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전시회-서울시립미술관에서

윤호정200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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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전시회-서울시립미술관에서

몇달 전, 교보문고에 갔다가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난다.

피카소의 작품이 대량으로 전시된다는 소식에 뭣도 모르고 마냥 설레었다.

 

오늘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그날이었다..!!

사실 공부하고 가지 않아서.. 피카소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고 해도 무방했다..ㅠ.ㅡ

 

그래도 정말 재미있게 봤다. 피카소 특유의 위트와 다채로운 색깔들..

큐비즘에 따른 다양한 시각에서 본 피사체들의 어울림..

전시의 순서도 감상자가 보기 편하게 테마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친절한 설명까지..!!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좀 아쉬운게 있다면 저 위에 올려진 그 유명한 그림들이 빠져있었고

그 외에 아비뇽의 처녀들이나 게르니카 또한 보지 못했지만..

피카소가 왜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인지 몸소 체험할 수 있었던 값진 체험이었다.

 

밑의 설명은 피카소에 대해 자세히 알고싶어 인터넷 검색한것이다..!!

 

피카소는 스페인출신의 화가로 어렸을 때 미술교사였던 아버지가 그 능력을 알아보고 자신의 직업을 그만 두기까지 했단다. 아들의 능력이 그만큼이나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14살에 바르셀로나에 있는 론자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능력은 그야말로 천재적이었기 때문에 보통학생이 한달에 배울 걸 한달만에 배웠고 16살까지 스페인의 콩쿨은 거의 다 휩쓸어 버렸다고 한다. 그의 그런 능력때문에 그런지 그는 전통화풍을 무시한 채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건지도 모르겠다.

 

그의 미술작품들을 시기별로 나누면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가 실연의 상처로 권총자살혔던 1901년 부터 첫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난 1904년까지를 청색시대라 칭한다. 그 시절의 그림은 대부분 청색으로 그려져 있는데 분위기가 비참하고 절망적이고 우울하다.

 

연인 올리비에를 만나고 나서는 자기 미술에 대해 점차 장밋빛 자신감을 얻는다.이 시기를 장밋빛 시대 (1904~1906)라고 하는데 장밋빛 시대에는 황토색과 연한 장밋빛을 많이 사용했다. 그림에는 곡예사나 그 가족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히 이색적인 구경거리보다는 그들의 일상생활에 훨씬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시기의 작품에는 버림받은 사람들을 소재로 다루었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책임을 사회의 잘못보다는 개인의 무능이나 운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비참하기보다는 신비스런 기운이 더 강했다. 그러기에 부유층에게 현실의 부조리를 잊게 해 주고 색다른 위안의 세계를 던져 줄 수 있었다.

20세기미술의 최고의 혁명이자 피카소를 세계적인 화가의 위치에 올려놓게 되는 '큐비즘'의 출발점이 바로 흑인미술이었다. 원시적이고 본질적인 감각들을 '직선적'으로 표현한, 흑인 조각품과 탈에 깊은 충격을 받는다. 그는 계시처럼 다가왔던 흑인미술에서 지극히 단순한 기하학적 상징성과 순순한 감각을 발견했던 것이다. 즉, 입은 장방형, 눈은 원주, 코를 표현하는 구멍 등의 새로운 조형세계로의 문을 본 것이다. '큐비즘'의 혁명적인 시각은 그 이후의 미술과 영화, 건축을 포함한 모든 예술장르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큐비즘'의 선구자로서 피카소의 전설적인 명성을 얻게 하는 작품이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이었다.

1907년 늦여름 26세의 피카소는 몇 달에 걸쳐 수 백장의 데생과 습작을 거쳐 거대한 작품을 하나를 완성했다. 그 유명한 아비뇽의 처녀들을 처음 공개 하던날 많은 사람들은 경악과 분노에 빠져 말을 잃었다. 대 화가였던 마티스는 격분했고 이 후 입체파의 쌍두마차가 될 브라크는 이렇게 외쳤다. "이거 마치 우리들에게 밧줄을 먹게 하거나 불을 들고 석유를 마시게 하는 것 같다"

친한 친구들조차 분노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단 한사람 현대 회화의 저명한 미술 수집상이 될 칸베릴러만이 칭찬을 하였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를 세상에 내놓은지 2년만인 28세 때부터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 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사회의 흐름을 본능적으로 깨달아 과감하게 표현한 피카소의 작품은 사람들의 의심 섞인 눈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독일, 미국인들에게 꾸준히 팔려나갔다.

당시 페르낭드와 사귀고 있었던 피카소는 그의 친구인 마르쿠스의 애인 '에바'에게 반하여 열열한 구애를 하게된다. 이 시기의 작품 밑에는 항상 에바에 대한 사랑의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때가 분석적 큐비즘의 시기로써 사물의 외면적인 모방을 하던 종래의 화법을 완전히 파괴하고 기하학적 도형으로 해체하여, 무엇을 그린 것인지 사람들은 분간하기 어려웠다.

마르쿠스는 결국 피카소에게 애인을 빼앗기고 만다. 화 가난 마르쿠스는 피카소를 만화로 풍자하여 분풀이를 했으나 그의 애인을 이미 피카소의 여자가 되었다.

1912년 31세의 피카소는 첫 번째 연인 이였던 페르낭드와 헤어지고 가냘픈 미모의 에바와 함께 살게된다.

