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콕토(Jean Cocteau)-예술의 천재

재희2006.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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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 aime le bruit de la mer(나의 귀는 소라 껍질)           Mon oreille est un coquillage(바닷물 소리를 그리워한다)    
     경쾌하고 신기하고 때로는 신비하기까지 한 시나 소설을 써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하고 한편 즐겁게 하기도 한 장 콕토jean Cocteau(1889~1963)는 한때는 20세기 초반 문단의 총아로, 유럽은 물론 이웃 나라 일본이나 우리나라 독자에게도 친숙한 작가이다.

 특히 그는 영화 , 와 등의 제작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파리의 명문 가정 태생으로, 조숙하여 어린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20세 전후에 이미 세 권의 시집을 내어 문단과 일반의 주목을 끌었다. 그는 조숙할 뿐 아니라 실재로 다재다능하여 문필 뿐만 아니라 미술, 조각, 연극, 영화, 발레 등 열 손가락에 이르는 예술 방면에서 창작 활동을 했고, 그의 작품들은 나올 때마다 화제가 되었고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의 재능과 취미는 다방면에 걸쳤으나 본령은 어디까지나 시였다. 그가 손을 댄 모든 예술 양식은 그의 중심 사상인 시 정신의 표현 수단이라고 그 자신이 말해왔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시집으로 , , 등을 발표하고, 이 시기 이후에 그는 상당히 긴 공백 기간을 이용하여 소설, 수필, 연극, 영화, 데생 등에 몰두했다. 다방면에 걸친 마술사 같은 그의 재간은 실로 종횡무진하여 전기의 활동 외에도 교회의 내부 장식, 색종이로 붙인 회화, 러시아 발레에서 샤넬의 의상 고안까지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1941년에 다시 시단으로 돌아와 , , , , 등의 시집이 발표되었다. 그의 시풍은 시집마다 경향을 달리하여 각각 전위적, 미래적, 초현실적, 환상적, 주지적, 고전적 등등의 평을 받았으나, 본인은 시에 필요한 것은 시 정신이지 유파가 아니라고 응수했다. 그런데 이라는 시집은 이상하게도 죽음의 찬가다.

콕토는 60이 훨씬 넘어서도 그의 정신의 젊은과 시 정신은 변치 않았다. 새로운 것, 이상한 것, 마적인 것에 대한 추구는 계속 다방면에서 추구되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좀더 평온해지고 좀더 신비적인 것으로 기울어진 점이다. 이 시기의 시집으로서는 , 이 있다.

이 유행과 신기의 추구자는 1955년 프랑스 문예의 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어 다시 한 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그의 여러 방면에 걸친 많은 작품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많은 것이 망각의 세계에 묻히고 말았다. 100편이 넘는 작품 가운데 10여 편의 작품 또는 제작이 그의 걸작으로 인정되고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상당한 일이다.

다재다능하고 카멜레온같이 변화무쌍한 그는 당대에 유례없는 오해와 비난을 받았다. 경방, 피상은 물론, 앙드레 브르통 같은 시인은 그를 한때 사기사로 혹평했다. 그러나 차츰 그의 가치를 공정하게 인정하고 그의 독창적인 위치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생겼다.

즉 피상적인 허구와 단순한 말장난으로 보이는 많은 그의 작품의 표면 뒤에 진정한 시인, 날카로운 지성의 시인을 발견하고, 화려하게 보이는 이 예술의 곡예사가 사실은 늘 고독과 허무와 죽음의 깊은 늪을 보아온 심각한 작가라는 것이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시인이란 그가 말한 대로 "참다운 시인은 죽은 사람과 같아 산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가 진실이었는지 모른다.

'지붕 위의 황소'라는 카바레의 주인에서부터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짧으나마 경건한 카톨릭 신자가 되기도 한 콕토는 실로 복잡하고 모순되고 항상 변하고 알 수 없는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자신도 자신을 몰랐는지 혹은 숨겼는지 모른다. "나는 항상 진리를 말하는 허위이다"라고도 했고, 또 "나는 낙관적인 비관론자다"라고도 했으니까......

 

  장 콕토(Jean Cocteau)-예술의 천재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리 부르조아 출신의 젊은 장 콕토가 발레를 감상한 후 디아길레프를 찾아가 자신도 발레곡을 쓰고 싶노라 말했다. 그러자 러시아의 이 천재 발레 프로듀서이자 니진스키의 삶을 뒤흔든 대단한 호모인 디아길레프는 다소 거만하게 말했다.

"나를 놀래켜보게 Etonne-moi."

아마도 디아길레프는 장 콕토가 후에 자신보다 훨씬 더 유명해지리라는 사실을 그 순간 짐작이나 했을까? 나중에 장 콕토는 디아길레프가 자신에게 이때 던진 '나를 놀래켜보게'라는 말을 '오르페우스' 등의 희곡 대사로 즐겨 사용하게 된다.

장 콕토는 1, 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식자층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집약하는 독특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발레곡, 희곡, 소설, 영화 등 그의 능력을 다방면에서 확인한 놀라운 천재임에 분명할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후대 작가들에게 기묘한 상상력의 원천을 제공하고 있다.

