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튼간에 내 배고픔을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자. 음식에 대한 배고픔일 뿐이었다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게 있을까? 음식에만 배고픈 게? 보다 광범위한 배고픔의 징표가 아닌, 단순한 밥통의 배고픔이라는 게 있을까? 배고픔, 나는 이것을 존재 전체의 끔찍한 결핍, 옥죄는 공허함이라 생각한다. 유토피아적 충만함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는 그저 단순한 현실, 아무 것도 없는데 뭔가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하는, 그런 현실에 대한 갈망이라고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내 안에서 바누아투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랐다. 스무 살에, 고대 로마의 시인 카툴루스가 부질없이 스스로를 다독이며 고 말하는 시를 읽으면서, 그와 같은 시인도 해내지 못한 일이니 나는 더더욱 하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배고픔, 이건 욕망이다. 이것은 열망보다 더 광범위한 열망이다. 이것은 힘으로 표현되는 의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유약함도 아니다. 배고픔은 수동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굶주린 사람, 그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다.
카툴루스가 체념으로 스스로를 강제하는 것은, 바로 그가 체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배고픔 속에는 스스로의 상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어떤 동력이 있다. 이것은 지독한 열망이다.
카툴루스의 열망은 사랑의 결핍이고, 사랑하는 여인의 부재로 인한 강박적 감성이니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냐고, 사람들은 내게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언어는 여기에서 동일한 결을 느낀다. 배고픔은, 진정한 배고픔은, 벼락같이 느껴지는 식욕이 아니라 가슴을 풀어헤쳐 영혼의 본질을 빼내 오는 배고픔이요, 사랑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위대한 연인들은 다 배고픔의 학교에서 배웠다.
뱃속이 푸만하게 태어난 존재들 - 이런 사람들이 참 많다 - 은 수시로 느껴지는 이 초조함, 이 날선 기다림, 이 요동침, 이 비참함을 절대로 모를 것이다. 인간의 인격은 생후 몇 개월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배고픔을 겪지 않은 인간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특이하게 선민이 되거나, 아니면 결핍을 바탕으로 존재를 쌓아 가지 않는, 저주 받은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얀센주의에서 주장하는 은총 혹은 저주와 가장 비슷한 개념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주린 배를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사람들은 왜 그들먹한 배를 가지고 태어나는지, 우리는 모른다. 로또 복권이다.
부모님은 언니가 테오필 고티에의 작품들을 읽는다고 칭찬했다. 나는 여기서 엄마를 유혹할 수 있는 기막힌 발상을 얻었다.
나는 내 나이 수준을 뛰어넘는 책들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을 읽었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테나르디에 가족에게 구박받는 코제트, 정말 감칠맛이 났다. 자베르 경감에게 쫓기는 장 발장의 이야기는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감탄을 유발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감탄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감탄하는 것, 이것은 오묘하고도 절묘한 행위다. 두 손이 따끔따끔거리고, 호흡이 쉬워졌다.
독서는 감탄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었다. 나는 자주 감탄하기 위해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내가 그때 사전을 읽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내 뇌가 한층 더 심하게 흩어져 버리는 것을 두고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갈망이 있었던 것이다. 내 몸이 여위어 가면 갈수록 내 영혼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금욕주의자들의 영적 풍요로움을 들먹이는 자들은 거식증으로 한번 고통을 당해 봐야 한다. 장기간의 단식보다 훌륭한 물질주의의 선생은 없는 법이다. 일정 선을 넘어서면 우리가 영혼이라고 여기는 것이 힘을 잃다가 결국에는 사라지고 만다.
영양실조인 인간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빈곤한 정신세계를 소유하고 있어서, 이 때문에 아주 초인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생존의 본능만큼이나 강렬한 교만함이 생기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이 교만함이 파라오적인 지적 시도를 하는 것, 가령 사전을 A에서 Z까지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높은 지능을 거식증이라는 병과 연관시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해두자. 금욕주의적인 삶으로 영홈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궁핍에는 미덕이 없으니까.
