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주말 오후에 나무 숲을 내다 본다. 아니, 짙푸른 나무숲이 내 시야로 들어온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확할 것이다. 날씨는 하루 종일 흐리고, 비도 심심치 않게 제법 뿌린다. 무수한 빗 방울들이 쏴와 쏴아, 고속으로 낙하하여 숲 속의 나뭇잎들에 부딪히는 소리는 마음을 모아주고, 또 경쾌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매 번 구름이 머금고 있는 물방울(빗물)의 양과 때에 따른 기온과 기압의 변화 그리고 바람의 세기와 매일 자라고 무성해지는 숲의 변화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연의 연출이요 공연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이며, 움직임이 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므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 동어반복의 순환논법이다. 사실 자체논증은 어쩔수 없이 그럴 수 밖에 없다.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공동으로 전승되는 창세기의 창세설화에서, 하느님이 사람(아담)을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숨, 네페쉬 nephesh, 루아ruah)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숨을 쉬었다고 한다. 이 소박한 창세설화에서 일컫는 입김(숨)은 하느님의 입김이요 바람이다. 인간의 생명은 조물주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데, 하느님 그분의 생명이 그 숨(바람)으로 인하여 인간의 생명을 존속시킨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그의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과의 너무나도 진하고 친밀한 관계가 이렇게 표방되고 있다.
사람마다 취향과 선호하는 것이 혹시 좀 다를 수 있겠다. (그것이 사회의 공익과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면 존중되야 할 것이다. 개인의 취향과 선호하는 바가 존중되는 세상은 신나는 세상, 살맛나는 세상이다.) 오랜 세월 성서를 가까이 하고 사는 나는 이와 같은 창세설화 전승을 좋아한다. 이같은 창세설화를 기반으로 할 것 같으면, 그 분으로부터 숨을 부여받은 생명체들은 쉼없이 숨을 쉰다. 숨을 쉰다는 것은 숨이 들고 나는 것을 가리키므로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고, 이것이 생명현상이라고 본다. 들숨과 날숨의 교호, 그 주고 받는 관계 속에 생명이 존속한다.
조용히 앉아서 코끝에 손등을 대고, 들고 나는 숨결을 고르면, 편하고 순하게 숨이 들락 날락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내 콧구멍을 통해서 바람이 인다, 안과 밖 쌍방향으로. 내가 의식을 하든 않든, 내가 깨어있든 잠이 들든, 숨이 절로 들고 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숨이 쉬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침 저녁으로, 그리고 가끔 창문을 열어 방안의 공기를 바꾼다. 문을 열어두면 실내의 탁한 공기(바람)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공기가 들어온다. 들고 나는 공기가 얼굴을 스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 느낌을 통해서 사람 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적이 흐르는 나무 숲도 그렇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할 때는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하고, 숨도 멎은 듯 하다. 그러나, 세심하고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이면 그런 때 조차, 바람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너무 여려서 마치 없는 듯이 여겨질 뿐이다.
구약성서 열왕기에 소개되는 예언자 엘리야가 새로운 소명을 받기 전에, 하느님을 만나는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스럽다. 그가 한 때, 피신하여 동굴에 이르러 지내는 어느날 밤 “앞으로 나가서 야훼(하느님)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 하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야훼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 한 줄기가 일어 산을 뒤 흔들고 야훼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불길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다.”
강풍, 지진, 불길 같은 위압적이고 인간을 압도하는 그러한 큰 움직임이나 바람 가운데서가 아니라, 그런 움직임이 지나고 난 뒤 정적이 흐르는 여린 미풍 가운데서 비로소 야훼(하느님)이라 호칭하는 절대자의 음성을 듣게된다는 묘미가 있다. 자연은 변화무쌍하다. 크게보면 계절마다 그 계절을 드러내는 날씨가 있고, 각 계절은 계절대로 시기에 따라 역시 변화무쌍한 일기를 연출한다. 어디 그뿐이랴. 하루는 하루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변화 무쌍하다. 다만, 일상의 분주함에 사로잡혀있을 때 그 변화 다기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제대로 그 느낌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조화 안에 바람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제도 일고, 오늘도 그리고 지금도 일고 있는 바람은 내일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강풍처럼 분기탱천한 바람부터 미풍처럼 보드라운 바람에 이르기까지, 그 가지수를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바람 그리고 바람들. 바람은 살게하고 변화를 주고 만물의 기운을 북 돋운다. 바람은 빗방울 사이에도 일고, 구름 한 점 없는 허공에도 일고, 그리고 사위가 고요한 한 여름 낮의 작열하는 태양아래서도 인다. 바람은 멀리에도 있고 가까이에도 있다. 모두가 바람 한 가운데 있다.