에릭 사티, 디아길레프와 연결된 발레곡, 당대 한창 창궐하던 초현실주의적인 연극, 피카소와의 우정, 그의 몽환적인 삽화들, 케네스 앵거 등의 전위 작가에게 영감을 부여한 그의 실험적 영화들, 평생의 친구이던 에디트 삐아프와 같은 날 함께 죽은 운명 등 소위 장 콕토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사 '그의 삶이 곧 예술이다!'를 증명하듯, 그의 인생은 화려한 파노라마로 점철되어 있다.

또 장 콕토는 게이였다. 그의 패션 감각은 당시 프랑스 패션을 선도할 만큼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사람들은 재즈가 고요히 흐르는 30년대 씨시 바에 가만히 앉아 담배를 피우며, 춤을 추는 세일러 복의 해군을 감상하는 그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많은 데생 작품들 중에는 당시 해군들에 관한 것들이 많다.

장 콕토(Jean Cocteau)-예술의 천재

또 처녀작 '시인의 피'를 비롯한 그의 영화들은 신화적 원형에 호모 에로티시즘이 채색된 가장 훌륭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장 콕토의 평생 애인은 두 명이었다. 첫 번째 애인은 20살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작가인 레이몽 라디게.

장 콕토(Jean Cocteau)-예술의 천재

천재로 소문이 자자하던 라디게를 장 콕토가 만난 건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였다. 라디게는 16세였다. 장 콕토는 첫눈에 라디게에게 반하고 말았다. 콕토는 당장 라디게에게 줄 반지를 주문 제작했다. 세 가닥으로 꼬여진 '삼환반지', 세상에서 가장 많이 복사되었다는 그 유명한 반지가 바로 라디게와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장 콕토가 제작한 것이다.

장 콕토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라디게는 2년 여에 걸쳐 그의 짧은 필생의 역작인 '육체의 악마'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곧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신고전주의를 대변하는 역작으로 열렬히 환영받았고, 후에 장 콕토의 작품 세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잦은 음주와 피폐한 생활로 레이몽 라디게는 스무 살 나이에 장디푸스로 죽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던 장 콕토는 심한 자기 학대와 아편에 빠져 버렸고, 결국 요양원에 실려가고 말았다.

장 콕토는 라디게를 열렬히 사랑했지만, 그는 자신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내 손의 하늘이 당신을 보호한다'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라디게를 줄곧 따라다니며 그를 즐겨 그렸던 장 콕토의 삽화는 그에 대한 애정이 애틋하게 묻어 있다. 그는 잠자는 라디게 삽화 밑에 '내 손의 하늘이 당신을 보호하다'라고 적어 놓았던 것이다.

장 콕토(Jean Cocteau)-예술의 천재
장 콕토(Jean Cocteau)-예술의 천재

만일 철학자 마르탱이 요양원으로 찾아가 그를 카톨릭으로 인도하지 않았다면 장 콕토의 인생은 거기에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잠시 카톨릭에 귀의했던 장 콕토는 그 속에서 신화적 모티브를 찾아냈고, 이후 그의 작품 세계는 보다 더 비의적으로 변해갔다. 라디게를 그리워하며 써내려갔던 그의 걸작 소설 '무서운 아이들'과 그 소설 모티브가 일부분 차용된 영화 '시인의 피'의 일부분은 라디게에게 바치는 그의 사랑의 소네트였다.

이후 왕성하게 창작 활동에 몰입하던 장 콕토에게 다시 사랑이 찾아온 것은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26세의 마르셀 킬, 그가 바로 콕토의 두 번째 남자였다.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던 마르셀 킬은 콕토에게 마약과 사랑 둘 다를 충족시켜줬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 영감까지 부여한 걸로 알려져 있다. 빈센트 킬은 콕토에게 그의 평생의 멋진 마지막 모험을 선사하기도 했다. 80일간의 세계 여행.

'80일간의 세계 일주'로 유명한 쥘 베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던 해 마르셀 킬은 콕토에게 재미있는 제안을 하게 된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의 주인공처럼 세계를 일주해보자는 거였다. 콕토는 이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현지에서 소식을 바로 글로 써서 보낸다는 조건 하에 그는 '파리-수아르'라는 잡지사에서 후원을 얻어냈다.

실제로 이 여행에서 콕토와 킬은 각각 필리어스 포그와 파스파르투 역을 맡고 있다. 당시 46세였던 콕토는 내기의 주체였고, 26세의 마르셀 킬은 여행에 수반되는 실질적인 흥정, 환전, 운반 등 육체적 힘이 필요한 하인의 역할을 맡았다. 예술가 입장에서 세계 곳곳의 광경을 음미하는 '80일간의 세계 일주' 곳곳에 마르셀 킬에 대한 애정이 또한 녹록치 않게 배어 있는 건 당연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게이임을 떳떳하게 공언하고 다닌 콕토이니만큼 그의 곁에는 남자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그의 평생의 연인은 단연 레이몽 라디게, 그리고 마르셀 킬이었다.

평생을 예술과 함께 살아온 장 콕토는 연애마저도 다소 드라마틱했으며 그의 삶이 하나의 멋진 향연이자 즐거운 퍼포먼스였음을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장 콕토(Jean Cocteau)-예술의 천재

74세에 나이로 죽기 전까지도 한 성당의 실내 장식을 하던 콕토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랑스 샹송의 대모인 에디트 삐아프가 죽은 몇 시간 후에 유명을 달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