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계 "골수야당" 신문선

정필우2006.07.20
조회171

프롤로그..

 

개인적으로 난 신문선의 그 "고집"을 조아한다...

 

남자란 난중에 아니다 싶더라도 그런 똥고집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아니다 싶고, 이것은 바르다 싶으면,

 

그것에 대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남자다..

 

나에게 손해가 올지 득이 될지는 그 다음 문제인 것이다...

 

옮은것은 옮은 것이다.. 옮은것을 아니다고 말할수 없는 것이다..

 

 

 

시험쳐 연세대 경영학과 입학. 대표선수, 대우와 유공팀을 거친 화려한 현역시절. 은퇴 후에도 경기 해설을 맡아 대중을 사로잡으며 자기 자리를 굳힌 신문선(45). 축구와 축구협회에 감사해야 마땅할 그는 왜 축구계 골수야당의 길을 걸어왔는가. 축구계 장막 뒤에서는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가. 자연인으로 45년, 축구인으로 35년. 신문선 이야기.


■ 첫 만남 때부터 어긋난 정몽준 회장
■ 김우중 회장과의 대충돌 그리고 재결합
■ ‘MBC 13년’에 감사패 하나 없는 사연
■ 陸士보다 엄격했던 한국체육학교 6년
■ 고려대 ‘빳다’ 무서워 연세대로 갔지만…
■ 석사학위 2개에 박사과정 마칠 동안 수업 결석 없어


1993년 12월 김우중 회장이 대한축구협회장직을 사퇴하고 정몽준 회장이 뒤를 이었다. 신문선씨는 그때 협회 홍보이사였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생각으로 신씨는 김회장 퇴임과 함께 협회측에 사의를 밝혔다. 그런데 새로 구성, 발표된 새 집행부 명단에 다시 그의 이름이 포함돼 있었다. 역시 홍보이사였다. 축구계 원로인 오완근 부회장이 어깨를 떠밀어 신씨는 부득불 협회 일을 하게 됐다. 신씨는 “그때 내 뜻대로 협회 일을 그만두었으면 차라리 정회장과의 사이가 지금처럼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새로 취임한 정회장과는 첫 만남에서부터 삐걱 소리가 났다. 1994년 1월초 롯데호텔에서 열린 회장과 임원진간의 상견례를 겸한 첫 이사회 때였다. ‘기타 안건’ 시간에 신씨가 발언권을 얻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 전 회장이 그동안 축구 발전을 위해 기여도 많이 했고 또 지금도 프로축구 대우 구단을 이끌어가는 만큼 신 집행부에서 그분에게 감사패를 해주자’고 했어요. 그렇게 하면 김 전 회장도 보람을 느낄 테고 신·구 집행부 간의 단합된 모습도 보이고 해서 여러 가지로 좋을 거라고 말이죠. 내가 순진했죠. 나는 정회장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좋은 얘기라고 공감해줄 줄 알았는데, 당장 정회장이 ‘그것은 좀더 생각해 보자’고 막고 나서는 거예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의견을 내겠어요? 나도 그냥 앉아버렸으면 그만이었을 텐데, 그런 정회장 말에 이의를 달아가면서 이삼십분 동안 물고 늘어진 거라. 결국 결론도 내지 못하고 서로 앙금만 남은 채 회의가 끝났죠.”

앙금이 남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로부터 불과 몇달만에 두 사람은 뚝 결별했다.
“1994년 월드컵 최종 예선이 카타르에서 열렸잖아요? 한국팀이 월드컵에 진출하게 되자 정회장이 즉각 선수들에게 천만원인가, 이천만원인가 포상금을 주겠다고 공표했어요. 참 기분 좋은 일이었죠. 그런데 협회에서 이사회를 하는데 김모 부회장이 ‘정회장이 약속한 포상금을 축구발전기금에서 지급하는 방안’을 꺼낸 겁니다. 깜짝 놀랐죠. 그래서 내가 벌떡 ‘결사반대’를 외치고 나선 거예요.”
축구발전기금은 축구협회가 장차 축구회관 건립을 위해 따로 적립해 놓은 돈이었다.