[77] 배고픔의 자서전
20060608
아멜리 노통브 - 배고픔의 자서전
여하튼간에 내 배고픔을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자. 음식에 대한 배고픔일 뿐이었다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게 있을까? 음식에만 배고픈 게? 보다 광범위한 배고픔의 징표가 아닌, 단순한 밥통의 배고픔이라는 게 있을까? 배고픔, 나는 이것을 존재 전체의 끔찍한 결핍, 옥죄는 공허함이라 생각한다. 유토피아적 충만함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는 그저 단순한 현실, 아무 것도 없는데 뭔가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하는, 그런 현실에 대한 갈망이라고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내 안에서 바누아투를 발견하게 되기를 바랐다. 스무 살에, 고대 로마의 시인 카툴루스가 부질없이 스스로를 다독이며 고 말하는 시를 읽으면서, 그와 같은 시인도 해내지 못한 일이니 나는 더더욱 하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배고픔, 이건 욕망이다. 이것은 열망보다 더 광범위한 열망이다. 이것은 힘으로 표현되는 의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유약함도 아니다. 배고픔은 수동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굶주린 사람, 그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다.
카툴루스가 체념으로 스스로를 강제하는 것은, 바로 그가 체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배고픔 속에는 스스로의 상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어떤 동력이 있다. 이것은 지독한 열망이다.
카툴루스의 열망은 사랑의 결핍이고, 사랑하는 여인의 부재로 인한 강박적 감성이니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냐고, 사람들은 내게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 언어는 여기에서 동일한 결을 느낀다. 배고픔은, 진정한 배고픔은, 벼락같이 느껴지는 식욕이 아니라 가슴을 풀어헤쳐 영혼의 본질을 빼내 오는 배고픔이요, 사랑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위대한 연인들은 다 배고픔의 학교에서 배웠다.
뱃속이 푸만하게 태어난 존재들 - 이런 사람들이 참 많다 - 은 수시로 느껴지는 이 초조함, 이 날선 기다림, 이 요동침, 이 비참함을 절대로 모를 것이다. 인간의 인격은 생후 몇 개월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배고픔을 겪지 않은 인간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특이하게 선민이 되거나, 아니면 결핍을 바탕으로 존재를 쌓아 가지 않는, 저주 받은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얀센주의에서 주장하는 은총 혹은 저주와 가장 비슷한 개념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주린 배를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사람들은 왜 그들먹한 배를 가지고 태어나는지, 우리는 모른다. 로또 복권이다.
부모님은 언니가 테오필 고티에의 작품들을 읽는다고 칭찬했다. 나는 여기서 엄마를 유혹할 수 있는 기막힌 발상을 얻었다.
나는 내 나이 수준을 뛰어넘는 책들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을 읽었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테나르디에 가족에게 구박받는 코제트, 정말 감칠맛이 났다. 자베르 경감에게 쫓기는 장 발장의 이야기는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감탄을 유발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감탄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감탄하는 것, 이것은 오묘하고도 절묘한 행위다. 두 손이 따끔따끔거리고, 호흡이 쉬워졌다.
독서는 감탄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이었다. 나는 자주 감탄하기 위해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내가 그때 사전을 읽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내 뇌가 한층 더 심하게 흩어져 버리는 것을 두고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갈망이 있었던 것이다. 내 몸이 여위어 가면 갈수록 내 영혼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게 느껴졌다.
금욕주의자들의 영적 풍요로움을 들먹이는 자들은 거식증으로 한번 고통을 당해 봐야 한다. 장기간의 단식보다 훌륭한 물질주의의 선생은 없는 법이다. 일정 선을 넘어서면 우리가 영혼이라고 여기는 것이 힘을 잃다가 결국에는 사라지고 만다.
영양실조인 인간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빈곤한 정신세계를 소유하고 있어서, 이 때문에 아주 초인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생존의 본능만큼이나 강렬한 교만함이 생기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이 교만함이 파라오적인 지적 시도를 하는 것, 가령 사전을 A에서 Z까지 읽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높은 지능을 거식증이라는 병과 연관시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해두자. 금욕주의적인 삶으로 영홈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궁핍에는 미덕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