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버 지 *** 나의 아버지는 예전

이상민200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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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버 지  ***     나의 아버지는 예전


         ***  아 버 지  ***

 

 

나의 아버지는 예전엔 농부이셨고 지금은 글쟁이시며 학자이시다

 

서양식 학교는 입학도 하신 적이 없으시고 집안에서 한학으로만 교육받고 자라신 아버지는 그냥 보통 글쟁이가 아니라 한문으로 시와 글도 지으시고 남의 집 비문이나 족보도 쓰시고 고서도 번역하신다

 

그리고 집안내력으로 서화에도 조혜가 깊으셔서 작가로도 활동하시고 제자들도 양성하신다

 

신학교에 다니신적은 없으셔도 한글, 수학, 물리적 이치 등은 스스로 또 학교에 다녔던 당신 동생들의 어깨너머로 훌륭하게 깨우치셨다

 

또한 손재주도 좋으셔서 죽은 나무들을 캐다가 깎고 다듬어 옛글과 그림도 새겨 넣고 칠도 하여 여러가지 멋스런 생활작품들도 만드시곤 하셨다

 

또 겉으로는 무뚝뚝하셔서 표현은 안하시지만 동식물도 사랑하셔서 집안에 동물들이 끊이지 않았고 사과, 배, 밤, 감, 포도, 딸기, 산딸기, 앵두, 벚, 오디(뽕나무 열매)나무등을 가족들을 위해 심으셨고, 진달래, 해당화, 장미같은 어여쁜 꽃나무들도 집앞뒷뜰에 가꿔놓으셔서 해마다 철마다 자연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게 해주셨다

 

아직도 가끔, 어렸을 적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머리맡에 바가지째로 내놓으셨던, 금방 따서 이슬이 맺힌 산딸기, 앵두, 벚, 오디들의 어여쁜 색과 향긋한 단내가 기억나곤 한다

-- (아마 내가 미국에 있는 내내 집앞뒤로 그런 열매들이 흐드러지게 열려 다 땅에 떨어져도 입주위가 뻘개지도록 먹어줄 자식이 가까이 없음을 철마다 안타까와하셨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다)

 

그때는 그런것들을 그냥 당연스레 여겼지 한번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진한 사랑의 표현이라 생각하고 감사드린 적이 없었다

그냥 달콤한 그것들만 야금야금 입안에 집어넣을줄 밖에 몰랐던것 같다

 

그리고 그땐 맹목적으로 먹고싶던 고기나 소세지도 거의 못먹었고, 학교 우유급식도 몸이 약한 둘째 동생만 먹고 나는 받아먹지도 못했고, 친구들이 이쁜 샌들이나 구두신고 다닐때 고무신이랑 오래 신으라고 사준 큰 운동화만 신고 다녔던 그때의 집안형편이 부끄러운 생각이 앞섰었다

 

철없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던 내가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욕심과 낙심, 포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것에 대한 감사함을 눌러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학교에 필요한 학용품을 사야한다고 부모님께 돈을 달라하면 부모님께선 아침밥도 드시다말고 이집저집 돈을 꾸러 다니시기 일쑤여서 용돈은 커녕 군것질을 한 기억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몇학년때인진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소풍날에도 용돈은 항상 몇백원이고 입고갈 옷이 없어서 더운날 동복 체육복을 입고 갔다가 더위에 지친데다 나혼자만 체육복을 입고 온게 챙피해서 게임도 참여하지 못하고 풀이 죽어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전년도에 교직에 계시던 삼촌이 사준 어린시절 유일한 샌들이 끈이 끊어져 버리는 바람에 거의 울다시피 맨발로 집에 왔던 적도 있었다

 

그런 저런 우리집이 가난하다는 생각때문인지 반에서 공부잘하는 아이였는데도 늘 주눅이 들어 생활했던것 같다

 

반친구들이 늘 군것질을 하고 새로운 장난감이나 학용품을 가지고 자랑하고, 새옷을 입고 구두에 머리장식한것을 보면서 부럽고 따라하고 싶단 생각보단, 나는 쟤들하곤 다르고 감히 어울려 놀수 없다는 괴리감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턴 막연히 얼른 시간이 지나서 집을 벗어나서 돈을 벌어서 먹고 싶은것도 사먹고 하고 싶은것도 해야겠단 생각을 하기시작했다

 

