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문동성200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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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8일

 

정말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이제 현실은 내게 더이상 로맨틱하지 않으니까. 이젠 더이상 그리움도 아픔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더이상 글을 쓸 이유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정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글을 써야한다는 막연한 의무감마저 들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세가지 다른 이야기가 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움과 아픔에 대한 이야기, 너무나도 무력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 주인없는 물건을 들고 하염없이 서성대는 한 어린아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글로 옮겨야 겠다고 작정한 이유는 내 마음에 대한 빚을 갚음과 동시에, 내가 흘린 눈물에 대한 의무감과 아무 댓가없이 받아온 사랑에 대해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 하나기 때문이다. 오래오래 잊지않고 기억하는 것. 이것 하나기 때문이다.

 

나와 할머니는 1984년 2월 7일에 처음 만났다. 할머니는 우리 아빠의 엄마로 그 당시에는 60대 초반이셨다. 내가 한국에 있는 하나 뿐인 손자였기에 할머니는 날 아주 예뻐하셨다고 아빠가 이야기한 기억이 난다. 내 기억속에 한 장면이 있는데, 머리가 까만 할머니가 내 볼에 뽀뽀하면서 침을 그득 묻히자, 난 그걸 닦았고 할머니는 왜 닦냐며 웃으며 내 엉덩이를 때렸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우리는 함께 살았고, 할머니는 아마 내게 몇번의 뽀뽀를 더 했을 것이다. 침을 묻히면서. 나도 그렇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나란 녀석은 도무지 그런 살가운 짓을 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친척들 앞에서는 무뚝뚝했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려워서 더욱 그랬다. 할머니를 정답게 불러본 적이 한번도 없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고 우리집은 강원도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전에 미국에서 둘째 큰아빠네가 들어왔다. 그 집에는 아들이 세명이었는데, 그 중 두명이 나보다 형이었고 막내는 동생이었다. 형들이 오자 할머니 할아버지는 형들을 좋아해주었다. 형들 중에 첫째형은 장손이었다. 난 미국에서 들어온 형들을 잡고 놔주지 않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곁에서 형들의 미제 야구 헬멧을 썼다 벗었다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다. 할머니는 내게 더이상 뽀뽀를 해주지 않았다.

 

강원도에서 2년간 살아야 했을 때, 우리는 농사를 지었다. 엄마 아빠가 배추를 팔러 서울로 올라가고 그동안 우리를 봐줄 사람이 없어 할머니가 시골로 내려와서 우리를 봐줬다. 그때일이 딱 하나 기억이 난다. 내가 할머니에게 "할머니 이따 한국시리즈 봐야해요." 하니까 할머니께서 "그 한국시리즈를 반찬으로 싸달라는거지?" 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한국시리즈를 모르셨다. 그때는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그 일이 있은 후 꽤 시간이 지나서야 할머니가 까막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무식하고, 글자도 모르지만 어린 손자 입맛이 자기들 노인네 입맛과 맞지 않을까봐 노심초사했던, 내 기억 속의 할머니를 난 사랑했다.

 

