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렌징 크림으로 얼굴을 지우고 나면 얼굴을 뽀독 거리게 씻어줄 폼클렌징이 충분히 있어야 하는데 여자 넷이 사는 집에서 폼클렌징이란, 보리차 사라지듯 꿀꺽꿀꺽 들어가 버린다. 330밀리리터의 싸구려 폼클렌징은 일주일도 못가 끝 부분이 너덜거리기 시작한다. 가끔 바람빠지는 소리와 함께 자기의 수명이 끝나감을 서러워 하며 꺼이꺼이 운다. 그래봤자 며칠 가겠지, 라고 생각하며 개념없는 여자 네명은 폼클렌징을 도저히 바꿀 생각을 안한다.
그러다 어느날, 바람빠지는 소리가 아주 심해지면서 극소량의 폼클렌징이 툭 떨어져 버렸다. 누군가 사다 놓겠지. 우습게도 여자 네명은 모조리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씻는 시간은 두려워진다.
나의 오장육부를 뒤틀리게 하는 건 이제, 그 비닐 재질의 폼클렌징에 많은 힘을 주어 비틀어 대야 두어방울, 선심쓰듯 떨어지는 그 액체 자체이다. 비참하게도 난 터져나오려는 욕설을 잠시 까맣게 잊고 그 두어방울에 감사해 한다.
역시 요즘 얼굴 작게 하는 마사지를 하길 잘했어. 얼굴이 아주 반쪽이 되었잖아. 이정도 거품이면 충분하지. 라며 씻고 뜨거운 물로 한번 더 씻어내고 찬물로 마무리 한다. 두어방울에 감사하자고 생각하고 나서야, 그 씻어 내 버릴 것에 많은 힘을 쏟아 부은 내 팔뚝이 시야에 들어온다.
혼자 살 땐, 조금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소리는 -앞으로 폼클렌징을 한달동안 더 쓸 수 있겠습니다- 라는 메시지 였으니까.
사람이 많으니 폼클렌징을 대용량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는 조심스런 제안을 했다. 그건 싫단다. 요새 오렌지 맛의 폼클렌징을 아주 좋아하는데 대용량의 폼클렌징에는 절대 없단다. 썩을것들.
순간, 폼클렌징 속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정로환 한통을 잘게 부숴넣어 섞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면 앞으로는 대용량의 무난한 폼클렌징을 군말없이 사다 놓지 않을까.
그냥 내가 하나 사다 놓으면 되는데 공연한 심술이 나를 부추긴다. 누군가가 사다 놓을거야. 굳이 같이 쓰는데 내 돈 쓸 필요가 있겠어. 하는 생각.
씻는건 두려운데 우습게도 그놈의 화장질은 멈출줄을 모른다. 요새는 가격이 많이 내려가서 5천원 정도면 오렌지 맛은 아니더라도 무난한 거 사서 조금 오래 쓸 수도 있는데 그돈이 도대체가 지갑에서 나오지를 않는단 말이다.
오늘도 도서관으로 가다가 화장품 가게에서 매니큐어만 다섯번 정도 발라보고 나온다. 뒤에서 뭐라고 씨부렁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작자들아, 그러면 샘플을 만들지를 말던가. 웃겨 아주.
***
며칠동안, 폼클렌징이 부족해 씻을때마다 받는 스트레스와 별일이 없는데로 화장을 하고 부득부득 밖으로 나가려는 의지 사이의 그 극심한 모순 속에서 나는 드디어 결심했다. 그래, 남들이 죽을때 까지 오렌지 맛 폼 클렌징을 쓰든 말든, 나는 내가 좋아하는 폼클렌징을 사서 쓰기로 하고 750 밀리리터의 중대용량 폼클렌징을 덜커덕 사버렸다.
가격은 그냥 그렇고, 디자인 역시 투박스럽고, 휴대하기에는 엄청나게 큰 크기이지만 잘 씻기고, 결정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이어서 결정했다.
