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4월 26일. 경남 의령군 궁유면 토곡리 일대 시골 마을에 난데없는 총성이 울렸다.
의령경찰서 궁유지서에 근무하던 우범곤(禹範坤·당시 27세) 순경이 만취 상태에서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수류탄 7발과 카빈소총 2정, 실탄 180발을 들고 나와 토곡리 등 인근 5개 마을을 돌며 무고한 주민들에게 총을 무차별 난사한 것.
우 순경은 토곡리 우체국에서 일하던 전화교환원을 살해하고 외부와 통신을 두절시킨 뒤 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마구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이로 인해 56명이 사망하고 3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희생자 중에는 생후 1주일 된 영아도, 70세 넘은 할머니도 있었다.
우 순경의 만행은 8시간 동안 계속됐다. 마을을 빠져 나간 주민의 신고로 사건을 접수한 의령경찰서는 뒤늦게 우 순경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기동대를 출동시켰지만 그는 자취를 감췄다. 우 순경은 다음날 새벽 인근 평촌리 서모 씨의 집에 몰래 들어가 서 씨의 부인 등 2명을 죽이고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했다.
당시 경찰은 평소 술버릇이 나빴던 우 순경이 내연의 처와 말다툼을 벌인 뒤 흥분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써야 할 총을 경찰이 무고한 주민에게 마구 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이 초래한 파문은 적지 않았다. 사건 당일 온천에 놀러가 자리를 비운 궁유지서장 등 4명이 구속됐고 내무부 장관이 사임했다.
잊혀질 만하면 터져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이런 ‘무차별 살인’ 사건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이어가며 벌어진 경기 화성 연쇄살인사건, 1994년 지존파 및 온보현 사건, 1996년 막가파 사건에 이어 2004년엔 유영철 사건이 세상을 경악케 했다. 최근 드러난 ‘봉천동 자매 살해사건’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 같은 강력범죄가 터질 때마다 등장해 논란이 되는 것이 ‘사형제 존폐론’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반인륜적 범죄자의 인권까지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 1986~1988
경기도 화성에서 발생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0건이나 되는데도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희생자들이 모두 여성들이고 성폭행을 당한 뒤에 잔인하게 살해되어 한동안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하고 건국이래 최대의 미스터리, 화성은 밤이 되면 유령의 거리…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은 조심하라는 유행어까지 남길 정도로 화제가 되었으나 범인은 끝내 검거되지 않고 어느덧 무심한 세월 속에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대략을 살펴본다.
1차사건 : 1986년 9월19일 오후 2시 발견, 이순분(가명 71세. 태안읍 안녕리)이 마을 앞 목초 밭에서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됨. 하의가 벗겨져 있었으나 별다른 폭행 흔적은 없음. 일주일 전 쯤 살해된 것으로 추정.
2차사건 : 1986년 10월23일 오후 2시50분 발견, 박순애(가명 25세. 직장인. 송탄시 신장동)가 진안리 농수로에서 알몸의 시체로 발견됨.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살해되고 강간 흔적 있음. 등과 하체에 심한 상처. 양손이 뒤로 묶여 있음.
3차사건 : 1987년 4월23일 오후 2시 발견, 권숙경(가명 26세. 직장인. 태안읍 안녕리)이 공장 옆의 울타리 넝쿨 밑에서 시체로 발견됨. 양손이 묶인 채 하의가 벗겨져 있음. 시체가 부패되어 몇 달 전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됨. 현장에 도장이 떨어져 있고 피해자의 옷으로 겨우 신원을 확인함.
4차사건 : 1986년 12월21일 낮 12시30분 발견. 이정애(가명 23세. 정남면 관항리)가 약혼자를 만나고 귀가하다가 살해된 뒤에 관항천에서 시체로 발견됨. 옷이 입혀져 있고 하체에 심한 상처. 강간 흔적 있음. 시체는 일주일 전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됨.
5차사건 : 1987년 1월11일 오전 10시30분. 홍미경(가명 18세. 고등학생. 태안읍 황계리)양이 병점읍 외곽을 흐르는 황구천 둑에서 피해자의 목도리로 목이 졸린 시체로 발견됨. 양손은 스타킹과 브래지어로 뒤에서 묶여 있고 입에 재갈이 물려 있음. 피해자 국부에서 B형 혈액형 검출. 1월10일 밤 8시30분쯤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됨.
6차사건 : 1987년 5월9일 오후 3시 발견. 박혜정(가명 29세. 주부. 병점읍 진안리)씨가 진안리 야산에서 하교하는 초등학교 학생들에 의해 시체로 발견됨. 시체는 브래지어, 내의 블라우스로 각각 세 차례 목이 졸리고. 목 어깨 등에 돌로 찍은 듯한 상처. 팬티, 청바지는 입은 채로 살해되어 있고 폭행 흔적 없음.
7차사건 : 1988년 9월8일 오전 9시 발견. 안영자(가명 54세. 주부. 팔탄면 가재리)씨가 블라우스로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됨. 입에 재갈. 양손 뒤로 묶여 있고 강간 흔적. 먹던 복숭아가 국부 안에서 발견됨.
8차사건 : 1988년 9월16일 오전 6시30분 발견. 박지영(가명 14세. 중학생. 태안읍 진안리)양이 집에서 잠자다가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됨. 폭행 흔적. 남자의 체모 발견. 감정 결과 B형 혈액형 발견. 체모에서 티타늄원소가 분석됨.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여섯 번째인 박혜정씨의 사체가 발견될 때까지 일반적인 개별 살인사건으로 여겨져 그다지 국민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관할 경찰서인 화성경찰서가 병점지서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자체 수사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딸이 셋 있는 주부 박혜정씨 사건이 발생하면서 매스컴의 집중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화성은 수원과 오산 사이에 있는 평범한 농촌으로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이 들어서기 전에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그러나 공단이 생기면서 갑자기 유동인구가 많아지고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 필연적으로 성범죄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게다가 경기도 남부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수원과 인접해 있어서 당시에 1년 평균 강간 사건이 40여건이나 발생하는 등 문제가 많은 지역이었다.
매스컴에서 두 번째 연쇄살인사건으로 꼽히고 있는 박순애 살인사건은 그녀의 사체가 농수로에서 알몸으로 발견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그 동안의 단순 강간살인에서 범인의 범행이 피해자의 옷을 벗기고 희롱할 정도로 점점 대범하게 발전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경찰은 박순애 살인사건 현장에서 범행의 단서가 될만한 유류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필자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설로 쓰기 위해 화성을 3개월 정도 걸려서 취재했다. 살인사건 현장을 직접 답사했고 수사본부에도 찾아가 보고 피해자 가족들도 만나보았다. 그 결과 살인사건 현장이 대부분 농로, 야산, 개울둑이어서 범인들의 유류품을 찾지 못한 것이 수사에 가장 어려운 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쇄살인의 첫 번째 살인사건인 이순분 할머니 살인사건은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화성에서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연쇄살인 사건 1호로 기록되게 되었다.
