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신사태 전 경상우도 사림의 실상
(1728년 무신사태 고찰, 2003년, 아이올리브)
조선후기의 사회는 본래 그 신분이 사대부층에 속했으나 사대부로서의 정치적인 기능을 빼앗긴 사대부층이 많았다. 이들은 거의 모두 1623년 3월 소위 인조반정과 1694년(숙종20) 갑술환국(甲戌換局)과 같은 당쟁이 빚은 정변을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실각당한 후 관료로 진출하여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한 몰락 사대부층에 속하는데, 이들을 사색(四色) 당파별로 살펴보면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몰락 사대부층은 도처에 산재해 있었지만, 특히 영남지방은 그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었는데 그것은 북인을 포함한 남인의 본거지가 경상도, 즉 영남이었기 때문이었다.
영남은 왕조의 건국초기 이래로 수많은 인재를 중앙에 진출시켜 혹은 정치경륜(政治經綸) 혹은 도학(道學)으로써 눈부신 활약을 하였고, 선조(宣祖)임금 이전까지 권력을 잡았던 사람은 모두 영남인이었으며, 문묘에 종사한 현풍의 김굉필(金宏弼), 함양의 정여창(鄭汝昌), 경주의 이언적(李彦迪), 안동의 이황(李滉) 등 4현(四賢) 역시 영남지방의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영남은 일찍부터「인재지보고(人才之寶庫)」또는「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하여 사림의 연총(淵叢)으로 일컬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現 합천 삼가 출생으로 경상우도 사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남명 조식(南冥 曺植)’선생의 수제자인 합천 가야 출생의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이 1623년(광해15)에 西人의 군사정변인 소위 인조반정 후「폐모살제(廢母殺弟)」를 배후 조정한 혐의로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된지 5일만에 억울하게 만88세에 참형을 당한 후 상황이 돌변하게 되었다. 사실 정인홍은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반대하였고 전은설(全恩說)로 영창대군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음에도 서인에 의해 희생양이 되었다. 이렇듯 인조반정 후 西人이 완전히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영남에서도 특히 남명학파(南冥學派)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 대부분을 이루고 있던 現 진주 합천 거창 함양 등 경상우도(慶尙右道)지방의 사족(士族)들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그들의 사기(士氣)는 소침해지고 관리로 나아가려는 교섭은 거의 두절되고 말았다. 그 후 서인은 1680년「경신환국」때 남인에 대한 보복문제로 노,소론으로 분열되었고, 영조 즉위 후 조선 말기까지 노론이 정권을 독점, 나라를 파탄으로 빠지게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인조반정 후 당시의 사정을 말하고 있는「성호사설(星湖僿說)」에, “정인홍이 참륙을 당하자 그 문하의 유생들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하나같이 관리의 세계로 진출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정인홍이 출생한 합천 등 인근 고을에는 관면(冠冕)이 세절(世絶)하고 사풍(士風)이 부진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물론 ‘성호 이익’의 말과 같이 합천과 진주를 비롯한 경상우도 일대에서 「관면세절」의 현상이 나타났던 것은 右道人 스스로가 비통한 나머지 관료로서의 진출을 포기한데서 온 것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당국으로부터 심한 차별과 배척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내암 정인홍(1535~1623, 영의정 역임)’의 당색은 北人(大北)이며, 일세에 위엄과 명성으로 임진왜란 때인 1592년 5월에는 합천 의병장으로, 고령 의병장 송암 김면 및 의령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등과 함께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왜군이 탐내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보전하는데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1592년 11월에는 영남의병 총대장으로 임명되어 왜군의 내륙진출을 제어하는 등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혁신적인 정치사상을 펼쳐「민본」과 외교의「자주성」을 주장하여 광해군의 정치 외교정책에 일조를 하였으며, 근기(近畿) 남인의 몰락 가문 출신인 실학(實學)의 거두 ‘성호 이익(星湖 李瀷: 曺世樞(무신사태 때 처형됨)의 조부인 조하주(曺夏疇)의 처남이며, 또한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의 종조부임)’과 그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년(영조38)~1836년(헌종2), 現 남양주시 조안면 출생)’의 실학적 사상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러나 소위 인조반정 후 西人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매도, 폄하되었다.
한편,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 대부분인 경상좌도의 사족(士族)들도 우도인(右道人)의 처지와 큰 차이없이 차별을 받았다. 좌우도(左右道)는 서인(西人)과 묵은 원한이 있던 남,북인(南,北人)의 본거지였고, 더구나 1623년 소위 인조반정 이후에는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필연적으로 경상도 지방 출신자의 관계(官界) 등용문은 매우 좁혀지게 되었으며, 비록 등용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조판서 이상 의정부의 관직에는 임명되지 않는 등 승진과 보직에 있어 더욱 제한과 차별이 가하여졌다.
