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와 7세기 초반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보면,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진정책을 취하였으며, 중원에서는 3세기 이래로 후한(後漢, 25∼220)이 멸망하고 220∼589까지 16국 시대,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를 거치며 30여개 이르는 군소국가가 명멸해 가는 동안 고구려는 수세기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며 그 당시까지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동아시아 최대강국으로 군림했다.
북주(北周)가 북제(北齊)를 멸망시켜 북조(北朝)를 통일하였고 분열된 중원을 양견(楊堅)이 581년 북주(北周)의 왕실을 폐하고 나라를 개창하고 수를 건국한다. 이어 589년에는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킴으로서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원을 평정한다. 이로써 고구려와 수나라는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다는 명분아래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이고 국제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수나라는 북쪽의 돌궐과 고구려를 압박해 오기 시작하였으며, 고구려와 수는 상호 사신을 보내 각국의 정세와 지리를 염탐하였다. 수가 비밀리에 30만 대군을 징집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한 영양왕( 陽王)은 침략야욕에 맞서 598년 요서(遼西)지방을 선제공격 하게된다. 그리하여 수나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구려를 공격한다. 하지만 강이식 장군에게 수나라 30만 대군은 불귀의 객(不歸의 客)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수나라의 1차 침입이다. 2차 침입 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살수(薩水)에서 수의 30만 대군을 전멸시켰다면 1차 침입에서는 또 다른 영웅 강이식 장군이 있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에 가려 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우리 민족의 영웅이며 이에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 해보고자 한다.
수(隋)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597년(영양왕 8) 국력을 과시하면서 고구려의 영양왕을 자신의 신하처럼 묘사했습니다. "고구려의 요수(遼水, 遼河)보다 수의 장강(長江, 揚子江)이 길고 한 명의 장군으로 고구려쯤은 능히 정벌할 수 있으니(후일 당태종도 당군의 군세(軍勢)만 믿다가 양만춘과 연개소문에게 참패한다) 수나라에 충성을 다하라"는 오만 무례한 국서를 보내왔습니다.
개황 17년 수 문제는 고구려가 진(陳)이 수나라에 패망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다음은 고구려를 칠 것이라고 판단하여 군사를 징모하는 한편 군량을 비축하여 국방에 대비한다는 첩보를 보고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책망하노니, "고구려가 번국(蕃國)이라 하나 성의가 없으니 중원 변경의 작은 지방으로서 인구가 적고 땅이 좁다고 하여도 그 왕을 한 번 내치면 공석으로 둘 수 없고 새로 통치자를 정해야 하는데 있는 왕을 위무하니 왕이 말하는 요하가 크다고 하나 장강과 같지 못하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하나 진나라(陳) 인구만 못하니 마음을 돌려 신복하면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니 짐이 없다면 누가 (고구려를) 보전케 하랴! 그대의 지난 허물을 문책하고자 한다면 큰 힘을 들일 것도 없이 한 장수를 보내 문책할 것이나 은근히 이르나니 왕호(王號)를 허락하는 바 그간 생각을 새로이 하기 바라오." 라고 국서를 보냈다.
천하를 호령하고 사해를 평정한 태왕(太王)의 나라 고구려에 이제 겨우 중원을 통일한 애송이 수나라가 병력만 믿고 모욕적인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대책에 들어간다. 강이식이 무력으로 맞설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영양왕은 598년 말갈병 1만을 동원하여 요서(遼西)지방을 선제공격 하였다. 수나라의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은 수성전을 벌이자 고구려군은 임유관(현 山海關)으로 거짓 후퇴하였다.
그 해 6월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績)을 원수로 삼아 30만 대군을 임유관(山海關)으로 보내고, 주나후(周羅喉)를 수군총관(水軍摠管)으로 삼아 해로를 통하여 평양을 치고자 하였다. 강이식은 5만의 정병을 이끌고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요서(遼西)로 나아갔다. 그는 주나후의 수군(水軍)이 평양으로 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양(諒)을 지원하는 보급선단임을 간파하고 수군(水軍)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주나후의 군량선을 급습하여 섬멸시키고 많은 군자(軍資)·기기(器機) 등을 노획하여 수나라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군중(軍中)에게는 벽루(壁壘, 성채)를 지키라고 명하여 출행하지 않았다.