“축구회관 짓는 데 말고 다른 데는 못 쓰게 돼 있는 돈이에요. 내가 그 원칙을 내세워 ‘절대 안된다’고 막고 나선 거죠. ‘미리 협회와 상의한 것도 아닌데 정회장이 포상금을 주겠다고 했으면 현대쪽에서 돈을 끌어다 주든가 사재(私財)로 주든가 해야지 왜 발전기금을 건드리려 하느냐’면서 끝까지 물고늘어졌어요. 만장일치가 돼야 안건이 의결돼 넘어가는데 내가 딴지를 거니 거기서 멈춘 거죠. 중간에 화장실에 잠깐 갔는데 다른 임원들이 와서 ‘대충 넘어가자’고 설득하더라고요. 하지만 조금도 내 입장을 물리지 않았어요. 내가 그때 홍보이사고 기술위원·상벌위원·여성위원까지 겸하고 있었는데 그 보직을 모두 걸고 안된다며 거품을 물었죠.”

그야말로 비분강개(悲憤慷慨)했던 모양이다.
“내가 축구협회 규약집까지 펴 들고, 거기 맨앞의 정관을 들이대면서 그랬어요. ‘축구협회 목적이 뭐냐? 축구를 널리 보급하고 축구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돼 있다. 나는 전체 축구인들로부터 우리 축구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라는 소임을 위임받았다. 이 회의는 역사에 남는다. 기금을 빼 포상금에 쓰자고 의결하면 여기 우리는 축구인들에게 맞아 죽을 것이다. 이사회에서 올바른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고 역설했죠. 내가 그렇게 반대하니 어떡해? 결국 그 안건은 부결됐어요.”

그러나 그가 소리 높여 외친 ‘축구인’은 멀고 회장은 가까웠다. 이튿날 아침 정회장측에서 신씨에게 연락이 왔다. ‘좀 보자’는 것이었다. 신씨는 협회 회장실에서 정회장과 마주앉았다.
“정회장이 ‘어제 이사회에서 신이사가 이러이러한 얘기를 했는가’하고 물어요. 내가 그래서 ‘이사회 회의록에 다 나와 있지 않느냐’고 했죠. 그랬더니 ‘신이사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책망하듯 들이대요. 무엇보다 감정이 먼저 상하더라고. 반말로 그러니까. 그래서 나도 감정적으로 치받았죠. ‘정회장이 왜 나한테 반말을 하느냐. 나는 어디까지나 봉사하기 위해 협회에 들어와 있다. 내가 이사회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회장을 제대로 모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고요. 그리고는 휙 나와 버렸어.”
“정회장, 나한테 왜 반말하는 거요?”

잠잠하게 하루 지나고 이틀 뒤 신씨가 이름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신이사께서 이사직을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당신 뭐냐’고 냅다 소리부터 지르고는 ‘안 그래도 더 이상 할 생각 없으니 정회장한테 전해’라면서 전화를 탁 끊었죠. 물론 그것으로 협회와의 연도 끊었고요.”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축구계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움직이다 보니 협회 일이 아니라도 대면할 기회는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 일부러 만난 것은 내가 협회를 나온 이후 두차례 더 있어요. 한번은 정회장이 보자고 해서, 또 한번은 내가 정회장을 만나자고 해서 단 둘이 만났죠. 그때 무슨 얘기를 했는가 하는 것은, 나한테 묻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

우연히 술자리를 같이, 그것도 대취(大醉)하도록 자리를 같이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재작년에 한겨레 기자들과 축구협회, 월드컵조직위가 한데 어울려 미사리에서 축구경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내가 그때 한겨레에 고정칼럼을 쓸 때인데 협회측에서 참여해 달라고 요청이 왔어요. 정회장도 참석했고요. 축구를 하고 뒤풀이로 술을 마셨는데, 처음에는 정회장이나 나나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피했지. 술자리라는 것이 그런 것이니까, 결국 나중에 정회장이랑 어찌어찌 대작하게 됐는데…. 뭐 술 먹고 좋은 얘기 나왔겠어요? 그날도 결국 ‘충돌’이었지. 까짓거, 그 얘기는 관둡시다.”

