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암 정인홍은 조응인(조성좌의 5대조)의 스승임. ◦1535년(중종30): 現 합천군 가야면 사촌리에서 출생 (사마방목에는 1536년생임) ◦1546년(명종1): 해인사에서 독서함. (만11세) -이 때 지은「영송(詠松)」이라는 한시(漢詩)가 남아 있음. *1548년에는 안음현이었던 現 거창 북상면의 ‘갈천 임훈(葛川 林薰, 1550~1584)’에게 잠시 수학함. ◦1550년(명종5): 現 삼가 외토리 토동마을「계부당(鷄伏堂)」에 ‘남명 조식’을 찾아가 입문(入門)함. (15세) ◦1558년(명종13): 사마시 합격 (23세) ◦1570년(선조3): 합천 유생 문경호 등이 찾아와 배움. (35세) -후일 1592년 5월 임진왜란 때 내암 門人들이 의병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됨. ◦1572년(선조5): 산청의 산천재에서 스승인 ‘남명 조식’의 임종을 지켜 봄. 스승의 행장(行狀)과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음. (37세) ◦1573년(선조6): 유일(遺逸)로서 당시 오현사(五賢士: 정인홍 이지함 최영경 조목 김천일)의 한 사람으로 천거됨. (38세) -6품직인 現 충북 영동군 황간현감에 제수됨. ◦1578년(선조11): 現 경북 영천군수에 제수됨. (43세) ◦1580년(선조13): 부음정(孚飮亭)을 건립하였고,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어 아전(서리)의 가렴주구를 탄핵함. (45세) ◦1589년(선조22):「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정철, 성혼 등 서인이 득세하고 이발 등 동인이 몰락함. (54세)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 등 1천여명이 억울하게 죽고, 정인홍도 삭탈관직됨. ◦1592년(선조25) 5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창의함. (57세) -김면과 現 합천 가야 숭산동에서 약 3천명의 의병으로 창의함. *이 때 창의한 합천사람으로는 전치원 이대기 전제 허자대 이흘 정질 정진철 윤탁 윤선 박사제 박사겸 박엽 진극신 권양 송희창 송희순 송희철 노흠 노순 조계명 하혼 문경호 박이장 문홍도 조응인 윤담손 정인영 정인함 문려 안극가 등등임. -6월에 진주목사, 11월에는 영남 의병도대장에 제수됨. *남원의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정인홍은 자신의 전공(戰功)을 조정에 보고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알고 있는 공로는 남보다 못하지만 사실은 경상도 의병장 가운데 정인홍의 공로가 으뜸이라고 증언하고 있음. ◦1593년(선조26): 성주를 수복한 후, 국가재건계획이 담긴「사의장봉사」라는 사직상소를 올리고 영남 의병도대장을 사직함. (58세) ◦1594년(선조27): 제용감정, 상주목사, 영해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59세) ◦1597년(선조30): 7월 왜구의 재침(정유재란)이 있자 유일하게 창의함. (62세) -8월 황석산성이 함락되어 곽준(郭䞭) 조종도(趙宗道)가 전사함. ◦1602년(선조35): 승정원 동부승지,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67세) ◦1605년(선조38):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됨. (70세) *1601년 선조임금이 임란 때 공로자를 포상토록하면서 말하기를,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사 덕분이다. 이순신, 원균, 권율은 다소 공을 세웠을 뿐이다"라고 함. 의병의 공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고, 이순신 등에 대해서도 다소 공을 세웠다고 평가함. 이는 광주의 의병장 김덕령(대곡 성운 문인)이 고문으로 1596년 억울하게 옥사한 사실과 함께 일국의 통치자의 편협되고 잘못된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하겠음. ◦1607년(선조40): 남계, 덕천, 향천서원장이 됨. (72세) ◦1609년(광해1): 대사헌 겸 세자보양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74세) ◦1610년(광해2): 의정부 종1품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2년간 23차례의 사직상소와「사은식물소」를 광해군에게 올림. (75세) ◦1611년(광해3): 우찬성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76세) -조식의 문묘종사 문제로 이황과 이언적의 출처 문제를 논박하였음. 