이 당시 피카소가 캔버스에 물감과 관계없는 물건들을 사용함으로써 최초의 콜라주작품을 탄생시킨다. 철물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 헝겊, 함석, 밧줄은 물론이고 물감에다가 모래와 톱밥을 섞어 사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박한 주제와 일상적인 재료들로 제작된 콜라주는 고상한 가치만이 예술이라고 여기던 부르주아 예술관에 맞지 않았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날 이런 작품들이 보험에 가입된 채 고상함을 찬양하는 작품보다 중요한 곳에 전시되어 있다.

1915년 12월14일 1차 세계대전 이듬해에 젊은 여인 에바 구엘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에바가 죽은 후 무수히 많은 여인들을 사귀었던 피카소는 자신이 무대미술과 의상을 담당했던 퍼레이드라는 공연에서 25세의 러시아 무용수 올가 코클로바에게 흠뻑 빠지게 되어 1918년 7월 12일 36세의 피카소는 아폴리네르, 막스자콥, 쟝콕토가 증인으로 참석한 파리의 한 교회에서 첫아들 파울로를 낳아줄 올가와 결혼식을 한다.

올가와 결혼생활을 하는 시기에 피카소는 입체주의가 아니 감상자의 입맛에 맞는 강렬한 사실주의 작품을 그린 탓에 일부 비평가들은 입체주의를 배신한 기회주의자라는 신랄한 비평을 가하기도 한다. 마흔을 갓 넘은 화가로써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그림이 거래되었으면 점차 거부가 되어갔다.

아들 파울로를 낳은 후 유모, 요리사, 하녀, 운전수까지 둔 한층 더 사치스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올가의 깔끔한 기질과 지나친 상류사회의 생활로 피카소는 속박과 외로움이 더해졌다.

또한 1924년 불기 시작한 초현실주의는 피카소에게 격렬한 분열과 더욱 부채질하면서 이혼을 생각하게 한다. 1927년 46세의 피카소가 만난 마리 테레즈는 17세의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미술에는 문외한이었지만 수영과 등산 등의 운동으로 단련된, 건강미 넘치는 천진한 소녀였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프로포즈를 육개월이나 거절했으나 끝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마리 테레즈의 18번째 생일이자 성년식 이였던 날 이후 피카소는 올가와 살고 있는 자신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마리 테레즈를 위한 비밀거처를 마련해 준다. 피카소는 그녀의 성적 환상을 주제로 조각, 그림, 판화를 통해 다른 어떤 여인들을 그린 것보다 많은 수의 작품을 남겼다.

올가와 헤어지고 마리 테레즈와 함께 살던 피카소는 1935년에 딸 마야를 낳은 마리테레즈를 소녀같은 순종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품위가 없고 무식하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버리고 지성적인 도라 마알을 만난다.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고 작은 도시 게르니카는 불바다에 휩싸이게 된다. 피카소는 큰 충격을 받고 게르니카를 그리게 된다. 도라는 이 그림의 착상과 주제 뿐만아니라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침식을 같이하며 피카소가 '게르니카'에 열정을 쏟도록 격려했다. 한달 여만에 완성한 '게르니카'는 파시즘의 공포 앞에 의연히 맞선 분노의 외침이며 혁명의 상징이였다. 피카소는 이렇게 외쳤다. "회화는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항하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의 도구이다."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와 더불어 다시 한번 전 유럽이 2차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1940년 59세의 피카소는 전재의 공포 속에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독일군은 피카소를 타락한 예술가로 보고 비난하였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되자 피카소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비록 총을 들지는 않았지만 나치의 블랙리스트 첫머리에 기재되어 있던 화가였다. 파시즘에 대항한 레지스땅스의 간판인물이 되어 버려 프랑스는 파리 해방 기념의 첫 사업으로 피카소의 작품전을 열게 하였다.

 

도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던 62세의 피카소는 1943년 어느 날 식당에서 21살의 프랑수와즈 질로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피카소의 첫아들인 파울로보다 나이가 어렸던 프랑스와즈는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는다. 또한 날카로운 지성을 지녔던 바로 전 연인, 도라 마알은 피카소와의 이별로 인해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불행한 여인이 되었다.

 

피카소는 공산당에도 입당하게되어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예술가가 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명성은 얻었지만 예술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도외시되었다.

 

1949년 공산당이 평화운동을 상징할 수 있는 포스터를 피카소에게 의뢰한다. 그 포스터 한 중앙에는 한 마리의 비둘기가 앉아 있었다. 이 후 피카소가 그린 비둘기는 전 세계에서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1950년과 1962년, 두 차례에 걸쳐 레닌 평화상을 수상하게된다.

 

70대의 피카소는 도자기와 도기로 유명한 발로리스 시를 발견하고 흥분하다. 새로운 장르에 손을 댄다는 설레임 때문이였다. 피카소의 마지막 여자 쟈클린은 도자기공장 관리인의 조카로써 공장의 뒷일을 보살피고 있었다. 젊은 이혼녀였던 쟈클린은 피카소를 필사적으로 유혹하여 결혼에 성공한 피카소에게는 헌신적인 여자였다.


1961년 80세의 피카소는 쟈클린과 발로리스 시청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그 날 신문을 온통 장식한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고령에 나이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이 전의 대가들의 작품을 재해석하였다. 옛 거장들이 작품을 풍자하고 모방하는 궁극적 목표는 어느 장르이건 같았다. 고전적 규율과 겨루기 그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모방하기, 그 결과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피카소는 들라크루아의 14점, 벨라스케스의 44점, 마네의 27점 등 과거의 그림을 재해석함으로써 전통과의 대화를 나누었다.

1978년 4월 8일 92세의 나이로 남프랑스 무쟝의 별장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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