세 번째 살인사건은 시체가 발견된 것이 너무나 늦어서 시체의 신원을 밝히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므로 특별한 단서를 찾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그녀의 시체가 완전히 부패했기 때문에 옷가지와 근처에서 발견된 도장으로 겨우 신원을 확인했을 정도였다.
네 번째 살인사건인 이정애양이 살해된 것은 관항천 옆의 논둑이었다. 그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약혼자와 데이트를 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 11시경에 귀가하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농로에서 관항천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범인은 그녀의 국부를 우산대로 난자한 뒤에 깻단, 짚더미 등으로 덮어 두어 시체가 여러 날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그러나 사체가 일주일이나 지나서 발견되었고, 비가 와서 유류품이 모두 쓸려가는 바람에 경찰은 역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정애양은 그후에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다섯 번째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고등학교 3학년인 홍미경양이었다. 홍미경양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도대표 탁구선수를 할 정도로 운동에 소질이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상업학교로 진학을 한 뒤에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자 사건 당일 취직을 하러 수원에 나갔다. 부친은 학교나 졸업한 뒤에 취직을 하라고 했으나 효녀인 그녀는 하루빨리 취직을 하여 집안을 돕겠다고 이력서를 써가지고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밤 8시30분 그녀는 귀가하다가 황구천 둑에서 살해되었다. 그녀는 귀가할 때 큰길로 돌아왔으면 살인마의 마수를 피할 수 있었으나 지름길로 돌아오기 위해 인적이 없는 개울가 둑길을 이용하여 집으로 돌아오다가 살해된 것이다. 부친의 진술에 의하면 다음날 경찰이 데리러 와서 현장에 가보니 딸이 죽어 있었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해 취재하는 필자를 가슴 아프게 했다. 사체는 짚단으로 덮여 있었다. 홍미경양의 살인사건은 사건 발생 1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으나 용의주도한 범인은 단서를 남기지 않아 지능범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여섯 번째 살인사건은 딸이 셋이 있는 가정주부에 대한 살인사건이었다. 주부 박혜정은 사건 당일 남편이 취직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자 그를 마중하러 집 앞에 있는 수인산업도로의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그날은 비가 억수 같이 내려서 귀가하던 마을 사람들이 그녀가 우산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밤11시 이후 행방이 묘연해 졌다. 그녀는 11시 이후 범인에게 마을 앞 야산으로 끌려올려가 살해된 것이다. 그녀의 구두가 논둑에 버려져 있었고 사체가 유기된 야산은 집 앞에서 훤히 바라보이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그녀는 귀가하는 초등학생들에 의해 나뭇가지에 덮여 있는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일곱 번째 살인사건은 54세가 되는 주부가 피해자다. 안영자씨는 아들이 하는 분식집에서 일을 하고 팔탄면 가재리에서 버스를 내려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농로를 가로지르는 작은 개울둑에서 범인을 만나 살해되었다. 안영자씨가 살해될 무렵은 9월이어서 개울둑 옆의 논에는 벼가 무성했다. 그리고 개울둑에는 커다란 포플러나무가 서 있어서 그날의 참극을 모두 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가 현장을 취재하러 갔을 때는 89년 겨울인데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수원에서 팔탄으로 가는 넓은 국도 옆에 있는 작은 둑에도 겨울비가 음산하게 내리고 있어서 마음이 착잡했다.
여덟 번째 살인사건은 중학생이 집안에서 잠을 자다가 변을 당한 사건이다. 그 학생이 살해된 것도 9월인데 사건 당일 MBC에서 인현왕후를 방송하여 가족들이 모두 그 방송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언니는 안방에서 잠을 잤고 박양은 작은 방에서 잠을 잤다. 필자가 만난 박양의 언니는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범인은 그 언니를 성폭행하려고 침입했다가 언니가 없고 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동생을 살해한 뒤에 성폭행을 했다고 한다. 범인의 유류품으로 체모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수거하여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범인의 체모를 분석한 결과 티타늄원소가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티타늄원소는 용접공들이 많이 사용하는 용접봉에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용접할 때 용접공들의 인체로 들어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경찰은 즉시 화성 일대의 용접공들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성의 전과자, 우범자를 저인망식으로 수사했으나 용접공들을 수사하게 된 것은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마침내 농기계수리공인 청년이 리스트에 올랐다. 경찰은 용의자에게서 머리칼을 수거하여 감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범인의 체모에서 검출된 티타늄원소가 용의자의 머리카락에서도 발견되었다. 경찰은 용의자를 검거하고 자백을 받아냈다. 범인은 화성연쇄살인과는 관계가 없었다.
화성연쇄 살인사건의 하나로 꼽히는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 살인사건은 계모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으로 밝혀져 제외되었다.
아홉 번째 화성연쇄 살인사건은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던 정미숙(가명. Y여고 2학년. 16세)이 수원시 오목천동 농수로에서 1989년 7월9일 알몸의 시체로 발견되어 전국을 놀라게 했다. 숨진 정양은 가슴은 예리한 흉기로 도려내져 있었고 옷이 벗겨져 거의 반듯하게 농수로에 눕혀지고 풀숲으로 덮여 있었다. 경찰은 하루가 지난 다음날 10일 인근에서 범인이 버린 것으로 보이는 정양의 유부와 책가방을 찾아냈다. 그러나 유력한 단서를 찾는데는 실패하여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다.
화성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중에 열 번째 사건으로 밝혀진 것은 14세의 중학생으로 학교에서 귀가하다가 행방불명이 되어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다. 살인마는 이 여학생을 성폭행 한 뒤에 살해하여 경찰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화성 주민들을 또 다시 공포에 떨게 했다. 이 사건에서도 범인은 검거되지 않아 주민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는 시간이다. 첫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어언 14년, 그 동안 연인원 10만명이 넘는 베테랑 형사들이 투입되고 살인마를 체포하는 경찰은 2계급 특진을 시키고 범인을 제보하는 시민들에게는 5천만원의 현상금까지 걸었으나 미제사건으로 남아 아쉬움이 많다.
정남규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사건 2004~2005
경찰은 28일 봉천동 세자매 살인사건 등 서울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용의자 정남규가 저지른 네 건의 강도, 살인 사건에 대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정남규는 태연하게 범행 당시의 상황을 재연해 현장검증을 지켜보던 주민들을 경악케 했다.
