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김대중은 전남 목포시 해남군 출신이다..한국 전쟁떄는 인민 수용소에 감금되다가 탕출하여 자신의 고향에서 해군 의용 경비대를 창설하여 지휘하였다...전쟁이 끝나자 목포에서 운수업을 하다가 친구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1961년 강원 인제 민의원 보궐선거에 나가 3낙끝에 당선되었지만 곧 일어난 5.16떄문에 국회가 해산되자 의원 선서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자동적으로 의원직을 잃게 되었다...
김영삼은 경남 부산시 거제군 출신이다..아버지가 그 지역의 유지이며(멸치 어장?ㅋㅋㅋ)재력가이기도 하였다..부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나왔으며,한국 전쟁때에는 자신의 고향인 부산으로 피난해 왔다..여기서 그의 어머니가 인민군에 의해 돌아가셨기 떄문에 사상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로웠다..(썡 철저한 보수주의자?ㅋㅋ)전쟁이 끝나고 장택상 총리의 보자관으로 있던 중 1954년 부산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27살이라는 최연소 민의원에 당선되어 많은 화제를 남겼었다.(아직도 꺠지지 않는 기록.ㅋㅋ)
2.김대중은 1963년 목포 해남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나서부터 정치 신인으로써 각광 받았다..민주당내 장면계파로써 대변인과 청년국장 등 당의 중요 당직을 맡았고,이러한 속에서 1971년 김영삼.이철승..등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여..결국 1위 낙점자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김영삼은 민주당과 민국당의 통합 과정에서 생겨난 민주당에 입당하여 당시 당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조병옥 박사 계파에 속하였다..
그는 당 선전부장.원내 총무 등 김대중씨와 함꼐 신민당내 신인 정치인으로써 각광 받았다...그는 국회 내 서울대학교 문리대 동우회인 신풍회를 만들어 장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데 노력하였다.여기서 그는 1967년 3선 개헌에 관련에 그 유명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다.ㅋㅋㅋㅋ
3.김대중과 김영삼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경쟁을 벌인 것이 바로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떄여서 부터이다.
1963년과 1967년 신민당 후보로 나선 윤보선씨가 공화당 박정희에게 계속 패하자 새롭고 신선한 인물을 후보로 만들여야 한다는 당내의 여론등을 업고 김대중.김영삼.이철승 등 당 내 소장파들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후보 경선에 나섰다.
1차 투표에선 과반수를 넘긴 후보가 없어,2차 투표를 하였다..
여기서 김대중은 이철승에게 대선 승리 후 당권을 분담하겠다는 조건으로 단일 후로로 합의 결국 김대중씨가 김영삼씨를 근소한 차로 리드..1971년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지명 받았다.
여기서 두 라이벌의 앙금의 벽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71년 4월 부산 유세때 김영삼씨가 배석한 자리에서..김대중 후보가 "여기 나와 있는 김영삼군에게.."이말이 두 라이벌의 앙금의 씨앗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ㅎㅎㅎㅎㅎㅎㅎㅎ
또 한 거제 유세에서는 김영삼이 찬조 연설에서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는 반드시 이 김영삼이가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오고야 말겠다,.," 참 쓸데없는 말들 많이 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이와같은 선전?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게 90만표의 근소한 차로 낙선하게 된다..
4.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김대중에게는 암울한 인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여당은 선거 결과를 보고 김대중을 잠재적 정권 위협자로 보고 선거법위반죄로 구속,동경 납치,연금 등 온갖 정치적 탄압을 당하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죽음과 함꼐 연금이 해제 되었다.
김영삼은 차기 대통령 선거를 내다 보며 백의 종군을 하고 있다가
1972년 유신 선포와 함꼐 그의 꿈은 날라가 버렸다,.ㅋㅋㅋㅋ
여기서 그의 반독재 운동이 시작된다....
1973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국회에 입성하고 그 해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이철승 계열을 압도적인 표차로 따돌리며 총재에 당선되었다..총재에 당선된 직 후 박정희 유신에 대해 강경하게 나감으로써 초산테러 등 갖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76년 총재 경선에는 유신에 온건적인 이철승계열에 패하고 .2년뒤 총재 경선에 다시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로 당선되었다.