수군(隋軍)은 군량이 떨어지고 후속 보급이 끊기게 되자 지휘체계는 무너지고 수나라 장수들은 회군의 불가피 함을 수문제에게 알려 회군을 시작하여 패수(浿水)를 건너니 임유관(山海關)은 이미 고구려군이 먼저 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 고구려군의 용맹과 강이식 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술 앞에서 30만 수군은 거의 섬멸되고 싸우지 않고 달아난 자는 굶어죽고 과거 조선(BC 2,333∼BC 108)과 한나라(BC 202∼AD 8, 前漢)의 국경지대였던 패수(浿水)변의 임유관 일대는 시체로 뒤덮였다. 전투병은 30만이었지만 운량병(運粮兵)까지 합하면 약 100만의 시체가 널려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진시황(재위 BC 246∼BC 210)과 한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 재위 BC 202∼BC 195)이 통곡할 일이었습니다. 이후 수나라에서 고구려 요동출정군(遼東出征軍)이라 하면 결사도피(決死逃避)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고구려의 강력함은 민간에 널리 전해져 공포를 심어줬습니다.
수서(隋書)의 기록을 보면 '九月己丑師還死者什八九' -- 9월 기축 출정군이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10중 8, 9였다.
수 문제(隋 文帝)는 애써 "군사들은 운량관의 잘못으로 군량미가 떨어져 죽고 수군은 태풍으로 배가 가라앉아 죽었다" 고 공포하여 혼란한 민심을 달래고 정치적 모면키 위해 고구려와의 휴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화친의 국서(國書)를 영양왕에게 보내왔다.
수부총관(征隋副摠管)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계속 추격하여 수문제가 머무는 동도(東都:東京, 현 낙양)를 포위하여 그를 사로잡겠다고 表를 올려 명령을 받았지만 고구려 역시 손해가 적지 않았고 백제가 고구려의 배후를 침공할 것을 우려해 전쟁을 종결짓기로 하고 수나라 왕에게 답서를 보낸다.
대고구려 황제는 수문왕(황제가 아닌 왕으로 표현)에게 글월을 보내노니 지난날 천도가 불순함으로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뭇 호걸이 사방에서 일어나 만민이 도탄에 빠진 때에 그대 왕문에서 대의를 잡고 일어서서 흉악한 무리들을 진압하고 해내를 안정하였는바 이는 비단 그대 왕문의 영광일뿐 아니라 만천하에 다행한 일이라. 짐 또한 이와 같은 세상을 덮는 대덕을 멀리서 경행한 바이오. 그러나 이번에 뜻밖에 우리나라를 침공함은 불법무도한 행동이라 요서는 본래 수나라의 땅이 아니며 우리나라는 열성조이래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아니하는데 지난날 위 나라의 요망한 장수 모구검이 우리를 침범한 후부터 지금까지 침략을 계속하였는바 옛날에 한고왕과 조선사이 패수를 국경으로 한다는 약정을 하였으니 자세히 그 사실을 살펴서 참고하여 주기 바라며, 이번 대전은 이웃나라끼리 싸워서 수나라군병이 요서와 패수에서 다수 죽어 짐이 또한 연민의 애도를 표하는바 왕의 표를 접하여 보니 과연 전과를 뉘우침이라. 지난 일은 필연코 측신에 망령된 자가 있어 일을 그르친 것이라 여겨진다. 이로써 위로하는 짐의 뜻을 전하는 바이요. 또한 이웃끼리의 친선을 위하여 지난날을 허물치 아니하며 앞날의 선린을 원하는 바이오.