'스킨맛'은 나 혼자 몇년째 주장하는 가장 좋아하는 화장품의 '맛' 이었다. 어느 회사건 한약재를 섞은 상품이 아닌 다음에야 스킨맛은 모든 회사의 베이직이다. 쉽게 말하자면, 소주와 비누를 섞은 그런 향기랄까.
그런 연유로 소주를 죽도록 마신 다음날은 스케쥴이 어떻든 말든 스킨을 바르다 토하기 일쑤였다. 그런 동일한 향의 스킨에 녹차도 넣고, 포도도 넣고, 오렌지도 넣는 것이다.
결국은 스킨이란 맛은 하나라는 결론에 이르른, 나란 인간은 스킨맛의 광신도이다. 아, 그렇다고 소주와 비누향을 섞어서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회사에 첨가물이 섞이지 않은 그 스킨맛 폼클렌징에 열광한다. 폼클렌징의 포장을 뜯어 냄새를 맡아보니 역시 그향기이다. 그 폼클렌징은 너무 커서 쥐어짜기도 힘들다.
기분이 무게만큼 살포시 좋아진다. 문득, 집으로 가면서 330밀리리터 짜리 허접한 비닐소재의 폼클렌징을 확 쥐어짜 보고 싶었다. 음, 우리는 어쩌면 오렌지 맛- 보다는 그 허접 비닐소재를 쥐어짜는 맛에 그 폼클렌징을 사용했던 것일수도 있겠다.
뽀독 거리는 느낌때문에 아주 개운했다. 그리고 향기 때문에 아찔했다. 며칠동안 몇방울의 폼클렌징때문에 공연한 열병을 앓았던 나의 기분은 아주 날아갈 것 같았다.
새로운 향기를 피부속에 촉촉 배어들게 한 다음 스킨 다섯방울을 손바닥에 톡톡 떨어뜨려 얼굴에 펴발랐다. 알싸한 느낌이 내 머리를 약간 띵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취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
얼굴 닳겠다며 내가 씻는 것을 보는 그가 말한다. 닳아 없어지라지. 왜 맨날 씻어낼 거면서 또 화장하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어차피 죽을건데 왜사냐고. 더이상의 정답은 없었다.
나는 씻는 것도, 화장하는 것도 광적으로 열심히 했다. 그래야만 했다. 나에겐 아주 독특한 향기가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내 향기는 얼굴에 덧대는 화장품에서 나는 향기가 아닌, 보통 몸매좋은 생머리 여자들이 보유한다는 샴푸냄새도 아닌, 깨끗하게 씻어버린 뒤의 무식하고도 강한 스킨맛 폼클렌징의 향기였다.
그 단순한 스킨맛 비누를 바르고 화장품 향기를 덧 입히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영화보러 가는 사람, 술마시는 사람, 도서관 같이 가는 사람, 밥 가끔 먹는 사람, 모두 달랐다.
그 중 한 사람이 내 폼클렌징에 '향기'를 부여했다. 그 뒤로 그 스킨맛 폼클렌징은 나를 강하게 자극하는 특별한 것이 되어버렸다.
꼭 여행을 가거나 다른 곳에서 잘 기회가 생길 때를 대비해 폼클렌징을 가지고 다녔다. 먹고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오렌지나 딸기맛은 딱 질색이었다.
향기에 의미를 부여한 스킨맛은 그냥 스킨일 수가 없었다. 약간 상큼하면서도 톡 쏘는 스킨향은 정말이지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의 비누향과 나의 폼클렌징 향은 같았고, 그닥 곱지 않은 나의 피부를 감싸는 나의 향기를 그는 늘 좋아해 주곤 했다. 하루종일 밖에 나가지 않아도 방 안에는 그 향기를 채우고 싶어 얼굴이 마르고 닳도록 몇 번이나 씻고 뒹굴었다. 나를 메이크업 베이스와 파운데이션 속에 가두지 않고 향기를 내뿜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
도서관에 패션쇼 하러 가냐고 묻는다. 한번 피식 웃고 세번째 마스카라를 덧 입힌다. 예나 지금이나 펄은 사양이다. 아무리 격조 높은 색깔이라고 해도, 눈가를 반짝이게 만드는 건, 눈물같아 아무래도 슬프다.
