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장애인선교

박영진2006.06.08
조회32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


  장애인 선교를 살펴봄에 있어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를 조명해 보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장애인 선교에 열정을 보이신 분이시다. 복음서를 통해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 축은 장애인 선교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장애인 선교에 많은 비중을 두셨다. 오늘의 교회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바르게 이해하기를 소원하며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를 조명해 본다.


1.장애인 사역자


  예수님은 장애인 선교를 위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을 장애인 선교사라고만 주장하려는 것을 지나치다고 지적할만한 이유를 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 선교를 하는 사역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예수님은 눈꼽 만큼의 의심도 할 수 없이 장애인 선교를 위해 오셨다.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예고했던 선지자들 중에서도 메시아의 사역이 무엇이 될 것인지를 상징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예언했던 선지자 이사야에 의하면 장차 오실 메시아는 장애인 사역자였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

      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61:1)


  역사적인 안목과 영적 통찰력을 깊이 있게 가지고 있었던 누가는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아 예언과 그의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조명해 주시는 성령님의 감동을 놓치지 않았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

      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

      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8)


  누가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하지 않았던 ‘눈먼자’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이사야 선지자가 상징적이면서도 포괄적으로 다루었던 메시아 사역의 대상을 구체화 시켰다.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은 한결같이 ‘그림자’를 보여주려는데 그치고 있다.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구약은 메시아의 전면사진이나 입체적인 투영도를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구약은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서도 그것이 무엇일지에 대하여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멧시지를 전하기는 하지만 포괄적인 조명으로 비추어 주는데 그치고 만다. 그러나 신약은 그것을 구체화 시켰다. 메시아가 누구인지를 실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메시아가 세상에서 무엇을 하려하셨으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주었다.

  성령께서는 마태와 누가를 통하여 구체적인 메시아 사역의 내용들을 열거했다. 요한이 헤로디아의 일로 헤롯의 잘못을 지적한 것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그는 감옥에서 제자들을 통하여 메시아 소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드디어 메시아로 보이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청년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자 요한은 제자들을 예수에게로 보내며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라는 답신을 요구하는 질의서를 보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내미는 요한의 질의서에 메시아로서의 답신을 이렇게 적으셨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

      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4~5)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

      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

      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이상에서 보는바 대로 먼저는 성령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했던 메시아 사역의 내용이 담긴 인봉된 책을 처음에는 상징적인 제목으로만 보여 주셨다가 그 다음에 마태와 누가를 통하여서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완전하게 개봉하셔서 누구든지 메시아 사역의 내용을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성령께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하기 위하여 그가 하시는 사역이 무엇이며 어떤 내용의 사역이 될 것인지를 요한의 제자들이 내민 질의서에 예수님이 직접 대답하시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내밀었던 질의서에 마치 ‘나는 장애인 선교를 하러 왔다’(마11:4~5, 눅7:22)고 적으신 것처럼 보인다 . 물론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이 절대로 장애인 사역에만 제한되어 질 수 없다. 장애인 선교만이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예수님이 친히 요한의 질의서에 대답하시므로 요한에게 회신해 주셨던 결정적인 예수님 사역의 내용은 종합적인 장애인 선교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언급되고 있는 장애인들은 장애복지가 상당히 발달하여 장애인들의 분류를 매우 세분하여 지칭하고 있는 현대의 다양한 장애인들(시각장애인, 지체장애인, 나병환자, 청각장애인등)을 거의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이들 모든 장애인을 일일이 찾아가시거나, 또 어떤 사람들이 장애인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의 영적인 회복과 장애의 치유를 통한 메시아 사역을 행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렇게 행하신 메시아 사역으로서의 생생한 현장 이야기들은 요한의 제자들도 보고, 들었던 것임을 지적하시면서 메시아로서의 사역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요한에게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성경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이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를 살펴보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장애인 사역자로서의 예수님의 포지션을 뚜렷하게 보여준다고 믿는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예수님은 절대로 장애인 사역만을 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은 장애인 선교사였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장애인 선교를 어떻게 하셨는지를 가감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한점의 오류도 없는 진실함에 근거하여 보여주고 있다.