지금도 바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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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바람이 인다
글. 양재오
한가한 주말 오후에 나무 숲을 내다 본다. 아니, 짙푸른 나무숲이 내 시야로 들어온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확할 것이다. 날씨는 하루 종일 흐리고, 비도 심심치 않게 제법 뿌린다. 무수한 빗 방울들이 쏴와 쏴아, 고속으로 낙하하여 숲 속의 나뭇잎들에 부딪히는 소리는 마음을 모아주고, 또 경쾌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매 번 구름이 머금고 있는 물방울(빗물)의 양과 때에 따른 기온과 기압의 변화 그리고 바람의 세기와 매일 자라고 무성해지는 숲의 변화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연의 연출이요 공연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이며, 움직임이 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므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 동어반복의 순환논법이다. 사실 자체논증은 어쩔수 없이 그럴 수 밖에 없다. 너무 자명하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공동으로 전승되는 창세기의 창세설화에서, 하느님이 사람(아담)을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입김(숨, 네페쉬 nephesh, 루아ruah)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숨을 쉬었다고 한다. 이 소박한 창세설화에서 일컫는 입김(숨)은 하느님의 입김이요 바람이다. 인간의 생명은 조물주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데, 하느님 그분의 생명이 그 숨(바람)으로 인하여 인간의 생명을 존속시킨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그의 피조물의 하나인 인간과의 너무나도 진하고 친밀한 관계가 이렇게 표방되고 있다.
사람마다 취향과 선호하는 것이 혹시 좀 다를 수 있겠다. (그것이 사회의 공익과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면 존중되야 할 것이다. 개인의 취향과 선호하는 바가 존중되는 세상은 신나는 세상, 살맛나는 세상이다.) 오랜 세월 성서를 가까이 하고 사는 나는 이와 같은 창세설화 전승을 좋아한다. 이같은 창세설화를 기반으로 할 것 같으면, 그 분으로부터 숨을 부여받은 생명체들은 쉼없이 숨을 쉰다. 숨을 쉰다는 것은 숨이 들고 나는 것을 가리키므로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고, 이것이 생명현상이라고 본다. 들숨과 날숨의 교호, 그 주고 받는 관계 속에 생명이 존속한다.
조용히 앉아서 코끝에 손등을 대고, 들고 나는 숨결을 고르면, 편하고 순하게 숨이 들락 날락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내 콧구멍을 통해서 바람이 인다, 안과 밖 쌍방향으로. 내가 의식을 하든 않든, 내가 깨어있든 잠이 들든, 숨이 절로 들고 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숨이 쉬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침 저녁으로, 그리고 가끔 창문을 열어 방안의 공기를 바꾼다. 문을 열어두면 실내의 탁한 공기(바람)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공기가 들어온다. 들고 나는 공기가 얼굴을 스치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 느낌을 통해서 사람 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적이 흐르는 나무 숲도 그렇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할 때는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하고, 숨도 멎은 듯 하다. 그러나, 세심하고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이면 그런 때 조차, 바람이 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너무 여려서 마치 없는 듯이 여겨질 뿐이다.
구약성서 열왕기에 소개되는 예언자 엘리야가 새로운 소명을 받기 전에, 하느님을 만나는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스럽다. 그가 한 때, 피신하여 동굴에 이르러 지내는 어느날 밤 “앞으로 나가서 야훼(하느님)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 하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야훼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 한 줄기가 일어 산을 뒤 흔들고 야훼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 내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불길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왔다.”
강풍, 지진, 불길 같은 위압적이고 인간을 압도하는 그러한 큰 움직임이나 바람 가운데서가 아니라, 그런 움직임이 지나고 난 뒤 정적이 흐르는 여린 미풍 가운데서 비로소 야훼(하느님)이라 호칭하는 절대자의 음성을 듣게된다는 묘미가 있다. 자연은 변화무쌍하다. 크게보면 계절마다 그 계절을 드러내는 날씨가 있고, 각 계절은 계절대로 시기에 따라 역시 변화무쌍한 일기를 연출한다. 어디 그뿐이랴. 하루는 하루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변화 무쌍하다. 다만, 일상의 분주함에 사로잡혀있을 때 그 변화 다기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제대로 그 느낌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조화 안에 바람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제도 일고, 오늘도 그리고 지금도 일고 있는 바람은 내일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강풍처럼 분기탱천한 바람부터 미풍처럼 보드라운 바람에 이르기까지, 그 가지수를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바람 그리고 바람들. 바람은 살게하고 변화를 주고 만물의 기운을 북 돋운다. 바람은 빗방울 사이에도 일고, 구름 한 점 없는 허공에도 일고, 그리고 사위가 고요한 한 여름 낮의 작열하는 태양아래서도 인다. 바람은 멀리에도 있고 가까이에도 있다. 모두가 바람 한 가운데 있다.
2003.6.15.
왕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