐던 오랜 내면의 친구 벤자민 삭스가 어느 시골길에서 폭사했음을 알게 된다. 삭스의 수첩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 찾아온 FBI 요원들에게 삭스와의 약속대로 입을 다문 아론은 수사당국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 전에 그가 목격했던 삭스의 일대기를 소설로 집필하기로 마음 먹는다. 급박한 시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전의 글쓰기 스타일과 달리, 동시에 친구 벤자민 삭스가 취했던 방식대로 두뇌 속의 사고가 즉시 활자로 바뀌어 터져 나오는 새로운 경험을 하며 벤자민 삭스 그 자체를 소설로 옮기기 시작한다.
소설은 쌍곡선이 교차하듯 시차를 두고 비슷한 삶의 전환을 겪으며 작가로, 또는 테러리스트로 변모해 가는 피터 아론과 벤자민 삭스 두 인물의 이야기이다. 벤자민 삭스가 초고를 쓰다가 마무리 짓지 못한 소설의 제목과 아론이 쓰는 삭스의 일대기의 제목이 'Leviathan'으로 같다는 점만으로도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아론은 작가 자신의 대변자로서 삭스의 숨가쁜 일생을 도드라지게 하는 대척점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거대한 괴물' 표지
촉망받는 소설가이자 호기로운 친구였던 벤자민 삭스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의 인생에 끼어든 우연의 지시대로 테러리스트가 되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삶이 운명의 거대한 괴물 Leviathan에 의해서 어떻게 왜곡되어 가는지를 지켜보는 일은 한 편으로 흥미진진하고 다른 한 편 비극적이다. 어느 겨울 우연한 계기로 한적한 바에서 만난 삭스와 아론은 곧 서로가 마음이 맞는 친구임을 발견하고 오랜 기간의 우정을 시작한다. 아론은 삭스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신과 그에게 시간의 간격을 두고 비슷한 인연으로 맺어지는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인물들이 두 친구와 만나는 지점을 구성하는 오스터의 솜씨는 천재적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절묘하다. 그러나 인연의 방향은 두 인물 간에 너무도 달라 아론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인물과 그 성격이 삭스에게는 정도는 다를지언정 모두 악연이 되고 만다. 악운이 거듭되는 가운데 삭스는 자신의 의지를 옭아매고 삶의 방향을 뒤트는 거대한 괴물 Leviathan이 횃불을 치켜든 미국의 상징 자유의 여신상임을 깨닫게 되며, 고독이라는 반대급부를 짊어진 채로 괴물과의 싸움에 몸을 던진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것에 의한 선택을 가로막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괴물의 존재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진실에 속한다. 오래전부터 자유의지와 우연의 대립각은 수많은 철학적 논쟁을 제공해왔고, 수많은 인간사의 고전들이 탄생하면서부터 죽음으로 달려가기 시작하는 인생에서 몸에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나침반으로 운명에 맞서는 끝없는 의지와 모험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전들이 놓치고 마는 것은 그 진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묘사하는 방식의 효과성이다. 많은 작품들이 지나치게 현학적이어서 평범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의 발견조차 어렵게 만들어 버렸으며, 적지않은 작품들이 속살거리는 혀로 유치한 운명의 그림을 그려 감상자들을 실망시켰다. 반면 폴 오스터가 독자에게 그려주는 그림은 탐구가 필요없을 정도로 쉽게 떠올려지지는 않으면서도 지독하게 현실적이며 암담할 만큼 거대하게 엄습해 온다. 성조기와 더불어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논란의 여지없이 미국의 상징이 되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생을 넘어 뜨리는 질곡의 정체가 되는 순간, 미국인들은 물론 지구적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미국을 자유의 여신상이라는 조상으로 갈음하여 인지하게 마련인 지구인들에게-물론 나를 포함해서-운명은 도저히 대적할 수 없게 크고 굳건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거대 조각상이라는 현상학적 이미지로 숨가쁘게 다가온다. 그리고 벤자민 삭스는 그 거대한 괴물에 맞서려는 무모한 용사가 되고 만다. 누구나 느낄 법한 슬픔은 여기에서 나온다. 삭스의 고난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막 두번째 초고가 마무리된 순간 FBI가 두 친구의 관계를 알아 차리고, 아론은 다시 찾아온 요원에게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노력하며 소설 'Leviathan'을 넘겨준다. 벤자민 삭스는 운명이 지시한 생의 끝자락에서 결국 혼자가 되어 처절한 외로움을 부둥켜 안고 황량한 아메리카 대륙을 떠도는 자신을 발견했다. 소도시의 작은 서점에서 발견된 아론의 소설 속지에 위조된 삭스의 사인만이 간절했던 소통에로의 갈망의 흔적으로 남았다. 모든 분야에서 재기 넘치고 인간관계에서 호탕했던 한 청년이 고독한 테러리스트가 되어 발 붙일 곳 없이, 그럴수록 광활해지는 대륙을 방랑하는 처연한 풍경이 영화를 보듯 선연하게 눈에 맺혔고, 나는 피터 아론이 그랬던 것보다는 덜할지라도 그 이미지만으로 어떤 비극보다도 슬펐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한 때의 감상에 그치는 얄팍하고 감성적인 슬픔이 아니다.