이에 수문왕은 영양왕의 국서를 받아보고 부끄럽고 분하였다. 그러나 감정을 감추고 고구려에서 항복한다고 사신이 왔다고 공표하는 어처구니없는 자존심을 부리기도 했다.
강이식 장군의 발해만 해상에서의 승리는 수나라의 2차 침입 당시 을지문덕이 우중문과 우문술의 30만 대군과 대응하고 있는 동안 해상에서 후에 영류왕이 된 건무태자((建武太子)가 이끄는 고구려 수군이 물자조달을 맡은 수나라 내호아(來護兒)의 수군을 대동강 인근 해상에서 궤멸시키고, 안시성 전투에서도 발해만 해상에서 지원하던 당(唐)의 수군을 격파시켜 당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안시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원동력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그 당시 고구려의 해군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조선산업이 세계 1위의 기술력(技術力)과 수주력(受注力)을 자랑하고 있음은 고구려인들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서와 중국 사서의 기록을 인용한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에는 "장마로 인한 질병·풍랑으로 수군(隋軍)이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퇴각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산해관 인근의 해양에는 음력 6월에는 태풍이 거의 없으며(사실 태풍은 대만, 일본, 한국을 지나가며 서해를 관통하여 중국 산동성을 넘는다 해도 세력이 거의 약화된 상태가 된다), 사실 장마가 온다해도 간헐적으로 비가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장마와 전염병에 시달렸다해도 전략상 바로 퇴각을 했을 것이다. 이는 대국의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춘추사관(春秋史觀)에 의한 기록임이 자명하다.
그 뒤 수나라 양제(煬帝)는 돌궐족을 복속시킨 뒤, 612년 113만 3,800명이라는 세계 전쟁역사상 최대의 대군을 이끌고 요하(遼河)를 건너다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으며 어렵게 방어벽을 뚫고 요동성(遼東城, 遼陽)에서 수개월 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고구려군의 철벽방어는 수군을 지치게 했다.
그러자 양제(煬帝)는 다시 우중문과 우문술을 보내 30만 병력으로 침입해왔으나, 명장(名將)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살수(薩水)에서 위장패전전술(僞裝敗戰戰術)을 이용 적을 유인하고 매복작전에 이은 총공격으로 섬멸함으로써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에 불과하였다.
신채호(申采浩)가 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는 강이식 장군에 대해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의 내용을 인용하였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강이식 장군은 수나라 30만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의 명장이며 진주 강씨(姜氏)의 시조(始祖)이며 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서기 600년 전후로 활동한 고구려 장군이다. 묘(墓)는 현재 중국 요녕성 심양현(瀋陽縣) 원수림역(元帥林驛) 앞에 있으며 "兵馬元帥姜公之塚(병마원수강공지총)" 이란 큰비가 있었으나 중국 문화혁명 때 현대 중국 혁명가 장작림(張作霖)의 묘를 성역화하면서 주변의 고총(古塚)들을 모두 매몰하는 바람에 지금은 거북좌대만 남아 있다.
고구려의 잊혀진 영웅 ' 강이식 '
강 이 식 (姜以式, General Kang E-sik)
6세기와 7세기 초반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보면,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진정책을 취하였으며, 중원에서는 3세기 이래로 후한(後漢, 25∼220)이 멸망하고 220∼589까지 16국 시대,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시대를 거치며 30여개 이르는 군소국가가 명멸해 가는 동안 고구려는 수세기 동안 태평성대를 누리며 그 당시까지 6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동아시아 최대강국으로 군림했다.