이상(理想)과 원칙으로 가열돼 펄펄 끓는 정의감이, ‘스리슬쩍’과 ‘적당히’가 판치는 차디찬 현실과 만나면 거기에서는 어김없이 ‘치지직’ 파열음을 내게 마련이다. ‘둥글둥글 넘어가려는 상황’이 ‘따져드는 사람’과 마주치면 거기서도 필연적으로 긴장과 갈등이 빚어진다. 지금은 스타 해설가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신문선(45)씨, 그와 축구협회 사이가 지금까지는 딱 그렇다.
신씨는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이 축구협회장으로 있을 때 협회에 들어가 이후 김우중·정몽준씨 등 모두 3명의 회장을 겪었다. 그가 협회 일을 하게 되면서 최회장이 곧 그만두고 김회장 체제가 들어섰기 때문에 실제로 그는 김·정 양(兩) 회장을 겪은 셈이다.

물리적으로는 1986년부터 1994년까지, 8년이었다. 그 8년 동안 그는 두차례나 협회와 맞서다 결별했다. 맞선 상대도 두번 다 다름아닌 협회장들이었다. 김우중 전 회장과는 그래도 결별했다 다시 결합했지만 현재의 정몽준 회장과는 결별 이후 재결합(은 생각도)하지 않고 있다. 각자의 참호에 얼굴을 묻고 상대방에게 총을 쏘는 병사처럼, 적어도 신씨의 입장에서는 정회장과 끈질긴 길항(拮抗)관계를 유지하는 형세다. 당연한 결과로 그는 축구계의 ‘여당’격인 축구협회 집행부쪽 눈으로 보면 그야말로 골수 야당이요, 고개를 수그리라 하면 되려 더 빳빳이 고개를 쳐드는 반골(反骨)로 인식돼 왔다. 군말 빼고, 계속 그의 ‘행동’을 보자.

“회장님 얼굴 뵙기가 통 힘들어서…”

신씨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 대표팀과 독일 프로팀간에 벌어진 평가전 해설을 할 때다. 강릉 경기였다.
당시 축구협회장이던 김우중 회장이 사업 때문에 바빠 대표팀에는 거의 신경을 못 쓰고 있던 상황이었다. 신씨가 대표선수들을 만나 보니 선수들간에도 그런 점에 대해 불만이 팽배한 터였다. 다른 때도 아닌 월드컵을 앞두고 협회장이 대표팀에 신경을 안 쓰다니…, ‘이것은 곤란하다’고 신씨는 생각했다. 그는 가급적 협회에서 김회장을 만나 이 문제를 거론하려 했으나 역시 김회장이 시간이 잘 나지 않아 그마저 기회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신씨는 독일과의 평가전 해설 중에 김회장에게 간접적으로 ‘간언’하자고 작정했다.

그는 이날 캐스터를 맡은 변웅전(현 자민련 총재비서실장) 아나운서와 미리 이러저러 각본을 짰다. 경기 중계 도중 변씨로 하여금 자신에게 몇가지 질문을 던지게 했다. 어디에선가 분명히 평가전을 TV로 보고 있을 김회장을 겨냥한 ‘작전’이었다. 경기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두 사람은 자연스러움을 가장하고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변웅전)“요즘 김우중 축구협회장이 많이 바쁜 모양이죠?”
(신문선)“그런 것 같습니다. 레슬링협회(당시 협회장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는 협회를 중심으로 선수들을 진작해서 세계 정상을 노린다는데, 우리는 8강(그때는 그랬다)을 목표로 한다면서 선수들조차 회장님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고 하데요.”