일명「회퇴변척소」로써 이를 빌미로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청금록(靑衿錄: 성균관 학적부)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당하는 폭거를 당함. ◦1612년(광해4):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77세) -15차례 사직상소를 올린 후, 상경하여 광해군을 2차 독대함. ◦1613년(광해5):「정운공신 1등」에 녹훈됨. (78세) -영창대군 처단은 불가하다는「신영창군소」를 올리는 등「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함. ◦1614년(광해6):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79세) ◦1615년(광해7): 궤장(几杖)을 하사 받음. (80세) -3차례 광해군을 독대하고 백성을 위한 구황책을 건의 실행케 함. -인목대비 폐모(廢母) 논의에「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고 광해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합천 가야 향리로 낙향, 소위 인조반정으로 죽임을 당할 때까지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음. ◦1618년(광해10):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3차례 사직상소를 올린 이후에는 죽임을 당할 때까지 글로써 조정에 상소하지 않았음. (83세) ◦1623년(인조 즉위년) 4월: 소위 인조반정에 의해 만88세에 죽임을 당함. 묘소는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탑골에 있음. *80살이 넘거나 정승을 지낸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경국대전」및「대명률」의 규정을 무시한 서인(西人)의 무고날조에 의해 現 합천 가야에서 서울로 압송된지 5일만에 죽임을 당함. 제자인ꡐ동계 정온ꡑ이 시신을 거두어 합천에서 장례를 치룸. -이 때 現 합천 묘산의 교리 조정립은 중도부처, 정언 조성생은 파직, 가회의 우참찬 윤선 파직, 고령의 이조좌랑 박종윤은 중도부처, 의령의 이조정랑 유활 파직, 합천 가야의 지평 정결, 율곡의 대사간 문려, 고령의 승지 박종주 등은 처형되는 등 많은 정인홍 문인(門人)들이 화를 당함. ◦1629년(인조7): 합천군이 정인홍의 고향이라하여 합천현으로 격하됨. 15년 후인 1644년(인조22)에야 합천군으로 승격됨. ◦1631년(인조9) 2월: 합천의 정한(鄭澣), 고령 도진의 박희집(朴禧集), 창녕 성지도(成至道) 등이 북인(대북) 잔당을 규합하여 광해군 복위를 계획하다 정한 박희집 등 40여명이 죽고, 6명이 유배됨. ◦1729년(영조5) 4월 9일: 1728년 3월 합천 거창 청주 등지에서 발발한 무신사태(무신란) 후, 우의정 이태좌가, "정인홍의 증손(曾孫) 중 겹눈동자(重瞳)인 사람이 있어 영남사람들이 마구 몰려드는 등 민심이 현혹되고 있다"고 하자, 영조임금이 "그 증손을 장살(杖殺)하라"고 명함. ◦1873년(고종10)~1876년: 한말 척사론자인 노론의 최익현(崔益鉉, 포천 출생, 이항로 문인, 1833~1906)과 김평묵(金平黙, 포천 출생, 이항로 문인, 1819~1888) 등은 상소 등을 통해, "이현일 한효순 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追律, 반역죄로 처단)해야 하며, 南人인 윤휴(尹鑴) 이후로 우리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됐다. 만약 서양과의 조약이 성립된 후에 민암 목내선 이인좌 정희량 이현일의 남은 후손들이 백성의 불인(不忍)한 마음을 이용하여 창을 들고 도성과 대궐을 침범한다면 서인은 일망타진될 것이다"라고 주창함. 척양(斥洋) 즉, 서양세력의 일망타진보다 또 하나의 양적(洋賊)인 무신사태의 후손 등 남인세력의 일망타진에 척사의 비중을 더 두었음을 알 수 있으며, 집권 노론세력들은 조선이 망하는 그 시점까지 무신당(戊申黨)과 남인들 모두를 원수처럼 철저히 배척했음. ◦1908년(순종2년) 4월 30일: 신원(사면 복권)됨. -이 때 우찬성 백호 윤휴, 이조판서 갈암 이현일 등도 신원됨. ◦1911년: 정인홍 문집이 전 15권 7책 실기 1권으로 발간됨. ◦1931년: ‘단재 신채호(신천영과 같은 고령申氏로 선조가 무신사태 때 연루되어 화를 당함)’는 여순 감옥에서 홍명희에게 쓴 편지에,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자신과 함께 매몰될지 모르겠다”고 하였고, 우리나라 삼걸(三傑)로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을 꼽았으며, 특히 정인홍의 개혁정신을 높이 평가함. ◦1983년: 영인본인「내암집」을 상하 2권으로 발간함. ◦1997년 12월: 정인홍 관련 고문서 및 서적, 교지 등 131점이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330, 331, 332호로 지정됨. ◦2003년 4월: (합천) 남명선생 선양회등의 요청으로 내암 사당인 청람사가 건립되고, 2004년 5월에는 부음정 개수 및 내암 표준영정이 제작됨.
