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4일, 밤새 스위스 전을 관람하고 바로 일터로 출근해서 비몽사몽간에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난데없이 황당한 문자메세지가 날아들었다.
'피파 공식 홈피에 24시간 안에 50만명 서명하면 재경기 한다고 공지 떴습니다. 돌려주세요.'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아쉽고 안타깝길래 이런 문자가 그토록 교우관계 안좋은 나에게까지 전달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해도, 설령 4800만명의 서명을 받는다 해도 재경기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루어져서도 안된다.
첫째로, FIFA에서 재경기를 승인할 이유가 없다. 오심은 늘 있어왔던 것이고, 86년 멕시코 월드컵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이 벌어졌어도 FIFA에서는 재경기는 커녕 코방귀도 뀌지 않았다. 더더군다나 재경기를 할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없다. 한국과 스위스가 조별예선 탈락이 확정된 국가들도 아니고, 재경기를 하겠다면 16강 이후 모든 일정들을 바꿔야한다. 일정사이에 하루 끼워넣고 재경기 했다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16강전 하고 또 지면, 그때가서는 일정이 잘못되었다고 또 재경기를 요구할 것인가? 만약, 정말 만약에, 백번만번 양보해서 재경기를 한다면, 그 다음의 모든 경기들 역시 재시합의 가능성을 안고 가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월드컵을 일년 내내 치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표현이 좀 과장되긴 했지만, 이는 FIFA에서는 물론이고, 전 세계 축구팬으로서도 당황스런 이야기다.
둘째로 재경기를 해서는 안되는 이유, 그것은 우리들을 위함이다. 경기내내 뻔히 보여진 편파판정, 억울하고 분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눈물을 삼키고 패배를 인정했다. 그런 우리 선수들에게 무효처리 해줄테니 한번 더 뛰라고? 그들의 가슴에 못을 두번이나 박을 셈인가? 무엇이 부족해서 또 뛰어야 한다는 말인가. 90분 내내 심장이 터지도록 뛰어다니고, 심판의 편파판정 속에서도 투혼을 발휘하며 휘슬이 불리는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붉은 악마들은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그런 그들을 위해 한시도 쉬지않고 노래를 부르며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무엇이 더 필요해서 재경기를 말한단 말인가?
나는 재경기를 말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대체 그 90분 동안 무엇을 보았느냐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뛰어준 우리 선수들과, 그들을 향해 끊임없이 대한민국을 소리지르던 붉은 악마들을 보지 못했는가? 그라운드에 피를 흩뿌리면서도 투혼을 불사르던 대표팀의 맏형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가? 그라운드에 엎드려 눈물 흘리고 인터뷰에서 패배를 인정한 우리 선수에게서 성숙한 스포츠 정신을 느끼지 못했는가? 원정 월드컵에서 역사상 첫 승리를 거두고, 강적을 상대로 극적으로 비기고, 편파판정 속에서도 끝까지 투혼을 불사르고 아쉽게 탈락한 우리의 경기들 속에서, 대체 무엇이 부족하여 재경기를 요구한단 말인가?
그들의, 아니 우리의 성적표가 부끄러운가??
당신은 우리가 쏟아낸 투혼과 뜨거운 열정을 부정하려 하는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없었다. 굳이 찾아내자면, 실력이다. 그냥 실력도 아니고, '편파판정으로도 어찌 못할 압도적인 실력'이다. 조별예선 2차전 아르헨티나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전에서, 아르헨티나가 뽑은 2번째 골과 같은 완벽한 플레이를 보여줄 실력이 없었다. 그런 실력이라면, 제 아무리 상대편에 가담한 주심이라도 휘슬을 불어댈 여지가 없지 않겠는가? 편파판정이 있었다면, 그것조차도 눌러버릴 만한 실력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실력을 가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과연 재시합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럼 무엇이 필요한가?
나도 잘 모른다. 그럼 어쩌라고?
그러니까 아는 것부터 차근차근 살펴보자.