더구나 당쟁이 격심했던 1680년(숙종6)에 허적(許積)의 기름유용 사건 등이 발단이 되어 정지화 남구만 등 서인들에 의해 영의정인 허적 우찬성 윤휴 대사간 권기(權愭: 정희량 外祖父) 좌의정 민희(민원보 祖父) 대사헌 이하진(李夏鎭: 성호 이익의 父, 曺夏疇의 장인) 등 남인들이 정권을 잡은지 6년만에 대거 축출되는 경신환국(庚申煥局)과, 9년후인 1689년(숙종15)에는 송시열 김수항 이이명 등 서인이 축출되고 권대운 목내선 민종도 등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己巳換局) 등과 같은 일진일퇴(一進一退) 차입피출(此入彼出)의 정변을 겪고, 드디어 1694년 숙종20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 때 노론보다는 비교적 양심적이었던 권대운 이현일 민암 이의징(이인좌의 큰 할아버지) 등 南人이 완전히 실각하고 김창집 이이명 서문중 남구만 박세채 등 西人분파의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집권하게 되자, 이제 영남 즉 경상도는 左右道 가릴 것 없이 중앙에 진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은 자취를 감추다시피 되었다. 이는 무신사태 5년 후인 영조9년에 소론으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서명균(徐命均)이 영조에게 아뢴 것에서 알 수 있는데, 갑술환국 이후 노론정권으로부터 거세된 사람이 많아 도무지 벼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경상도 士林들이 중앙에 나아가 관직을 맡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노론(老論)을 중심으로 하는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자제들은 우점(優占)하여 재능이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아니하고 빨리 등용되는 것에 비해, 영남인들은 열심히 공부하여 비록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해도 거의 등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1711년 숙종37년에 소론인 교리 정식(鄭拭: 1664~1719, 노론의 거두인 이이명 조태채를 탄핵하다 파직되기도 했음)이 당시의 실정을 말하는 것을 보면, “근래에는 영남인을 전혀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내(道內)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람이 매우 많지만 수령과 찰방(察訪)이 된 사람만 겨우 몇명 뿐이다” 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태는 숙종시대에 이어 경종임금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1721년 경종 원년 소론(少論)인 경상감사 조태억(趙泰億: 1675~1728)은 그의 상소에서, “영남인으로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80여명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벼슬을 하여 국가의 녹(祿)을 받는 자가 없음을 지적하고 속히 전조(銓曹)로 하여금 널리 찾아 물어서 재능에 따라 골고루 등용할 것ꡓ을 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권력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이것은 단지 빈 말에 그칠 뿐 아무런 실효도 거둘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이 중앙관료로서의 진출의 길이 막혀버려 세력을 잃은 사대부들은 중앙에 권력을 두지 못한 한갖 지방의 양반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들은 선조(先祖)들의 권위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농장을 배경으로 향촌에서 세력을 부리는 토호(土豪)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비생산적인 소비생활과 사대부로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혼례, 상례 등 모든 절차에서의 낭비, 그리고 집안 재산의 자녀들에 의한 분점(分點) 등은 그들의 경제생활을 파탄으로 몰고가기도 했다. 또한 여러 대에 걸쳐 벼슬한 사람이 없어 선조(先祖)들의 명예도 차츰 그 빛을 잃어갔다. 이러한 여건하에 있던 경상도(영남) 지방 사림(士林)들의 장래는 실로 암담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사정은 무신사태(戊申事態)가 평정된 직후에 現 경기도 여주에서 무신사태에 참여하여 처형된 조관규(趙觀奎: 조행검(曺行儉: 1720~1804, 조성좌의 7촌 조카이며, 또한 조하현의 증손)의 장인인 趙日奎의 동생)가 英祖임금에게 공술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영조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직접 조관규를 국문(鞠問)하는 과정에서 조관규가 무신사태 관련사실을 진술하면서 조상(趙鏛: 조관규의 7촌 조카로, 능지처사됨)의 말을 인용하여, “과거에 급제하고서도 도무지 관직을 얻을 수 없으니, 만약 노론이 되지 않는다면 이 나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서는 살아갈 다른 방책이 없다”라고 공술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무신사태 때 처형된 순창趙氏인 조일규(趙日奎)는 조정립(曺挺立)의 6세손인 조행검(曺行儉)의 장인이며, 1728년 3월 무신사태 때 조정립의 현손인 조성좌(曺聖佐)와 조명좌(曺命佐: 조행검의 父)의 起兵으로 인해 조성좌, 명좌 등이 처형되는 등 조정립의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고, 趙日奎 또한 무신사태 때 처형되었는데도 무신사태 후 趙日奎의 딸이 조성좌의 7촌 조카인 조행검에게 시집을 옴. 이는 趙日奎의 증조부인 만한 조수익(晩閑 趙壽益: 1596~1674, 이조참판 대사헌 역임)이 조행검의 5대(6세) 祖父인 조정립과 교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됨)
노론이 아니고서는 살 수가 없는 궁한 사정, 이것이 곧 조선후기에 있어서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세력을 잃은 사대부들의 실정이었으며, 영남지방은 이러한 사정이 심각한 곳이었다. 특히 합천에서 요집조권(遙執朝權: 멀리서 조정의 권세를 좌지우지 함)하던 ‘내암 정인홍’이 1623년 4월 참형된 후 영남지방의 경상우도 중 합천 삼가 초계 거창 안음 산청 함양 진주 사천 함안 의령 고령 성주 등의 사림(士林)에 대한 조정(朝廷)의 차별은 더 한층 심하게 가하여졌다.
(‘내암 정인홍’의 門人으로는, 합천의 문경호 문홍도 강익문 박이장 조응인 조정립 조정생 하혼 박인 한대기 손창후 정덕지, 삼가의 이흘 권양 박사제 윤선, 초계의 전우 이대기, 거창의 유중룡 형효갑 전팔고, 안음의 정온, 산청의 오장 유경갑, 함양의 정경운 노사상 강린, 진주의 성여신 정승훈 하성, 사천의 이대일, 함안의 이정 오여은, 의령의 이종욱 곽재기 유활, 고령의 박광선 박종주 박종윤, 성주의 문려 이지화 성변규, 현풍의 박성 등임)
무신사태 전 경상우도 사림의 실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