(변웅전)“요 다음 2차전 경기일정 때문에도 선수들간에 말이 많다죠?”
(신문선)“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겠죠. 독일팀은 여기 강릉에서 비행기를 타고 금방 대구로 가는데, 우리 대표팀은 버스를 타고, 주말 아닙니까. 보나마나 교통체증을 겪으면서 지루하고 피곤하게 대구로 내려가야 하니까요. 어느 쪽이 월드컵팀이고, 어느 쪽이 프로팀인지 모를 노릇이죠.”
(변웅전)“이제 월드컵도 얼마 안 남았는데 최종적으로 준비해야 할 사항 같은 것은 어떤 것입니까?”
(신문선)“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역시 축구협회, 특히 협회장이 애정을 가지고 대표팀에 많은 신경을 쓰고 힘을 주고 해야겠지요.”

아니나 다를까. 경기 직후 협회 임원들이 방송국으로 달려왔다. 신씨의 기억.
“도대체 신문선이가 왜 그렇게 김회장을 비비 트는 거냐, 무슨 억하심정이냐, 신문선이를 MBC에서 내보내라, 사과방송을 해야 한다, 난리가 벌어졌어요. 내가 지지 않고 되받았죠. ‘바른 소리 한 게 뭐가 문제냐? 한국팀이 지금 어떤 상태냐? 이대로 월드컵에 나가면 8강은 고사하고 당장 1차 리그에서 3전 전패하게 생겼다. 그렇게 돼서 국민감정이 나빠졌을 때,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 정식으로 협회와 대표팀 문제를 거론하겠다’고 말이죠.”

무슨 소리냐?는 표정들을 향해,
“월드컵을 코앞에 두고 대표팀 숙소(타워호텔)에서 협회 임원들과 대표팀 임원들이 얼마짜리 판돈으로 포커를 쳤는지 공개하겠다고 했어요. 흠칫들 하지. 그것이 정말로 공개되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을 만큼 판돈 액수가 엄청났거든. 협회며 대표팀이 그런 정신상태였으니 실제로 나중에 경기 결과가 어떻게 됐겠어요? 뻔한 것 아닙니까. 일단 그날 소동은 거기서 끝났어요.”
그런데 실제로 이탈리아로 날아간 한국팀은 1차 리그에서 벨기에·스페인·우루과이에 잇따라 패하고 말았다. 신씨의 말처럼 정말 3패를 당한 것이었다.

“이제사 밝히는 얘기지만 한국팀이 2패를 했을 때 그 사람들(포커 친 사람들) 심정이 어떠했겠느냐는 말이죠. 그 중 한사람이 내 숙소를 찾아와서는 봉투를 쓱 내밀더라고. 혹시 내가 정말로 ‘포커 판돈’을 밝히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나 보죠? 내가 거기다 대고 불같이 화를 내고 쫓아버렸어요. 결국 판돈 공개 문제는, 내가 할까 말까 생각하다 ‘에이 관두자’하고 덮어버렸어요.”


분노한 김회장, 숟가락을 던지다

1990년 월드컵이 그렇게 지나가고 얼마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다이내스티컵대회가 열렸다. 신씨도 중계를 위해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김회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협회를 떠난 사람이 뭐하러’라고 생각해 거절했으나 이때도 오완근 협회 부회장이 “고집피우지 말고 만나보라”고 거듭 권유, 베이징 시내의 한국음식점에서 신씨는 김회장과 대면했다. 당시 이재명 협회 부회장과 대우 사장단 몇몇이 배석해 있었다.

