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 이야기 (짧지 않은 이야기)

임현정200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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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컵 이야기     (짧지 않은 이야기)


 

[주]새생활체인 출신의 종이컵C는 모든 종이컵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답니다.

누군가에 의해 한번 사용 되면 곧 버려질 나.

버려진 후 곧바로 의식이 사라진다면 그나마 행복한 편이련만 온몸이 찢겨지고 온갖 더러운 꼴을 보며 최후를 마감하는 것이 보편적인 우리들의 삶이랍니다.

 

그러나 소문에 의하면 어떤 종이컵은 5년이 넘게 어떤 미술가의 책상 위에서 잡동사니 꽂이 노릇을 하며 장수를 누리고 있으며 또 한 전설에 의하면 어느 유명한 미술가에 의해 1회용 커피잔으로 사용되고 급기야 재털이 노릇까지 하고는 수명을 다 할 처지가 되었을 때 무명의 미술가가 나타나 그 님을 집어 들고는 “너는 나의 이 순간을 기억하는 시간의 증거물이다!” 하고는 작품의 재료로 이용되어 그 무명 미술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어 불사의 종이컵이 되었다는 그런 신비로운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답니다.

 

내 친구 C는 자신의 본분을 아는 극소수의 종이컵이었지만 감추어둔 그만의 꿈이 있었답니다.

그건 머그컵이 되는 것이었어요.

 

우리들이 살고 있던 서랍이 열릴 때마다 동료들은 차례차례 차출되어 세상에 나갔고 그때마다 그들의 뜨겁지만 너무나 짧은 생애를 보면서 C는 막연한 비애에 잠기곤 했어요. 그 때,

정수기 옆 쟁반에 우아하게 앉아 있던 머그컵님을 보았어요.

얼핏 보면 자신과 별반 차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곧 머그컵과 자신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란걸 느꼈답니다.

머그컵님은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며 말없이 햇빛아래 있었습니다.

은은한 장미꽃그림으로 아름답게 치장하고 크림 빛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윤기는 파리가 앉다 놀라 자빠라질 지경이었죠.

더욱 매혹적인 것은 우리에게는 없는 의문부호 모양의 손잡이였답니다. 아~ 손잡이!

우리 종이컵들에겐 저것이 없어서 한 순간의 뜨거움 마저도 절반밖에 허락되지 안았는데  머그컵님은 온몸 가득 그 뜨거움을 채우고는 오랫동안 서서히 식혀지는 쾌락을 즐길 수 있었고 그 이후에는 다시 새롭게 정화되어 다시금 느끼게 될 그 절정의 순간을 기대하며 휴식의 시간을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종이컵들에겐 전설로 전해오는 무변 불사의 시간이 머그컵 님에게는 사소한 일상이란 것이 C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왜 종이컵일까? 저이는 왜 머그컵일까?

  -내가 머그컵이라면 얼마나 좋을 까?

 

C는 자신이 머그컵이 되는 상상을 수없이 해보며 급기야 머그컵이 되고야 말겠다는 황당무계한 목표를 설정하게 되었답니다.

C는 머그컵이 되기 위해선 자신의 재질을 바꾸어야 한단 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목숨과 맞바꾸어야 하는 위험도 따른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던 어느 날, 왁자지껄 소리에 모든 종이컵들은 흥분에 쌓여 서랍이 열리길 기다렸고 이윽고 한꺼번에 많은 종이컵들이 서랍 밖 세상으로 나가게 되었답니다.

이 때 C도 같이 차출되어 머그컵과 멀지 않은 자리에 앉게 되었지요.

차가운 음료, 뜨거운 음료, 알코올이 든 음료. 여러 가지의 액체들이 그들의 품속에 들어왔고 저마다의 희열을 느끼며 종이컵들은 자신의 생의 마지막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C는 초조함과 기대감으로 쓰러질 것 같았지만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는데 바로 눈앞에서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어요.

소주를 품게 된 한 종이컵이 쓰여지기도 전에 온 몸이 흐물흐물해져서 어떤 사람이 마시려 집어 들자 물컥 찌그러지며 엎어졌어요.

본래 종이컵은 알코올을 만나면 가슴속이 녹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힘이 절반으로 줄어들거든요.

C는 눈물이 났어요.

그 동료는 쓰여지지도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하고 어느 누구도 그를 안타깝게 여기지 않았어요.

C는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했어요.

   - 싫어! 이렇게 무의미하게 갈 순 없어. 어서 머그컵이 되어야 해! 

 

C는 머그컵님을 바라보았어요. 

머그컵님은 조용히 뜨거운 차를 품고는 명상을 하고 있었어요. C는 머그컵에게 다가 갔어요.

   - 머그컵님아! 당신은 나의 우상이예요. 전 님처럼 되고싶어요. 제가 어떻게 해야 머그컵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방법이 없을까요?

 

머그컵은 C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어요.

 

  - 종이컵님아. 그대나 나나 어차피 같은 한 흙에서 나온 거라오. 본시 그대의 조상은 흙에 뿌리

     를 내리고 살던 이름있는 나무로서 오랫동안 천수를 누렸지만 세상이 어지러워 지면서 베어져

     일부는 목재가 되었고 일부는 종이가 되었는데 그나마 종이가 된 그대의 조상은 학자로서 기

     품 있게 다루어졌으나 넘쳐나는 세균들로부터 병폐를 막고자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학자인 그

     대의 조상을  일개 이름없는 종이컵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오.

     지금 당신은 자신의 처지가 가엽게 여겨져 내가 부러운가 본데 나 또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오.

 

  - 그게 무엇인데요?

 

  - 내가 흙에서 머그컵이 되기까지 겪은 고행 중 가장 큰 것은 불가마 고행 이었소.

    온도가 800도가 넘는 곳에서 지독하게는 2번이나 달구어지는 고행을 수행 해야 하오.

    그리고 가장 절망적인 것은 난….한번 깨지면 끝장이라오. 다시금 무언가로 부활하기란….

    당신이 50번 부활하고 소멸하는 동안 난 어느 쓰레기더미에 있거나 어쩜 영영 다시는 그 무엇

    이 되지 못할지도 모르는 그런 운명이라오.

 

C는 울며 고백했어요.

 

   - 50번씩을 500번 반복하여 산다 한들 그게 무엇이란 말이오? 단 한번을 살아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고 싶단 말이요.

      내 가슴을 아시오? 머그컵이 종이컵의 마음을 안단 말이요? 흑흑흑~~

 

머그컵님은 한 숨을 쉬고 체념하듯 말했어요.

 

    - 종이컵님아. 그대가 그토록 머그컵이 되고자 한다면 한가지의 방법이 있소이다. 그건 당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당신의 조상이 살던 흙! 우리는 모두 흙의 자손이요.

      저기 저 음식을 데우고 있는 가스 불이 보이지요? 그 속으로 뛰어 드시오.

      불은 당신의 몸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힘을 가지고 있소.

      당신의 몸이 재가 되면 바람을 따라 떠나시오. 그리고 때를 기다리시오. 누군가 그대를 흙과

      함께 불에 구어 머그컵으로 만드는 날이 올지도 모를 테니.

      그러나 경고하는데 머그컵이 될진 안될지는 장담 못합니다. 다만 지금의 종이컵의 운명으로

      부터는 벗어날 수 있을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