강원도에서의 2년 생활이 끝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난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때의 나를 돌이켜보면 내게 가장 주가 되었던 것은 공부였다. 강남이라는 곳에서 나 자신에 대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난 놀기도 많이 놀았지만 공부를 놓지 않았다. 할머니와의 추억이 없던 것에 대한 변명이지만, 그 때의 난 그랬던 것이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어버이 날일 수도, 아니면 그냥 평일일 수도 있다. 자세한 것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가뵈라고 해서 찾아갔었다. 아빠가 시킨대로 귤이나 박카스를 사들고 갔다. 가서 인사를 하고 한 10분에서 20분 앉아있다가 나온다. 항상 난 그랬다. 어떤 살가운 이야기도, 행동도 난 하지 못했다. 다리를 주물러 드리겠다는 말도 하지못했다. 배가 고팟지만 밥먹었냐는 말에 밥먹고 왔다는 거짓대답도 하곤했다. 하지만 그날은 할머니께서 할아버지 밥을 차려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니 하는 김에 같이 먹고 가라고 하셔서, 그날은 진짜 밥을 먹고 왔지만 억지로 할아버지와 한끼를 먹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있는데 할머니는 내 옆에서 연신 내 칭찬을 하셨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같이 밥먹어주는 애는 우리 동성이밖에 없구나..." 하시면서. 계속 그러시다 급기야는 울음을 터트리셨다. "우리 동성이 밖에 없어, 우리 동성이...동성이..." 할머니는 계속 우시며 날 껴안으셨다. 난 그런 할머니등을 다독여 드렸다. 할아버지는 왜 우냐고 할머니를 나무라셨지만, 할머니는 날 껴안으면서 계속 우셨다. 우리 동성이밖에 없다고. 우리 동성이.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는 일이 잦아졌다. 예전부터 있었던 지병이 악화되어서 자주 병원을 들락날락 하셨다. 2년전, 크게 쓰러지시고나서 퇴원하셨는데 그때 아빠가 할머니가 동생을 찾는다고 해서 동생이 할머니를 뵈러 간적이 있었다. 할머니를 뵙고 돌아온 동생은 돈봉투를 들고왔다. 동생 말로는 나도 가는 것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손자, 손녀들을 하나씩 불러서 돈봉투를 나눠주고 계셨다. 난 그 말을 듣고 가지 않았다. 가서 돈봉투를 받아오면 할머니가 죽게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가지 않았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된다.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언제 어떻게 간다해도 완전한 준비란 있을 수 없다. 결국 난 이번에도 후회를 하게 됐으니까.

 

그렇게 잦은 병치레는 할머니는 점점 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야위게 만들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햇수로 치면 2년, 실제 기간은 1년 반. 그 시간은 할머니를 눈에 보일정도로 늙게 했다. 올해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들고 찾아뵈었을 때 눈에 띄게 할머니는 늙어있었다. 배에는 담즙주머니를 달고,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셨던 할머니. 난 멍하니 앉아서 사이다를 따 마셨다. 할머니는 내가 사온 카네이션이 가장 멋지다며 티비 옆에다가 세워 놓으셨다. 난 사이다를 다 마시고 할머니 할아버지 댁을 빠져나왔다.

 

어버이날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다시 입원하셨다. 의식을 잃으셨다고 해서 모든 가족이 소환되었다. 생전 처음보는 할머니의 모습.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 거칠게 몰아쉬는 호흡.

 

 

2006년 7월 18일

 

그때의 할머니는 정말 낯설었다. 온 몸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숨이 멈출 것 만 같았다. 난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지금 이렇게 돌아가시면 남겨진 내 후회가 너무 많아서. 살갑지 않은 내가 할머니의 손을 덥썩 잡았다.

 

할머니는 곧 있어 의식을 차리셨지만, 가족을 잘 알아보시지 못했다. "할머니 동성이 왔어요. 동성이" 누군가 얘기했다. 나를 슬쩍 보시더니 손을 움켜쥐셨다. 나인줄 아셨을까. 잘 모르겠다.

 

할머니가 병원에 계속 계셨고, 전 식구가 할머니 병간호에 동원되었다. 나와 내 동생과 삼촌이 밤을 새워 간호했고, 낮에는 고모, 큰엄마와 교대를 하는 식이었다. 기말고사 기간을 제외하고 오후 수업 부터 시작하는 날은 어김없이 밤을 샜다. 할머니 옆에서 불편한 잠을 잤지만 오히려 맘은 편했다. 우리 할머니와 나는 함께 있었으니까. 지금 할머니 곁에 있는건 오직 나니까.

 

그렇게 몇주가 흘렀다. 나는 할머니의 변을 치우고, 매끼마다 미음을 코에 넣어드렸다. 아프다고 신음하시면 간호사를 불러 마취 주사를 놓게 했다.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드리기도 하고 다리를 주물러드리기도 했다. 할머니의 이마를 짚어봤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할머니의 이마는 주름살로 쭈글쭈글했다. 얼굴빛도 아주 탁했다. 내 마음속에 각인된 할머니의 이미지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꾸부정은 했지만 항상 크게 웃으시는 할머니. 그게 내 할머니였는데. 내 눈앞의 할머니는 얼굴이 더 누렇고 웃지 않으신다. 그래도 이 할머니에게는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 드릴 수 있다. 내 기억 속의 건강한 할머니에겐 못하지만. 지금 누워계신 할머니는 내 손길이 필요한 할머니다.