지금까지 5명을 살해하고 14명에게 중상을 입힌 서남부 연쇄 강도, 살인 사건 피의자 정남규.
이날 오전 봉천동 세자매 살인사건 현장검증 소식을 듣고 몰려온 100여 명의 주민들은 정남규가 나타나자 웅성대기 시작했다.
세자매를 기억하는 주민들은 반성의 기미를 보이기는 커녕 태연하게 범행을 재연하는 정남규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정남규는 구로구 시흥동에서 모자 피습사건의 검증을 하다 흥분을 참지 못해 화분 등을 던진 피해자의 가족에게 주변에 있던 빨래 건조대를 던지려고 해 지켜보던 주민들을 더욱 경악케 했다.
정남규에 의해 참변을 당한 세자매의 가족들은 결국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시흥동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은 울분을 토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남규는 이날 봉천동 세자매 피습사건을 비롯해 지난해 4월 모자 폭행사건 등 4건의 범행을 차례로 재연했다.
유영철 연쇄살인사건 2003~2004
고등학교 2학년 때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된 이래, 총 14차례의 특수절도 및 성폭력 등의 혐의로 11년을 교도소에서 생활한 30대 중반의 남성 유영철이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총 21명을 살해한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이다.
유영철은 1991년 안마사와 결혼하였으나, 2002년 5월 무렵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뒤부터 여성 혐오증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는 간질 증세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고, 2003년 11월에는 전과자·이혼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교제 중이던 여성으로부터 절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1990년대 중반부터 막연한 복수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연쇄살인의 계기가 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첫 살인은 2003년 9월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新沙洞)의 단독주택에서 행해진 대학교 명예교수 부부 살인사건이다. 이후 2004년 7월까지 총 21명을 잇달아 살해하였는데, 공식적으로 확인된 숫자만 21명이다. 유영철 자신은 5명의 여성을 더 살해했다고 주장하는데, 2004년 8월 현재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살해 대상은 주로 부유층 노인과 여성으로, 범행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범행 수법이 과감하면서도 치밀해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도구는 자신이 직접 만든 망치나 칼 등을 이용하였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지르거나 시체를 토막 내 야산에 묻기도 하였다. 또 피해자의 신원을 알지 못하도록 살해한 여성의 지문을 흉기로 도려 내기도 하는 등 갖가지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최대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유영철은 2004년 7월 18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어 같은 해 8월 13일 구속 기소되었는데, 죄목은 21명 살해, 공무원 자격 사칭, 강도 등의 혐의이다. 유영철 자신이 더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5명에 대해서는 계속 수사가 진행 중이다.
김대두 연쇄살인사건 1975~1976
1975년 10월 8일 서울 청량리경찰서. 깡마른 체구의 20대 남자 하나가 압송돼 왔다. 자신을 향해 플래쉬 세례가 터졌지만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흔들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두 달 동안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 김대두(당시 26세)가 검거된 것이다.
김대두가 55일 동안 전국을 돌며 살해한 사람은 모두 17명. 칠순 노인부터 3개월짜리 아기까지 일가족 단위로 무참히 살해했다. 어른은 자기 얼굴을 기억할 것이고 아이는 우는 소리가 귀찮아서였다. 당시 김씨는 "완전 범죄를 위해 현장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며 거침없이 살인을 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초등학교 졸업과 전과 2범이었던 김씨는 당시 취업도 못하는 무력감과 소외의식 때문에 마구잡이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두 달 동안 무안, 송탄, 수원, 서울 등 전국을 누비며 9곳에서 17명을 살해하고 그가 강탈한 것은 현금 2만 6천여원, 고추 30근, 쌀 1말, 청바지 1개, 시계 1개가 전부였다.
부유층 노인과 부녀자 19명을 살해한 유영철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면 검거 과정에서 시민의 제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김대두는 피해자의 피가 묻은 청바지를 세탁소에 맡겼다가 수상하게 여긴 세탁소 주인의 신고로 검거됐다.
김대두는 다음해인 76년 12월 사형이 집행됐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형장에 선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국선변호를 맡았던 이상혁 변호사는 이후 사형폐지운동에
사이비종교 백백교 사건 1900~1941
백백교(白白敎) 사건이라면 지금도 으스스 몸을 떨게 한다. 일제시대 수많은 사교집단-사이비종교-이단종파들이 판을 쳤지만 백백교처럼 오랫동안 베일에 덮혀서 수백 명의 신도를 살해하고 여성신도들을 간음하면서 교세를 유지한 사교집단도 흔치 않다. 살인광마 사교집단인 백백교는 1900년 평안남도 영변군 근산면 화현동의 가난한 농사꾼으로 동학교도였던 전정운(全廷雲)이 백도교(白道敎)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농사를 짓다가 25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3년동안 도를 닦아 천지신령의 도를 터득하였다고 주장하며 함경남도 문천군 운림면 마양동에 백도교를 창설했다. 교명을 백백교로 고친 전정운은 1904년 6월에 천재지변이 일어나 전 인류가 멸망하지만 백백교를 믿으면 동해바다에 새로 생길 신선의 땅으로 피난하여 불로장생하게 된다면서 신도를 끌어 모았다. 전정운이 감언이설로 신도들을 미혹시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을 넘으면 바다가 있고 거기에 아름다운 섬이 떠 있는데 거기는 사철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일하지 않아도 농사는 저절로 되어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기후는 항상 따뜻하여 눈도 비도 거의 없고 꽃 향기만 그윽하니 사람들은 수백년을 예사로 산다. 그 섬의 소유는 백백교이다. 잘 개간된 토지 위에 궁궐같은 집들을 이미 잘 지어 놓았고 모든 준비가 다 되었으므로 이 이상향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백백교에 들어오라. 