굳이 나갈 일이 없을 땐 집에 얌전히 앉아 공부에 몰두할 것인데 무슨 연유인지 꼭 부산을 떨며 책을 챙기고 반드시 화장을 하고 옷을 다섯번은 바꿔가며 도서관으로 반드시 가야만 한다고 우겨본다.
고약한 역마살이다.
집에서 꼬질거리는 모습으로 책을 보다가 침대의 유혹에 빠져 낮잠을 자는건 휴식이 아니다. 정말 게을러서 퍼질러 자는거다.
얼굴을 하얗게 만드는 데에는 쌀뜨물이 최고라고 해서 쌀뜨물까지 얼굴에 끼얹다 보니 얼굴에 하는 나의 행동은 점점 복잡해지고 정교해 지고만 있다. 립글로즈까지 바르고 나서 가방을 들고 나갈 채비를 한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참 많이도 변했다. 피식 웃는다. 변해버렸어. 더 변할거야. 당신은 나를 절대 기억하지 못해. 나를 알아보지 마.
언니, 가면을 써라, 뭘 그렇게 덕지덕지 처 발랐냐. 라고 묻는 동생에게 나는 한결같은 대답 뿐이다. 죽을걸 알면서 열심히 살잖냐.
***
호텔안에 구비된 폼 클렌징으로 얼굴을 씻었다. 나는 더이상 스킨맛 폼 클렌징을 휴대하지 않는다. 호텔에도, 여느 찜질방에도, 여느 편의점에도,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스킨맛 폼클렌징은 그 모습 그대로 가장 기본적인 모습으로 어디에나 있다.
보고싶었어.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한다. 왜 바빠 죽겠는 내 앞에 몇달동안 연락도 없다가 네 마음대로 나타나 보고싶다는 말로 나를 농락하는지 묻고싶었지만 그도 이유를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맥주를 한병씩 나누어 마시고 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같은 향기가 난다고, 간신히 그가 한마디 떼어놓는다.
이건 나의 비누가 아닌데, 내가 늘 쓰던 폼클렌징이 아닌데, 다른데에서도 내 향기를 내 뿜을 수 있구나, 그는 다른 곳에서도 내 향기를 맡을 수가 있었겠구나, 그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디서든 나를 기억하겠단 말이었을까,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나는 도처에 널려있는 그런 다른 폼클렌징과 다를게 없었단 소리일까, 후. 이런 편협한 사고를 하는 내가 싫다.
분명 우리는 엇갈렸었지. 기약없는 기다림으로 지쳤고, 약속할 수 없는 미래로 두려워 했고, 그 미래로 함께 걸어가기를 두려워 하며 떠났던 그는 나를 겨우 향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로망에 흔들려 버리기엔 나는 너무 짙은 화장에 익숙해 져 버렸고 여러가지 맛의 폼클렌징에 길들여져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이란, 나 역시 간신히 할 수 있는 말이란. 이제, 이런향기는 어디서나 맡을 수 있어. 라는 웃기는 한마디 뿐 이었다.
내겐 특별했던 향기가 어느곳에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잔인하기도 하다. 그 어디에나 있는 그것이 특별하다고 착각했고, 그 향기를 나만의 향기로 착각한 나도 그렇지만. 그도 그 맛을 내 맛으로 기억한다. 그도 착각했다. 그래서 한때는 눈과 코와 귀와 입이 모조리 멀었었다.
아직까지도 특별하게 기억해 준다면야 상관없지만 이젠 그 타이밍이 지나버렸다. 그것은 그냥 지나간 흔한 향기일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향기든 다 섞어버릴 수가 있다.
이제 이 향기엔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부여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향기란, 저질스런 작업수단의 하나로 전락해 버렸을 뿐이다.