 

내가 병간호를 했던 어느 한 새벽. 할머니는 잠꼬대를 막 하셨다. "동성이 불러와 동성이" "할머니 저 여기 있어요. 저 동성이예요. 할머니 저 여기있어요. 여기 있어요." "동성아 동성아" "네 할머니 저 여기 있어요." 난 할머니의 손을 꼭 잡으며 얘기했다. 할머니는 내 이름을 몇번 잦아드는 목소리로 얘기하시더니 이내 다시 잠이 드셨다. 그게 내 이름을 불러주신 마지막이다. 난 그 이후로 할머니의 입에서 내 이름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난 이제 어디서도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어느날 아침엔 젊은 의사가 와서 관장을 했다. 할머니의 변이 굳게 나와서 막혀서 잘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관장을 도왔는데 할머니는 정말 괴로워하셨다. "야이놈들아 날 죽여라 죽여" "아이고 죽갔다 아이고 이놈들아" 하고 소리치셨다. 나는 계속 "할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참으세요" 라고 이야기 했다. 너무나 괴로워하시는 할머니를 매일 보면서 나는 정말 안타까웠다. 안타까움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오직 그 하나 뿐이라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난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잠을 잤다. 환자 침대 아래 보조 침대에서 담요를 깔고 굽은잠을 자면서도 할머니의 손을 놓기가 싫었다. 팅팅 부었지만 아직은 따뜻한 손이었다. 할머니와 맞잡은 내 손을 폰카로 찍었다. 어린 시절 앨범 이외에는 할머니와 찍은 사진이 없다. 그 흔한 가족사진 조차 찍지 않았다 우리 집안은. 손자와 할머니의 마지막 사진. 보여드리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그 후 몇 일이 지나고 할머니는 1인실로 옮겼다. 이제 모두 임종을 준비하는 듯 했다. 나는 어김없이 밤을 새러 병원으로 갔다. 삼촌이 있었다. 할머니 병간호에 가장 열심히였던 사람은 삼촌이었다. 막내는 아니었지만 막내 아들이었던 삼촌. 제일 마지막에 태어났기 때문에 더 아쉬웠을까. 삼촌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도 옆에서 모셨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나와 격일로 밤을 새웠다. 그날 나는 삼촌과 같이 밤을 샜다. 삼촌은 울면서 할머니에게 걱정말라고 문제 다 해결했으니 맘 편하게 가지시라고 다독였다.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 엄마" 삼촌은 병실을 나가면서 오열했다.

 

삼촌과 아빠에겐 할머니는 엄마다. 엄마 없는 세상이 어떨지 궁금하지 않다. 할머니를 산소에 묻을 때의 삼촌, 고모 그리고 우리 아빠.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엄마 없는 세상을 더이상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상상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삼촌과 함께 밤을 새고 집에 돌아와 자고 있을 때, 삼촌의 딸인 내 사촌동생과 내 친동생이 방문을 벌컥 열더니 "오빠 일어나 할머니 돌아가셨어" 라고 날 깨웠다. 지금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한다며 날 깨웠다. 난 일어나지 않았다. 잠을 더 잤다.

 

잠을 더 자면서도 난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말한마디에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그당시 나는 무척 졸렸었다. 할머니가 정말 돌아가셨을까. 난 살아계신 할머니를 보고 집에 왔다. 그러니 할머니는 죽은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 장례식장으로 갔다. 일가친척들이 다 모여있었고, 사촌형 동생들은 상복을 입고 있었다.

 

좁은 방에서 사촌들과 같이 상복을 입고 있었던 그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누군가가 죽었을때 입는 상복을 입고있는 나를 보면서. 나는 정말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인정했다.