2.회당중심의 장애인 선교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회당중심의 사역이었다. 초기 예수님의 사역이 회당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바울에게서도 회당은 매우 중요한 선교사역의 거점이 되었다. 회당은 유대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나 유대인의 회중을 일컫는 일반적인 용어로 이해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회당이 그들의 유대교 신앙으로 예배하는 예배처소이면서 유대인생활전반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회당은 사도적인 교회의 형성에 어느 정도 조직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회당에 대해서는 복음서에서만이 아니라 사도적 교회가 형성되고 발전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도행전에서도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는 것(6:9.9:2,20.13:5,14.14:1.15:21.17:1,10,17.18:4,19,26.19:8)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회당은 사도적 교회의 형성에 적지 않게 긍정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복음서(특히 공관복음)는 예수님의 초기사역이 회당중심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즐겨 모이는 유대인들에게 사역의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마태복음이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회당에서의 사역을 간추려 본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

      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4:23)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

      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9:35)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

      어가시니”(마12:9)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

      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마13:54)


  마가(1:21~28, 3:1~6, 5:21~24, 35~43, 6:2~6등)와 누가(4:31~37, 6:6~11, 8:41~42, 49~56, 13:10~17등)복음에서는 마태에서보다 예수님의 회당에서의 사역을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마가와 누가복음에 비해 유대인들에게 더 친숙했을 마태복음에서 오히려 예수님의 회당에서의 사역을 더 소극적이며 포괄적으로 다루었다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태가 예수님의 회당사역을 가볍게 여겼다는 뜻이 아니다. 어쩌면 마가와 누가에 비해 마태의 예수님의 회당사역을 조금은 소극적인 태도로 나타내려 한 것은 예수님이 안식일날 회당에서 장애인을 치유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신 것 때문일 것이다.

  마태는 이 복음서의 독자들이 유대인들이라는 전제하에 많은 구약의 말씀(토라)들을 즐겨 인용하면서도 예수님의 회당사역에 대해서만큼은 소극적 자세를 취했던 것은 율법의 준수를 좋아하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통해서도 메시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안식일에 회당에서 장애인을 치유하신 사건을 불편한 심기로 곱씹고 있는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에게 걸림돌로 자극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마태복음은 12장 9절 이하에서 예수님이 회당에서 한편 손마른 사람의 장애를 고쳐주셨다는 사실에서만 안식일에 병고치는 문제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예수를 죽일런지를 생각하게 하는 원인제공이 되었다는 비교적 자세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장애인을 치유하시는 것을 송사(訟事) 하려는 뜻으로 못마땅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이라고 직접 밝히지 않고 단지 (어떤)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고 했다고만 언급하므로 율법을 존중하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했다. 마태복음은 한편 손마른 사람의 장애인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사역을 다룸에 있어서만 유일하게 장애인의 입장과 장애인의 생명도 귀한 가치가 있음을 자세하게 언급(마12:11,12)하므로 장애인 선교의 중요성을 나타내 주었을 뿐이지 그 외에는 마태복음의 어디에서도 장애인을 구체적으로 치유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다는 사실을 자세히 언급하여 말하지 않고 다만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마4:23, 9:35)는 포괄적인 서술만 하므로 초기 회당중심의 사역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에 대한 마태의 입장이 상당히 소극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마가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장애인을 치유하신 구체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 구체적인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의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마태는 주로 생략한데 반해 마가와 누가는 조금도 삭제하지 않고 리얼하게 소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주로 마가와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회당에서의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를 살펴보려 한다.

  ①귀신들린 사람(막1:21~28, 눅4:31~37)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셨다. 거기서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방해했다(막1:25). 예수님이 귀신을 꾸짖으시며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의 권세에 복종한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 남아있지 않다. 귀신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다. 또는 여러 가지 질병을 가지게 만든다. 정신을 파괴시키고 정신질환을 일으킨다. 귀신이 들린 사람의 상당수는 장애인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귀신은 사람을 흉악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기를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다’(마15:22)고 했다. 귀신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실 때 귀신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막1:24)라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예수님이 귀신을 내어쫒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려 하심이다(마12:28, 눅11:20). 그러므로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시는 것,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도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마6:10).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귀신을 내어쫒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시키는 것이 회당사역의 중요한 내용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러나 당시 회당에서는 능력있는 하나님이 나라의 선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회당에서의 능력있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회복되었다. 회당사역의 실제적인 회복이 능력있는 장애인 선교로 말미암아 이루어 질 수 있었다.