이 신선들의 세계에서 돈 따위는 필요치 않고 다만 보화만을 기준으로 삼으니 속세에서 사용하는 돈 따위는 모두 버리고 들어오라" 대부분의 종말론들이 그러하듯 백백교의 경우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1904년 6월이 지나도록 천재지변은 일어나지 않았고 동해의 유토피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신도들이 동요하자 반발하는 신도들을 죽이고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으로 본거지를 옮겼다가 다시 근동명 오성산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1만여 명의 신도를 모은 전정운은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60명이 넘는 첩을 거느리고 호사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1919년 51세의 나이에 본거지를 새로 옮긴 가평군 화악산 기슭에서 병사하였다. 그동안 첩 4명을 생매장하고, 장인이자 수제자인 우광현(禹光鉉) 등과 함께 신도 최인상 최인혁 형제 가족 8명을 살해하는 등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교주 전정운이 죽자 장남 용주(龍株)와 차남 용해(龍海) 사이에 재산싸움이 벌어졌다. 전용해는 재빨리 외할아버지 우광현과 결탁하여 재산을 차지하고 차병간을 백백교의 새교주로 내세웠다. 이에 패배한 전용주는 별도로 인천교(人天敎)를 만들어 교주가 되었다. 백백교와 인천교는 각기 포교활동을 통해 신도 수를 늘려가는 한편, 여신도 간음과 재산탈취 등을 예사로 하였다. 1923년 전용해가 형을 내쫓고 인천교까지 장악하여 가평의 본거지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대교당을 짓게 된 것은 그만큼 갈취한 신도들의 재산이 많았기에 가능했다. 사이비 교리에 민중들 현혹돼 백백교의 중심 교리는 '한 사람(교주)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하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것으로, 이는 유불선 3교가 모두 성쇠를 거듭하며 3천년을 흐르는 동안 그 본질이 쇠퇴하고 거죽만 남았으므로 새로운 종교가 요구되고 그 것이 바로 백백교라는 것이다. 그들은 신도들에게 백백교를 믿으면 살아서 무병장수하고 죽어서 극락에 가게된다면서 우매한 민중을 끌어 모았다. 입교식은 돈 1원을 내고 행하는데 먼저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 후 맑은 물 한 그릇을 정히 떠놓고 세번 손을 들었다 놓은 후 "제불자 제불자 천혼도우 제여자 제여자…" 운운 하는 괴상한 주문을 7번씩 세차례 외는 것이었다. 신도는 성별에 따라 평상시에도 늘 주문을 외워야 한다. 성인 남자의 경우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따위다. 전용해는 1923년 7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공식적으로 포교허가를 받아 3대 교지를 만들었다. 첫째는 '백백교는 유불선 3교를 종합한 것이며 교조의 결박한 심령으로 세도인심을 결백하게 하고 이를 믿으면 몸과 마음이 다 결백해지고 일체중생은 모두 선남선녀가 된다'. 둘째는 '전세계는 얼마 지나지않아 신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서양은 불로 망하고 동양은 물로 망한다. 그러나 백백교도만은 정감록에서 구인백백(求人白白)이라고 한 것 같이 구원을 받는다'. 셋째는 '30척 이상의 대홍수 재앙이 있은 후에 동해에 새로운 섬이 생겨나는데 이곳은 기린과 봉황이 춤추고 불로초가 있어 양식걱정이 없고, 교도는 질병과 재앙이 없어 불로장수하여 극락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자식없는 사람은 자식을 두게된다'는 허황하기 그지없는 내용이다. 일제의 폭압통치에 시달리면서 희망없는 삶을 살고있던 가난한 농민들과 어리석은 민중에게 백백교의 달콤한 교리는 한줄기 구원이고 복음이었다. 거기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대회당은 믿음을 주었다. 백백교에 끌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부인과 딸은 교주에게 헌상되었다. 남자들은 산너머 이상향의 목적지에 보낸다면서 모두 죽여 없앴다. 교주 전용해는 아버지 전정운의 잔인함과 음란함을 보고 배운 뒤에 더 흉악한 간계를 보태어 무려 14년간이나 비밀을 지켜오며 음란과 살인극을 자행하였다. 총독부 경찰, 초기에는 묵인 교주 전용해는 학식이 없는 무지한 인간이었지만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마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총참모격인 이경득과 문봉조 등 간부들을 각도에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뒤 그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정조를 유린하였다. 전용해는 이렇게 끌어들인 젊은 여성 4∼5명 씩을 항상 첩으로 거느리다가 살해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이런 속에서도 백백교의 교세는 늘어나 가평소재 일본인 경찰서장이 인사를 오기도 했다고 한다. 1930년 전 교주 전정운이 첩 4명을 생매장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돼 백백교 간부에 대한 일제검거령이 내렸으나 전용해 등은 교묘하게 잠적하여 검거를 피할수 있었다. 해마다 거액을 일경에 바쳤던 터라 경찰에서도 애써 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용해는 부하들에게 외조부이자 늙은 교주인 우광현을 살해하도록 지시하였다. 명실상부한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전용해는 금광개발을 한다면서 탄광을 사들였다. 그러나 이 광산은 금을 캐는 것이 아니라 화약폭발음 소리에 맞춰서 백백교도들의 살인장소로 이용되었다. 정용해와 백백교 간부들은 신도들에게 갈취한 돈으로 호화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살인을 다반사로 저질렀다. 전용해는 1935년 서울 신당동으로 거소를 옮기면서 자신의 살인마각을 알고있는 이복동생 전잡비와 그의 여동생까지 살해하는등 인면수심의 만행을 거듭하였다. 백백교의 범죄사건은 '사소한' 일로 희대의 사교 교주의 죄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부친이 백백교에 빠져 여동생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치고 전재산을 빼앗긴 유혼룡이란 청년이 교주 면담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흑막이 폭로되었다. 건장한 청년신도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나타난 전용해가 유혼룡에게 거액의 헌금을 강요하자 유혼룡이 이를 거부하면서 백백교를 성토하자 전용해는 칼을 빼들고 격투가 벌어졌다. 싸움판이 벌어진 곳은 바로 동대문경찰서 왕십리주재소 옆이었다. 싸움소리에 놀란 모리야 순사부장이 순사들을 이끌고 급히 달려와 이들을 체포하였다. 이 틈에 전용해는 애첩 등을 데리고 양평군 비밀장소로 도주하였다. 경찰은 8개월에 걸쳐 전용해의 아지트와 전국 각처의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346구의 시체를 발굴했다. 전용해는 몇 달후 용문산 도일봉 능선 솔밭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세간에는 신출귀몰한 전용해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잡아다가 자기의 옷을 입히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고 도망쳤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사건의 선고공판은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십수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희대의 살인마 사교사건은 막을 내렸다
우리나라 역대 살인사건들
1982년 우범곤 순경 총기난사 사건
1982년 4월 26일. 경남 의령군 궁유면 토곡리 일대 시골 마을에 난데없는 총성이 울렸다.
의령경찰서 궁유지서에 근무하던 우범곤(禹範坤·당시 27세) 순경이 만취 상태에서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수류탄 7발과 카빈소총 2정, 실탄 180발을 들고 나와 토곡리 등 인근 5개 마을을 돌며 무고한 주민들에게 총을 무차별 난사한 것.