***
며칠 뒤, 무심코 집어든 폼클렌징은 너무 가볍다. 이거 누가 썼어, 다들 오렌지맛 쓴다고 해서 내가 사다놨더니 치사하게 이것도 쓰냐, 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스킨맛 폼 클렌징은 우리집 여자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난 쓰지 말란 말을 한 적이 없었고, 그 곰같은 크기의 폼 클렌징은 욕실 한 가운데에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자리에 놓여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거기다 대고 파렴치한 폼클렌징 도둑들 하면서 길길이 날뛰기에는 욕실에 놓은 스킨맛 폼클렌징은, 너무 착하게 그자리에서 우리집 여인네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흔하니까, 그들도 그 향기를 가질 권리가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당장이라도 내다 버리고 싶었지만 아직 바람빠지는 소리가 나려면 한참 먼 것같다. 큰 걸 사길 잘했어. 그치만, 곧 싫증이 나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랬지. 스킨맛이란, 무엇을 섞어놓으면 그 맛이 되어버리는 가장 기본적인 맛이더랬지. 그는 나를 건드린적이 없어. 내 스킨맛을 그대로 두었던 유일한 사람. 어떤식으로 변형시켜보아도, 키위맛 속에는 스킨맛이 녹아 들어갈수 밖에 없다는 걸. 다음에는 새로 나왔다는 상백피던가, 그걸 한번 써 봐야겠다.
短-스킨맛 폼 클렌징
단편-스킨 맛 폼 클렌징
**
1.
스킨을 바른다.
로션을 바른다.
영양크림을 바른다.
선크림 혹은 선밤을 바른다.
메이크업 베이스를 바른다.
파운데이션을 바른다.
압축 파우더를 바른다.
선택사항에 따라 파우더로 톡톡 두들겨준다.
취향에 따라 마스카라, 아이라인,
립스틱, 립글로즈, 펄, 등등등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2.
일상생활
3.
클렌징 크림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화장솜(경우에 따라 엠보싱 휴지)으로 닦아낸다.
뜨거운 물로 한번 씻는다 .
폼클렌징을 꽉 짜 거품을 내 얼굴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비벼준다.
뜨거운 물로 한번 더 헹군다.
쌀뜨물, 녹차, 등등등 다른 선택사항에 따라 얼굴을 마사지 한다.
한번 더 헹군다.
찬물로 헹군다.
수건으로 토닥토닥.
***
나는 어느정도의 겹이 입혀진 화장을 했다.
클렌징 크림으로 얼굴을 지우고 나면 얼굴을 뽀독 거리게 씻어줄 폼클렌징이 충분히 있어야 하는데 여자 넷이 사는 집에서 폼클렌징이란, 보리차 사라지듯 꿀꺽꿀꺽 들어가 버린다. 330밀리리터의 싸구려 폼클렌징은 일주일도 못가 끝 부분이 너덜거리기 시작한다. 가끔 바람빠지는 소리와 함께 자기의 수명이 끝나감을 서러워 하며 꺼이꺼이 운다. 그래봤자 며칠 가겠지, 라고 생각하며 개념없는 여자 네명은 폼클렌징을 도저히 바꿀 생각을 안한다.
그러다 어느날, 바람빠지는 소리가 아주 심해지면서 극소량의 폼클렌징이 툭 떨어져 버렸다. 누군가 사다 놓겠지. 우습게도 여자 네명은 모조리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씻는 시간은 두려워진다.
나의 오장육부를 뒤틀리게 하는 건 이제, 그 비닐 재질의 폼클렌징에 많은 힘을 주어 비틀어 대야 두어방울, 선심쓰듯 떨어지는 그 액체 자체이다. 비참하게도 난 터져나오려는 욕설을 잠시 까맣게 잊고 그 두어방울에 감사해 한다.