“김회장이 ‘나도 연간 몇십억원씩 들여가면서 나름대로 우리 축구 발전을 위해 애쓰는데 신위원은 왜 자꾸 나를 어렵게 만드는 거냐’고 따져 묻더라고요. 그때 김회장이 마침 앞에 놓인 물김치 국물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들고 있었는데 내가 대놓고 쏘았죠. ‘저는 회장님께서 쿠데타로 축구협회를 접수한 것부터 잘못됐다고 봅니다’라고요. 그랬더니 김회장이 ‘뭐야? 쿠데타라니’라면서 들고 있던 숟가락을 식탁 위에 쾅 소리가 나도록 집어던지는 거예요. 그 서슬에 이부회장만 남고 다른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나가고 말이죠.”

강력하게 날아오는 공을 더 강하게 되받아치듯, 신씨는 거듭 말을 받아쳤다고 한다.
“내가 그랬죠. ‘협회장 되실 때 어떻게 했습니까. 전임 최순영 회장이 할렐루야팀 해체하니까 대우쪽 축구인들이 협회로 몰려가 최회장 물러나라고 시위하고 난리를 피우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회장님과 무관한 일입니까. 그렇게 해서 최회장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차지하신 것 아닙니까.’라고요. 그리고는 내친 김에 ‘제가 회장님을 괴롭혔다고 하는데 뭘 언제 어떻게 괴롭혔다는 것이냐’고도 따졌죠. ‘대표선수나 대표팀 감독을 선발할 때 보면 그 기준이 능력도 아니고 순전히 인맥으로 해먹는데 그게 다 협회 행정이 잘못 돼서 그런 것 아니냐? 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능력이 안되는 선수들을 그렇게 선발하고 하는데 누군가는 대표팀과 협회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하지 않느냐?’ 그런 요지였어요.”

그렇게 해서 김회장과 몇시간에 걸친 긴 대화가 진행됐다.
“그 양반이 역시 인물은 인물입디다. 앞의 내 말에 기분이 상했던 것도 싹 잊었다는 듯 대학노트에 내가 하는 얘기를 죄다 적는 거예요. 때때로 옆에 앉은 이부회장에게 ‘사실이냐’고 확인해 가면서 말이죠. 그날 알고 보니 김회장은 당시 베이징의 실권자인 장바이파(張百發) 부시장과 약속이 돼 있었더라고. 그런데 그것까지 취소하고 나와 서너시간 동안이나 얘기했어요. 마침 그날 내가 경기 중계 일정이 잡혀 있어서 오후 늦게 대화가 중단됐죠. 김회장에게 내 뜻은 충분히 전달했어요.”
신씨가 김회장과 다시 대면한 것은 그로부터 1년 뒤, 그러니까 1991년 가을이었다. 그때는 배석자가 아무도 없는, 독대(獨對)였다.

“김회장이 ‘앞으로 축구 관계자 6명 정도가 상시적으로 만나 축구 개혁 문제를 논의해 나가자’고 하더군요. 말하자면 고위 비밀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자는 것이었죠. 김회장 나름대로의 축구 발전을 위한 방안이었겠지만 나는 그것을 딱 잘라 반대했어요. ‘협회가 있고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돼 있는데 굳이 그런 것을 만들어 봐야 옥상옥(屋上屋)이고 괜히 말이 날 수 있다’는 이유로 말이죠. 그랬더니 그 양반이 ‘그러면 신위원이 애써서 축구협회 개혁안을 좀 만들어 달라’고 그래요. 그것은 내가 하겠다고 했죠.”
개혁안을 만드는 중에 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김회장이 신위원을 꼭 이사직에 넣으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신씨는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며칠후 신문을 통해 발표된 축구협회 임원진 명단에 신씨는 기술홍보이사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것까지 꼬투리잡아 잡음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신씨는 협회에 적(籍)을 두고 일하게 됐다.

