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고(肥後)번의 양이파인 그는 문학은 토도로기 무헤이(轟武兵衛)에게, 군학(軍學)은 미야베 켄조우(한자불명)에게, 양학은 하야시 오우엔(한자불명)을 통해 익히므로서, 근왕사상(勤王思想)을 품게된다. 이러한 지식은 그의 검을 히토키리의 실로 빠져들게 했다.
그의 검의 유파(流派)는 겐사이류(下知火流 라고 일컬어짐)라 한다.
도장에도 다니긴 하였으나 죽도검술은 서툴러서 매번 두들겨 맞았으나. 그는 실전에는 천재적이었으므로 진검으로 겨룰때는 패한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이론보다는 실전에서 임하는 검술이 진정한 무술이라고 인정하는 논리였다.
그는 막말 오카다 이조,다나카 신베에 등 4대암살자중 하나로 수없이 많은 자들을 막부의 풍운속에 비명에 횡사하게 하였다.
분큐(文久)3년 - 1863년, 존황양이파(存皇揚夷派) 지사들이 경도의 한 음식접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무렵의 지사들이라 하면 술이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화제는 막부에 관한 비판이 화제의 중심이었는데
겐사이도 그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흐르면서 그 막부의 관련인사의 실제이름이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잠시 후 겐사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얼마 후 겐사이가 돌아왔다.
옆구리에 꾸러미를 든 채였다. 모두들 그 꾸러미를 궁금해 하며 호기심에 풀어보았다. 그 꾸러미에는 막 베어온 사람의 머리가 들어있던 것이다. 겐사이는 툭 내뱉듯이 말했다.
"좀 전에 거론되었던 막부 인사라는게 이놈 맞는가?..."
그런 그는 평상시에는 상당히 과묵하지만 입을 열면 여성처럼 온화한 말씨를 구사하였으며 아담한 체구에 여성같은 곱상한 외모를 가진 그는 수줍음도 많았는지 친구나 손님들을 대할때는 눈을 아래로 깔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벤 인물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처남인 사쿠마 죠우잔(左久間象山)을 죽임으로서 동지들의 복수를 하고자 한 것 같다.
이케다야 사변으로 미야베 켄조등과 같은 히고번 출신의 동지들을 잃은 겐사이는 사건의 흑막으로 여겨졌던 사쿠마 죠우잔을 죽임으로써 동지들의 복수를 감행한 것이다.
당시 겐사이는 이런말을 하였다.
"사람을 벨 때는 마치 인형을 베는것 같았으나.... 죠우잔를 벨때는 마치 사람을 처음 벤것 같은 기분이 났습니다... 필경 죠우잔이 당대의 호걸중 하나인게 맞는거 같군요..." 또 공포감에 휩싸여 처음로 목숨이 위태로웠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 후로 겐사이는 활인검(活人劍)의 길을 걸었다. 칼을 빼들어도 칼등으로 돌려쳤다고 한다. 그 후, 조슈번과 함께 싸우게 되는데, 메이지 정부가 개국정책으로 돌아서도 양이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개국책에 비판을 하다가 정부전복의 협의로 체포되어 1871년 참수되었다(38세)
메이지 유신후에도 야이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겐사이가 장차 국가의 큰 골치거리가 될 것이라 정부가 생각했던 모양이다.
켄신의 모티브 가와카미 겐사이
텐포(天保)5년~ 메이지(明治)4년 (1834 ~ 1871)
구마모토(熊本城下)태생으로 부친 오모리 사다스케(小森貞助)와
모친 와카(和歌)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오모이 히코지로우
(小森彦治)였으나, 가와카미 겐페이(河上源兵衛)의 양자가 되면서
가와카미 겐사이(河上源 ?)로 개명한다.
히고(肥後)번의 양이파인 그는 문학은 토도로기 무헤이(轟武兵衛)에게, 군학(軍學)은 미야베 켄조우(한자불명)에게, 양학은 하야시 오우엔(한자불명)을 통해 익히므로서, 근왕사상(勤王思想)을 품게된다. 이러한 지식은 그의 검을 히토키리의 실로 빠져들게 했다.