작가는 이야기의 모든 부분에서 운명이라는 괴물에 대처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다. 운명에 적당히 순응해서 갈등을 피할 것인가, 그것의 도전에 세찬 응전으로 답할 것인가. 그러나 오스터는 옳다고 판단되는 한 가지 선택지를 곱게 포장해 내놓음으로써 독자에게 헛된 희망을 적선하려 하지 않는다. 삭스의 험난한 인생이 보편적인 심성으로부터 자아내는 애잔함은, 과장해서 말하면 작가가 권하는 하나의 선택지를 쥐는 것이 목숨 그 자체를 담보로 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운명을 예정하는 것임을 독자가 깨닫도록 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그는 독자가 자기 생의 표면적인 주관자-실질적인 주관자가 신의 의지 또는 운명이라는 점을 독자와 작가가 모두 인정한다고 보면-로서의 선택을 감행했을 경우 얼마나 큰 고통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극적 긴장감과 더불어 알려 주고 있다.
작가의 손으로 병치되는 두 인물 아론과 삭스는 두 선택지의 양극단에 서 있다. 피터 아론의 경우 그의 생에 개입한 우연한 사건들이 대체로 긍정적이며 폭발력이 적은 편이었다는 사실에서 역설적으로 숨겨진 그의 반응 태도를 알아낼 수 있다. 그는 운명과 의지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찰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가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후회한 첫번째 부인과의 만남은 차치하더라도, 아론이 이후 만난 두번째 부인을 제외한 세 여인과의 인연에서 그는 한 번도 적극적으로 처신하지 않는다.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예술가 마리아의 취향에 맞춰 변태적인 섹스를 하면서도 심적 갈등을 느끼지 않고, 삭스의 부인이었던 페니와의 패륜과도 같은 정사 이후에는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마지막 여인인 릴리언과의 직접적인 만남의 기회가 극 속에서 제거되었던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갈등이라는 결과물을 빚는데 번번히 실패한 운명이 그를 피해갔다는 해석마저 가능할 정도로 그는 순응적인 인간형이다.
반대로 삭스는 중요한 삶의 전환점에서 마주친 우연한 사건들에 온힘을 다해 반응한다. 반응이라는 표현이 인색하게 느껴질 만큼 그의 사고와 행동은 응전에 가깝다. 마리아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욕정을 비켜가지 않는 동시에 모욕을 피하려는 선택을 하다가 절명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임신할 수 없는 아내 페니의 질투와 상실감을 덜어주기 위해 거짓된 혼외정사에 대해 고백한 결과 결국 친구 아론의 배신과 세익스피어의 비극의 한 장면 같은 파경을 경험하며,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기질을 지닌 여인 릴리언을 사랑함으로써 결국 운명의 절벽으로 내몰리고 만다. 조화로웠던 그의 삶에 갈등에 의한 마찰음이 굉음이 되어 불혐화음을 만들고 마침내 인생의 질서는 손댈 수 없게 어지럽혀진다. 따라서 폭탄에 의해 온몸이 찢겨 죽어버린 삭스의 비참한 말로는 오히려 그가 작가에 의해 선택지의 볼릭으로 강조된 1번이었음을 보여주는 역설적 결말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아론이 이전에 자신에게 익숙했던 글쓰기 방식을 버리고 벤자민 삭스의 일대기를 구성하기 위해 삭스의 필법을 모방하면서 흥분을 느끼는 장면은 삭스가 결국 오스터가 추천하는 선택지임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근거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아론은 몸부림치며 죽어간 삭스의 삶의 방식에 동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사의 고민들-사랑, 정욕, 우정, 배신, 폭력, 분노-은 그 자체로 이야기의 흥미를 자아내는 부분이면서, 폴 오스터가 그려낸 '거대한 괴물'의 지도를 구성하는 요소이고 올바른 방향을 잡아나가기 위한 판단의 근거들이다. 이 지도의 어떤 지점에서 유난히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서성이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그 요소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상깊은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보면 난잡하게 보일 정도로 나열되고 서로 얽힌 다양한 요소들을 배치한 작가의 의도가 개별적인 개인사들을 위한 배려라고 평가한다면 조금 과도한 상찬일까.
