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정(孚飮亭,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내암이 장령(현 대검 중수부장)을 사직하고 기거하면서 제자들과 국정개혁을 논하던 곳,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을 제수받은 후 서울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기거함.
◈ 내암 정인홍선생(來庵 鄭仁弘先生)과 부음정(孚飮亭)
부음정(孚飮亭)은, 여기 남사촌(南蓑村, 현 가야면 야천리)에서 태어난 내암 정인홍(1536년~1623년)선생이 탁행지사(卓行之士)로 출사(出仕)하였으나, 위민활동(爲民活動)이 여의치 못해 벼슬을 버리고 만44세 때인 1580년 선조13년에 귀향(歸鄕)하여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정자(亭子)로써, 남명사상(南冥思想)의 본거지(本據地)가 된 유서 깊은 곳이다. 부음은 “믿음(孚)을 가지고 술을 마시면(飮) 허물이 없다”는 뜻으로, 부음정기(孚飮亭記)는 내암선생이 직접 지은 글로써, 내암사상(來庵思想)이 잘 나타나 있다.
1592년 선조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겨레와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이자, 내암선생은 문인집단(門人集團)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의병활동(義兵活動)을 전개하여, 왜군(倭軍)의 낙동강(洛東江) 보급로(補給路)를 차단하였고, 성주성(星州城)촵개령성(開寧城) 일대의 수복(收復)과 진주성(晉州城)을 부원(赴援)하였으며, 해인사(海印寺)와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보전(保全)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유일하게 창의기병(倡義起兵)하였으며, 전후(戰後)에는 정권을 장악한 북인(北人)의 영수(領袖)가 되자, 이 곳 부음정에서 양성(養成)된 내암문인(來庵門人)들이 대거 정계(政界)에 진출하여 국가재조운동(國家再造運動)과 국난극복(國難克服)의 핵심적 역할(役割)을 수행하였다.
그 후 내암선생은 66세 때인 1602년 선조35년에는 대사헌(大司憲)에 제수(除授)되었고, 1607년에는 남계(藍溪) 덕산(德山) 향천(香川) 3서원장(書院長)이 되어 우도사림(右道士林)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이듬해「청참유영경소(請斬柳永慶疏)」를 올려 유배(流配)되었으나 선조임금의 급서(急逝)로 방석(放釋)되었다.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판윤(判尹)촵대사헌(大司憲)촵우의정(右議政) 등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고, 1613년 광해5년에는 정운공신일등(定運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그 해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세 차례나「영창대군신원소(永昌大君伸寃疏)」를 올려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였다.
78세 때인 광해6년에 좌의정(左議政)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으며, 광해9년에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반대 답서(答書)를 올렸다. 來庵先生이 만82세 때인 1618년 광해10년 정월에 산림유일지사(山林遺逸之士)로는 처음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임명(任命)되었으나 차자(箚子)를 올려 사임(辭任)하였다.
1623년 소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폐모론(廢母論)을 주도하였다는 날조(捏造)된 죄명(罪名)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만87세에 세상을 떴다. 문인(門人)인 정온(鄭蘊), 이대기(李大期), 조응인(曺應仁) 등이 처형에 강력히 반대하고 스승의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1931년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며 민족사학자(民族史學者)인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는 벽초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암선생을 조선역사(朝鮮歷史) 인물 중, 을지문덕, 이순신과 함께 삼걸(三傑)로 꼽고 내암선생의 개혁사상을 높히 평가했다.
부음정
▲부음정(孚飮亭,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내암이 장령(현 대검 중수부장)을 사직하고 기거하면서 제자들과 국정개혁을 논하던 곳,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을 제수받은 후 서울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 기거함.
◈ 내암 정인홍선생(來庵 鄭仁弘先生)과 부음정(孚飮亭)
부음정(孚飮亭)은, 여기 남사촌(南蓑村, 현 가야면 야천리)에서 태어난 내암 정인홍(1536년~1623년)선생이 탁행지사(卓行之士)로 출사(出仕)하였으나, 위민활동(爲民活動)이 여의치 못해 벼슬을 버리고 만44세 때인 1580년 선조13년에 귀향(歸鄕)하여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건립한 정자(亭子)로써, 남명사상(南冥思想)의 본거지(本據地)가 된 유서 깊은 곳이다. 부음은 “믿음(孚)을 가지고 술을 마시면(飮) 허물이 없다”는 뜻으로, 부음정기(孚飮亭記)는 내암선생이 직접 지은 글로써, 내암사상(來庵思想)이 잘 나타나 있다.
1592년 선조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겨레와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이자, 내암선생은 문인집단(門人集團)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의병활동(義兵活動)을 전개하여, 왜군(倭軍)의 낙동강(洛東江) 보급로(補給路)를 차단하였고, 성주성(星州城)촵개령성(開寧城) 일대의 수복(收復)과 진주성(晉州城)을 부원(赴援)하였으며, 해인사(海印寺)와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보전(保全)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유일하게 창의기병(倡義起兵)하였으며, 전후(戰後)에는 정권을 장악한 북인(北人)의 영수(領袖)가 되자, 이 곳 부음정에서 양성(養成)된 내암문인(來庵門人)들이 대거 정계(政界)에 진출하여 국가재조운동(國家再造運動)과 국난극복(國難克服)의 핵심적 역할(役割)을 수행하였다.
그 후 내암선생은 66세 때인 1602년 선조35년에는 대사헌(大司憲)에 제수(除授)되었고, 1607년에는 남계(藍溪) 덕산(德山) 향천(香川) 3서원장(書院長)이 되어 우도사림(右道士林)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이듬해「청참유영경소(請斬柳永慶疏)」를 올려 유배(流配)되었으나 선조임금의 급서(急逝)로 방석(放釋)되었다.
1608년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판윤(判尹)촵대사헌(大司憲)촵우의정(右議政) 등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고, 1613년 광해5년에는 정운공신일등(定運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그 해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세 차례나「영창대군신원소(永昌大君伸寃疏)」를 올려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였다.
78세 때인 광해6년에 좌의정(左議政)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으며, 광해9년에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반대 답서(答書)를 올렸다. 來庵先生이 만82세 때인 1618년 광해10년 정월에 산림유일지사(山林遺逸之士)로는 처음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임명(任命)되었으나 차자(箚子)를 올려 사임(辭任)하였다.
1623년 소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폐모론(廢母論)을 주도하였다는 날조(捏造)된 죄명(罪名)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만87세에 세상을 떴다. 문인(門人)인 정온(鄭蘊), 이대기(李大期), 조응인(曺應仁) 등이 처형에 강력히 반대하고 스승의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1931년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이며 민족사학자(民族史學者)인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는 벽초 홍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암선생을 조선역사(朝鮮歷史) 인물 중, 을지문덕, 이순신과 함께 삼걸(三傑)로 꼽고 내암선생의 개혁사상을 높히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