이 무렵 그가 한국 축구 개혁을 위해 밀어붙인 주요 사안은 우선 두가지였다. 하나는 대표팀 감독을 소속팀을 떠나 대표팀 전임 지도자로 만드는 것, 다른 하나는 대표팀을 무슨 대회가 있을 때 급히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상비군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었다. 두가지 사안 모두 별 무리 없이 정착됐다.
“밝혀도 좋을지 모르겠지만”이라는 단서를 단 신씨의 얘기에 따르면, 당시 김호 감독을 대표팀 감독으로 밀어올리는 일도 신씨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고 한다. 당시 대표팀 감독은 3배수의 후보가 추천되면 그들 가운데 한사람을 협회 기술위원회에서 최종 결정하도록 돼 있었다.

“실력만 있으면 누구든 대표팀 감독을 맡을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시킨 것이었죠. 그때 축구계에서 후보로 추천된 사람은 두사람이었어요. 그때 막 현대팀을 맡은 차범근 감독과 LG 고재욱 감독이었죠. 차감독과 김감독은 제가 추천했어요. 고졸로 학맥도 없고, 더욱이 자기 색깔이 강해서 축구계 다른 사람이나 협회쪽과는 담을 쌓다시피 지내온 분이 바로 김감독이거든요. 그래서 그분은 능력과 경륜을 갖추고 있는데도 그때까지 아무도 추천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차감독은 “당장 현대팀이 프로리그에서 우승하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라면서 후보 자리를 사절했다. 그래서 고감독과 김감독을 놓고 6명의 기술위원이 투표를 했다. 결과는 3 대 3이었다. 여기서 당시 기술위원장이자 신씨와 마찬가지로 축구계의 ‘야당발’로 통하는 허승표씨가 캐스팅보트를 행사해 결국 김감독이 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김호 대표팀 감독’ 만들기

고려대와 함께 한국축구의 양대 산맥을 형성해온 연세대 축구부를 거쳐 대표선수로 발탁되고, 실업 대우팀과 프로 유공팀을 거치며 화려한 현역 시절을 보낸 그다. 현역 은퇴 이후에도 역시 축구 덕분에 TV 중계방송 해설을 맡았고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이름을 날리고 이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굳힌 그다. 마땅히 축구와, 그 행정의 총본산이라 할 축구협회에 대해 감사 또 감사해야 할 그가 아닌가. 그런데 왜. 그는 야당으로, 반골로 돌게 된 것일까.
묻는 사람이 무안할 만큼 그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한국축구를 사랑하고, 한국축구가 바로서도록 하려다 보니까”다.

“현역 시절이나 은퇴 이후 저는 한국축구가 어떻게 해야 바로설 수 있겠다, 어떻게 해야 발전하겠다, 하는 점들을 체험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늘 한국축구가 바로서고 강해지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녀왔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이 축구를 좋아하게 하고 그래서 한국축구가 점점 발전할 수 있다면 내가 거기에 몸을 던지겠다, 그렇게 내 자신을 몰아온 거죠. 당연히 한국축구의 발전을 막는 장애나 독소가 있다면 누구보다 내가 총대를 메고 그것을 깨뜨리겠다, 그런 다짐을 새겨왔습니다. 그 열정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 놓은 거죠.”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서는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뭔가 쉽게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투사’의 냄새가 난다. 로마처럼, 한 사람의 기질과 성향도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인으로 45년, 축구인으로 35년. 겉보기에는 노상 ‘밝아 보이는’ 신문선이 어째서 그렇게 ‘야당’이 됐는지 그리고 한국축구에 대해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옛날부터’ 차근차근 되짚어 보자. 그의 긴 얘기를 들으면서 기자는 그의 45년, 그 마흔다섯개의 염주를 꿰는 줄은 아마도 ‘치열함’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체육계의 陸士, 체육학교