역시 요즘 얼굴 작게 하는 마사지를 하길 잘했어. 얼굴이 아주 반쪽이 되었잖아. 이정도 거품이면 충분하지. 라며 씻고 뜨거운 물로 한번 더 씻어내고 찬물로 마무리 한다. 두어방울에 감사하자고 생각하고 나서야, 그 씻어 내 버릴 것에 많은 힘을 쏟아 부은 내 팔뚝이 시야에 들어온다.
혼자 살 땐, 조금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소리는 -앞으로 폼클렌징을 한달동안 더 쓸 수 있겠습니다- 라는 메시지 였으니까.
사람이 많으니 폼클렌징을 대용량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는 조심스런 제안을 했다. 그건 싫단다. 요새 오렌지 맛의 폼클렌징을 아주 좋아하는데 대용량의 폼클렌징에는 절대 없단다. 썩을것들.
순간, 폼클렌징 속에 고약한 냄새가 나는 정로환 한통을 잘게 부숴넣어 섞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면 앞으로는 대용량의 무난한 폼클렌징을 군말없이 사다 놓지 않을까.
그냥 내가 하나 사다 놓으면 되는데 공연한 심술이 나를 부추긴다. 누군가가 사다 놓을거야. 굳이 같이 쓰는데 내 돈 쓸 필요가 있겠어. 하는 생각.
씻는건 두려운데 우습게도 그놈의 화장질은 멈출줄을 모른다. 요새는 가격이 많이 내려가서 5천원 정도면 오렌지 맛은 아니더라도 무난한 거 사서 조금 오래 쓸 수도 있는데 그돈이 도대체가 지갑에서 나오지를 않는단 말이다.
오늘도 도서관으로 가다가 화장품 가게에서 매니큐어만 다섯번 정도 발라보고 나온다. 뒤에서 뭐라고 씨부렁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작자들아, 그러면 샘플을 만들지를 말던가. 웃겨 아주.
***
며칠동안, 폼클렌징이 부족해 씻을때마다 받는 스트레스와 별일이 없는데로 화장을 하고 부득부득 밖으로 나가려는 의지 사이의 그 극심한 모순 속에서 나는 드디어 결심했다. 그래, 남들이 죽을때 까지 오렌지 맛 폼 클렌징을 쓰든 말든, 나는 내가 좋아하는 폼클렌징을 사서 쓰기로 하고 750 밀리리터의 중대용량 폼클렌징을 덜커덕 사버렸다.
가격은 그냥 그렇고, 디자인 역시 투박스럽고, 휴대하기에는 엄청나게 큰 크기이지만 잘 씻기고, 결정적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이어서 결정했다.
'스킨맛'은 나 혼자 몇년째 주장하는 가장 좋아하는 화장품의 '맛' 이었다. 어느 회사건 한약재를 섞은 상품이 아닌 다음에야 스킨맛은 모든 회사의 베이직이다. 쉽게 말하자면, 소주와 비누를 섞은 그런 향기랄까.
그런 연유로 소주를 죽도록 마신 다음날은 스케쥴이 어떻든 말든 스킨을 바르다 토하기 일쑤였다. 그런 동일한 향의 스킨에 녹차도 넣고, 포도도 넣고, 오렌지도 넣는 것이다.
결국은 스킨이란 맛은 하나라는 결론에 이르른, 나란 인간은 스킨맛의 광신도이다. 아, 그렇다고 소주와 비누향을 섞어서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회사에 첨가물이 섞이지 않은 그 스킨맛 폼클렌징에 열광한다. 폼클렌징의 포장을 뜯어 냄새를 맡아보니 역시 그향기이다. 그 폼클렌징은 너무 커서 쥐어짜기도 힘들다.
기분이 무게만큼 살포시 좋아진다. 문득, 집으로 가면서 330밀리리터 짜리 허접한 비닐소재의 폼클렌징을 확 쥐어짜 보고 싶었다. 음, 우리는 어쩌면 오렌지 맛- 보다는 그 허접 비닐소재를 쥐어짜는 맛에 그 폼클렌징을 사용했던 것일수도 있겠다.