그의 검의 유파(流派)는 겐사이류(下知火流 라고 일컬어짐)라 한다.
도장에도 다니긴 하였으나 죽도검술은 서툴러서 매번 두들겨 맞았으나. 그는 실전에는 천재적이었으므로 진검으로 겨룰때는 패한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이론보다는 실전에서 임하는 검술이 진정한 무술이라고 인정하는 논리였다.
그는 막말 오카다 이조,다나카 신베에 등 4대암살자중 하나로 수없이 많은 자들을 막부의 풍운속에 비명에 횡사하게 하였다.
분큐(文久)3년 - 1863년, 존황양이파(存皇揚夷派) 지사들이 경도의 한 음식접에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무렵의 지사들이라 하면 술이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화제는 막부에 관한 비판이 화제의 중심이었는데
겐사이도 그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흐르면서 그 막부의 관련인사의 실제이름이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잠시 후 겐사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그가 어디로 갔는지 걱정을 하고 있는데 얼마 후 겐사이가 돌아왔다.
옆구리에 꾸러미를 든 채였다. 모두들 그 꾸러미를 궁금해 하며 호기심에 풀어보았다. 그 꾸러미에는 막 베어온 사람의 머리가 들어있던 것이다. 겐사이는 툭 내뱉듯이 말했다.
"좀 전에 거론되었던 막부 인사라는게 이놈 맞는가?..."
그런 그는 평상시에는 상당히 과묵하지만 입을 열면 여성처럼 온화한 말씨를 구사하였으며 아담한 체구에 여성같은 곱상한 외모를 가진 그는 수줍음도 많았는지 친구나 손님들을 대할때는 눈을 아래로 깔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벤 인물의 기록이 남아있는데,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처남인 사쿠마 죠우잔(左久間象山)을 죽임으로서 동지들의 복수를 하고자 한 것 같다.
이케다야 사변으로 미야베 켄조등과 같은 히고번 출신의 동지들을 잃은 겐사이는 사건의 흑막으로 여겨졌던 사쿠마 죠우잔을 죽임으로써 동지들의 복수를 감행한 것이다.
당시 겐사이는 이런말을 하였다.
"사람을 벨 때는 마치 인형을 베는것 같았으나.... 죠우잔를 벨때는 마치 사람을 처음 벤것 같은 기분이 났습니다... 필경 죠우잔이 당대의 호걸중 하나인게 맞는거 같군요..." 또 공포감에 휩싸여 처음로 목숨이 위태로웠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 후로 겐사이는 활인검(活人劍)의 길을 걸었다. 칼을 빼들어도 칼등으로 돌려쳤다고 한다. 그 후, 조슈번과 함께 싸우게 되는데, 메이지 정부가 개국정책으로 돌아서도 양이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개국책에 비판을 하다가 정부전복의 협의로 체포되어 1871년 참수되었다(38세)
메이지 유신후에도 야이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겐사이가 장차 국가의 큰 골치거리가 될 것이라 정부가 생각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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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무라 켄신의 모티브로 채택되었던 가와카미 겐사이 막말의 암살자중 한사람으로써 활약을 했던 인물이다. 오히려 바람의 검심이란 만화로 인하여 이 인물이 알려졌다고 하면 정답일 것이다.
사이토 하지메 또한 바람의 검심으로 유명해졌다. 겐사이의 특징을 꼽자면 얼굴의 십자흉터 켄신의 십자흉터도 당시 가와카미 겐사이의 얼굴에 십자가 모양의 검상이 있다고 하여 작가가 그렇게 그린 것이다.
겐사이에 대해 더 알고싶다면 시바 료타로의 "막말의 암살자들"을 읽어보는것도 좋을것이다. 사이토 하지메 작성할때보단 정말 수월히 작성했다. 사이토 하지메는 싸이월드 정기검진으로 다 작성해 놓고 다시 작성하였으니 정말 암울했었다.....
위의 사진은 바람의 검심의 히무라 켄신
첨부파일 : 히무라 켄신(1742)_0227x0385.sw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