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타키타니(수정)

김보옥200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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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타키타니를 세 번 보았다.

 

지금 딱 맥주 한 잔을 마시거나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글을 쓰고 싶다. 그렇지만 맥주는 너무 배가 불러 못 마시겠고 담배는 이가 노래질까 봐 못 피우겠다. 늘 이런 식이다. 적당하다는 것. 나는 내가 어떤 와중에도 상당히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는 인간이란 걸 안다.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누군가가 기습하더라도 벗겨진 신발을 찾을 만큼 나는 본능적으로 흐트러지는 걸 치밀해서라기보다는, 두려워하는 사람이며, 그것이 나를 언제나 적당히 여기서 멈추게 한다는 걸 안다.

 

그 영화를 세 번 보았지만 실은 처음 봤을 때가 제일 좋았다. 그 후로 두 번은 보지 말 걸 그랬나 보다. 보면 볼수록 자꾸 무언가가 더 보이는 영화나 책이 있지만 이건 딱 처음, 그 처음 이상 더 무언가가 보이질 않는다고나 할까. 물론 확실히 짚지 못한 것을 차분히 정리할 수는 있었다. 어쨌든 영화는 처음부터 내가 생각할 공간을 무한대로 키워 놓았고 그 이후로도 그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이 영화에 이렇게 바짝 열광하고 있는 이유는 이것이 갖고 있는 함축의 미학 때문이다. 우선 러닝 타임이 70분이다 보니 함축을 하지 않을 방법이 없었을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이 원작이라고 하는데, 이 영화의 감독 이치카와는 그전까진 줄곧 30초짜리 광고만 찍어 온 사람이었다. 이 기발하면서도 사색적인 단편을 가장 긴 여운을 남기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간결함'이 간절히 필요해 보였다.

 

실제로, 일인극의 대가였던 잇세 오가타(토니 타키타니 등 1인 1역)는 연기를 하면서 자주 부끄러웠다고 한다. 감독은 늘 오버를 자제해 달라는 주문을 했다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연기는 정말로 거슬리지 않았다. 순간 최근까지의 한국 영화 풍토 아래서 '최민식(최민수가 아니다) 풍'의 연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쥐어짜이는 관객의 역할에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스토리는 어차피 무라카미 소설이므로, 언급할 필요가 별로 없다 생각된다. 그의 팬은 아니지만 그가 말하는 '상실감'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공감한다.

 

같은 화면의 구성, 비슷한 패턴의 반복, 모노톤 색감, 게다가 내레이션까지 과도했다. 그런데 지루하지 않았다. 많은 생략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한 컷 한 컷이 저마다 작품 같았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돈가스에 소스를 뿌리는 장면이라든가, 기계로 빵을 자르는 장면들마저도 아름다웠다. 잇세 오가타가 특별히 공을 들였다는 일러스트의 작업하는 모습 또한 그랬다. 도저히 의도한 연기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훨씬 더 고민해야 했고 치밀했어야 했던 것은 아닐지.... 즉 그러한 역설로써 어필하는 것이 아마도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의 중요한 한 포인트일 것이다.

 

바람을 찍고 싶었다고 했다, 감독은. 그리고 그것은 성공했다고 전해 주고 싶다. 그러니까 나무 숲이 흔들리는 그 장면이, 내가 처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장면이었다. 그리고 토니가 아버지와 만난 후 길을 나설 때 그의 머리 위에 가득했던 그 구름의 장면도 나는 참 좋았다. 열거하자면 순위를 매겨 가며 얼마든지 더 가능하다. 그만큼 씬들이 선명하게 살아 있다. 어떤 장면 장면들이 스토리를 연결해 주는 데 급급한 영화가 아니어서, 장면 하나하나가 다 작품이 될 만큼 독립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미처 잡아 채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히사코가 우는 장면이었다. 그녀의 울음을, 처음 보고 나서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면 두 번 세 번 이 영화를 봤던 것일지도 모른다. 히사코의 울음을 찍은 그 장면은 그러나, 이 영화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장면이다. 731벌의 옷을 남기고 죽은 여자의 옷방에서 히사코는 흐느꼈다. 그리고 이 오열은 토니에게 아주 인상적으로 남는다. 다시 말해 이 울음은 결정적으로 이 영화가 아주 긴 여운을 남기게 되는 어떤 단서가 된다. 촌스럽게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쓰자면, 그래 희망 같은 것을 상징하면서 끝을 맺으려 한 듯도 하다. 슬쩍, 그러니까 그 울음에 담긴 것들을 궁금하게 만들면서 말이다. 

 

히사코의 울음은 그래서 결국 내 마음에도 남아 버렸다. 

 

그리고 그 울음에 대해 자꾸 생각하다 보니, 내가 왜 요새 토니 타키타니에 천착하는지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히사코의 울음이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인지 감독이, 아니 작가가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를 내가 제대로 알아챘는지 그건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토록 아름답고 많은, 새것이나 다름없는 옷들을 남기고 갑자기 죽어 버린 한 여자의 인생 앞에서 저도 모르게 울음을 떠뜨린 여자라면, 기억에 남을 만도 하다는 것에 우선 공감한다.

 

그것은 단순히 히사코라는 한 여자의 일반화된 눈물로써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생명의 덧없는 무게'라고 해야 할까, 히사코가 직면했던 것은 그런 감정 앞에서의 서러움이었을 거라고 나는 추측한다. 살아 있던 에이코의 몸을 감싸 아름답게 빛나던 옷, 영화에서는 그녀의 고운 자태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특별한 여행을 준비하는 새가 걸쳐 입은 바람'과도 같다고. 아름답다는 건, 온전하게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 아름다움은 에이코가 걸었던 생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한때 토니를 숨막히게 매료시키키도 했던. 또 실제로 그것은 영화 속에서 어떤 삶들을 창조하고 유지시키는 매개체로서 충분한 구실을 해냈다. 예를 들어 토니와 에이코의 만남, 그들의 결혼, 그리고 토니의 고독감을 완벽하게 상쇄시킨 행복했던 신혼에 이르기까지. 그럼에도 그것은 사라지고 만다. 에이코의 옷들을 보며 토니는 그녀가 사라진 지금 이것들은 그녀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입었던 옷들을 그리고 그녀를 점점 잊어 간다.

 

우리가 살면서 의존하는 것들은 대부분 그렇게 지나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잊혀져 가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것을 위해 살면서 때로는 필생을 걸기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허망하고 고독하고 슬픈가. 이것을 나는 히사코가 '조용한 오열'로써 대변해 주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과 똑같은 무게로, 말하고 싶은 무언가에 대해서 말하기를 주저하였던 근래의 내 자신이, 나는 마치 이 영화의 역설과 비슷하게 닮아 있다고 느껴진다. 어쨌든 요즘 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한기가 들 만큼 고독하다..... 내가 상실해 온 수많은 것들 중 이제는 완전히 가슴에서 지워진 것들이 많이 있다. 그것들은 비록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덧없다 할지라도, 이전에는 또 그토록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이렇게... 잃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두렵고도 아름다운 일이구나, 하고 나는 생각한다.

 

이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 대한 짧은 글을 마친다. 덧붙여, 고요히 사색해야 할 많은 부분을 관객에게 되돌려 준 감독과 배우들의 훌륭한 자제력에 진심으로 갈채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