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시네. 중학교 진학조차 어려웠던 가난한 시골집을 반지하나 훔쳐서 도망나온 뒤로 평생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일하고, 일하고 공부하면서 살아오신 우리 아버지.. 이제 늙어 세상으로부터 정년퇴임하신 아버지가 마룻바닥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시네. 차가운 바닥에 앉지 말고 소파에 올라앉으시라고 해도 "이게 더 편해" 하며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시네. 전에는 권투와 축구 중계가 아니면 뉴스만 보시던 아버지. 연속극 보면서 어머니가 훌적훌쩍 우시면 혀를 차면서 '텔레비전 망국론' 을 펴시던 우리 아버지가, 이제는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고개를 약간 젖히고 연속극에 정신을 팔고 계시네. 저 여자는 이러니저러니 저 남자는 어떠니저떠니 혼잣말로 중얼거리시기까지 하네. 연예인들 사생활 소식을 줄줄이 꿰고 계신 어머니가 뭐라 설명을 하시면 귀를 쫑긋 세우면서 관심까지 기울이시네. 한번은 "뉴스 안 보세요?" 하고 여쭙자, 아버지는 체념한 듯 달관한 듯 대답하셨네 "봐야 뭐 혀,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들인걸." 지난 명절때 뵈니 삼십 년을 한결같이 보던 신문마저 끊으셨네. 은근히 걱정되어, "그래도 신문은 계속 보시지 그러세요?" 하고 여쭈니, 또 체념한 듯 달관한 듯 대답하시네. "이젠 신문 봐야 눈이 어두워서 눈물만 흐른다." "그래도 소일거리 삼아 그냥 보시지요? 심심하고 갑갑하지 않으세요?' "갑갑하기는... 마음이 한결 편키만 하다. 그놈의 신문, 순 거짓말이거나 나랑 상관없는 애기뿐인걸. 그동안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산 것도 억울혀." "언제는, 연속극이 순 거짓말이고 사는 거랑은 상관없는 애기뿐이라더니?" 어머니가 뒷동을 다시자, 아버지는 그야말로 도사연하게 말씀하시네. "젊었을 땐 정말 그런 줄 알았지. 그러나 살아 보니까 꼭 그런것만도 아니데.. 뉴스나 신문이야말로 말짱 헛것이었고, 연속극이 진짜 내 애기더라구. 이젠 뉴스를 보면 말이여, 뉴스야말로 일일연속극 같어. 안 봐도 뻔한 애길 하지 않나, 그게 그놈인 것들이 매양 역할 바꿔서 등장하질 않나, 우리 같은 서민들 생각은 반영하지 못한 채로 번드르르한 말만 늘어놓지를 않나." by. 이만교 님 (소설가) - 좋은생각 4월호 中 -
연속극 보는 아버지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시네.
중학교 진학조차 어려웠던 가난한 시골집을 반지하나 훔쳐서 도망나온 뒤로
평생을 부지런히 공부하고 일하고, 일하고 공부하면서 살아오신 우리 아버지..
이제 늙어 세상으로부터 정년퇴임하신 아버지가 마룻바닥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시네.
차가운 바닥에 앉지 말고 소파에 올라앉으시라고 해도 "이게 더 편해" 하며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시네.
전에는 권투와 축구 중계가 아니면 뉴스만 보시던 아버지.
연속극 보면서 어머니가 훌적훌쩍 우시면
혀를 차면서 '텔레비전 망국론' 을 펴시던 우리 아버지가,
이제는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고개를 약간 젖히고 연속극에 정신을 팔고 계시네.
저 여자는 이러니저러니 저 남자는 어떠니저떠니 혼잣말로 중얼거리시기까지 하네.
연예인들 사생활 소식을 줄줄이 꿰고 계신 어머니가 뭐라 설명을 하시면
귀를 쫑긋 세우면서 관심까지 기울이시네.
한번은 "뉴스 안 보세요?" 하고 여쭙자,
아버지는 체념한 듯 달관한 듯 대답하셨네
"봐야 뭐 혀,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들인걸."
지난 명절때 뵈니 삼십 년을 한결같이 보던 신문마저 끊으셨네.
은근히 걱정되어, "그래도 신문은 계속 보시지 그러세요?" 하고 여쭈니,
또 체념한 듯 달관한 듯 대답하시네.
"이젠 신문 봐야 눈이 어두워서 눈물만 흐른다."
"그래도 소일거리 삼아 그냥 보시지요? 심심하고 갑갑하지 않으세요?'
"갑갑하기는... 마음이 한결 편키만 하다. 그놈의 신문, 순 거짓말이거나
나랑 상관없는 애기뿐인걸. 그동안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산 것도 억울혀."
"언제는, 연속극이 순 거짓말이고 사는 거랑은 상관없는 애기뿐이라더니?"
어머니가 뒷동을 다시자, 아버지는 그야말로 도사연하게 말씀하시네.
"젊었을 땐 정말 그런 줄 알았지. 그러나 살아 보니까 꼭 그런것만도 아니데..
뉴스나 신문이야말로 말짱 헛것이었고, 연속극이 진짜 내 애기더라구.
이젠 뉴스를 보면 말이여, 뉴스야말로 일일연속극 같어.
안 봐도 뻔한 애길 하지 않나, 그게 그놈인 것들이 매양 역할 바꿔서 등장하질 않나,
우리 같은 서민들 생각은 반영하지 못한 채로 번드르르한 말만 늘어놓지를 않나."
by. 이만교 님 (소설가) - 좋은생각 4월호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