북주(北周)가 북제(北齊)를 멸망시켜 북조(北朝)를 통일하였고 분열된 중원을 양견(楊堅)이 581년 북주(北周)의 왕실을 폐하고 나라를 개창하고 수를 건국한다. 이어 589년에는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킴으로서 남북조로 분열되었던 중원을 평정한다. 이로써 고구려와 수나라는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다는 명분아래 동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이고 국제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수나라는 북쪽의 돌궐과 고구려를 압박해 오기 시작하였으며, 고구려와 수는 상호 사신을 보내 각국의 정세와 지리를 염탐하였다. 수가 비밀리에 30만 대군을 징집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한 영양왕( 陽王)은 침략야욕에 맞서 598년 요서(遼西)지방을 선제공격 하게된다. 그리하여 수나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구려를 공격한다. 하지만 강이식 장군에게 수나라 30만 대군은 불귀의 객(不歸의 客)으로 사라진다. 이것이 수나라의 1차 침입이다. 2차 침입 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살수(薩水)에서 수의 30만 대군을 전멸시켰다면 1차 침입에서는 또 다른 영웅 강이식 장군이 있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에 가려 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우리 민족의 영웅이며 이에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 해보고자 한다.
수(隋)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597년(영양왕 8) 국력을 과시하면서 고구려의 영양왕을 자신의 신하처럼 묘사했습니다. "고구려의 요수(遼水, 遼河)보다 수의 장강(長江, 揚子江)이 길고 한 명의 장군으로 고구려쯤은 능히 정벌할 수 있으니(후일 당태종도 당군의 군세(軍勢)만 믿다가 양만춘과 연개소문에게 참패한다) 수나라에 충성을 다하라"는 오만 무례한 국서를 보내왔습니다.
隋文帝 開皇十七年 高麗王湯聞陳亡 大懼 治兵 積穀 爲拒守之策是 歲常賜湯 爾書責以 雖稱藩附 誠節未盡 且曰 彼之一方 雖地挾人少 今若黜王 不可虛置 終須更選官屬 就彼安撫 王若酒心易行 卒由憲章 卽是朕之良臣 何勞別遣方彦也…王謂遼水之廣 何如長江 高麗之人多少 陳國 朕若不存含育 責王前愆 命一將軍何待多力 殷勤曉示 許王自新耳
개황 17년 수 문제는 고구려가 진(陳)이 수나라에 패망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다음은 고구려를 칠 것이라고 판단하여 군사를 징모하는 한편 군량을 비축하여 국방에 대비한다는 첩보를 보고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책망하노니, "고구려가 번국(蕃國)이라 하나 성의가 없으니 중원 변경의 작은 지방으로서 인구가 적고 땅이 좁다고 하여도 그 왕을 한 번 내치면 공석으로 둘 수 없고 새로 통치자를 정해야 하는데 있는 왕을 위무하니 왕이 말하는 요하가 크다고 하나 장강과 같지 못하며, 고구려 인구가 많다하나 진나라(陳) 인구만 못하니 마음을 돌려 신복하면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니 짐이 없다면 누가 (고구려를) 보전케 하랴! 그대의 지난 허물을 문책하고자 한다면 큰 힘을 들일 것도 없이 한 장수를 보내 문책할 것이나 은근히 이르나니 왕호(王號)를 허락하는 바 그간 생각을 새로이 하기 바라오." 라고 국서를 보냈다.
천하를 호령하고 사해를 평정한 태왕(太王)의 나라 고구려에 이제 겨우 중원을 통일한 애송이 수나라가 병력만 믿고 모욕적인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대책에 들어간다. 강이식이 무력으로 맞설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영양왕은 598년 말갈병 1만을 동원하여 요서(遼西)지방을 선제공격 하였다. 수나라의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韋沖)은 수성전을 벌이자 고구려군은 임유관(현 山海關)으로 거짓 후퇴하였다.
그 해 6월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績)을 원수로 삼아 30만 대군을 임유관(山海關)으로 보내고, 주나후(周羅喉)를 수군총관(水軍摠管)으로 삼아 해로를 통하여 평양을 치고자 하였다. 강이식은 5만의 정병을 이끌고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요서(遼西)로 나아갔다. 그는 주나후의 수군(水軍)이 평양으로 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양(諒)을 지원하는 보급선단임을 간파하고 수군(水軍)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주나후의 군량선을 급습하여 섬멸시키고 많은 군자(軍資)·기기(器機) 등을 노획하여 수나라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군중(軍中)에게는 벽루(壁壘, 성채)를 지키라고 명하여 출행하지 않았다.