  ②한편(오른) 손마른 사람(막3:1~6, 눅6:6~11)


  이번엔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시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송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마12:2, 막2:24, 눅6:2)을 하는가를 살펴서 율법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목을 지키는 사람들(눅11:54) 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말을 하기를 기다리는 자들이었고 율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도록 악한 모사를 꾸미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깊은 웅덩이에 빠지게 할 악한 계획을 위해 한편(우상지) 손마른 사람을 일부러 회당에 데리고 왔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계획을 아시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무엇이 선을 행하는 것이며 무엇이 악을 행하는 것인지를 가르치셨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그날에 손발을 묶어놓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일을 마땅히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반면에 생명을 구해야 할 일을 두고서도 안식일이라는 율법에 묶여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명을 멸하는 것이며 악을 행하는 것임을 가르치셨다. 형식적인 율법의 사람이 되는 것은 오히려 악한 것이며 율법이 가르치는 대로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것이 안식일을 바로 지키는 것일 뿐 아니라 옳은 것임을 가르치시고는 한편 손마른 사람을 회복시켜 주셨다. 예수님은 장애인 치유와 선교를 통하여 참된 선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장애인 선교가 선을 행하는 ‘착한 일’(행4:9)이라는 것을 사도들이 잘 알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배웠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장애인 선교가 분명히 보여주는 바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장애인 선교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이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③회당장 야이로의 딸(막5:21~24, 35~43, 눅8:41~42, 49~56)


  이것은 회당에서의 사역은 아니지만 회당에서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는 회당장인 야이로의 집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이다. 이것은 직접적인 회당사역은 아니어도 회당사역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예수님의 회당사역에서 뺄 수 없는 내용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12살된 외딸이었고, 심각한 질병으로 죽음의 문 앞에 서 있었다. 회당장은 그 직책상 예수님께 엎드리어 많이 간구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 엎드리어 딸의 문제를 가지고 많이 간구하게 된 것은 딸의 문제가 매우 위중한 것이었던 점과 예수님이 회당에서 행하시던 능력을 직접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회당장은 예수님께 간구하면서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막5:23)라는 구체적인 요구를 하는 것을 보아서 그가 예수님이 회당에서 장애인을 치유하시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간청하고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옷을 만지고 회복된 사건이 있었다. 예수님은 혈루증 여인의 사건을 가지고 상당한 시간을 길에서 보내고 있었다. 예수님은 너무나 태평스러웠고 조금도 바쁜일이 없으신 분처럼 보였다. 회당장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딸의 문제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회당장의 걸음은 바쁘기만 한데 예수님은 길에서 머뭇거리기만 하셨던 것이다. 그러는 중에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전하는 말은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께 더 간청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포기했다. 죽음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포기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보시지 않고 ‘잔다’(막5:39, 눅8:52)고 보았다. 길에서 머뭇거리기만 하시던 예수님이 걸음이 죽었다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빠른 걸음으로 회당장의 집으로 향하셨다. 그리고는 비웃던 사람들을 다 내어 보내시고 아이의 부모와 또 예수님과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가 있는 곳에 들어가셔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막5:41)하시고는 소녀를 일으키셨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통하여 두 가지 일을 하시려 했다. 하나는 야이로의 딸을 치유하시므로 그 가정을 선교하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회당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문이 닫히지 않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초기 선교를 통하여 회당중심의 사역을 많이 하셨는데 그것은 회당에서의 사역이 그만큼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안식일날 회당에서 빈번하게 장애인을 치유하시면서 적극적인 장애인 선교를 하시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부딛히게 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회당에서의 예수님의 선교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회당에서의 예수님의 선교의 문이 좁아지고 있던 중에 야이로의 딸이 살게 된 것은 회당선교의 문이 얼마동안이라도 닫히지 않게 하는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④18년 동안 꼬부라진 여인(눅13:10~17)