우 순경은 토곡리 우체국에서 일하던 전화교환원을 살해하고 외부와 통신을 두절시킨 뒤 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마구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이로 인해 56명이 사망하고 3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희생자 중에는 생후 1주일 된 영아도, 70세 넘은 할머니도 있었다.
우 순경의 만행은 8시간 동안 계속됐다. 마을을 빠져 나간 주민의 신고로 사건을 접수한 의령경찰서는 뒤늦게 우 순경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기동대를 출동시켰지만 그는 자취를 감췄다. 우 순경은 다음날 새벽 인근 평촌리 서모 씨의 집에 몰래 들어가 서 씨의 부인 등 2명을 죽이고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했다.
당시 경찰은 평소 술버릇이 나빴던 우 순경이 내연의 처와 말다툼을 벌인 뒤 흥분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데 써야 할 총을 경찰이 무고한 주민에게 마구 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이 초래한 파문은 적지 않았다. 사건 당일 온천에 놀러가 자리를 비운 궁유지서장 등 4명이 구속됐고 내무부 장관이 사임했다.
잊혀질 만하면 터져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이런 ‘무차별 살인’ 사건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이어가며 벌어진 경기 화성 연쇄살인사건, 1994년 지존파 및 온보현 사건, 1996년 막가파 사건에 이어 2004년엔 유영철 사건이 세상을 경악케 했다. 최근 드러난 ‘봉천동 자매 살해사건’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 같은 강력범죄가 터질 때마다 등장해 논란이 되는 것이 ‘사형제 존폐론’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반인륜적 범죄자의 인권까지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 1986~1988
경기도 화성에서 발생한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0건이나 되는데도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희생자들이 모두 여성들이고 성폭행을 당한 뒤에 잔인하게 살해되어 한동안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하고 건국이래 최대의 미스터리, 화성은 밤이 되면 유령의 거리…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은 조심하라는 유행어까지 남길 정도로 화제가 되었으나 범인은 끝내 검거되지 않고 어느덧 무심한 세월 속에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대략을 살펴본다.
1차사건 : 1986년 9월19일 오후 2시 발견, 이순분(가명 71세. 태안읍 안녕리)이 마을 앞 목초 밭에서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됨. 하의가 벗겨져 있었으나 별다른 폭행 흔적은 없음. 일주일 전 쯤 살해된 것으로 추정.
2차사건 : 1986년 10월23일 오후 2시50분 발견, 박순애(가명 25세. 직장인. 송탄시 신장동)가 진안리 농수로에서 알몸의 시체로 발견됨.
스타킹으로 목이 졸려 살해되고 강간 흔적 있음. 등과 하체에 심한 상처. 양손이 뒤로 묶여 있음.
3차사건 : 1987년 4월23일 오후 2시 발견, 권숙경(가명 26세. 직장인. 태안읍 안녕리)이 공장 옆의 울타리 넝쿨 밑에서 시체로 발견됨. 양손이 묶인 채 하의가 벗겨져 있음. 시체가 부패되어 몇 달 전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됨. 현장에 도장이 떨어져 있고 피해자의 옷으로 겨우 신원을 확인함.
4차사건 : 1986년 12월21일 낮 12시30분 발견. 이정애(가명 23세. 정남면 관항리)가 약혼자를 만나고 귀가하다가 살해된 뒤에 관항천에서 시체로 발견됨. 옷이 입혀져 있고 하체에 심한 상처. 강간 흔적 있음. 시체는 일주일 전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됨.
5차사건 : 1987년 1월11일 오전 10시30분. 홍미경(가명 18세. 고등학생. 태안읍 황계리)양이 병점읍 외곽을 흐르는 황구천 둑에서 피해자의 목도리로 목이 졸린 시체로 발견됨. 양손은 스타킹과 브래지어로 뒤에서 묶여 있고 입에 재갈이 물려 있음. 피해자 국부에서 B형 혈액형 검출. 1월10일 밤 8시30분쯤에 살해된 것으로 추정됨.
6차사건 : 1987년 5월9일 오후 3시 발견. 박혜정(가명 29세. 주부. 병점읍 진안리)씨가 진안리 야산에서 하교하는 초등학교 학생들에 의해 시체로 발견됨. 시체는 브래지어, 내의 블라우스로 각각 세 차례 목이 졸리고. 목 어깨 등에 돌로 찍은 듯한 상처. 팬티, 청바지는 입은 채로 살해되어 있고 폭행 흔적 없음.
7차사건 : 1988년 9월8일 오전 9시 발견. 안영자(가명 54세. 주부. 팔탄면 가재리)씨가 블라우스로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됨. 입에 재갈. 양손 뒤로 묶여 있고 강간 흔적. 먹던 복숭아가 국부 안에서 발견됨.
8차사건 : 1988년 9월16일 오전 6시30분 발견. 박지영(가명 14세. 중학생. 태안읍 진안리)양이 집에서 잠자다가 목이 졸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됨. 폭행 흔적. 남자의 체모 발견. 감정 결과 B형 혈액형 발견. 체모에서 티타늄원소가 분석됨.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여섯 번째인 박혜정씨의 사체가 발견될 때까지 일반적인 개별 살인사건으로 여겨져 그다지 국민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다. 관할 경찰서인 화성경찰서가 병점지서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자체 수사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딸이 셋 있는 주부 박혜정씨 사건이 발생하면서 매스컴의 집중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화성은 수원과 오산 사이에 있는 평범한 농촌으로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이 들어서기 전에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그러나 공단이 생기면서 갑자기 유동인구가 많아지고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 필연적으로 성범죄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게다가 경기도 남부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수원과 인접해 있어서 당시에 1년 평균 강간 사건이 40여건이나 발생하는 등 문제가 많은 지역이었다.
매스컴에서 두 번째 연쇄살인사건으로 꼽히고 있는 박순애 살인사건은 그녀의 사체가 농수로에서 알몸으로 발견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이것은 그 동안의 단순 강간살인에서 범인의 범행이 피해자의 옷을 벗기고 희롱할 정도로 점점 대범하게 발전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경찰은 박순애 살인사건 현장에서 범행의 단서가 될만한 유류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필자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설로 쓰기 위해 화성을 3개월 정도 걸려서 취재했다. 살인사건 현장을 직접 답사했고 수사본부에도 찾아가 보고 피해자 가족들도 만나보았다. 그 결과 살인사건 현장이 대부분 농로, 야산, 개울둑이어서 범인들의 유류품을 찾지 못한 것이 수사에 가장 어려운 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쇄살인의 첫 번째 살인사건인 이순분 할머니 살인사건은 처음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화성에서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연쇄살인 사건 1호로 기록되게 되었다.