◉1546년(명종1)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 지은 「영송(詠松)」 *소나무는 만11살인 ‘정인홍’ 자신을, 탑은 판결사(判決使)인 ‘양희(梁喜)’를 비유하여 지은 한시(漢詩). 그 후 정인홍은 ‘양희’의 사위가 됨.
작고 작은 외로운 소나무가 탑 서쪽에 서 있으니, 一尺孤松在塔西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서 서로 가지런하지 않네. 塔高松短不相齊 오늘날 외로운 소나무가 작다고 말하지 마오, 莫言此日松低塔 소나무가 자란 뒤에는 탑이 도리어 작으리. 松長他時塔反低
◉1595년 왜적과 화의(和議) 주장이 나오는 등 국론이 분열되자 ‘내암 정인홍’이 주화론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지은 「과무계(過茂溪)」 *現 고령 성산 무계지역을 지나면서 지은 한시(漢詩)
필마로 옛 싸움터 지나노라니, 匹馬經過舊戰場 강물은 한을 품고 유유히 흐르네. 江流遺恨與俱長 지금 그 누가 왜적과 주화하려 하는가, 於今誰唱和戎說 장군과 사병은 이미 원통하게 죽었는데. 將士當年枉死亡
내암 정인홍 연보
◈ 鄭仁弘(號:來庵, 字:德遠):1535년(중종30)生~1623년(인조1)卒
*내암 정인홍은 조응인(조성좌의 5대조)의 스승임.
◦1535년(중종30): 現 합천군 가야면 사촌리에서 출생 (사마방목에는 1536년생임)
◦1546년(명종1): 해인사에서 독서함. (만11세)
-이 때 지은「영송(詠松)」이라는 한시(漢詩)가 남아 있음.
*1548년에는 안음현이었던 現 거창 북상면의 ‘갈천 임훈(葛川 林薰, 1550~1584)’에게 잠시 수학함.
◦1550년(명종5): 現 삼가 외토리 토동마을「계부당(鷄伏堂)」에 ‘남명 조식’을 찾아가 입문(入門)함. (15세)
◦1558년(명종13): 사마시 합격 (23세)
◦1570년(선조3): 합천 유생 문경호 등이 찾아와 배움. (35세)
-후일 1592년 5월 임진왜란 때 내암 門人들이 의병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됨.
◦1572년(선조5): 산청의 산천재에서 스승인 ‘남명 조식’의 임종을 지켜 봄. 스승의 행장(行狀)과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음. (37세)
◦1573년(선조6): 유일(遺逸)로서 당시 오현사(五賢士: 정인홍 이지함 최영경 조목 김천일)의 한 사람으로 천거됨. (38세)
-6품직인 現 충북 영동군 황간현감에 제수됨.
◦1578년(선조11): 現 경북 영천군수에 제수됨. (43세)
◦1580년(선조13): 부음정(孚飮亭)을 건립하였고,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어 아전(서리)의 가렴주구를 탄핵함. (45세)
◦1589년(선조22):「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정철, 성혼 등 서인이 득세하고 이발 등 동인이 몰락함. (54세)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 등 1천여명이 억울하게 죽고, 정인홍도 삭탈관직됨.
◦1592년(선조25) 5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창의함. (57세)
-김면과 現 합천 가야 숭산동에서 약 3천명의 의병으로 창의함.
*이 때 창의한 합천사람으로는 전치원 이대기 전제 허자대 이흘 정질 정진철 윤탁 윤선 박사제 박사겸 박엽 진극신 권양 송희창 송희순 송희철 노흠 노순 조계명 하혼 문경호 박이장 문홍도 조응인 윤담손 정인영 정인함 문려 안극가 등등임.