그러면서 다른 아버지들과는 다른 학식도 있으시고 성품도 점잖으신 아버지를 존경하였음에도, 항상 옛것만 아시고 교통이나 모든생활이 불편한 시골 외딴집만 고집하시며 자기잇속 챙기고 돈버는데엔 별관심도 없으시고 순진하기만 하신 아버지가 답답해보였다

 

그래선지 아주 어릴적부터 어른들이 늘 내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시던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않았었다

 

" 상민아, 넌 아부지한티 효도해야 한다. 세상에 니네 아부지처럼 딸래미를 이뻐하는 아부지는 못봤다. 너를 얼마나 이뻐했는지 밭이고 논이고 읍내고 맨날 자전거에 태우고 아주 널 달고 다녔다! "

 

그런말을 듣고 나면 잠시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서, 떨어질까봐 아버지 허리춤을 꼭 잡고 조마조마하면서, 바닥이 딱딱한  뒷자리때문에 궁뎅이가 아프다는 생각만 하면서 달리던 기억이 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이뻐죽겠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안아주고 뽀뽀해주신다든지 '아이구 이쁜 내딸, 우리 공주님~!' 뭐 이런 낯간지런 말들을 들은 기억이 전혀 없던 난 '아버지들은 원래 그정도는 딸을 이뻐하는거 아냐?'란 식으로 아버지만의 사랑의 표현방식을 당연스레 여겼었다

 

내가 아는 나의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시고 좀 무뚝뚝하시고 일만 하시고 잔소리도 안하시는 소박한 시골 농부시며 겉으로 사랑을 드러내시지 않는 표현력 부족한 아버지셨다

 

그때문에, 철부지였던 나는 커가면서 한번도 살갑고 다정하게 아버지를 부른다든지 대화를 나누는 일이 전혀 없었다

 

내가 첫애였고 엄마 아버지께 앵앵대는 동생들이 셋씩이나 있었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난 아버지나 집안 남자어른들과는 정반대되는, 그때그때 사랑을 겉으로 표현하는 사람과 결혼하리라 다짐하고  부모님께 들으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리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사람을 만나 살고있는것 같긴 하다...)

 

사춘기로 들어서면서 우리 집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1989년 고3학년말이 되어서야 우리집에 전화기를 겨우 놓았으니 어느정도인지 알것이다

 

여하튼, 그런 우리집이 챙피했고, 고등학교를 대전으로 가게된 나를 유학보내면서 자취나 하숙방하나 구해주시지 않고 그렇잖아도 북적대는 큰아버지댁에 일년에 쌀몇가마니 주고 나를 맡긴 부모님을 나중에 조금은 원망도 했었다

 

나를 맡겨놓으시곤 농사일이 바쁘셔서 자주 오시지도 못했으니 용돈도 거의 못썼고 사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던 그당시 옷도 거의 사지 못해 사촌들의 눈치를 보며 얻어입고 다니는것도 불만이었다

 

도시락을 하루 열개를 싸시던 큰엄마는(그집도 넉넉하진 않았으므로) 거의 매일 김치나 나물같이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만 싸주셔서 -이해는 되었지만-점심시간만 되면 챙피한 맘이들어 많이 혼자 밥을 먹곤 했던것같다

 

암튼 본론으로 들어와서 보면, 순전히 주관적인 나의 생각이지만 그러그러한 제반 상황들이 더욱 아버지의 어깨를 쳐지게 하고 그 점이 가족들에 대한 사랑의 적극적인 표현을 막았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한번은 대전에서 학교다니면서 방학때 시골집에 다니러 왔을 때의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농사일과 한학 학력으론 도저히 생계를 꾸려 나가실 수가 없어 어딘가 멀리 막노동을 하시러 가셔서 몇달째 집에 안계신다는 엄마의 말씀을 듣고, 학식과 점잖으신 성품에 가당치도 않는 일을 하시며 어느 막사에서 고생하며 지내고 계실 아버지를 떠올리며 한동안 가슴이 쓰라리고 미어졌던 때가 있었다

 

그때, 그런 원망도 했었다

 

'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무리 증조할아버지가 극심한 반대를 하셨다 해도 아버지밑에 삼촌부터만 학교란 데를 보내셨을까, 왜 우리 아버지만 죽으라고 농사일만 시키시고 보수도 안주고 가끔은 밥도 안챙겨주는 이집저집(친척집)일까지 하게 하셨을까!'