세 번째 살인사건은 시체가 발견된 것이 너무나 늦어서 시체의 신원을 밝히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므로 특별한 단서를 찾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그녀의 시체가 완전히 부패했기 때문에 옷가지와 근처에서 발견된 도장으로 겨우 신원을 확인했을 정도였다.
네 번째 살인사건인 이정애양이 살해된 것은 관항천 옆의 논둑이었다. 그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약혼자와 데이트를 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 11시경에 귀가하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농로에서 관항천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범인은 그녀의 국부를 우산대로 난자한 뒤에 깻단, 짚더미 등으로 덮어 두어 시체가 여러 날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그러나 사체가 일주일이나 지나서 발견되었고, 비가 와서 유류품이 모두 쓸려가는 바람에 경찰은 역시 단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정애양은 그후에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다섯 번째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고등학교 3학년인 홍미경양이었다. 홍미경양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도대표 탁구선수를 할 정도로 운동에 소질이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상업학교로 진학을 한 뒤에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자 사건 당일 취직을 하러 수원에 나갔다. 부친은 학교나 졸업한 뒤에 취직을 하라고 했으나 효녀인 그녀는 하루빨리 취직을 하여 집안을 돕겠다고 이력서를 써가지고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밤 8시30분 그녀는 귀가하다가 황구천 둑에서 살해되었다. 그녀는 귀가할 때 큰길로 돌아왔으면 살인마의 마수를 피할 수 있었으나 지름길로 돌아오기 위해 인적이 없는 개울가 둑길을 이용하여 집으로 돌아오다가 살해된 것이다. 부친의 진술에 의하면 다음날 경찰이 데리러 와서 현장에 가보니 딸이 죽어 있었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해 취재하는 필자를 가슴 아프게 했다. 사체는 짚단으로 덮여 있었다.
홍미경양의 살인사건은 사건 발생 1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으나 용의주도한 범인은 단서를 남기지 않아 지능범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여섯 번째 살인사건은 딸이 셋이 있는 가정주부에 대한 살인사건이었다. 주부 박혜정은 사건 당일 남편이 취직 때문에 서울에 올라가자 그를 마중하러 집 앞에 있는 수인산업도로의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그날은 비가 억수 같이 내려서 귀가하던 마을 사람들이 그녀가 우산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밤11시 이후 행방이 묘연해 졌다. 그녀는 11시 이후 범인에게 마을 앞 야산으로 끌려올려가 살해된 것이다. 그녀의 구두가 논둑에 버려져 있었고 사체가 유기된 야산은 집 앞에서 훤히 바라보이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그녀는 귀가하는 초등학생들에 의해 나뭇가지에 덮여 있는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일곱 번째 살인사건은 54세가 되는 주부가 피해자다. 안영자씨는 아들이 하는 분식집에서 일을 하고 팔탄면 가재리에서 버스를 내려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농로를 가로지르는 작은 개울둑에서 범인을 만나 살해되었다. 안영자씨가 살해될 무렵은 9월이어서 개울둑 옆의 논에는 벼가 무성했다. 그리고 개울둑에는 커다란 포플러나무가 서 있어서 그날의 참극을 모두 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가 현장을 취재하러 갔을 때는 89년 겨울인데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수원에서 팔탄으로 가는 넓은 국도 옆에 있는 작은 둑에도 겨울비가 음산하게 내리고 있어서 마음이 착잡했다.
여덟 번째 살인사건은 중학생이 집안에서 잠을 자다가 변을 당한 사건이다. 그 학생이 살해된 것도 9월인데 사건 당일 MBC에서 인현왕후를 방송하여 가족들이 모두 그 방송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언니는 안방에서 잠을 잤고 박양은 작은 방에서 잠을 잤다. 필자가 만난 박양의 언니는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범인은 그 언니를 성폭행하려고 침입했다가 언니가 없고 동생이 있었기 때문에 동생을 살해한 뒤에 성폭행을 했다고 한다. 범인의 유류품으로 체모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경찰이 수거하여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범인의 체모를 분석한 결과 티타늄원소가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티타늄원소는 용접공들이 많이 사용하는 용접봉에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용접할 때 용접공들의 인체로 들어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경찰은 즉시 화성 일대의 용접공들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화성의 전과자, 우범자를 저인망식으로 수사했으나 용접공들을 수사하게 된 것은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마침내 농기계수리공인 청년이 리스트에 올랐다. 경찰은 용의자에게서 머리칼을 수거하여 감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범인의 체모에서 검출된 티타늄원소가 용의자의 머리카락에서도 발견되었다. 경찰은 용의자를 검거하고 자백을 받아냈다. 범인은 화성연쇄살인과는 관계가 없었다.
화성연쇄 살인사건의 하나로 꼽히는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 살인사건은 계모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으로 밝혀져 제외되었다.
아홉 번째 화성연쇄 살인사건은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던 정미숙(가명. Y여고 2학년. 16세)이 수원시 오목천동 농수로에서 1989년 7월9일 알몸의 시체로 발견되어 전국을 놀라게 했다. 숨진 정양은 가슴은 예리한 흉기로 도려내져 있었고 옷이 벗겨져 거의 반듯하게 농수로에 눕혀지고 풀숲으로 덮여 있었다. 경찰은 하루가 지난 다음날 10일 인근에서 범인이 버린 것으로 보이는 정양의 유부와 책가방을 찾아냈다. 그러나 유력한 단서를 찾는데는 실패하여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다.
화성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중에 열 번째 사건으로 밝혀진 것은 14세의 중학생으로 학교에서 귀가하다가 행방불명이 되어 야산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다. 살인마는 이 여학생을 성폭행 한 뒤에 살해하여 경찰을 발칵 뒤집어놓았고 화성 주민들을 또 다시 공포에 떨게 했다. 이 사건에서도 범인은 검거되지 않아 주민들은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는 시간이다. 첫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어언 14년, 그 동안 연인원 10만명이 넘는 베테랑 형사들이 투입되고 살인마를 체포하는 경찰은 2계급 특진을 시키고 범인을 제보하는 시민들에게는 5천만원의 현상금까지 걸었으나 미제사건으로 남아 아쉬움이 많다.
정남규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사건 2004~2005
경찰은 28일 봉천동 세자매 살인사건 등 서울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용의자 정남규가 저지른 네 건의 강도, 살인 사건에 대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정남규는 태연하게 범행 당시의 상황을 재연해 현장검증을 지켜보던 주민들을 경악케 했다.
지금까지 5명을 살해하고 14명에게 중상을 입힌 서남부 연쇄 강도, 살인 사건 피의자 정남규.