-6월에 진주목사, 11월에는 영남 의병도대장에 제수됨.
*남원의 조경남(趙慶男)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정인홍은 자신의 전공(戰功)을 조정에 보고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에서 알고 있는 공로는 남보다 못하지만 사실은 경상도 의병장 가운데 정인홍의 공로가 으뜸이라고 증언하고 있음.
◦1593년(선조26): 성주를 수복한 후, 국가재건계획이 담긴「사의장봉사」라는 사직상소를 올리고 영남 의병도대장을 사직함. (58세)
◦1594년(선조27): 제용감정, 상주목사, 영해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59세)
◦1597년(선조30): 7월 왜구의 재침(정유재란)이 있자 유일하게 창의함. (62세)
-8월 황석산성이 함락되어 곽준(郭䞭) 조종도(趙宗道)가 전사함.
◦1602년(선조35): 승정원 동부승지,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67세)
◦1605년(선조38):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됨. (70세)
*1601년 선조임금이 임란 때 공로자를 포상토록하면서 말하기를,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나라 군사 덕분이다. 이순신, 원균, 권율은 다소 공을 세웠을 뿐이다"라고 함. 의병의 공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고, 이순신 등에 대해서도 다소 공을 세웠다고 평가함. 이는 광주의 의병장 김덕령(대곡 성운 문인)이 고문으로 1596년 억울하게 옥사한 사실과 함께 일국의 통치자의 편협되고 잘못된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하겠음.
◦1607년(선조40): 남계, 덕천, 향천서원장이 됨. (72세)
◦1609년(광해1): 대사헌 겸 세자보양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74세)
◦1610년(광해2): 의정부 종1품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2년간 23차례의 사직상소와「사은식물소」를 광해군에게 올림. (75세)
◦1611년(광해3): 우찬성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76세)
-조식의 문묘종사 문제로 이황과 이언적의 출처 문제를 논박하였음. 일명「회퇴변척소」로써 이를 빌미로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청금록(靑衿錄: 성균관 학적부)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당하는 폭거를 당함.
◦1612년(광해4):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77세)
-15차례 사직상소를 올린 후, 상경하여 광해군을 2차 독대함.
◦1613년(광해5):「정운공신 1등」에 녹훈됨. (78세)
-영창대군 처단은 불가하다는「신영창군소」를 올리는 등「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함.
◦1614년(광해6):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79세)
◦1615년(광해7): 궤장(几杖)을 하사 받음. (80세)
-3차례 광해군을 독대하고 백성을 위한 구황책을 건의 실행케 함.
-인목대비 폐모(廢母) 논의에「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고 광해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합천 가야 향리로 낙향, 소위 인조반정으로 죽임을 당할 때까지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음.
◦1618년(광해10):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3차례 사직상소를 올린 이후에는 죽임을 당할 때까지 글로써 조정에 상소하지 않았음. (83세)
◦1623년(인조 즉위년) 4월: 소위 인조반정에 의해 만88세에 죽임을 당함. 묘소는 합천군 가야면 야천리 탑골에 있음.
*80살이 넘거나 정승을 지낸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는「경국대전」및「대명률」의 규정을 무시한 서인(西人)의 무고날조에 의해 現 합천 가야에서 서울로 압송된지 5일만에 죽임을 당함. 제자인ꡐ동계 정온ꡑ이 시신을 거두어 합천에서 장례를 치룸.
-이 때 現 합천 묘산의 교리 조정립은 중도부처, 정언 조성생은 파직, 가회의 우참찬 윤선 파직, 고령의 이조좌랑 박종윤은 중도부처, 의령의 이조정랑 유활 파직, 합천 가야의 지평 정결, 율곡의 대사간 문려, 고령의 승지 박종주 등은 처형되는 등 많은 정인홍 문인(門人)들이 화를 당함.
◦1629년(인조7): 합천군이 정인홍의 고향이라하여 합천현으로 격하됨. 15년 후인 1644년(인조22)에야 합천군으로 승격됨.