우리는 일단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선전하기를 원한다. 이번 대회보다 더 좋은 성적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대회에서도 아시아의 자존심으로 남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단 유소년 유망주들을 발굴해서 성장시키는 것이 첫번째다. 2002년의 신화를 재현하겠다고 그 당시에 뛴 선수들 데려다가 다시 뛰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럼 유소년 유망주들을 발굴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역시 뭐니뭐니해도 잉글랜드나 프랑스같은 체계화된 유스 시스템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유스 시스템은 거의 학원 축구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유럽 각국의 리그에는 각각의 프로팀들이 가진 유스팀이 있고, 그 안에서 성장한 선수들이 해당 프로팀은 물론이고 리그를 풍성하게 해주며, 나아가 국가대표까지 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아약스 암스테르담의 유스 시스템이 아닐까. 잘은 모르지만, 네덜란드 국가대표의 대부분이 아약스 유스 출신이라고 알고있다. 따라서 유망주들을 키워내기 위한 체계적인 유스 시스템, 이것이 두번째다.
그럼 체계적인 유스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고 운영하고 지원하는가. 그것은 아무래도 프로 축구팀에서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성인 프로팀도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이 실정에 유스팀을 과감히 지원하고 '유망주'라는 위험부담을 안고 투자 할만큼 여유있는 프로팀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일시적으로 외국 유수의 클럽들과 제휴하고 유학을 보내주는 등의 일은 할 수 있다지만, 결국 그것도 한계는 있는 법. 결국 우리 손으로 우리가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프로팀을 살찌우고 배부르게 해서 유스 시스템에 투자를 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결론.
우리의 K-리그 팀들을 살찌우고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는, 별 다른 방도가 없다. 열심히 찾아가서 돈내고 축구를 보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도 늘 관심을 가지고 TV로 경기를 일부러 보기도 하고, 방송 및 언론에서도 K-리그에 관한 기사나 방송 프로그램을 늘리는 것이다.
물론, 모든 리그 일정이 국가대표 A팀에 맞춰져 있는 이 실정과, 그런 식으로 진행하는 KFA의 어이없는 행정이 팬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큰 관건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너무 K-리그보다 국가대표 경기에만 관심을 가지다보니, 언론도 자꾸 리그를 경시하고, 축구협회에서도 국가대표 경기를 중시하고, 우리는 또 국가대표 경기만 찾아다니고...그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우리의 리그를 우리 손으로 키워야한다.
우리의 힘은 우리 스스로가 키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심이고 편파판정이고 질질 끌려다니면서 불만을 토로하고, 패배를 곱씹으면서 인터넷에 항의글을 올리는 것밖에는 못할 것이다.
금방 식어버릴 축구에 대한 열정이라고, 냄비근성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다. 좋다, 냄비근성도 좋다. 냄비라면, '끓여주기만하면' 무조건 뜨겁게 있을 '근성'이 있는것 아닌가. 우리의 냄비근성에 K-리그라는 국물을 집어넣고, 축구협회를 비롯한 많은 축구 관계자들이 불을 지피기만 하면, 우리는 끓어오를 것 아닌가. 한창 끓다보면 거품이 일 것이지만, 그 거품만 걷어내면 진국이 남을 것이다. 그 진한 국물이 K-리그의 기반이 되어주겠지. 물론, 그 진국을 얼마나 남기는가 하는 것은 냄비의 몫이 아닌, 끓이는 사람의 몫일테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AC밀란의 팬이다. 전통과 역사가 있고, 밀란에 잘하는 선수가 많고, 유니폼이 예쁜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산 시로에서 퍼져 올라가는 붉은 홍염과, 매번 경기장을 꽉꽉 채우는 로쏘네리들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 월드컵에서 희망을 보았다.
우리 리그의 프로팀도 그런 로쏘네리들에 못지 않는 훌륭한 서포터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전국의 월드컵 경기장에 모인 붉은 셔츠의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팀 유니폼을 입고 열정적인 응원을 보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로인해 아시아의 자존심이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을 아시아 최강의 리그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2006년에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시아 국가 중에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국가이다.
나는 2010년에 열릴 월드컵에서
2002년의 신화를 재현하기보다,
2006년의 투혼을 다시 한번 보여주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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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이 모두 입국한 뒤에 이런 글을 올리려니 민망하지만...
24일 밤에 써놓고 26일에야 퇴고를 해서...-ㅅ-;;;
쩝, 뭐, 내 생각은 이렇다는 이야기.
스위스전 재경기? 절대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