이날 오전 봉천동 세자매 살인사건 현장검증 소식을 듣고 몰려온 100여 명의 주민들은 정남규가 나타나자 웅성대기 시작했다.
세자매를 기억하는 주민들은 반성의 기미를 보이기는 커녕 태연하게 범행을 재연하는 정남규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정남규는 구로구 시흥동에서 모자 피습사건의 검증을 하다 흥분을 참지 못해 화분 등을 던진 피해자의 가족에게 주변에 있던 빨래 건조대를 던지려고 해 지켜보던 주민들을 더욱 경악케 했다.
정남규에 의해 참변을 당한 세자매의 가족들은 결국 현장에는 나타나지 않았고, 시흥동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은 울분을 토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남규는 이날 봉천동 세자매 피습사건을 비롯해 지난해 4월 모자 폭행사건 등 4건의 범행을 차례로 재연했다.
유영철 연쇄살인사건 2003~2004
고등학교 2학년 때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된 이래, 총 14차례의 특수절도 및 성폭력 등의 혐의로 11년을 교도소에서 생활한 30대 중반의 남성 유영철이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총 21명을 살해한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이다.
유영철은 1991년 안마사와 결혼하였으나, 2002년 5월 무렵 부인이 이혼소송을 제기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한 뒤부터 여성 혐오증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는 간질 증세로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고, 2003년 11월에는 전과자·이혼남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교제 중이던 여성으로부터 절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1990년대 중반부터 막연한 복수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연쇄살인의 계기가 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첫 살인은 2003년 9월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新沙洞)의 단독주택에서 행해진 대학교 명예교수 부부 살인사건이다. 이후 2004년 7월까지 총 21명을 잇달아 살해하였는데, 공식적으로 확인된 숫자만 21명이다. 유영철 자신은 5명의 여성을 더 살해했다고 주장하는데, 2004년 8월 현재까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살해 대상은 주로 부유층 노인과 여성으로, 범행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범행 수법이 과감하면서도 치밀해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도구는 자신이 직접 만든 망치나 칼 등을 이용하였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지르거나 시체를 토막 내 야산에 묻기도 하였다. 또 피해자의 신원을 알지 못하도록 살해한 여성의 지문을 흉기로 도려 내기도 하는 등 갖가지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최대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유영철은 2004년 7월 18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어 같은 해 8월 13일 구속 기소되었는데, 죄목은 21명 살해, 공무원 자격 사칭, 강도 등의 혐의이다. 유영철 자신이 더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5명에 대해서는 계속 수사가 진행 중이다.
김대두 연쇄살인사건 1975~1976
1975년 10월 8일 서울 청량리경찰서. 깡마른 체구의 20대 남자 하나가 압송돼 왔다. 자신을 향해 플래쉬 세례가 터졌지만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흔들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두 달 동안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 김대두(당시 26세)가 검거된 것이다.
김대두가 55일 동안 전국을 돌며 살해한 사람은 모두 17명. 칠순 노인부터 3개월짜리 아기까지 일가족 단위로 무참히 살해했다. 어른은 자기 얼굴을 기억할 것이고 아이는 우는 소리가 귀찮아서였다. 당시 김씨는 "완전 범죄를 위해 현장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며 거침없이 살인을 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초등학교 졸업과 전과 2범이었던 김씨는 당시 취업도 못하는 무력감과 소외의식 때문에 마구잡이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두 달 동안 무안, 송탄, 수원, 서울 등 전국을 누비며 9곳에서 17명을 살해하고 그가 강탈한 것은 현금 2만 6천여원, 고추 30근, 쌀 1말, 청바지 1개, 시계 1개가 전부였다.
부유층 노인과 부녀자 19명을 살해한 유영철 사건과 공통점이 있다면 검거 과정에서 시민의 제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김대두는 피해자의 피가 묻은 청바지를 세탁소에 맡겼다가 수상하게 여긴 세탁소 주인의 신고로 검거됐다.
김대두는 다음해인 76년 12월 사형이 집행됐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형장에 선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국선변호를 맡았던 이상혁 변호사는 이후 사형폐지운동에
사이비종교 백백교 사건 1900~1941
백백교(白白敎) 사건이라면 지금도 으스스 몸을 떨게 한다. 일제시대 수많은 사교집단-사이비종교-이단종파들이 판을 쳤지만 백백교처럼 오랫동안 베일에 덮혀서 수백 명의 신도를 살해하고 여성신도들을 간음하면서 교세를 유지한 사교집단도 흔치 않다. 살인광마 사교집단인 백백교는 1900년 평안남도 영변군 근산면 화현동의 가난한 농사꾼으로 동학교도였던 전정운(全廷雲)이 백도교(白道敎)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농사를 짓다가 25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3년동안 도를 닦아 천지신령의 도를 터득하였다고 주장하며 함경남도 문천군 운림면 마양동에 백도교를 창설했다. 교명을 백백교로 고친 전정운은 1904년 6월에 천재지변이 일어나 전 인류가 멸망하지만 백백교를 믿으면 동해바다에 새로 생길 신선의 땅으로 피난하여 불로장생하게 된다면서 신도를 끌어 모았다. 전정운이 감언이설로 신도들을 미혹시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을 넘으면 바다가 있고 거기에 아름다운 섬이 떠 있는데 거기는 사철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토질이 비옥하여 일하지 않아도 농사는 저절로 되어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기후는 항상 따뜻하여 눈도 비도 거의 없고 꽃 향기만 그윽하니 사람들은 수백년을 예사로 산다. 그 섬의 소유는 백백교이다. 잘 개간된 토지 위에 궁궐같은 집들을 이미 잘 지어 놓았고 모든 준비가 다 되었으므로 이 이상향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백백교에 들어오라. 