너무나 암담하게 보이는 관념적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이상적인 방향을 권고하고 있다는 미안함이 있었던지, 폴 오스터는 씁쓸하지만 씨익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독자들에게 작은 위로의 말을 던진다.
"또 다시 24시간 동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한 동안 이 문장은 그의 친절한 배려를 고맙게 받고 싶은 나에게 남아 있으면서 의지가 되고 격려가 되리라 믿는다.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이 있었음에도 마치 소설의 핵심을 간파한 양 과도하게 자의적이고 해석적인 글이었다면, 이 이야기가 마땅히 받음직한 찬사보다 훨씬 열렬한 지지를 보낸 것이라면 그것은 어젯밤 내 방 책상에서부터 오전의 인파로 붐비는 지하철에 이르기까지 내가 폴 오스터가 창조한 이야기 속에서 너무나 기쁘게 고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 냄새] 거대한 괴물(Leviathan)
"또 다시 24시간 동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Paul Auster의 소설은 언제나 숨가쁘게 읽힌다. 책의 끝부분 역자의 감상처럼 사건의 다음 전개가 궁금해서 도저히 한 번 잡은 책장을 놓치 못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장을 넘긴 다음 막막하고 복잡한 심경을 안겨주곤 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항상 흔한 일상이 담담하게 묘사되다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우연과 기이한 사건이 평온을 파괴하고, 인물은 운명의 거친 손아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가운데 순례자로서 길을 떠난다. 길 끝에서 인물이 맞닥뜨리는 것은 대개 가냘픈 희망보다 암담한 절망, 평화로운 안주보다는 창조적인 파열이며 그 즈음 이미 플롯과 스토리는 어떤 추리장르의 그것들보다 복잡다단한 가운데 의미의 심화를 거듭하며 보다 높은 차원의 의미로 승화되기도 한다.
Paul Auster
처녀작 '스퀴즈 플레이(Squeeze Play)'를 제외하고 가열차게 순수문학에서의 깊은 발견을 고집해 온 그의 소설이 일단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는, 모든 이야기가 그럴 듯한 허구에서 있음직하지 않은 허구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직적이고 간명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패기를 읽지 않고 문체의 독창성과 기교를 자유자재로 펼쳐내는 그의 천재성이겠지만, 팔려야 더 쓸 수 있다는 중압감 속에서도 폴 오스터가 일독한 독자들에게 재독을 강권하듯 흥미로운 이야기 내부에 인간과 삶의 연관성에서 우러나오는 의미들을 깊게 탐구하게 만드는 미로를 심어놓는 것은 문학적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의 고뇌를 진전시키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큰 행운이다. 그래서 다시 폴 오스터를 밤새워 읽었다. 고급 독자가 되겠다는 야망의 발로가 아니라 문학으로 고뇌하는 방법의 실마리를 나에게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작가들에게 가장 부담없는 1인칭 시점이 사실은 3인칭 시점보다 더욱 작가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기회를 내포하고 있음을 주장이라도 하듯 '거대한 괴물' 역시 이야기는 '나'에게서 시작된다. 두번째 소설을 낸 후 어느 정도 문명을 얻어가던 피터 아론은 몇 년 동안 소식조차 몰랐던 오랜 내면의 친구 벤자민 삭스가 어느 시골길에서 폭사했음을 알게 된다. 삭스의 수첩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 찾아온 FBI 요원들에게 삭스와의 약속대로 입을 다문 아론은 수사당국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 전에 그가 목격했던 삭스의 일대기를 소설로 집필하기로 마음 먹는다. 급박한 시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전의 글쓰기 스타일과 달리, 동시에 친구 벤자민 삭스가 취했던 방식대로 두뇌 속의 사고가 즉시 활자로 바뀌어 터져 나오는 새로운 경험을 하며 벤자민 삭스 그 자체를 소설로 옮기기 시작한다.
