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기 승무원 판교 조언형 묘비와, 우측 200미터 기슭에 있는 남명이 지은 모친 인천李氏 묘비는 (합천) '남명선생 선양회(회장 박우근)'의 건의로, 2004년 4월 22일 경남도 관보에 공고 후, 6월 10일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됨.
*부친 묘비는 남명 선생이 만25세 때인 1526년에 부친인 승문원 판교 언형(彦亨)이 별세(別世)하자 남명이 직접 지은 묘비이고, 모친 묘비는 남명이 만44세 때인 1545년에 모친인 인천李氏가 별세하자 남명의 벗인 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1487~1547, 대사헌, 이조참판)가 지은 묘비임.
선고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 묘갈명 병서
아아! 여기가 나의 선고의 묘이다. 삼대가 같은
산에 있어 고조, 증조, 조부의 비갈이 여기에 있다.
부군의 휘는 언형이고, 자는 형지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방정하며, 일에 임해서는 공손하고 청렴하였다. 홍치 갑자년(연산군 10,1504)에 정시에서 정원하여 승문원 정자에 제수되고부터, 가정 병술년(중종 21,1526)에 판교에 이르기까지 이십삼년 동안 벼슬하였다. 그 가운데 외직에 임명된 것이 두 번으로, 의홍 현감과 단천 군수이다. 이조에서 근무한 것이 두 번인데, 좌랑과 정랑이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고나리가 된 것이 세 번인데, 정언, 지평, 집의였다. 선균관에서 스승이 되었던 것이 여섯 번인데, 전적이 세 번, 사예가 한 번, 사성이 된 것이 두번이다. 그리고 종부시 정이 된 것이 한 번이고, 춘추관에서 일한 것이 한 번이었으며, 춘추관의 일을 겸하여 본 것이 세 번이었다. 이것이 부군이 종사한 대략이다.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린 경우, 기술할 만한 덕이 있으면 사관이 기록을 하고, 백성들이 한결같이 말을 하여 전해 온다. 그러니 과장하고 둘러댈바에는 뇌를 짓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가령 말할 만한 덕이 없다면, 아첨하는 말이 되어서 나의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고 남을 속이는 행동이 되어 나의 아버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아버지를 속이거나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나 또한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벼슬살이를 이십 년 동안 하였지만 돌아가셨을 때 예를 갖출 수가 없고, 집에서는 먹고 살 길이 없었으니, 자손들에게 남겨 준 것은 분수에 만족하라는 것뿐이었다. 두 임금을 내리 섬기면서 특히 수고하고 힘썼지만 품계는 삼품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가 세상에 구차하게 아첨하여 영화를 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높은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조정의 고관들이 공에게 의지해서 하루라도 공이 없으면 안 될 정도였으니, 한 시대에 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도 알 수 있다.
아! 나의 경우에는 선고를 속이는 일을 거의 면할 수 있게 되고, 선고의 경우에는 덕에 비추어 거의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은 어찌하여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을 세상에 내어 놓고는, 그 수명에는 인색하게 하여 고작 오십팔 세에 그치게 하였는가? 그러니 내가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애통해 하는 것이 어찌 하늘 때문이 아니겠는가? 액은을 만나 제주 목사로 임명되자마자 병이 심해져 취임하지 못해였는데, 마침내는 병을 핑계로 어려운 일을 회피하였다는 죄에 걸려 관작을 모두 삭탈당하였다. 장례를 지내고 난 다음에 임금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자, 판교 이하의 관작을 회복한다는 명이 내려졌다. 아, 이것이 어찌 밝은 세상의 일이겠는가!
부인은 이씨인데, 조부는 현령을 지낸 추이고, 외구는 좌의정을 지낸 최윤덕이다. 아들 일곱을 두었는데 모두 일찍 죽고, 나와 막내 환만이 다행히 죽지 않았다. 딸이 넷인데 사위는 정운, 이공량, 정백빙, 정사현이다.
여기에 장사하고 나서 나는 선고의 행적을 없어지게 할 수 없어, 표를 세워 명을 새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남명 선선(先山)
▲남명 조식 선산(합천군 삼가면 하판리 지동마을 우측 산기슭)
-위쪽부터 남명 조식의 증조부인 생원 조안습(曺安習)과 배위, 조부 조영(曺永) 및 배위, 부친 승무원 판교 조언형(曺彦亨) 묘소
*상기 승무원 판교 조언형 묘비와, 우측 200미터 기슭에 있는 남명이 지은 모친 인천李氏 묘비는 (합천) '남명선생 선양회(회장 박우근)'의 건의로, 2004년 4월 22일 경남도 관보에 공고 후, 6월 10일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됨.