이 신선들의 세계에서 돈 따위는 필요치 않고 다만 보화만을 기준으로 삼으니 속세에서 사용하는 돈 따위는 모두 버리고 들어오라" 대부분의 종말론들이 그러하듯 백백교의 경우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1904년 6월이 지나도록 천재지변은 일어나지 않았고 동해의 유토피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신도들이 동요하자 반발하는 신도들을 죽이고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으로 본거지를 옮겼다가 다시 근동명 오성산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1만여 명의 신도를 모은 전정운은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60명이 넘는 첩을 거느리고 호사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1919년 51세의 나이에 본거지를 새로 옮긴 가평군 화악산 기슭에서 병사하였다. 그동안 첩 4명을 생매장하고, 장인이자 수제자인 우광현(禹光鉉) 등과 함께 신도 최인상 최인혁 형제 가족 8명을 살해하는 등 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교주 전정운이 죽자 장남 용주(龍株)와 차남 용해(龍海) 사이에 재산싸움이 벌어졌다. 전용해는 재빨리 외할아버지 우광현과 결탁하여 재산을 차지하고 차병간을 백백교의 새교주로 내세웠다. 이에 패배한 전용주는 별도로 인천교(人天敎)를 만들어 교주가 되었다. 백백교와 인천교는 각기 포교활동을 통해 신도 수를 늘려가는 한편, 여신도 간음과 재산탈취 등을 예사로 하였다. 1923년 전용해가 형을 내쫓고 인천교까지 장악하여 가평의 본거지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대교당을 짓게 된 것은 그만큼 갈취한 신도들의 재산이 많았기에 가능했다. 사이비 교리에 민중들 현혹돼 백백교의 중심 교리는 '한 사람(교주)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하자(一之白將欲白之於 天下地)'는 것으로, 이는 유불선 3교가 모두 성쇠를 거듭하며 3천년을 흐르는 동안 그 본질이 쇠퇴하고 거죽만 남았으므로 새로운 종교가 요구되고 그 것이 바로 백백교라는 것이다. 그들은 신도들에게 백백교를 믿으면 살아서 무병장수하고 죽어서 극락에 가게된다면서 우매한 민중을 끌어 모았다. 입교식은 돈 1원을 내고 행하는데 먼저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 후 맑은 물 한 그릇을 정히 떠놓고 세번 손을 들었다 놓은 후 "제불자 제불자 천혼도우 제여자 제여자…" 운운 하는 괴상한 주문을 7번씩 세차례 외는 것이었다. 신도는 성별에 따라 평상시에도 늘 주문을 외워야 한다. 성인 남자의 경우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따위다. 전용해는 1923년 7월 조선총독부로부터 공식적으로 포교허가를 받아 3대 교지를 만들었다. 첫째는 '백백교는 유불선 3교를 종합한 것이며 교조의 결박한 심령으로 세도인심을 결백하게 하고 이를 믿으면 몸과 마음이 다 결백해지고 일체중생은 모두 선남선녀가 된다'. 둘째는 '전세계는 얼마 지나지않아 신의 심판을 받게 되는데 서양은 불로 망하고 동양은 물로 망한다. 그러나 백백교도만은 정감록에서 구인백백(求人白白)이라고 한 것 같이 구원을 받는다'. 셋째는 '30척 이상의 대홍수 재앙이 있은 후에 동해에 새로운 섬이 생겨나는데 이곳은 기린과 봉황이 춤추고 불로초가 있어 양식걱정이 없고, 교도는 질병과 재앙이 없어 불로장수하여 극락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자식없는 사람은 자식을 두게된다'는 허황하기 그지없는 내용이다. 일제의 폭압통치에 시달리면서 희망없는 삶을 살고있던 가난한 농민들과 어리석은 민중에게 백백교의 달콤한 교리는 한줄기 구원이고 복음이었다. 거기에 궁궐을 방불케 하는 대회당은 믿음을 주었다. 백백교에 끌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부인과 딸은 교주에게 헌상되었다. 남자들은 산너머 이상향의 목적지에 보낸다면서 모두 죽여 없앴다. 교주 전용해는 아버지 전정운의 잔인함과 음란함을 보고 배운 뒤에 더 흉악한 간계를 보태어 무려 14년간이나 비밀을 지켜오며 음란과 살인극을 자행하였다. 총독부 경찰, 초기에는 묵인 교주 전용해는 학식이 없는 무지한 인간이었지만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마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총참모격인 이경득과 문봉조 등 간부들을 각도에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뒤 그 딸을 전용해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정조를 유린하였다. 전용해는 이렇게 끌어들인 젊은 여성 4∼5명 씩을 항상 첩으로 거느리다가 살해하는 것을 능사로 삼았다. 이런 속에서도 백백교의 교세는 늘어나 가평소재 일본인 경찰서장이 인사를 오기도 했다고 한다. 1930년 전 교주 전정운이 첩 4명을 생매장한 사실이 뒤늦게 발각돼 백백교 간부에 대한 일제검거령이 내렸으나 전용해 등은 교묘하게 잠적하여 검거를 피할수 있었다. 해마다 거액을 일경에 바쳤던 터라 경찰에서도 애써 잡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용해는 부하들에게 외조부이자 늙은 교주인 우광현을 살해하도록 지시하였다. 명실상부한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전용해는 금광개발을 한다면서 탄광을 사들였다. 그러나 이 광산은 금을 캐는 것이 아니라 화약폭발음 소리에 맞춰서 백백교도들의 살인장소로 이용되었다. 정용해와 백백교 간부들은 신도들에게 갈취한 돈으로 호화방탕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살인을 다반사로 저질렀다. 전용해는 1935년 서울 신당동으로 거소를 옮기면서 자신의 살인마각을 알고있는 이복동생 전잡비와 그의 여동생까지 살해하는등 인면수심의 만행을 거듭하였다. 백백교의 범죄사건은 '사소한' 일로 희대의 사교 교주의 죄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부친이 백백교에 빠져 여동생을 교주에게 첩으로 바치고 전재산을 빼앗긴 유혼룡이란 청년이 교주 면담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흑막이 폭로되었다. 건장한 청년신도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나타난 전용해가 유혼룡에게 거액의 헌금을 강요하자 유혼룡이 이를 거부하면서 백백교를 성토하자 전용해는 칼을 빼들고 격투가 벌어졌다. 싸움판이 벌어진 곳은 바로 동대문경찰서 왕십리주재소 옆이었다. 싸움소리에 놀란 모리야 순사부장이 순사들을 이끌고 급히 달려와 이들을 체포하였다. 이 틈에 전용해는 애첩 등을 데리고 양평군 비밀장소로 도주하였다. 경찰은 8개월에 걸쳐 전용해의 아지트와 전국 각처의 백백교 비밀장소에서 346구의 시체를 발굴했다. 전용해는 몇 달후 용문산 도일봉 능선 솔밭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세간에는 신출귀몰한 전용해가 자신과 체격이 비슷한 사람을 잡아다가 자기의 옷을 입히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하고 도망쳤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다. 1941년 1월에 마무리된 백백교사건의 선고공판은 혼자서 170명을 죽인 김서진, 167명을 죽인 이경득, 127명을 죽인 문봉조 등 살인마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 십수명에게는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희대의 살인마 사교사건은 막을 내렸다
이외에도 전두환독재정치때 일어난일들,대구지하철참사,서울7호선방화사건 의 범인들도
엄연한 살인범들입니다
더이상이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비극적인일은 일어나지않았으면
좋겠네요
-이세상에서 제일무서운건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