수군(隋軍)은 군량이 떨어지고 후속 보급이 끊기게 되자 지휘체계는 무너지고 수나라 장수들은 회군의 불가피 함을 수문제에게 알려 회군을 시작하여 패수(浿水)를 건너니 임유관(山海關)은 이미 고구려군이 먼저 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 고구려군의 용맹과 강이식 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술 앞에서 30만 수군은 거의 섬멸되고 싸우지 않고 달아난 자는 굶어죽고 과거 조선(BC 2,333∼BC 108)과 한나라(BC 202∼AD 8, 前漢)의 국경지대였던 패수(浿水)변의 임유관 일대는 시체로 뒤덮였다. 전투병은 30만이었지만 운량병(運粮兵)까지 합하면 약 100만의 시체가 널려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진시황(재위 BC 246∼BC 210)과 한나라 고조(高祖)인 유방(劉邦, 재위 BC 202∼BC 195)이 통곡할 일이었습니다. 이후 수나라에서 고구려 요동출정군(遼東出征軍)이라 하면 결사도피(決死逃避)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고구려의 강력함은 민간에 널리 전해져 공포를 심어줬습니다.
수서(隋書)의 기록을 보면 '九月己丑師還死者什八九' -- 9월 기축 출정군이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10중 8, 9였다.
수 문제(隋 文帝)는 애써 "군사들은 운량관의 잘못으로 군량미가 떨어져 죽고 수군은 태풍으로 배가 가라앉아 죽었다" 고 공포하여 혼란한 민심을 달래고 정치적 모면키 위해 고구려와의 휴전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화친의 국서(國書)를 영양왕에게 보내왔다.
수부총관(征隋副摠管)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계속 추격하여 수문제가 머무는 동도(東都:東京, 현 낙양)를 포위하여 그를 사로잡겠다고 表를 올려 명령을 받았지만 고구려 역시 손해가 적지 않았고 백제가 고구려의 배후를 침공할 것을 우려해 전쟁을 종결짓기로 하고 수나라 왕에게 답서를 보낸다.
大高句麗皇帝致書于隋文王麾下耳往時天道不順以天下大亂群雄厥起於四方而萬民陷墜塗炭之際貴王門?義伐凶終乃鎭壓海內一統乎此非但貴王室家之譽誠天下萬民之大幸焉朕亦如此蓋世之盛遠爲慶幸不己之念焉雖然今此不想侵功我彊境不法無謀之擧乎遼西之土本不隋地也我皇朝累世宗社絶不侵他邦往時魏妖將母丘儉犯境來侵以後連年兵擾于今矣昔旣漢高祖劉邦和朝鮮約定于浿水爲界詳悉故事之明然依考爲之如促王之察焉今番大戰於兩後而隋國軍兵橫死於遼西浿水之?者無數而朕亦憐憫不己是今接王表至此果見認前過之悔是幸則今擧者王之傍側妄臣之誤乎以慰朕慮兼且由望願後好以不咎先愆以垂深慮也留不具比平陽九年冬至大高句麗國皇帝 戒書. 漏錄補記
대고구려 황제는 수문왕(황제가 아닌 왕으로 표현)에게 글월을 보내노니 지난날 천도가 불순함으로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뭇 호걸이 사방에서 일어나 만민이 도탄에 빠진 때에 그대 왕문에서 대의를 잡고 일어서서 흉악한 무리들을 진압하고 해내를 안정하였는바 이는 비단 그대 왕문의 영광일뿐 아니라 만천하에 다행한 일이라. 짐 또한 이와 같은 세상을 덮는 대덕을 멀리서 경행한 바이오. 그러나 이번에 뜻밖에 우리나라를 침공함은 불법무도한 행동이라 요서는 본래 수나라의 땅이 아니며 우리나라는 열성조이래 남의 나라를 침략하지 아니하는데 지난날 위 나라의 요망한 장수 모구검이 우리를 침범한 후부터 지금까지 침략을 계속하였는바 옛날에 한고왕과 조선사이 패수를 국경으로 한다는 약정을 하였으니 자세히 그 사실을 살펴서 참고하여 주기 바라며, 이번 대전은 이웃나라끼리 싸워서 수나라군병이 요서와 패수에서 다수 죽어 짐이 또한 연민의 애도를 표하는바 왕의 표를 접하여 보니 과연 전과를 뉘우침이라. 지난 일은 필연코 측신에 망령된 자가 있어 일을 그르친 것이라 여겨진다. 이로써 위로하는 짐의 뜻을 전하는 바이요. 또한 이웃끼리의 친선을 위하여 지난날을 허물치 아니하며 앞날의 선린을 원하는 바이오.