  예수님이 18년 동안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을 회당에서 고쳐주시자 회당장이 문제를 삼았다. 회당장은 회당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자세히 알 수 있었고 또 회당에서의 일들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회당장은 일할 수 있는 날이 엿새나 되는데 하필이면 안식일에 병고침을 받아야 하느냐고 하면서 예수님의 병고침을 문제삼으려 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시비에 대답하시기를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풀어주는 것이 옳지않느냐고 말씀하시므로 비록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장애인 사역을 하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가운데는 깊이 생각해야 할 멧시지가 있다. ⓐ첫째는 그 장애인이 18년동안의 세월을 장애로 지냈다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18년 동안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11)였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18년의 세월을 조금도 펴지 못하고 꼬부라진 채 지내는 불편과 고통이 어떠한지에 대하여 건강한 사람들은 잘 모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다음날에 고쳐도 될 것을 왜 하필이면 오늘 그 일을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18년 동안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잘 아신다. 그러므로 그 일을 내일로 미룰 수 없으신 것이다. ⓑ둘째는 18년 동안 장애를 가지고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고통으로 살았던 그 여인이 바로 ‘사단에게 매인바 된’(16)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장애의 원인이 사단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으므로 치료의 시기를 미룰 수 없으셨다. 사고나 단순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장애가 아니라 사단이 하나님의 형상을 일그러뜨린 것이며 사단이 그 장애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장애의 치료를 예수님은 참을수도 미룰수도 없으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셋째는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되었던 그 장애인이 바로 아브라함의 딸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사단에게 매인바 된 것은 참을 수 없는 주님의 분노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장애가 부끄러움은 아니지만 그 장애가 사단에게 매인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점에서 참을 수 없었던 주님의 심정을 나타내신 것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존귀하게 여기신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장애가 있든지 없든지를 상관하시지 않으신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예수님께 절대가치의 기준이 된다는 점을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되어서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을 회복시키시므로 장애인 선교가 장애인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회복하도록 하는 것임을 가르치셨다. 장애인 선교는 장애를 치료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구원을 회복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장애인 선교는 그 목적에 있어서 다른 선교에 비하여 열등한 분야의 선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 위상이 시급히 회복되어지지 않으면 안될 선교임을 인식케 하여준다. 그리고 장애인 선교에 더욱 빨리 마음을 기울여 힘쓰지 않으면 안될 이유는 이것을 18년 동안 미루어 왔던 일로서가 아니라 교회선교 2천년 동안 미루어 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⑤소수의 장애인(막6:2~6)