1979년 미국 시사 주간지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미국은 인권탄압을 자행하는 박정희 정권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고,신민당 당사안에서 농성중인 YH여공들을 보호하다가 경찰의 진입과정에서 구타를 당하고,친미 사대주의자다,국가 원수모독죄라 몰아..결국 임시 국회에서 공화당.유신 정우희 의원들만 참여한 가운데 김영삼 국회의원 의원제명 결의안을 통과 시켰다..이 일로 인하여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마산에서 대규모 반독재 항쟁이 일어났으며,결국 1달만에 박정희 대통령이 죽음으로써,막을 내리게 되었다.
5.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에서 부.마 항쟁 등 정국 해결방안을 놓고 차지철과 김재규가 갈등을 하는 동안 뜻하지 않게 박정희 대통령이 그토록 믿었던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실상 유신의 종말을 알리는 총소리였던 것이다.
그 해 12월 12일 군부내 몇몇 박 대통령 추종자였던 전두환.노태우 등 하나회 출신 장군들이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체포하는 등 쿠데타 사건이 발발하였다.이들은 이떄까지만 하더라도 군부의 실권만 잡고 있었지 정치권에는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이 떄 나선것이 김영삼.김종필.김대중 3김들이었다.
이들은 박대통령 사후,헌법을 직선제로 개헌하고 대통령에 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러나 이들의 구상은 빛나가고 있었다.1212이 후 서서히 권력집단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른바 신군부 세력을 너무 과소 평가 하고 있었기 떄문이다.설마하니 군부가 다시 나오겟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딴 사람은 생각은 없는데 김칫국부터 먹는 생각일로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1980년 봄..이른바 전국에는 서울의 봄이라는 자유의 봄이 피어나기 시작하였다.과도체제로 성립된 최규하정부는 그 해 3월 긴급조치9호를 해지 시켰고,전국의 대학교에는 유신떄 강제로 폐지 되었던 학생회가 자율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러한 이떄 3김은 오로지 권력의 정점만을 생각하며 자기만의 환상에 빠져 있었다..
처음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신민당에 입당하여 당내 경선을 통하여 대통령 후보를 지명 받자고 제의 하였지만,당내에 자신의 기반이 전혀 없었던 김대중은 이 제의를 거절하였다.
이렇게 허송세월만 보내게 되고,결국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요구만 전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게 되었다.
신군부는 이 떄다 싶어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통한 사회 혼란을문제 삼아 .군이 직접 전군 지휘관 회의를 통해,정부의 이름을 빌려 5월 17일 0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김영삼과 김종필은 가택연금 ..김대중은 내란 선동죄로 감금시킨다.
이른바 5.17쿠데타로 불리운다..
그 뒤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광주에서는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고,5월 29일 김대중에게는 내란 선동죄,국가 보안법위반 등 죄명을
달아 사형 구형이 내려진다.3달 뒤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떄 레이건 미 대통령의 방한을 전제로 김대중은 감형에 감형을 가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이 떄 김영삼은 상도동 자택에서 정치 은퇴 강요를 받고,가택 연금에 처하게 된다.
6.5년이 흐른 1985년이 되었다.
김영삼은 벼르고 벼른 단식 농성을 하게된다.(말로만//ㅋㅋㅋ.내 홈피 게시판 구석구석을 보게되면 김영삼의 거짓된 단식 농성을 알게 될 것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른바 전두환 정권에 대한전쟁 선포였다..그는 단식 농성을 하면서 전두환에게 민주 이행을 위한 5개 권고 조항을 문서로 보내게 된다.
!.현행 헌법을 조속히 직선제로 개헌한다.
!!.감옥에 갇혀 있는 정치범들을 즉각 석방한다.
!!!.전두환 정권은 즉각 광주 문제를 사과하고 퇴진한다.
!!!!. ?
!!!!!. ?
여기서 전두환이 김영삼에게 했던 말이 유명하다.ㅋㅋ
"그 양반 단식 조금 했더니 간떙이가 배 밖으로 나 온것 아니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필자도 전두환 심정을 깊이 이해한다.ㅋㅋㅋㅋ
김영삼의 단식투쟁 소식은 숨죽여 있던 재야,정치권에 큰 방향을 몰고 왔다.과거 신민당 의원들이나 현 야당의원,재야 인사들이 다시 모여 신민당을 재건하고 그 해 2월 12 치뤄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적의원 229중 84석을 차지하여 당시 제1야당이었던 민한당을 제치고 새로운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다.전두환 정권에 대항할 만한 진짜 야당을 국민들은 지지해 주었기 떄문이다.
DJ와 YS..둘 다 못말려...
같은 민주당 출신이다...
