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산스님

변재중2006.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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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정읍 산외면 상두리 1523 보광사

 

스님은 저곳에 산다.

그러니까 저 찻집처럼 생긴것이 이름하여 보광사인데

본래 저곳 상두마을 터는 마을이 없고 "보광사"라는 절이 있었단다.

 

사진에 담아오지는 못했지만 마을 한가운데 빈터로 남아있는 옛 보광사 법당터를 보면 괘불대가 남아있다.

처음 보았을땐 당간지주석인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세 개가 나란히 있는 것이 틀림없이 괘불대다.

 

괘불은 법당 밖에서 큰 법회를 치를 때 걸어놓는 탱화를 말한다.

커다란 탱화를 걸기 위해 나무 기둥을 세우는 지주석을 괘불대라한다.

괘불대는 당간지주석에 비하면 작고 여러개인 경우도 있다.

 

반면 당간지주는 역시 법회를 열 때 세우는 절을 상징하는 깃발을 매다는 커다란 나무를 말한다. 당간지주를 세우는 지주석을 당간지주석이라 한다.

당간지주석은 크기가 일단 웅장하게 크다.

 

스님은 본래 선운사에서 출가하였는데 지금은 저곳에 토굴을 짓고 산다.

토굴이라면 수좌(보통 선방수좌들이라 일컫는데 절살림을 맡는다는가하는 소임을 맡지 않고 선방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을 통칭하여 수좌라 한다)들이 선방에 있지 않는 동안 거처하는 곳을 말하는데 말그대로 토굴인 경우도 잇고 시골집을 얻어 살거나 야산스님처럼 손수 짓기도 한다.

 

요즘은 아파트 토굴도 있단다. 아무튼 토굴이라하여 흙을 파서 만든 굴은 아니다. 스님들은 사물의 성격을 직접 지칭하여 부르기보다 애둘러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술을 곡차라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선방수좌들은 토굴 하나 얻어 나가 사는 것이 소망이란다. 걸리는 것 없이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스님들의 성격을 반영한 소망이 아닌가 싶다.

 

야산스님과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좋다.

스님과 이야기를하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서 가장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내게 나이를 떠난 여러 친구가 있지만 아직 스님처럼 내가 말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스님에게선 일체의 권위도 엿볼 수 없다. 그가 수행자라하여 성직자라하여 혹은 세속의 나이가 나보다 많다하여 불교 지식이 나보다 많다하여 그것을빌미로 권위를 내세운 적은 단 한순간도 없다. 오히려 스님은 내게 늘 묻는다. 물론 세상사는 이치나 정치사상, 유가철학이나 속가의 일들이야 내가 더 많이 알겠으나 나 또한 그러한 것들을 빌미로 스님을 얕본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또한 스님은 타종교, 타철학을 비방하거나 얕잡아 보는 것을 본적이 없다. 배척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유가공부를 하기를 권하자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예기의 책을 빼곡하게 사서 읽고 오히려 내게 그것들에 대해 느낀바를 이야기 하실 때는 학자적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물론 타종교나 철학들에 대한 불교의 자부심을 은근히 내비치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미얀마에서 6개월간 수행을 하기도 한 스님은 조계종이나 선불교만을 일방적으로 찬양하시지도 않는다. 선불교 혹은 화두선만을 지고지순하다 말씀하시지 않는다. 소위 남방불교를 체험하고나서 그들의 수행방법이나 공부가 수준이 좀 낮다는 말을 잊지는 않으셨지만 말이다.

 

여튼 미얀마를 다녀오신 스님은 사고의 영역이 더 넓어진 느낌이다.

 

1년이면 몇 차례씩 스님에게 다녀온다. 물론 득달같이 다녀가라는 스님의 전화가 빗발쳐서야 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하지만(세속에 매이지 않는 스님들이야 맘 내키면 훌쩍 몸을 일으키기가 쉽겠지만 이런 저런 일에 매여 있는 나는 맘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스님은 그걸 잘 이해하시지 못하여 야속할 때가 가끔 있다) 그곳에 가면 늘 마음이 편안하다.

 

그곳에 가면 스님과 하루 종일 수다를 떨고도 모자라 밤새 수다를 떨곤 한다. 비스듬히 누워서 발을 까닥거리면서 울다가 웃다가 낄낄거린다.

 

벌써 스님과 알고 지낸지 여러해이고 절에 다닌지도 여러해지만 아직 새벽 예불을 드리거나(다른 절에서도 마찬가지다. 절에가서 숙박을 하게 돼면 새벽예불에 참여하는 건 일종의 예의에 속하는데 난 내 맘내키는대로 한다. 하기 싫으면 안하는 것이다.)부처님께 절을 드린 적이 없으나 요번엔 부처님께 향을 올리고 절을 드렸다.

 

부처님께 삼귀의라하여 세 번 절 한다. 원불교에선 네 번 절한다. 약간의 향값도 올렸다. 돌덩이, 나무 덩어리에 절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없지않으나 돌덩이, 나무 덩어리에 절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나를 낮추는 것 하심(下心)이라는 것에 딱히 동의하여 그리한 것이 아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진심으로 내 몸을 낮추는 것이 얼마나 겸손한 일이냐.

또한 내가 살아오면서 단 한순간이라도 내 자신이 아닌 것에 몸을 낮추어 본적이 있는가. 성경을 읽으면서 논어를 읽으면서 불경을 읽으면서 인간 공자와 예수, 석가를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단 한순간이라도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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