  이것은 예수님의 고향에서 행하신 사역이다. 예수님은 주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셨다. 그것은 회당에서의 랍비들의 전형적인 사역형태이다.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지혜로운 말씀은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다른것으로 많은 사람이 듣고 놀랄만한 권세(마7:29, 눅4:32)가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예수님이 그 손으로 행하시는 권능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라는 신분과 충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고향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 신분상 권세있는 교훈을 할만한 분도 아니고 권능을 행하실만한 분이 아니었다고 이해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2)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3)며 예수님을 배척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사람의 신분이나 성장배경이 그 사람의 평가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아시아적 인습의 오랜 소산물인데 전통적인 유대인들에게는 더욱 원색적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 예수님의 가정환경과 성장배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배척했다. 예수님은 배척을 받은 고향에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으시다며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다. 예수님은 고향에서 아무 권능도 행하시지 않으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수의 병인을 고치셨다. 예수님의 회당사역에서 소수의 병인을 고치신 것은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권능을 행하신 것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배척하는 고향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다고 하셨다. 더 많은 권능을 행하신 고향에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에는 중요한 뜻이 들어 있다. 예수님의 권능 행하심은 단지 장애인이 건강하게 회복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장애인이 건강하게 회복되는 일을 통하여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능의 참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에 대하여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6)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장애인 사역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장애인 사역의 목적은 사람들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믿게 하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권능이다. 믿음에 이르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건강하게 회복되지 못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믿음에 이르게 되지 못하는 일이 큰 일이다. 예수님이 많은 장애인을 치유하신 것은 사실이나 당시의 모든 장애인을 치유하신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장애인이 건강하게 되기를 바라시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장애인이 구원받기를 소원하셨다. 모든 장애인이 예외 없이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이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과 완고하여 불신앙의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자주 장애인을 치유하신 것은 장애인 사역이 보다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들도 예수님처럼 장애인 선교에 더 많은 마음을 둘 수 있다면 불신앙의 문화와 의식을 깨트리고 믿음의 큰 역사와 부흥을 일으키는 선교의 판도로 확연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3.회당 밖의 장애인 선교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모이는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사역만 하시지 않으셨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있는 장애인을 치유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렇게 하신 예수님의 사역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유대 랍비들은 가르치기는 했지만 고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고칠수도 없었지만 고치려 하지도 않았다. 안식일에 병든자를 고치는 것은 그들이 엄격하게 여기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에 병든자는 외면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안식일에 병든자가 외면을 당해야 하는 것은 랍비들이 가르치는 율법의 근본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랍비들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사역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은 것이 아니고 병든자를 치유하신 것을 가지고 문제 삼았다. 안식일에 가르치는 것과 고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행하신 사역 중에서 도무지 고칠 수 없는 장애인을 치유하셨을 뿐 아니라 귀신에게 잡혀 있던 사람을 회복시키신 사건들이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메시지로 나타났다. 예수님이 핍박을 받기 시작했던 이유도 단순히 율법을 강론하며 가르쳤던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장애 속에 갇혀 지내던 자들과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던 영혼들을 온전히 회복시키시는 권세와 권능을 나타내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고치시므로 복음을 전했던 사역을 인하여 방해를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방해를 받으시기는 하셨지만 사역의 제한을 받으시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와 방해를 받으므로 예수님의 장애인 사역은 더욱 광범위한 사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행하신 장애인 사역이 교권주의자들의 방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위축되지 않고 도리어 성장했으며 회당 밖에서의 사역에 더욱 비중을 두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리고 회당 밖에서의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는 회당에서의 사역과는 비교될 수 없는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다.


  ①각색 병든자(마8:16~17, 막1:32~34, 눅4:40~41)


  예수님은 회당에서보다 회당에서 나오셨을 때에 훨씬 많은 병인을 만나셨다. 이것은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이 회당에서 나오시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병든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고 있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예수께서 회당에서 나와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고 나신 이후에 이미 날이 저물었지만 사람들이 예수님께 많은 병인과 귀신들린 자를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회당에 계실 때에는 사람들이 많은 병인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회당 밖에서는 병인들이 스스로 예수님께 왔고, 심지어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또 다른 많은 병인들을 데리고 함께 오기도 했다. 예수님께 나아온 병인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은 다 고침을 받았다.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눅4:40). 예수님은 장애인 선교가 막히지 않는 곳에서는 자유롭게 사역하셨다. 장애인 사역이 가장 안되는 곳이 회당이었다. 교권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고 있는 곳에서는 장애인 사역도 위축되었다. 장애인 선교가 위축받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장애인 사역이 막히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지고 넓혀졌다. 예수님은 아무 막힘 없이 각색 병든자들을 고치셨을 뿐 아니라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②나병환자(마8:2~4, 막1:40~45, 눅5:12~16)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는 온 몸에 나병이 들린 사람이었다(눅5:12). 그가 예수님께 나아와 꿇어 엎드리어(절하고) 간구했다. 예수께서 그를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깨끗하게 회복시켜 주셨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긍휼히 여기셨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은 나병환자를 조금도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병은 사람들의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부정한 것이었다. 나병에 대한 율법의 태도는 매우 엄격해서 조금도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 율법은 나병을 치료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율법은 사람에게나 건물에 나병이 발하였는지 아닌지를 진단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지만 나병환자가 어떤 치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병을 긍휼히 여기셨다. 뿐만 아니라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면서 치료하여 주셨다. 아무도 나병환자를 만지려 하지 않으려 했고, 만지면 부정해 진다고 생각하던 때에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만지셨고, 온전한 건강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장애인 사역은 장애인에 대하여 아주 특별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장애인을 보지 않고 사랑으로 보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에서 판단하는 대로 장애와 부정한 질병에 대해 심판하려 하지 않고 긍휼의 법으로 어루만져 주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장애인 사역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병환자의 몸에 친히 손을 얹으시므로 보여 주셨다.