1.김대중은 전남 목포시 해남군 출신이다..한국 전쟁떄는 인민 수용소에 감금되다가 탕출하여 자신의 고향에서 해군 의용 경비대를 창설하여 지휘하였다...전쟁이 끝나자 목포에서 운수업을 하다가 친구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1961년 강원 인제 민의원 보궐선거에 나가 3낙끝에 당선되었지만 곧 일어난 5.16떄문에 국회가 해산되자 의원 선서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자동적으로 의원직을 잃게 되었다...
김영삼은 경남 부산시 거제군 출신이다..아버지가 그 지역의 유지이며(멸치 어장?ㅋㅋㅋ)재력가이기도 하였다..부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를 나왔으며,한국 전쟁때에는 자신의 고향인 부산으로 피난해 왔다..여기서 그의 어머니가 인민군에 의해 돌아가셨기 떄문에 사상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로웠다..(썡 철저한 보수주의자?ㅋㅋ)전쟁이 끝나고 장택상 총리의 보자관으로 있던 중 1954년 부산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27살이라는 최연소 민의원에 당선되어 많은 화제를 남겼었다.(아직도 꺠지지 않는 기록.ㅋㅋ)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이승만에 대한 불만 표출로 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당으로 당적을 옯겼다..
여기서 그는 40년 야당 생활이 시작 된 것이다...
2.김대중은 1963년 목포 해남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나서부터 정치 신인으로써 각광 받았다..민주당내 장면계파로써 대변인과 청년국장 등 당의 중요 당직을 맡았고,이러한 속에서 1971년 김영삼.이철승..등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여..결국 1위 낙점자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김영삼은 민주당과 민국당의 통합 과정에서 생겨난 민주당에 입당하여 당시 당 세력을 장악하고 있던 조병옥 박사 계파에 속하였다..
그는 당 선전부장.원내 총무 등 김대중씨와 함꼐 신민당내 신인 정치인으로써 각광 받았다...그는 국회 내 서울대학교 문리대 동우회인 신풍회를 만들어 장차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데 노력하였다.여기서 그는 1967년 3선 개헌에 관련에 그 유명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다.ㅋㅋㅋㅋ
3.김대중과 김영삼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경쟁을 벌인 것이 바로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떄여서 부터이다.
1963년과 1967년 신민당 후보로 나선 윤보선씨가 공화당 박정희에게 계속 패하자 새롭고 신선한 인물을 후보로 만들여야 한다는 당내의 여론등을 업고 김대중.김영삼.이철승 등 당 내 소장파들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후보 경선에 나섰다.
1차 투표에선 과반수를 넘긴 후보가 없어,2차 투표를 하였다..
여기서 김대중은 이철승에게 대선 승리 후 당권을 분담하겠다는 조건으로 단일 후로로 합의 결국 김대중씨가 김영삼씨를 근소한 차로 리드..1971년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지명 받았다.
여기서 두 라이벌의 앙금의 벽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71년 4월 부산 유세때 김영삼씨가 배석한 자리에서..김대중 후보가 "여기 나와 있는 김영삼군에게.."이말이 두 라이벌의 앙금의 씨앗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ㅎㅎㅎㅎㅎㅎㅎㅎ
또 한 거제 유세에서는 김영삼이 찬조 연설에서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는 반드시 이 김영삼이가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오고야 말겠다,.," 참 쓸데없는 말들 많이 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이와같은 선전?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후보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게 90만표의 근소한 차로 낙선하게 된다..
4.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김대중에게는 암울한 인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여당은 선거 결과를 보고 김대중을 잠재적 정권 위협자로 보고 선거법위반죄로 구속,동경 납치,연금 등 온갖 정치적 탄압을 당하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죽음과 함꼐 연금이 해제 되었다.
김영삼은 차기 대통령 선거를 내다 보며 백의 종군을 하고 있다가
1972년 유신 선포와 함꼐 그의 꿈은 날라가 버렸다,.ㅋㅋㅋㅋ
여기서 그의 반독재 운동이 시작된다....
1973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국회에 입성하고 그 해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이철승 계열을 압도적인 표차로 따돌리며 총재에 당선되었다..총재에 당선된 직 후 박정희 유신에 대해 강경하게 나감으로써 초산테러 등 갖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1976년 총재 경선에는 유신에 온건적인 이철승계열에 패하고 .2년뒤 총재 경선에 다시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로 당선되었다.