“거기, 똑바로 못하나, 엉!”
“벌써 넘어지는 놈은 뭐야? 다리 확실하게 안 올리나!”
폭우가 쏟아지는 칠흑같은 여름밤. 서울 중랑구 묵동 봉화산 중턱의 체육학교 운동장. 까까머리 100여명의 남녀 학생들이 운동복 차림으로 몽둥이를 든 감독교사의 호통을 받으며 물텀벙 진창에 두 팔로 온몸을 버티며 물구나무를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무방비로, 그것도 벌써 1시간 가까이다. 여기저기 공중에서 다리가 후들거리다 이내 툭툭 떨어진다. 다리를 떨어뜨린 학생의 엉덩이에는 곧바로 감독교사의 ‘빳다’가 떨어진다. 그러면 놀란 듯 학생의 두 다리는 다시 벌떡 하늘로 들어올려진다.

벌벌 떨리는 팔로 이를 악물고 몸을 떠받치던 신문선 생도는 옆으로 한사람 건너 방금 ‘빳다’를 맞은 이용수(전 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세종대 교수)를 힐끗 돌아봤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힘내’하는 눈길을 보낸다. 덩치와 팔힘이 좋은 저 앞의 조병득(전 국가대표 골키퍼)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시간이 훨씬 지나고서야 고맙게도(?) “일어서”하는 구령이 나온다. 이어 “숙소에 들어가 물기 닦고 1분내 취침” 지시와 “해산” 명령이 떨어진다. 물벼락 맞은 새앙쥐 꼴의 학생들은 달궈진 가마솥에 부어진 콩무더기처럼 타다닥 숙소로 튀어든다.

“한 방에 15명씩 자거든요. 그런데 그날 밤 누군가 안 자고 옆사람과 소근거리다 당직교사에게 걸린 모양이에요. 새벽 2시쯤인가, 숙소의 불이 탁 켜지더니 당직교사 목소리가 잠결에 귀를 탁 때리는 겁니다. ‘야 누가 안 자고 떠들어? 잠이 잘 안 온다 이거지. 전원 운동장 10초 집합!’ 이거예요. 후다닥 뛰어나갔죠. 비가 얼마나 오는지, 게다가 산속이잖아요? 그러니 여름이라도 새벽에 춥기는 또 얼마나 추운지 말이죠. 땅바닥에 물이 철철 넘치는데 거기다 ‘좌우로 정렬, 하고는 덜컥 물구나무를 서라 이거예요.

평소 운동할 때야 그깟 물구나무 서는 게 별 것 아니지만 잠바람에, 그것도 비바람 맞아가면서 한시간 넘게 있어봐요. 어린 마음에 참 집 생각 많이 나죠.”(웃음)
신씨는 자신이 “갇히다시피” 청소년기를 보낸 체육학교에서 기합을 받던 얘기로 ‘나의 축구 35년사’를 풀기 시작했다. 그는 “체육학교를 만난 것이 내게는 더없는 행운이었고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며 턱을 쳐들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지금은 서울체육중·고교로 이름과 학풍이 많이 바뀐 체육학교 제1회 졸업생이다.

서울까지 이래저래 4시간은 걸려야 올라올 수 있었던 1957년의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고은리 출생. 원래 1957년생이지만 ‘동사무소에 불이 나는 바람에’ 호적을 다시 정리하면서 ‘58년 개띠’로 오적(誤籍)됐다고 한다. 3남2녀 중 막내. 문선이 5살 때 집이 서울로 이사했다. 큰형님이 시골 동네서 ‘신동 났다’고 소문날 만큼 공부를 잘해서 부친(신재호·작고)이 “서울 가서 공부시켜야겠다”며 시골집을 정리하고 이사한 것이었다. 부친은 ‘안성쌀’의 연고에 기대어 청파동에 싸전을 열었다.
문선의 낙은 축구였다. 가난한 시절 공터가 많았고 축구는 돈 없이도 여럿이 즐길 수 있는, 그러면서도 가장 신나는 놀이였다. 동네축구에서 기본기를 다진 그는 청파초등학교 4학년때 학교에 축구부가 생기면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신씨는 “쌀가게를 했지만 서울에 기반 없이 일곱 식구가 밥 먹고 공부하고 하기 어려워 제대로 못 먹고 살았는데 축구부에 들어가니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던 기억들이 선명하다”고 그때를 기억한다.