  ③침상에 누워 지내는 장애인(마9:2~8, 막2:2~12, 눅5:18~26)


  침상에 누워지내는 장애인은 뇌졸중으로 지체가 마비되었다. 침상에 누워서 지낼 정도의 뇌졸중이었다면 중증이다. 또 뇌졸중으로 침상에 누워지내게 되었다는 것은 이 사람이 중도장애인임을 말해준다. 전에는 건강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침상에 눕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었다. 많은 경우에 선천성 장애인의 경우보다 후천성 장애인(중도장애인)이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건강할 때를 생각하게 되는 마음을 빨리 비우지 않으면 장애로부터 자유하기 어려운 것이 중도장애인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면이다. 침상에 누워지내는 장애인은 사람들에게 침상채 들린채로 예수님께 왔다. 4사람(막2:3)의 건강한 사람들이 한 사람의 장애인을 데리고 온 것이다. 4사람이면 한 사람을 충분히 도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4사람이 연합하여 믿음으로 한 사람의 연약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장애인 사역의 중요한 원리이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데리고 온 4사람의 믿음을 보셨다(막2:5). 4사람은 믿음으로 장애인 사역을 했고, 믿음으로 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만났어도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이길 수 있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행하는지를 살펴보셨다(마9:2,막2:5,눅5:20).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주목하시는 바가 아니다. 장애인 선교는 오직 믿음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장애인 사역자는 장애인의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만 믿음으로 사역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사역자는 장애인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영적인 도움을 주는데는 극히 제한적일 뿐이다. 오직 예수님만 장애인을 온전히 도울 수 있다. 그러므로 장애인 사역자의 최선의 사역은 장애인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는 것이어야 한다. 4사람의 사역자는 장애인을 오직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려고 애썼다. 만일 장애인 사역자가 장애인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는일에 실패한다면 모든 것에 실패하는 것이다. 장애인의 온전한 회복은 예수님께 나아가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의 유니티한 합력과 적절한 팀웍, 그리고 한결같은 믿음으로 행할 수 있는 힘, 뿐만 아니라 장애인을 오로지 예수님께로 데리고 갈 수 있는 것은 이 사역이 교회의 사역이어야 함을 입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씀이다. 오늘의 교회는 장애인 사역을 교회보다 더 잘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없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④베데스다의 장애인(요5:2~15)


  베데스다의 못에 뛰어들기 위하여 몰려든 많은 장애인들은 고침을 받기위한 소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육제의 장애를 고침받지 못해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장애인은 회복된 장애인인데 그런 장애인을 만나기가 어렵다. 고침을 받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치유받지 못한채로 살아가야 하는 장애인들보다 더 가련한 사람은 없다. 베데스다 못은 고침받기를 원했지만 고침받지 못한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그곳은 탄식의 우물이었고, 눈물의 호수였다. 예수님이 베데스다의 못을 찾으신 것은 장애의 치유가 천사가 내려오는 것이나 물이 움직이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있음을 증거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의 못가에 모여있는 장애인들 가운데서도 38년동안 불편했던 사람을 찾으셨다. 38년된 병자는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갈 힘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를 물에 던져 넣어줄 사람도 없었다. 그런 그가 베데스다 못가에서 물이 동함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부질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부질없는 수고를 계속하고 있는지 모른다. 치료만 받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치료는 고사하고 헛된 수고로 시간과 재산을 허비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예수님은 장애를 치료하시는 분이시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고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베데스다의 못가에 몰려든 장애인 인파는 오늘날 장애인들이 좀처럼 가지 않으려는 교회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들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장애인을 위하여 어떻게 행하시고 역사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곳이어야 한다. 장애인들이 비록 육체의 장애를 치유받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장애인으로 회복시키지 못하는 교회는 결코 베데스다 못보다 소망스럽지 못하다.