 

이미 다들 상복을 입고 있었고, 위령소가 마련되어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절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우리들은 장례식장 옆 방에서 잠을 잤다. 어른들은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아빠는 맥주를 마시고 잠시 울더니 잠을 조금 잤다. 난 아빠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빠는 팔로 눈을 가리고 잠을 잤다.

 

몇일이 지나고 이제는 할머니를 묻으러 가야하는 날.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볼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한다. 온 가족들이 갔다. 병원 일꾼들이 누워있는 할머니를 상으로 옮겨서 삼베로 칭칭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워있는 할머니 주위를 우리가 한바퀴 돌면서 나오는 예식을 치렀다. 나는 그때 마지막으로 차가운 할머니의 머리카락, 얼굴, 몸을 만졌다. 눈에서 물이 나왔다. 그 순간에는 어떤 이유도 원인도 찾을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엉엉울면서 손으로 삼베 위를 쓰다듬었다. 딱딱한 팔과 다리, 발. 할머니는 박제같았다. 내가 쓰다듬던 이마의 주름살이 움직이지 않았다. 난 문에 기대어 계속 울었다. 고모가 내 이름을 외쳤다. 사촌 형이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렇게 할머니의 얼굴과 영원히 안녕을 했다. 삼촌은 밖에서 계속 울고 나도 계속 울었다. 할머니는 관으로 들어갔다. 내일은 산소로 향할 것이다.

 

산소로 가는 날 아침. 동생과 엄마가 늦었다. 아빠는 화를 냈다. 큰 버스를 타고 산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제일 큰아빠는 처음 듣는 옛날 이야기를 해주셨다. 할머니가 자신들을 어떻게 키웠는지에 대한 얘기였다. 고생고생한 이야기를 했는데, 처음엔 웃으면서 말씀하시다 결국 큰아버지도 울음을 터트리셨다. 이제 70이 넘으신 제일 큰아버지도 결국 우셨다.

 

산소에 도착해서 할머니를 안장하고 흙을 부었다. 흙은 곧 관을 다 가리고 점점 쌓였다. 인부들이 흙을 덮었는데 삼촌이 너무 거친 것 아니냐고 화를 냈다. "우리 엄마 안아프게 잘좀 합시다." 돌아가실 때까지 너무 아프셨으니까. 흙으로라도 아프게 해서는 안돼. 난 그 마음을 알고있다. 관에 떨어지는 흙이 너무 야속했다. 살짝 살짝 내려놓는데도 거칠게만 보였다. 아빠는 하늘을 바라보며 울었다.

 

큰 고모의 "엄마 미안해"라는 오열과, 둘째 고모의 그만하라는 외침속에서 밥을 먹었다. 그날 나는 밥을 많이 먹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러 갔을때 나는 항상 할머니의 밥을 사양했다. 입맛에 맞지 않았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동성아 밥먹었니?" 이 말을 다신 들을 수 없다는 것. 할머니가 해주신 밥을 더이상 먹을 수 없다는 것. 꾸역구역 입에 밥을 넣으면서 말했다. '할머니 맛있어요. 밥 더 주세요. 할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까지 그리고 할머니를 묻을 때까지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우리 할머니는 만들어 냈을까. 그 눈물 방울의 수 만큼이나 우리 할머니는 사랑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할머니를 떠나보낸 1주년이 어느덧 지난 지금, 다시 한번 조금의 눈물을 보태게 되었다.

 

작년 7월 말에 반쯤 써두었던 글을 이제서야 끝맺으면서, 잠시 잊고 지냈던 할머니와의 일들을 다시 생각한다. 다행히 많이 잊지는 않은 1년 뒤의 내가 이어받은 이 글. 돌아가신 할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잊지 않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

 

그리고 가끔씩 다시 할머니를 사랑하게 해줄 추억의 액자.

 

이 것이 바로 이 글의 의미.

 

 

받은 사랑을 다 주지도 못하고 할머니를 보낸 무뚝뚝한 한 손자의 자기 위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