소설은 쌍곡선이 교차하듯 시차를 두고 비슷한 삶의 전환을 겪으며 작가로, 또는 테러리스트로 변모해 가는 피터 아론과 벤자민 삭스 두 인물의 이야기이다. 벤자민 삭스가 초고를 쓰다가 마무리 짓지 못한 소설의 제목과 아론이 쓰는 삭스의 일대기의 제목이 'Leviathan'으로 같다는 점만으로도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아론은 작가 자신의 대변자로서 삭스의 숨가쁜 일생을 도드라지게 하는 대척점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거대한 괴물' 표지
촉망받는 소설가이자 호기로운 친구였던 벤자민 삭스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의 인생에 끼어든 우연의 지시대로 테러리스트가 되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삶이 운명의 거대한 괴물 Leviathan에 의해서 어떻게 왜곡되어 가는지를 지켜보는 일은 한 편으로 흥미진진하고 다른 한 편 비극적이다. 어느 겨울 우연한 계기로 한적한 바에서 만난 삭스와 아론은 곧 서로가 마음이 맞는 친구임을 발견하고 오랜 기간의 우정을 시작한다. 아론은 삭스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신과 그에게 시간의 간격을 두고 비슷한 인연으로 맺어지는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인물들이 두 친구와 만나는 지점을 구성하는 오스터의 솜씨는 천재적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절묘하다. 그러나 인연의 방향은 두 인물 간에 너무도 달라 아론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인물과 그 성격이 삭스에게는 정도는 다를지언정 모두 악연이 되고 만다. 악운이 거듭되는 가운데 삭스는 자신의 의지를 옭아매고 삶의 방향을 뒤트는 거대한 괴물 Leviathan이 횃불을 치켜든 미국의 상징 자유의 여신상임을 깨닫게 되며, 고독이라는 반대급부를 짊어진 채로 괴물과의 싸움에 몸을 던진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것에 의한 선택을 가로막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괴물의 존재는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진실에 속한다. 오래전부터 자유의지와 우연의 대립각은 수많은 철학적 논쟁을 제공해왔고, 수많은 인간사의 고전들이 탄생하면서부터 죽음으로 달려가기 시작하는 인생에서 몸에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나침반으로 운명에 맞서는 끝없는 의지와 모험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전들이 놓치고 마는 것은 그 진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묘사하는 방식의 효과성이다. 많은 작품들이 지나치게 현학적이어서 평범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의 발견조차 어렵게 만들어 버렸으며, 적지않은 작품들이 속살거리는 혀로 유치한 운명의 그림을 그려 감상자들을 실망시켰다. 반면 폴 오스터가 독자에게 그려주는 그림은 탐구가 필요없을 정도로 쉽게 떠올려지지는 않으면서도 지독하게 현실적이며 암담할 만큼 거대하게 엄습해 온다. 성조기와 더불어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논란의 여지없이 미국의 상징이 되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생을 넘어 뜨리는 질곡의 정체가 되는 순간, 미국인들은 물론 지구적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미국을 자유의 여신상이라는 조상으로 갈음하여 인지하게 마련인 지구인들에게-물론 나를 포함해서-운명은 도저히 대적할 수 없게 크고 굳건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거대 조각상이라는 현상학적 이미지로 숨가쁘게 다가온다. 그리고 벤자민 삭스는 그 거대한 괴물에 맞서려는 무모한 용사가 되고 만다. 누구나 느낄 법한 슬픔은 여기에서 나온다. 삭스의 고난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막 두번째 초고가 마무리된 순간 FBI가 두 친구의 관계를 알아 차리고, 아론은 다시 찾아온 요원에게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노력하며 소설 'Leviathan'을 넘겨준다. 벤자민 삭스는 운명이 지시한 생의 끝자락에서 결국 혼자가 되어 처절한 외로움을 부둥켜 안고 황량한 아메리카 대륙을 떠도는 자신을 발견했다. 소도시의 작은 서점에서 발견된 아론의 소설 속지에 위조된 삭스의 사인만이 간절했던 소통에로의 갈망의 흔적으로 남았다. 모든 분야에서 재기 넘치고 인간관계에서 호탕했던 한 청년이 고독한 테러리스트가 되어 발 붙일 곳 없이, 그럴수록 광활해지는 대륙을 방랑하는 처연한 풍경이 영화를 보듯 선연하게 눈에 맺혔고, 나는 피터 아론이 그랬던 것보다는 덜할지라도 그 이미지만으로 어떤 비극보다도 슬펐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한 때의 감상에 그치는 얄팍하고 감성적인 슬픔이 아니다.
작가는 이야기의 모든 부분에서 운명이라는 괴물에 대처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다. 운명에 적당히 순응해서 갈등을 피할 것인가, 그것의 도전에 세찬 응전으로 답할 것인가. 그러나 오스터는 옳다고 판단되는 한 가지 선택지를 곱게 포장해 내놓음으로써 독자에게 헛된 희망을 적선하려 하지 않는다. 삭스의 험난한 인생이 보편적인 심성으로부터 자아내는 애잔함은, 과장해서 말하면 작가가 권하는 하나의 선택지를 쥐는 것이 목숨 그 자체를 담보로 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운명을 예정하는 것임을 독자가 깨닫도록 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그는 독자가 자기 생의 표면적인 주관자-실질적인 주관자가 신의 의지 또는 운명이라는 점을 독자와 작가가 모두 인정한다고 보면-로서의 선택을 감행했을 경우 얼마나 큰 고통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극적 긴장감과 더불어 알려 주고 있다.
