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자료만 보아도 그가 손을 댄 공주 일대 백제 유적은 고분만 해도 교촌리 고분군을 필두로 금학동 고분군, 소학동 고분군 등지의 23기가 확인되는데 그 시기는 1932-33년 두 해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런 그가 송산리 고분군을 빼놓을 리 만무했다. 이곳은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으나 가루베 조사 당시에도 고분 30기 가량이 남아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왕릉급으로 생각되었기에 이름이 꽤 있었다. 때문에 가루베가 이처럼 중요한 송산리 고분군에 눈독을 들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입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가루베는 1933년에 드디어 송산리 고분군에 도굴의 마수를 뻗치는데 각각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으로 밝혀진 제5, 6호분도 대상이었다. 이중 백제 고분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제6호분이다. 왜냐하면 백제 고분으로는 아주 드물게 네 벽면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무엇보다 그 구조가 무령왕릉과 아주 똑같은 벽돌무덤임이 이때 가루베 조사를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5, 6호분을 뒤진 가루베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산등성이에 옆으로 나란히 자리한 이 두 고분 바로 위에 위치한 조그마한 언덕이었다. 가루베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이 둔덕은 인공으로 쌓아 올린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 언덕에 대해 가루베는 결론내리기를 5, 6호분을 뒤에서 보호하기 위해 쌓아 올린 주산(主山)이라고 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난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간 가루베는 이런 생각을 글로도 남기고 있다고합니다.
가루베 지온
가루베 지온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 도굴해 간 사람입니다
1927년 공주중학교 선생으로 들어오면서
백제사를 가르치게 됫고
그때문인디 송산리 고분군을 발굴한다 하며
도굴을 합니다
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자료만 보아도 그가 손을 댄 공주 일대 백제 유적은 고분만 해도 교촌리 고분군을 필두로 금학동 고분군, 소학동 고분군 등지의 23기가 확인되는데 그 시기는 1932-33년 두 해에 집중되고 있습니다.이런 그가 송산리 고분군을 빼놓을 리 만무했다. 이곳은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으나 가루베 조사 당시에도 고분 30기 가량이 남아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왕릉급으로 생각되었기에 이름이 꽤 있었다. 때문에 가루베가 이처럼 중요한 송산리 고분군에 눈독을 들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입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가루베는 1933년에 드디어 송산리 고분군에 도굴의 마수를 뻗치는데 각각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으로 밝혀진 제5, 6호분도 대상이었다. 이중 백제 고분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제6호분이다. 왜냐하면 백제 고분으로는 아주 드물게 네 벽면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무엇보다 그 구조가 무령왕릉과 아주 똑같은 벽돌무덤임이 이때 가루베 조사를 통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5, 6호분을 뒤진 가루베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산등성이에 옆으로 나란히 자리한 이 두 고분 바로 위에 위치한 조그마한 언덕이었다. 가루베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이 둔덕은 인공으로 쌓아 올린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 언덕에 대해 가루베는 결론내리기를 5, 6호분을 뒤에서 보호하기 위해 쌓아 올린 주산(主山)이라고 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난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간 가루베는 이런 생각을 글로도 남기고 있다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