 

한동안 화도 나고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물밀듯이 밀려왔었다

 

그리고 동시에, 7살이후로 아버지께 배웠던 천자문, 동몽선습, 몽학동감, 명심보감등 한학, 한문을 등한시하게 되었고, 우습지만 영어과목에만 중점을 두고 공부하게 되었다

아버지를 보면서 옛학문을 공부하면 살길이 없겠구나란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같다

그리하여 당신과 비슷한 길인 국립사대 한문과로 입학해 내가 공부하길 바라셨던 아버지의 기대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던것 같다

 

그런데 결혼해서 아버지곁을 떠나 멀리 코쟁이 나라에서 살다보니 한국에 가서 아버지를 뵐 때마다 전엔 관심도 거의 없던 아버지의 작품들의 소중함과 훌륭함이 눈에 들어왔고 그간에 아버지곁에서 응원과 보탬이 되지못한 점이 많이 죄송스럽고 부끄러웠다

 

동인이를 가졌을때 시댁으로 보내주신 커다란 족자에 고서로부터 발췌하셔서 써주신 장문의 태교글, 모처럼 난이 잘 쳐지셨다며 국제우편으로 동인아빠에게 보내주신 '군자의 도'라는 글과, 함께 그리신 단아한 난 그림, 동인이가 태어났을때 축하의 시를 지으셔서 보내주신 서예글 한점, 작년에  한국갔을때 내게 주셔서 지금 우리집 거실에 걸어놓은 두 벽걸이 서예작품들이 어리석었던 나를 깨우쳐주고 끊임없이 감동을 주고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아버지께선 겉으로 사랑을 표현하시지 않는게 아니라 남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꾸준히 사랑을 표현하고 계셨던 것이고 어리석은 자식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었다

 

엄마의 사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아버지의 자식사랑이 이제와서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시댁, 친정 통틀어 모두들 얼굴을 못보며 살지라도 우리가 미국에서 뿌리내려 성공하길 바라는데 오로지 아버지만이 노심초사 우리가 돌아올 날만 기다리고 계신다 한다

 

표현은 안하시는것 같지만 애사랑이 많으시고 맘이 여리신 아버지께서 얼마나 하나밖에 없는 손주 동인이를 품에 앉고 싶으실까를 생각하면 늘 맘이 짠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꼭 집어말할순 없지만 나와 아버지가 마주 앉으면 필요한 말도 줄여서 하고는 대부분 정적이 흘러버리는 멋대가리없는 부녀지간이 된지 오래여서, 이제와 철이들어

아버지의 사랑의 애틋함을 새삼 깨달았다 해도 갑자기 내가 살갑고 다정한 딸노릇을 하는 일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부녀지간에 필요한 대화를 많이 만들고 동인아빠와 동인이, 미래의 동인이 동생의 머리를 아버지앞에 최대한 자주 조아리게 해드릴 생각이다

 

이제 행정도시 개발로 아버지께서 피땀흘려 가꿔놓으신 우리 고향 산천이, 그 꽃과 과일나무들이, 아버지 자전거뒤에 앉아서 달리던 그 냇가길까지 다 싸그리 없어진다고 한다

 

가끔씩 그리울 때마다 달려가서 향수에 젖을 고향이 곧 없어진다니 서글프기 짝이 없다...

내머릿속의 한편이 뚝 잘려져 나가는 기분이랄까...

 

....문득, 결혼 직후 미국에 와서 드린 첫 전화통화에서 아버지께서 뜬금없이 ' 내가 너한테 시집보내기 전까지 아무것도 해준게 없구나..'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그러셔서 딸래미 나이가 스물아홉이나 되어 지금의 동인아빠가 결혼허락을 받으려 하던날에도 좀 더있다 시키겠다고 고집을 피우신걸까?

좀더 데리고 있으시면서 더 잘해주시고 싶으셔서.....

 

...오늘따라 멀리 계신 아버지가 뵙고 싶은 생각에 잠도 오지않는다........

 

자주는 아니지만 전화드리면 항상 이내 할말을 잃고 정적만 흐르지만 전화한번 또 드려야겠다

 

 

' 아버지..그 옛날 거친손으로 나무 열매들을 따다 주시던 때의 그 단내와 아침이슬냄새가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그때의 아버지.. 당신이 그립습니다 '

 

...라고 속으로만 되뇌이면서 고개숙이고 전화기앞에 앉아서 동인이를 붙잡고 아버지께 전화로라도 목소리를 들려드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