  ⑤시각 장애인(마9:27~31)


  성경은 시각장애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크게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구했다는 사실을 여러차례 기록하고 있다(마9:27,20:30,막10:47,눅18:38). 시각장애인이 이렇게 큰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회당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시각장애인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예수님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어 가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예수님께 말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큰 소리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당시의 시각장애인은 건강한 사람들처럼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가난이 친구였고, 배고픔이 아내였고, 서러움이 남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며 소리를 질렀다. 당시의 누구도 시각장애인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예수님만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다. 지금도 시각장애인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시각장애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을 이해하는 예는 드물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시각장애인을 긍휼히 여기신다. 교회는 긍휼히 여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애인이 긍휼히 여김을 받고 싶은 깊은 내면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드러내며 나올 수 있는 곳으로서의 교회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장애인이 교회에서도 그 내면의 아픔을 토해내지 못한다면 교회는 장애인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가난이 친구이며, 배고픔과 서러움이 아내와 남편인 장애인은 오늘도 곳곳에서 지르지 못하는 소리를 감추고 있다. 교회는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긍휼의 가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를 통하여 예수의 소문이 온 땅에 전파되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마9:31).


  ⑥모든 병든자(마14:34~36, 막6:53~56)


  게네사렛(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장애인 사역은 독특했을 뿐 아니라 충만한 은혜의 사역이었다. 이미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소문이 확산되어 있었으므로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매우 특별한 사건은 갈릴리 마을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마14:35) 모든 병든자를 예수께 데리고 오거나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막6:55) 장애인을 침상채로 메고 나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마을이나 도시, 그리고 촌에서 장애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고 고침을 받게 해 달라고 간구하기까지 했다. 예수님은 옷가에 손을 대기를 간구하는 사람들마다 놀라운 은혜를 받게 하셨다. 이같은 예수님의 장애인 사역은 오늘날 지역중심의 장애인 사역의 발달이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여 장애인을 돕고, 지역 주민들에 의하여 장애인 문제를 해결해 가려는 노력이 장애인 사역을 위하여 바람직하다는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동기를 부여해 줄뿐 아니라 그 동기를 결집하는 일을 교회가 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장애인 사역이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매개가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교회가 믿음으로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돕자는 뜻에 지역 주민들을 참여케 하는 범 사회적 활동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다면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교회의 사역에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⑦귀먹고 어눌한 자(막7:31~37)


  청각장애는 언어장애를 동반한다. 듣지 못하는 것은 말하지 못하게 하는 통로이다. 청각, 언어 장애인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리고 나와서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했다. 이 장애인은 예수님에 대한 어떠한 소문도 들을 수 없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했던 이유는 듣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아무 것도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는 예수님의 능력에 닫혀 있었던 것이었고, 주님의 은혜에 닫혀 있게 하는 원인이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들을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어장애인을 도와주어야 한다. 청각장애인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다. 예수님은 청각장애인의 귀와 입을 열어주시므로 복음을 듣고 말할 수 있게 하셨다(막7:36).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들어야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듣지 못하는 자의 귀가 되시고, 말하지 못하는 자의 입이 되신다.


  ⑧큰 무리의 협력(마15:29~31)


  예수님의 초기 사역은 고독한 사역이었다.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방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이 후기로 넘어오면서 많은 협력자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장애인 사역으로 말미암았음을 보여준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연약한 사람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왔다. 회당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거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큰 무리의 협력이 없으면 다수의 장애인 선교는 일어날 수 없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계실 때에도 장애인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는 많은 협력자들에 의해 놀라운 장애인 선교가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는 장애인들만 모아서 장애인들만 위한 사역을 하신 것이 아니라 봉사자들과 함께 사역하고, 봉사자들의 몫을 봉사자들이 감당할 수 있도록 한 사역이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의 봉사자들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라 큰 무리의 협력자들을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교회야말로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를 위해 협력할 수 있는 가장 큰 무리이다. 교회는 ‘지체장애인과 몸이 불편한자와 시각장애인과 언어장애인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앞에’(마15:30) 엎드려야 한다. 교회가 능력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가려면 예수님의 장애인 사역을 위해 협력하는 큰 무리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4.결어 - 예수님의 선교 눈 높이


  예수님의 선교는 언제나 낮은 곳에서 시작하셨고 거기에 선교의 기둥을 든든히 세웠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지가 그랬었고, 예수님이 만났던 선교 대상자들이 한결같이 낮은 곳에 서있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선교 눈높이는 화려하지도 않았고, 조금도 영광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그랬으므로 당시의 교권주의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선교원칙이 결코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