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이상희2006.07.18
조회75
-쇼펜하우어-

젊은이여 절망하라 철저히 절망하라

젊은이여 절망하라 철저히 절망하라

젊은이여 고뇌하라 철저히 고뇌하라

젊으이여 사색하라 철저히 사색하라.

그리고 젊으이여 밝은 내일이 오고 있음을 청춘이

불타고 있는 더욱 향기로운 인생이 열리고 있음을 깨달으라.

오늘, 우리들의 생명은 살기위한 끊임없는 투쟁이며

악의 술책으로 고통의 세계일뿐만 아니라

"가능한 세계중의 최악의 세계이다.

"젊은이여 이를 벗어나기 위하여 생의 의지를 철저히 끊고

 괸저의 세계인 예술과 종교로 나아가라.

 

  -낙천주의-

 

염세주의는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반면,

낙천주의는 우리를 달래어 거짓된 안정으로 이끄므로

낙천주의는 염세주의 보다 더 비도덕적인 듯 하다.

 

 

  -쇼펜하우어의 에서-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A.Schopenhauer:1788-1860)

 

"삼류 철학자?"

 

그많은 야구 선수들 중에서, 우리가 경기에서 실제로 볼수 있는 선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경기에서 뛰는 9명 뒤에는 ㅊㄹ전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벤치에 죽치고 앉아 있는 수많은 후보 선수들이 있다. 그뒤에는 그나마 벤치에도 못 앉고 감독 눈치만 살피고 있는 더 많은 2군 선수들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별 볼일 없다 해도 자기 야구 인생이 결국 무명의 2군 선수로 끝나리라 믿으며 연습에 몰두하는 이는 별로 없다. "언젠가는 유명한 대스타가 되어 관중의 갈채를 받겠지" 하고 꿈 꾸며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사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플라톤,칸트,헤겔같이 역사에 빛나는 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뒤에는 무명의 설움을 씹으며 한 시대를 살다간 수많은 철학자들이 있다. 그리고 드 뒤에는 그나마 철학계에 명함도 못 내밀어 보고 꿈을 접어야 했던 더 많은 철학도들이 있었다. 우리가 살펴볼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1860)는 큰 흐름에서 본다면 결코 '메이저급 철학자' 가 아니다. 철학계를 무대에 비유한다면, 주연 배우이고 싶어했지만 결구 '밤무대가수' 정도 수준에서 삶을 접어야 했던 사람에 가깝다고 할까? 그러나 쇼펜하우어를 그정도 수준의 철학자로 보기에는 그는 지금도 너무나 큰 대중적 유명세를 누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철학의 숨겨진 황제'하고 생각했으며 '후세의 평가'가 자기를 알아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실 그는 철학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철학자의 대명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의 사상을 정확하게 아는 이는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드물다. 오히려 소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보다는 '엽기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기이한 행동과 돌출적인 언행으로 사람들에게 더 알려져 있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용서할 수 없는 귀찮은 녀석"

 

쇼펜하우어는 1788년 2월 유럽 북쪽의 단치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크게 성공한 네덜란드 계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후에 작가로 세상에 알려질 정도로 예술적 기질이 풍부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두 사람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다. 스무살 정도의 나이 차와 상인과 예술가 기질 사이의 차이를 생각해 볼 때 이 둘의 사이가 왜 좋지 않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쇼펜하우어의 이름 앞에는 보통 '염세주의자'라는 말이 붙는다. 많은 사람들은 항상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극도로 혐오했던 그의 태도가 원만하지 못한 가정 분위기와 어머니ㅘ 의 잦은 불화에서 출발했으리라 추측하곤 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해 처음부터 드다지 애정을 보이지 않았을 뿐더러, 후에는 그에게 '너는 용서할 수 없는 귀찮은 녀석이며 함께 사는 것은 몹시 힘들 것' 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내기조차 했으니 말이다.