1979년 미국 시사 주간지 뉴욕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미국은 인권탄압을 자행하는 박정희 정권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고,신민당 당사안에서 농성중인 YH여공들을 보호하다가 경찰의 진입과정에서 구타를 당하고,친미 사대주의자다,국가 원수모독죄라 몰아..결국 임시 국회에서 공화당.유신 정우희 의원들만 참여한 가운데 김영삼 국회의원 의원제명 결의안을 통과 시켰다..이 일로 인하여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마산에서 대규모 반독재 항쟁이 일어났으며,결국 1달만에 박정희 대통령이 죽음으로써,막을 내리게 되었다.
5.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에서 부.마 항쟁 등 정국 해결방안을 놓고 차지철과 김재규가 갈등을 하는 동안 뜻하지 않게 박정희 대통령이 그토록 믿었던 중정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실상 유신의 종말을 알리는 총소리였던 것이다.
그 해 12월 12일 군부내 몇몇 박 대통령 추종자였던 전두환.노태우 등 하나회 출신 장군들이 정승화 계엄 사령관을 체포하는 등 쿠데타 사건이 발발하였다.이들은 이떄까지만 하더라도 군부의 실권만 잡고 있었지 정치권에는 별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이 떄 나선것이 김영삼.김종필.김대중 3김들이었다.
이들은 박대통령 사후,헌법을 직선제로 개헌하고 대통령에 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러나 이들의 구상은 빛나가고 있었다.1212이 후 서서히 권력집단으로 떠오르고 있는 이른바 신군부 세력을 너무 과소 평가 하고 있었기 떄문이다.설마하니 군부가 다시 나오겟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딴 사람은 생각은 없는데 김칫국부터 먹는 생각일로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1980년 봄..이른바 전국에는 서울의 봄이라는 자유의 봄이 피어나기 시작하였다.과도체제로 성립된 최규하정부는 그 해 3월 긴급조치9호를 해지 시켰고,전국의 대학교에는 유신떄 강제로 폐지 되었던 학생회가 자율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러한 이떄 3김은 오로지 권력의 정점만을 생각하며 자기만의 환상에 빠져 있었다..
처음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신민당에 입당하여 당내 경선을 통하여 대통령 후보를 지명 받자고 제의 하였지만,당내에 자신의 기반이 전혀 없었던 김대중은 이 제의를 거절하였다.
이렇게 허송세월만 보내게 되고,결국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요구만 전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게 되었다.
신군부는 이 떄다 싶어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통한 사회 혼란을문제 삼아 .군이 직접 전군 지휘관 회의를 통해,정부의 이름을 빌려 5월 17일 0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김영삼과 김종필은 가택연금 ..김대중은 내란 선동죄로 감금시킨다.
이른바 5.17쿠데타로 불리운다..
그 뒤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광주에서는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고,5월 29일 김대중에게는 내란 선동죄,국가 보안법위반 등 죄명을
달아 사형 구형이 내려진다.3달 뒤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떄 레이건 미 대통령의 방한을 전제로 김대중은 감형에 감형을 가해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이 떄 김영삼은 상도동 자택에서 정치 은퇴 강요를 받고,가택 연금에 처하게 된다.
6.5년이 흐른 1985년이 되었다.
김영삼은 벼르고 벼른 단식 농성을 하게된다.(말로만//ㅋㅋㅋ.내 홈피 게시판 구석구석을 보게되면 김영삼의 거짓된 단식 농성을 알게 될 것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른바 전두환 정권에 대한전쟁 선포였다..그는 단식 농성을 하면서 전두환에게 민주 이행을 위한 5개 권고 조항을 문서로 보내게 된다.
!.현행 헌법을 조속히 직선제로 개헌한다.
!!.감옥에 갇혀 있는 정치범들을 즉각 석방한다.
!!!.전두환 정권은 즉각 광주 문제를 사과하고 퇴진한다.
!!!!. ?
!!!!!. ?
여기서 전두환이 김영삼에게 했던 말이 유명하다.ㅋㅋ
"그 양반 단식 조금 했더니 간떙이가 배 밖으로 나 온것 아니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필자도 전두환 심정을 깊이 이해한다.ㅋㅋㅋㅋ
김영삼의 단식투쟁 소식은 숨죽여 있던 재야,정치권에 큰 방향을 몰고 왔다.과거 신민당 의원들이나 현 야당의원,재야 인사들이 다시 모여 신민당을 재건하고 그 해 2월 12 치뤄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적의원 229중 84석을 차지하여 당시 제1야당이었던 민한당을 제치고 새로운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다.전두환 정권에 대항할 만한 진짜 야당을 국민들은 지지해 주었기 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