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에 대하여

박민진2006.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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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잠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1)코이노니아(이하 ‘공동체’)를 생각해보자. 그 공동체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곳이어야 하고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해준 곳이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일 수도 있고 또는 선교단체 혹은 소그룹 모임일 수도 있다. 다 생각했다면 이제 그 곳을 선택하지 않았을 자신을 생각해보자. ‘상상할 수 없다’거나 혹은 ‘끔찍하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그에게 진정 소중한 공동체가 아닐 것이다.

 

자, 그럼 이제 한 가지 더 생각해보자. 이번에는 어떤 이유에서건 나의 사랑하는 공동체를 나간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물론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당신의 마음은 어떠한가? 떠난 사람과 친밀했다면 그 마음은(어떤 이유라 할지라도) 아마 탕자를 떠나보낸 아비의 마음과도 비슷할 것이다. 그 마음의 이름은 안타까움이다.

 

이때에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선택이 아주 중요한 것이며 그에 따르는 결과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우리는 경중을 무론하고 많은 선택을 하고 있다. 그 중에는 물론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까?’와 같은 가벼운 것들도 있지만 내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 놓을만한 선택도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우리가 속기 쉬운 함정이 있다. 그것은 이런 큰 선택에 대한 문제들이 ‘어떤 직장을 선택할 것인가?’또는 ‘어떤 배우자를 만날 것인가?’와 같은 심각한 문제들에만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어떤 공동체에 속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은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지만 인생을 바꾸는 문제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어떤 공동체에 속할 것인가?’가 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냐고 반문할지도 모르나 한국의 경우 믿음의 공동체가 쉽게 말해 너무 흔하다. 그래서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있다가 맘에 안 들면 그냥 나가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정말 교만한 마음이다. 당신은 터기의 갑바독키아에 있는 카타콤에 가본 일이 있는가? 카타콤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땅굴을 파고들어가 지하생활을 하던 지하도시다. 그런데 나는 그 곳에서 인상적인 T자 형태의 기둥을 보게 되었다. 그 기둥은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났던 사람들을 끌어다가 묶어두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부인할 때의 결과들을 보여주는 곳이었다고 한다.

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소중히 여기셨던 교회이다. 혹시라도 이러한 공동체를 떠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생각해볼 것과 중대한 선택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고 싶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지만 그에 따르는 결과도 우리의 책임으로 주셨다.

 

1) (코이노니아; 진정한 성서적 교제가 이루어지는 사귐이란 의미 존트루딩거의[가정소그룹모임]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