 

아무튼 '현실주의자' 아버지는 쇼펜하우어를 자신의 뒤를 이을 '개방적이고 활달하며 세계시민적인 사업가'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는 그가 '아루트르(Arthur)' 라는 세레명을 받게 했는데, 그 이유는 유럽 어느 나라에서나 이 이름이 똑같이 '아루트르'라고 밞음되기에 후에 사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 그는 어린 쇼펜하우어가 '세계라는 큰 책'을 배울 수 있도록 프랑스와 영국 등지로 보내 외국어를 익히고 고급 문화를 접하게 한다. 아마도 쇼펜하우어는 이를 통해 언어와 쥐족적 품성을 익혔을 뿐 아니라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보통 사람을 혐오하는 태도'도 갖추었을 것 같다.

 

1799년 11살 쇼펜하우어는 랑게 사립학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장차 상인이 될 학생들을 교육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상업보다는 인문학에 더 큰 흥미를 느껴 김나지움(우리의 인문계 고등학교에 해당)에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상인에게는 인문학 굥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의 결심이 너무나 진지했기에 결국 아버지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김나지움 진학이나 견문을 쌓기 위한 유럽 여행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 단, 그가 장차 '상인이 된다' 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무엇때문이었는지, 이 상황에서 쇼펜하우어는 2년간의 유럽 여행을 선택했다. 그리고 후에 그가 회고하듯 '고전과 히랍·라틴어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젊은이의 2년을 쓸모없이 보낸 후에' 함부르크로 돌아와 아버지 친구 가게에서 상인으로서의 일을 익히기 시작한다. 이 때까지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바램대로 충실하게 커가고 있던 셈이다.

 

그러다 1805년. 아버지가 상점 창고에서 떨어져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죽음은 자살로 생각되었는데, 아버지는 우울증과 점점 악화되는 귀머거리 증세로 고통받았을 뿐 아니라, 부부 갈등으로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쇼펜하우어와 어머니 사이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지기 시작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를 비판했다.

 

"아버지가 고독하게 지내는 동안 어머니는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아버지가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동안 어머니는 즐겁게 지냈다. 그것이 여인들의 사랑이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끊임없이 멍청한 세상과 인간의 고통에 대해 한탄해대는' 아들 쇼펜하우어를 더이상 견딜 수 없었다. 연회에 참석한 거물급 손님들과 벌이는 '진저리나게 불쾌한 논쟁' 은 어머니를 조마조마하게 했고, 아들은 결국 그녀에겐 '언짢은 밤과 악몽을 가져다주는 사람' 일뿐

이었다. 결국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에 대해 결별을 선언한다. 어머니는 누이동생을 데리고 아예 이들이 살았던 함부르크를 떠났고, 쇼펜하우어는 2년간 더 그곳에 남아 아버지의 사업을 정리한다. 그리고 나서 평소에 원하던 김나지움에 입학한다.

 

"신과 같은 플라톤, 경탄할 만한 칸트" : 쇼펜하우어의 대학 생활

 

1809년, 스물 한 살의 젊은아 쇼펜하우어는 이제 비로소 대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철학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괴팅겐 대학 의부학부에 들어가 의학 공부를 먼저 하다가 칸트 연구가인 수ㅠㄹ체의 강의에 감동 받아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그는 술체를 통해 '신과 같은 플라톤' 과 '경탄할 만한 칸트' 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이 두 사람의 사상은  '그를 인도하는 두 별' 이 되었다.