◦1631년(인조9) 2월: 합천의 정한(鄭澣), 고령 도진의 박희집(朴禧集), 창녕 성지도(成至道) 등이 북인(대북) 잔당을 규합하여 광해군 복위를 계획하다 정한 박희집 등 40여명이 죽고, 6명이 유배됨.
◦1729년(영조5) 4월 9일: 1728년 3월 합천 거창 청주 등지에서 발발한 무신사태(무신란) 후, 우의정 이태좌가, "정인홍의 증손(曾孫) 중 겹눈동자(重瞳)인 사람이 있어 영남사람들이 마구 몰려드는 등 민심이 현혹되고 있다"고 하자, 영조임금이 "그 증손을 장살(杖殺)하라"고 명함.
◦1873년(고종10)~1876년: 한말 척사론자인 노론의 최익현(崔益鉉, 포천 출생, 이항로 문인, 1833~1906)과 김평묵(金平黙, 포천 출생, 이항로 문인, 1819~1888) 등은 상소 등을 통해, "이현일 한효순 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追律, 반역죄로 처단)해야 하며, 南人인 윤휴(尹鑴) 이후로 우리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됐다. 만약 서양과의 조약이 성립된 후에 민암 목내선 이인좌 정희량 이현일의 남은 후손들이 백성의 불인(不忍)한 마음을 이용하여 창을 들고 도성과 대궐을 침범한다면 서인은 일망타진될 것이다"라고 주창함. 척양(斥洋) 즉, 서양세력의 일망타진보다 또 하나의 양적(洋賊)인 무신사태의 후손 등 남인세력의 일망타진에 척사의 비중을 더 두었음을 알 수 있으며, 집권 노론세력들은 조선이 망하는 그 시점까지 무신당(戊申黨)과 남인들 모두를 원수처럼 철저히 배척했음.
◦1908년(순종2년) 4월 30일: 신원(사면 복권)됨.
-이 때 우찬성 백호 윤휴, 이조판서 갈암 이현일 등도 신원됨.
◦1911년: 정인홍 문집이 전 15권 7책 실기 1권으로 발간됨.
◦1931년: ‘단재 신채호(신천영과 같은 고령申氏로 선조가 무신사태 때 연루되어 화를 당함)’는 여순 감옥에서 홍명희에게 쓴 편지에,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자신과 함께 매몰될지 모르겠다”고 하였고, 우리나라 삼걸(三傑)로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을 꼽았으며, 특히 정인홍의 개혁정신을 높이 평가함.
◦1983년: 영인본인「내암집」을 상하 2권으로 발간함.
◦1997년 12월: 정인홍 관련 고문서 및 서적, 교지 등 131점이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330, 331, 332호로 지정됨.
◦2003년 4월: (합천) 남명선생 선양회등의 요청으로 내암 사당인 청람사가 건립되고, 2004년 5월에는 부음정 개수 및 내암 표준영정이 제작됨.
◉1546년(명종1)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 지은 「영송(詠松)」
*소나무는 만11살인 ‘정인홍’ 자신을, 탑은 판결사(判決使)인 ‘양희(梁喜)’를 비유하여 지은 한시(漢詩). 그 후 정인홍은 ‘양희’의 사위가 됨.
작고 작은 외로운 소나무가 탑 서쪽에 서 있으니, 一尺孤松在塔西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서 서로 가지런하지 않네. 塔高松短不相齊
오늘날 외로운 소나무가 작다고 말하지 마오, 莫言此日松低塔
소나무가 자란 뒤에는 탑이 도리어 작으리. 松長他時塔反低
◉1595년 왜적과 화의(和議) 주장이 나오는 등 국론이 분열되자 ‘내암 정인홍’이 주화론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지은 「과무계(過茂溪)」
*現 고령 성산 무계지역을 지나면서 지은 한시(漢詩)
필마로 옛 싸움터 지나노라니, 匹馬經過舊戰場
강물은 한을 품고 유유히 흐르네. 江流遺恨與俱長
지금 그 누가 왜적과 주화하려 하는가, 於今誰唱和戎說
장군과 사병은 이미 원통하게 죽었는데. 將士當年枉死亡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총763건이 기록됨), 조선중기 사림파의 사회정치사상(한길사, 권인호), 정래암 사상 연구논총(내암선생 기념사업회), 1728년 무신사태 고찰(아이올리브, 조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