*부친 묘비는 남명 선생이 만25세 때인 1526년에 부친인 승문원 판교 언형(彦亨)이 별세(別世)하자 남명이 직접 지은 묘비이고, 모친 묘비는 남명이 만44세 때인 1545년에 모친인 인천李氏가 별세하자 남명의 벗인 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1487~1547, 대사헌, 이조참판)가 지은 묘비임.
선고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 묘갈명 병서
아아! 여기가 나의 선고의 묘이다. 삼대가 같은
산에 있어 고조, 증조, 조부의 비갈이 여기에 있다.
부군의 휘는 언형이고, 자는 형지이다. 타고난 성품이 순후하고 방정하며, 일에 임해서는 공손하고 청렴하였다. 홍치 갑자년(연산군 10,1504)에 정시에서 정원하여 승문원 정자에 제수되고부터, 가정 병술년(중종 21,1526)에 판교에 이르기까지 이십삼년 동안 벼슬하였다. 그 가운데 외직에 임명된 것이 두 번으로, 의홍 현감과 단천 군수이다. 이조에서 근무한 것이 두 번인데, 좌랑과 정랑이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고나리가 된 것이 세 번인데, 정언, 지평, 집의였다. 선균관에서 스승이 되었던 것이 여섯 번인데, 전적이 세 번, 사예가 한 번, 사성이 된 것이 두번이다. 그리고 종부시 정이 된 것이 한 번이고, 춘추관에서 일한 것이 한 번이었으며, 춘추관의 일을 겸하여 본 것이 세 번이었다. 이것이 부군이 종사한 대략이다.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다스린 경우, 기술할 만한 덕이 있으면 사관이 기록을 하고, 백성들이 한결같이 말을 하여 전해 온다. 그러니 과장하고 둘러댈바에는 뇌를 짓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가령 말할 만한 덕이 없다면, 아첨하는 말이 되어서 나의 아버지를 속이는 것이고 남을 속이는 행동이 되어 나의 아버지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아버지를 속이거나 아버지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나 또한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벼슬살이를 이십 년 동안 하였지만 돌아가셨을 때 예를 갖출 수가 없고, 집에서는 먹고 살 길이 없었으니, 자손들에게 남겨 준 것은 분수에 만족하라는 것뿐이었다. 두 임금을 내리 섬기면서 특히 수고하고 힘썼지만 품계는 삼품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가 세상에 구차하게 아첨하여 영화를 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높은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조정의 고관들이 공에게 의지해서 하루라도 공이 없으면 안 될 정도였으니, 한 시대에 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도 알 수 있다.
아! 나의 경우에는 선고를 속이는 일을 거의 면할 수 있게 되고, 선고의 경우에는 덕에 비추어 거의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은 어찌하여 훌륭한 덕을 지닌 사람을 세상에 내어 놓고는, 그 수명에는 인색하게 하여 고작 오십팔 세에 그치게 하였는가? 그러니 내가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애통해 하는 것이 어찌 하늘 때문이 아니겠는가? 액은을 만나 제주 목사로 임명되자마자 병이 심해져 취임하지 못해였는데, 마침내는 병을 핑계로 어려운 일을 회피하였다는 죄에 걸려 관작을 모두 삭탈당하였다. 장례를 지내고 난 다음에 임금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자, 판교 이하의 관작을 회복한다는 명이 내려졌다. 아, 이것이 어찌 밝은 세상의 일이겠는가!
부인은 이씨인데, 조부는 현령을 지낸 추이고, 외구는 좌의정을 지낸 최윤덕이다. 아들 일곱을 두었는데 모두 일찍 죽고, 나와 막내 환만이 다행히 죽지 않았다. 딸이 넷인데 사위는 정운, 이공량, 정백빙, 정사현이다.
여기에 장사하고 나서 나는 선고의 행적을 없어지게 할 수 없어, 표를 세워 명을 새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나의 선조는 창산 사람인데
구세에 걸쳐 평장사를 지냈다.
선고께서 그 일을 거듭하시어
그 바탕을 연마하셨다.
큰 뜻을 품었으나 볼잘것없는 직책을 맡았으니,
진실로 그 운명은 덧없었다.
사람들은 착한이가 복받는다 하지만
내 무엇으로 그것을 확인할까
나는 아직 죽지 않고
철따라 제사를 올릴 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