뽀독 거리는 느낌때문에 아주 개운했다. 그리고 향기 때문에 아찔했다. 며칠동안 몇방울의 폼클렌징때문에 공연한 열병을 앓았던 나의 기분은 아주 날아갈 것 같았다.
새로운 향기를 피부속에 촉촉 배어들게 한 다음 스킨 다섯방울을 손바닥에 톡톡 떨어뜨려 얼굴에 펴발랐다. 알싸한 느낌이 내 머리를 약간 띵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취한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
얼굴 닳겠다며 내가 씻는 것을 보는 그가 말한다. 닳아 없어지라지. 왜 맨날 씻어낼 거면서 또 화장하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항상 똑같았다. 어차피 죽을건데 왜사냐고. 더이상의 정답은 없었다.
나는 씻는 것도, 화장하는 것도 광적으로 열심히 했다. 그래야만 했다. 나에겐 아주 독특한 향기가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내 향기는 얼굴에 덧대는 화장품에서 나는 향기가 아닌, 보통 몸매좋은 생머리 여자들이 보유한다는 샴푸냄새도 아닌, 깨끗하게 씻어버린 뒤의 무식하고도 강한 스킨맛 폼클렌징의 향기였다.
그 단순한 스킨맛 비누를 바르고 화장품 향기를 덧 입히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영화보러 가는 사람, 술마시는 사람, 도서관 같이 가는 사람, 밥 가끔 먹는 사람, 모두 달랐다.
그 중 한 사람이 내 폼클렌징에 '향기'를 부여했다. 그 뒤로 그 스킨맛 폼클렌징은 나를 강하게 자극하는 특별한 것이 되어버렸다.
꼭 여행을 가거나 다른 곳에서 잘 기회가 생길 때를 대비해 폼클렌징을 가지고 다녔다. 먹고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오렌지나 딸기맛은 딱 질색이었다.
향기에 의미를 부여한 스킨맛은 그냥 스킨일 수가 없었다. 약간 상큼하면서도 톡 쏘는 스킨향은 정말이지 너무 자극적이었다.
그의 비누향과 나의 폼클렌징 향은 같았고, 그닥 곱지 않은 나의 피부를 감싸는 나의 향기를 그는 늘 좋아해 주곤 했다. 하루종일 밖에 나가지 않아도 방 안에는 그 향기를 채우고 싶어 얼굴이 마르고 닳도록 몇 번이나 씻고 뒹굴었다. 나를 메이크업 베이스와 파운데이션 속에 가두지 않고 향기를 내뿜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
도서관에 패션쇼 하러 가냐고 묻는다. 한번 피식 웃고 세번째 마스카라를 덧 입힌다. 예나 지금이나 펄은 사양이다. 아무리 격조 높은 색깔이라고 해도, 눈가를 반짝이게 만드는 건, 눈물같아 아무래도 슬프다.
굳이 나갈 일이 없을 땐 집에 얌전히 앉아 공부에 몰두할 것인데 무슨 연유인지 꼭 부산을 떨며 책을 챙기고 반드시 화장을 하고 옷을 다섯번은 바꿔가며 도서관으로 반드시 가야만 한다고 우겨본다.
고약한 역마살이다.
집에서 꼬질거리는 모습으로 책을 보다가 침대의 유혹에 빠져 낮잠을 자는건 휴식이 아니다. 정말 게을러서 퍼질러 자는거다.
얼굴을 하얗게 만드는 데에는 쌀뜨물이 최고라고 해서 쌀뜨물까지 얼굴에 끼얹다 보니 얼굴에 하는 나의 행동은 점점 복잡해지고 정교해 지고만 있다. 립글로즈까지 바르고 나서 가방을 들고 나갈 채비를 한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참 많이도 변했다. 피식 웃는다. 변해버렸어. 더 변할거야. 당신은 나를 절대 기억하지 못해. 나를 알아보지 마.
언니, 가면을 써라, 뭘 그렇게 덕지덕지 처 발랐냐. 라고 묻는 동생에게 나는 한결같은 대답 뿐이다. 죽을걸 알면서 열심히 살잖냐.