작가의 손으로 병치되는 두 인물 아론과 삭스는 두 선택지의 양극단에 서 있다. 피터 아론의 경우 그의 생에 개입한 우연한 사건들이 대체로 긍정적이며 폭발력이 적은 편이었다는 사실에서 역설적으로 숨겨진 그의 반응 태도를 알아낼 수 있다. 그는 운명과 의지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찰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그가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후회한 첫번째 부인과의 만남은 차치하더라도, 아론이 이후 만난 두번째 부인을 제외한 세 여인과의 인연에서 그는 한 번도 적극적으로 처신하지 않는다. 기이한 행동을 일삼는 예술가 마리아의 취향에 맞춰 변태적인 섹스를 하면서도 심적 갈등을 느끼지 않고, 삭스의 부인이었던 페니와의 패륜과도 같은 정사 이후에는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마지막 여인인 릴리언과의 직접적인 만남의 기회가 극 속에서 제거되었던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갈등이라는 결과물을 빚는데 번번히 실패한 운명이 그를 피해갔다는 해석마저 가능할 정도로 그는 순응적인 인간형이다.
반대로 삭스는 중요한 삶의 전환점에서 마주친 우연한 사건들에 온힘을 다해 반응한다. 반응이라는 표현이 인색하게 느껴질 만큼 그의 사고와 행동은 응전에 가깝다. 마리아와의 우연한 만남에서 욕정을 비켜가지 않는 동시에 모욕을 피하려는 선택을 하다가 절명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임신할 수 없는 아내 페니의 질투와 상실감을 덜어주기 위해 거짓된 혼외정사에 대해 고백한 결과 결국 친구 아론의 배신과 세익스피어의 비극의 한 장면 같은 파경을 경험하며, 충동적이고 파괴적인 기질을 지닌 여인 릴리언을 사랑함으로써 결국 운명의 절벽으로 내몰리고 만다. 조화로웠던 그의 삶에 갈등에 의한 마찰음이 굉음이 되어 불혐화음을 만들고 마침내 인생의 질서는 손댈 수 없게 어지럽혀진다. 따라서 폭탄에 의해 온몸이 찢겨 죽어버린 삭스의 비참한 말로는 오히려 그가 작가에 의해 선택지의 볼릭으로 강조된 1번이었음을 보여주는 역설적 결말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아론이 이전에 자신에게 익숙했던 글쓰기 방식을 버리고 벤자민 삭스의 일대기를 구성하기 위해 삭스의 필법을 모방하면서 흥분을 느끼는 장면은 삭스가 결국 오스터가 추천하는 선택지임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근거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아론은 몸부림치며 죽어간 삭스의 삶의 방식에 동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사의 고민들-사랑, 정욕, 우정, 배신, 폭력, 분노-은 그 자체로 이야기의 흥미를 자아내는 부분이면서, 폴 오스터가 그려낸 '거대한 괴물'의 지도를 구성하는 요소이고 올바른 방향을 잡아나가기 위한 판단의 근거들이다. 이 지도의 어떤 지점에서 유난히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서성이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그 요소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상깊은 경험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보면 난잡하게 보일 정도로 나열되고 서로 얽힌 다양한 요소들을 배치한 작가의 의도가 개별적인 개인사들을 위한 배려라고 평가한다면 조금 과도한 상찬일까.
너무나 암담하게 보이는 관념적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이상적인 방향을 권고하고 있다는 미안함이 있었던지, 폴 오스터는 씁쓸하지만 씨익하고 부드럽게 웃으며 독자들에게 작은 위로의 말을 던진다.
"또 다시 24시간 동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한 동안 이 문장은 그의 친절한 배려를 고맙게 받고 싶은 나에게 남아 있으면서 의지가 되고 격려가 되리라 믿는다.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이 있었음에도 마치 소설의 핵심을 간파한 양 과도하게 자의적이고 해석적인 글이었다면, 이 이야기가 마땅히 받음직한 찬사보다 훨씬 열렬한 지지를 보낸 것이라면 그것은 어젯밤 내 방 책상에서부터 오전의 인파로 붐비는 지하철에 이르기까지 내가 폴 오스터가 창조한 이야기 속에서 너무나 기쁘게 고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괴물(Leviathan)'
Paul Auster(1992), 황보석 역(1996),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