 

플라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진정한 세계인 '이데아의 불완전한 ㅗ방"일 뿐이며 진정한 지식은 이데아를 아는것 ' 이라고 주장한다. 그를 통해 쇼펜하우어는 진정한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보고 접하는 세계를 넘어서 세상의 본질을 추구해야 함을 배운다. 그리고 인간 인식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칸트에게서는, 우리의 지식과 삶에 대한 태도는 외부 세계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거나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주체인 인간 의식과 태도에 따라 달라짐을 알게 된다. 쇼펜하우어 특유의 우울함이 예전에는 일종의 정신 질환 같은 것이었다면, 이제 이 두 사람의 사상을 통해 그의 사상은 '염세주의'라고 할 만한 것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호기심 많은 젊은이는 괴팅겐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았다. 2년뒤 그는 피히테와 슐라이어마허가 명성을 날리고 있던 그 시대 사상의 중심지였단 베를린 대학으로 옮긴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철학 체계가 조금씩 자리 잡아가기 시작한 이 오만한 젊은이에게 이들의 사상은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했던 듯하다. 피히테의 정열적인 연설을 듣고 프랑스에 대항하는 '조국 해방 전쟁'에 참여할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전쟁을 피해 여러 곳을 떠돌다가 1813년 결국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 [충족 이유율의 네 가지 근거에 관하여] 는 별다른 반을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 논물을 주의 깊게 읽은 소수의 사람 중에는 대문호 괴테도 있었다. 괴테는 쇼펜하우언의 첫 만남을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학식이 깊고 업적이 많은 젊은 쇼펜하우어 박사의 방문은 나를 흥분시켰고 서로 배움에 도움이 되었다." 고 회상한다. 이 대가(大家) 는 여러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이젊은 염세주의적 추종자에게 다음과 같은 적절한 충고를 던져 주었다.

 

"...만일 그대가 그대의 가치를 즐기고자 한다면, 그대가 먼저 세계가 가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시대 정신에 도전하다! 그러나 이 염세주의자는 그 후로도 세상을 밝게 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상을 더 어둡고 비참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1818년 ,수년간의 연구 끝에 그는 [의지와 표상으로서 의 세계]라는 책을 내놓는다. 그는 이 책이 '세셰라는 수수께끼의 진정한 해결책' 이며 '전적으로 새롭고 독창적인 사상으로서 이후 수많은 책들의 원천이 될 것' 임을 장담한다. 그러나 출한업자는 더많은 인세를 요구하는 쇼펜하우어에게  '이 책은 안 팔려서 파지나 되지 않을까 두렵다' 고 공격한다. 불행히도, 후에 이 비판은 현실이 된다.

 

그럼에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는 그 자체로 매우 의미있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당시에는 누구도 의심핟지 않았던 인간 이성과 과학 기술 발전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에 처음으로 피바하는 목소리를 내었다는 점에 있다. 즉, 당시의 철학과 과학은 세계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구조로 되어있으며 학문은 이 것을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가운데서 인간은 점점 더 행복해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면, 쇼팬하우어는 세계란 결코 합리적으로 되어 있지 않으며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 일뿐 이라고 비판한다. 의지란 곧 충동과 욕망을 의미한다. 즉, 식물이 자라고 돌이 중력으 ㅣ법칙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고, 동물이 살기 위해 투쟁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합리적인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 에 따라 맹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세상의 모든것들은 자신의 충동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 충동과 ㅇ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의지(욕망)는 곧 우리와 세계의 본질이기에 이 것은 채우고 또 채워도 욕망은 여전히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욕망 때문에 고통을 받게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삶은 맹목적인 의지일 뿐이며 인생살이는 결국 고통일 뿐' 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대행히도, 세상 만물 중에 오직 인간만은 이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 (욕구) 에 무작정 따라가지만 않고, 이를 억제해야 한다고 욕망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삶의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려면 우리의 욕구에 반하여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해야한다. 이때에만 '바다와 같이 고요한' 영혼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더 많은 생산과 소비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쪽으로 흘러가던 과학 기술적 세계관에 대한 최초의 반성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 무명의 신출내기 철학도의 주장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실패르 '자기 사상의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헤겔의 사상은 '절대적으로 허풍스런 헛소리에 불과한 철학' 이며 '정신병자의 수다' 이고 '요술장이의 주문' 같은 것에 불과하며, 이번 ㅣㄹ패는 자신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 '밤에 늑대로 변하는 것 같이 사악한' 교수들 의 모함과 방해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토록 심각하게 헤겔을 공격하고 고민에 빠져있었지만 헤겔은 정작 이런 그의 사정에 전혀 관심을갖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쇼펜하우어는 점점 더 울적해져서 공포와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발사가 면도칼로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고 생각해 절대로 면도를 하지 못하게 했고, 잘 때에도 침대 밑에 권총을 넣어 두고 잤다는 등의 유명한 '엽기적 행위' 들이 이때 나온 것들이다. 모든 것이 쇼펜하우어에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부록] 으로 유명해지다.