***
호텔안에 구비된 폼 클렌징으로 얼굴을 씻었다. 나는 더이상 스킨맛 폼 클렌징을 휴대하지 않는다. 호텔에도, 여느 찜질방에도, 여느 편의점에도,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스킨맛 폼클렌징은 그 모습 그대로 가장 기본적인 모습으로 어디에나 있다.
보고싶었어.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한다. 왜 바빠 죽겠는 내 앞에 몇달동안 연락도 없다가 네 마음대로 나타나 보고싶다는 말로 나를 농락하는지 묻고싶었지만 그도 이유를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맥주를 한병씩 나누어 마시고 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같은 향기가 난다고, 간신히 그가 한마디 떼어놓는다.
이건 나의 비누가 아닌데, 내가 늘 쓰던 폼클렌징이 아닌데, 다른데에서도 내 향기를 내 뿜을 수 있구나, 그는 다른 곳에서도 내 향기를 맡을 수가 있었겠구나, 그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디서든 나를 기억하겠단 말이었을까, 아니면, 그게 아니라면, 나는 도처에 널려있는 그런 다른 폼클렌징과 다를게 없었단 소리일까, 후. 이런 편협한 사고를 하는 내가 싫다.
분명 우리는 엇갈렸었지. 기약없는 기다림으로 지쳤고, 약속할 수 없는 미래로 두려워 했고, 그 미래로 함께 걸어가기를 두려워 하며 떠났던 그는 나를 겨우 향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로망에 흔들려 버리기엔 나는 너무 짙은 화장에 익숙해 져 버렸고 여러가지 맛의 폼클렌징에 길들여져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이란, 나 역시 간신히 할 수 있는 말이란. 이제, 이런향기는 어디서나 맡을 수 있어. 라는 웃기는 한마디 뿐 이었다.
내겐 특별했던 향기가 어느곳에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잔인하기도 하다. 그 어디에나 있는 그것이 특별하다고 착각했고, 그 향기를 나만의 향기로 착각한 나도 그렇지만. 그도 그 맛을 내 맛으로 기억한다. 그도 착각했다. 그래서 한때는 눈과 코와 귀와 입이 모조리 멀었었다.
아직까지도 특별하게 기억해 준다면야 상관없지만 이젠 그 타이밍이 지나버렸다. 그것은 그냥 지나간 흔한 향기일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향기든 다 섞어버릴 수가 있다.
이제 이 향기엔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부여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향기란, 저질스런 작업수단의 하나로 전락해 버렸을 뿐이다.
***
며칠 뒤, 무심코 집어든 폼클렌징은 너무 가볍다. 이거 누가 썼어, 다들 오렌지맛 쓴다고 해서 내가 사다놨더니 치사하게 이것도 쓰냐, 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스킨맛 폼 클렌징은 우리집 여자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난 쓰지 말란 말을 한 적이 없었고, 그 곰같은 크기의 폼 클렌징은 욕실 한 가운데에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자리에 놓여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거기다 대고 파렴치한 폼클렌징 도둑들 하면서 길길이 날뛰기에는 욕실에 놓은 스킨맛 폼클렌징은, 너무 착하게 그자리에서 우리집 여인네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흔하니까, 그들도 그 향기를 가질 권리가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당장이라도 내다 버리고 싶었지만 아직 바람빠지는 소리가 나려면 한참 먼 것같다. 큰 걸 사길 잘했어. 그치만, 곧 싫증이 나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랬지. 스킨맛이란, 무엇을 섞어놓으면 그 맛이 되어버리는 가장 기본적인 맛이더랬지. 그는 나를 건드린적이 없어. 내 스킨맛을 그대로 두었던 유일한 사람. 어떤식으로 변형시켜보아도, 키위맛 속에는 스킨맛이 녹아 들어갈수 밖에 없다는 걸. 다음에는 새로 나왔다는 상백피던가, 그걸 한번 써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