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정신대' 할머니입니다..。

한창엽2006.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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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정신대' 할머니입니다..。 ▲ 영정(고 박두리 할머니) ⓒ2006 이민선 따뜻한 봄기운이 살갗을 파고들지만 이곳의 공기는 차갑기만 합니다. 사람들의 표정 속에는 봄이 없습니다. 그저 싸늘한 겨울의 냉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열하는 유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합니다. 고인의 사연은 너무 슬퍼서 입에 담기조차 가슴이 아픕니다.

고인은 '정신대' 할머니입니다. 고인의 마지막 소원은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할머니는 지난 19일 오후에 고단했던 '생'을 접으셨습니다

박두리(83)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배웅한 것은 21일, 수원시 연화장(납골당)이라는 곳에서입니다. 연화장의 풍경은 언제나 을씨년스럽습니다. 몇 년 전 저는 바로 손위 형님을 이곳에서 배웅해 드렸습니다.

그때도 지금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창창한 마흔의 나이에 훌쩍 떠나버린 형님을 배웅할 때 저는 마음 속에 형님과 이곳의 쓸쓸한 분위기를 함께 묻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제 눈에 비치는 이곳은 언제나 을씨년스럽기만 합니다.

할머니의 시신이 화장터로 들어갈 때 유족들이 오열을 터뜨렸습니다. 할머니의 유일한 혈육은 딸 전유순(47)씨입니다. 하얀 소복을 입고 오열하는 몸짓 하나하나에 걷잡을수 없는 슬픔이 배어나옵니다. 유족들 주위에 둘러서 있는 사람들 중에도 눈물을 찍어내는 모습이 보입니다.

고인은 '정신대' 할머니입니다..。 ▲ 오열하는 유족 ⓒ2006 이민선 박두리 할머니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일본인의 말에 속아서 끌려간 뒤 5년간을 대만에서 지옥같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해방 직후 22살에 수송선을 타고 귀국한 뒤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또다시 숨막히는 시간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그 후 1992년 69세에 일본정부의 기만적인 행동에 분노하시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당당히 밝히셨습니다. 이후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집에 기거하시며 수요집회, 국내외 증언집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시어 일본군위안부 제도의 진상을 알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벌이셨습니다.

수요집회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강제연행 인정, 희생자에 대한 손배상을 요구하며 벌이는 시위를 말합니다. 수요집회는 92년 1월 18일에 시작되어 매주 수요일 낮 12시에 일본대사관 앞에서 15년째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2006년 3월 1일은 금강산에서 특별 수요집회를, 3월 15일은 전 세계에서 함께 하는 700차 수요집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강요된 일본군 위안부 생활에서 얻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할머니를 병마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습니다. 구타 및 폭력후유증으로 인한 척추질환과 중이염, 다리골절로 고생하셨고 최근 2년간은 암으로 경기도 안양에서 요양을 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만은 언제나 불타 올랐습니다. 병상에서도 매주마다 수요집회에 참가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할머니는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 쉬쉬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떨쳐 일어나 일본의 만행을 규탄했고 이후에도 앞장서서 고행의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고인은 '정신대' 할머니입니다..。 ▲ 운구(수원 연화장) ⓒ2006 이민선 장례는 시민사회 단체장으로 치러졌습니다. 20일 오후 8시에 할머님이 타계하신 안양 메트로 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식이 벌어졌고, 다음날인 21일 8시에 빈소를 떠나 수원 연화장으로 향하였습니다. 연화장으로 가는 도중에 일제시대 수탈의 본거지였던 안양 서이면사무소 앞에서는 일제 만행 규탄대회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안양역에서는 노제도 치러졌습니다. 노제를 치르는 자리에는 수많은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했고 많은 사람들의 추모사가 있었습니다.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몇 년 전 형님의 장례를 치르던 것이 생각납니다. 형님의 장례를 치르면서 '이러한 행위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참을 고심하다가 내린 결론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행위라는 것이었습니다. 싸늘한 시신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슬픔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고인의 삶이 한으로 점철된 것이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박두리 할머니의 장례를 주관한 '시민사회장 장례위원회'에서는 추모사 중에 이런 글을 넣었습니다.

"17세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게 끌려가 한많은 삶을 살아오신 그 분의 주름진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차마 닦아드리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럽습니다."

이 글을 읽으니 정말 부끄러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부끄럽게도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풀어드리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보내야 하는지 안타깝기만 합니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형님의 장례식처럼 살아 있는 사람 맘 편하려고 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들었습니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잊지 않기 위해서 치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할머니의 한이 무엇이었고 얼마만큼이었는지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살아계신 정신대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일본군 정신대 위안부 문제는 민족의 문제이며 인권의 문제입니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누려야할 인권을 묵살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민족의 자존심을 깡그리 무시한 희대의 대 사건입니다. 일본정부의 사과를 외치며 수요집회를 벌이던 할머님들이 이제 모두 고령이십니다.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분들도 점점 늘어갈 것입니다.

그 전에 할머님들의 소원이 풀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을 낱낱이 규명하여 일본정부가 무릎꿇고 할머니들에게 사죄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범죄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하고 배상도 받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 길만이 할머니들의 주름진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이미 돌아가신 원통한 넋들을 달래주는 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