 

1831년 콜레라로 인한 헤겔의 죽음은 쇼펜하우어에게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헤겔을 죽인 콜레라를 피해 프랑크푸르트로 갔다가 그 곳에 정착하는데, 그는 이때부터 비로소 성공을 맛보게 된다. 헤겔이라는 이성 중심 사상의 큰 나무가 사라지자 그 동안 여기에 가려 소외되어 왔던 사상들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차츰차츰 알려지기 시작했고 거의 광신적인 추종자들이 나타나기까지 했다. 그는 이러한 성공에 매우 만족했으며 자신의 명성을 보도한 기사를 자세히 읽고 되씹으묘 즐거워 했다고 한다. 이 염세주의자는 말년에 와서 비로소 낙관주의자처럼 즐거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역석적으로 그의 성공은 그의 대표작 [의지와표상으로서의 세계] 가 아닌 사상 전체로 본다면 부록에 가까운 얇은 책 한 권에서 시작되었다. (책제목 조차도 [부록과 보유]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 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어 있다) 이 책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거꾸로 그의 대표작을 읽게 되었고 이로서 비로소 말년에야 그의 사상은 하나의 '사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860년 쇼펜하우어는 72세의 긴 생애르 마치고 폘혐으로 눈을 감았다. 이렇게 장수할 수 있었던 원인 중에 하나는 앞서 말한 죽음에 대한 망상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너무나 두려워 한 나머지 자신의 안전과 겅강에 극도로 신경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을 때까지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장례식조차도, 아직 죽지 않은 상태로 매장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 그의 유언에 따라 죽은지 몇 일이 지난후에야 치루어 졌을 정도로 말이다.

 

사후 평가: 염세주의의 의의

 

그가 죽은지 15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는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헤겔보다는 한참 낮은 평가를 받는 철학자이다. 야구에 견주어 볼때 , 헤겔 같은 대 철학자를 메이저리그 대표팀의 간판 투수로 볼 수 있다며, 쇼펜하우어는 마이너리그에서 갓 올라왔다가 간판 투수에게서 기습 번트를 성공시킨 타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울러, 그 번트가 이후 경기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정작 번트를 댄 선수는 '실력' 보다는 그가 일으키는 끊임없는 사생활 스켄들 때문에 더 유명했던 그런 선수 말이다.

 

확실히 그의 철학은 인간 이성에 낙관적인 기대를 갖고 있던 근대 사상계가 보지 못했던 커다란 맹점을 지적해 주었다 그러나 투쟁을 잘 하는 사람이 정치도 잘하는 것은 아니듯, 그의 염세주의는 그 성격상 앞으로도 주요한 철학 사조가 되기는 힘들 듯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엠세주의가 함축하는 중요한 의미 하나를 놓쳐서는 안된다. 인간에 대한 극도의 혐오는 역설적으로 '인간이면 당연히 이래야 한다' 는 높은 기대치에서 나온다는 것 말이다. 염세주의는 오히려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비판정신에 근거해야만 그 의미가 있다. 그 모든 비난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가 단순한 기인이 아닌 현대 사상과 문명에 있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철학자' 로 언급되는 것은 바로 그의 사상 내면에 깊이 깔려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