이에 수문왕은 영양왕의 국서를 받아보고 부끄럽고 분하였다. 그러나 감정을 감추고 고구려에서 항복한다고 사신이 왔다고 공표하는 어처구니없는 자존심을 부리기도 했다.
강이식 장군의 발해만 해상에서의 승리는 수나라의 2차 침입 당시 을지문덕이 우중문과 우문술의 30만 대군과 대응하고 있는 동안 해상에서 후에 영류왕이 된 건무태자((建武太子)가 이끄는 고구려 수군이 물자조달을 맡은 수나라 내호아(來護兒)의 수군을 대동강 인근 해상에서 궤멸시키고, 안시성 전투에서도 발해만 해상에서 지원하던 당(唐)의 수군을 격파시켜 당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안시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원동력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그 당시 고구려의 해군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조선산업이 세계 1위의 기술력(技術力)과 수주력(受注力)을 자랑하고 있음은 고구려인들의 피를 이어받아서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서와 중국 사서의 기록을 인용한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에는 "장마로 인한 질병·풍랑으로 수군(隋軍)이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퇴각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산해관 인근의 해양에는 음력 6월에는 태풍이 거의 없으며(사실 태풍은 대만, 일본, 한국을 지나가며 서해를 관통하여 중국 산동성을 넘는다 해도 세력이 거의 약화된 상태가 된다), 사실 장마가 온다해도 간헐적으로 비가 내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장마와 전염병에 시달렸다해도 전략상 바로 퇴각을 했을 것이다. 이는 대국의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춘추사관(春秋史觀)에 의한 기록임이 자명하다.
그 뒤 수나라 양제(煬帝)는 돌궐족을 복속시킨 뒤, 612년 113만 3,800명이라는 세계 전쟁역사상 최대의 대군을 이끌고 요하(遼河)를 건너다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으며 어렵게 방어벽을 뚫고 요동성(遼東城, 遼陽)에서 수개월 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고구려군의 철벽방어는 수군을 지치게 했다.
그러자 양제(煬帝)는 다시 우중문과 우문술을 보내 30만 병력으로 침입해왔으나, 명장(名將)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살수(薩水)에서 위장패전전술(僞裝敗戰戰術)을 이용 적을 유인하고 매복작전에 이은 총공격으로 섬멸함으로써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에 불과하였다.
신채호(申采浩)가 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는 강이식 장군에 대해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의 내용을 인용하였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강이식 장군은 수나라 30만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의 명장이며 진주 강씨(姜氏)의 시조(始祖)이며 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서기 600년 전후로 활동한 고구려 장군이다. 묘(墓)는 현재 중국 요녕성 심양현(瀋陽縣) 원수림역(元帥林驛) 앞에 있으며 "兵馬元帥姜公之塚(병마원수강공지총)" 이란 큰비가 있었으나 중국 문화혁명 때 현대 중국 혁명가 장작림(張作霖)의 묘를 성역화하면서 주변의 고총(古塚)들을 모두 매몰하는 바람에 지금은 거북좌대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