“벌써 그때부터 ‘청파 7번 하마’하면 유명했어요. 입이 커서 별명이 하마였거든. 라이트윙을 했는데, 우리 축구부가 창단 첫해에 전국대회 우승을 했으니까. 물론 내가 스트라이커였죠. 축구도 축구지만 어린 입에는 정말 먹는 재미가 컸어요. 집이 정말 가난했고 못먹었죠. 꽁치는 그래도 값싸서 되게 먹어봤네. 그런데 축구부에 들어가니 불고기도 사주고 자장면도 사주고 말이죠. 그게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어린 문선은 축구 말고도 두가지를 더 잘 했다. 공부와 싸움질이었다.

“공부는 큰형님 영향이 컸고 싸움은 아무래도 그때 운동을 했고 동네 터가 그랬으니까. 꼬맹이가 싸움을 잘한다고 해봐야 뭐 얼마나 잘했겠어요? 시쳇말로 깡다구가 있었다 이거지. 그때 우리집 있던 데가 만리동·청파동·효창동, 그 3개 동이 딱 만나는 지점이었거든. 그러니까 동네에 시쳇말로 양아치며 건달들이 잔뜩 모여 노상 죽때리고 있었거든. 그러면서 수시로 동네 대항으로 돈내기 축구시합이 열리는 거예요. 무슨 월드컵도 아니고, 시합 끝나면 으레 시비가 붙고 싸움박질이 벌어지기 일쑤라. 그러다 보니 효창공원이 나한테는 유명한 전장(戰場)이었죠. 그때부터 상대방이 아무리 세다 해도 겁없이 달려드는 기질 같은 것이 길러졌나봐요. 또 그때 없는 집 애들이야 대개 그랬으니까.”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문선에게는 대신중·중동중·한양중 등 그때 쟁쟁했던 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공부쪽만 보고 있던 형들이 운동은 안된다며 그런 제의들을 가차없이 물리쳤다. 그러나 문선과, 무엇보다 부친이 축구쪽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신씨의 표현을 빌리면 “마치 무슨 운명의 장난과도 같이” 체육학교가 떡 나타났다.


하마(河馬), 날다

“내 진로 문제를 놓고 집안이 갑론을박 시끄럽던 터에 어느날 큰형님이 특수학교 입학원서라면서 봉투를 하나 들고 왔어요.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알게 됐다는데, 그것이 바로 운명의 체육학교였죠. 형님 말이 ‘여기는 특수목적 학교라서 공부도 시키고 운동도 시키니 괜찮을 것 같다’는 거예요. 무엇보다 형을 공부 시키느라 집안 살림이 휘어지는 판이었는데 나라에서 다 대준다 이거라. 그래서 그리로 가자 하고 다들 합의를 봤죠.”

들어간 뒤 진창에 구르면서야 알게 됐지만, 체육학교는 한마디로 국립 체육사관학교 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잘 쓰는 엘리트체육이란 말 있잖아요? 그게 요즘은 뜻이 좀 달라진 것 같은데, 그 말이 바로 체육학교의 이념이었어요. 말 그대로 공부도 엘리트, 체육도 엘리트를 키운다 이거였죠. 나중에 입학해서 알게 됐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일본 도쿄(東京)올림픽을 보고 체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직접 지시해 세웠다는 거예요. 그때 한창 유행하던 구호도 ‘체력은 국력’이었거든요. 중·고교 과정 6년을 공부하게 돼 있는데 좌우지간 돈이 들어가는 것은 모두 나라에서 대주는 거였죠.”

어렵던 시절, 공부도 할 수 있고 운동 특기도 살릴 수 있다는 매력에 끌려 응시생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전체 선발인원은 남학생 80명에 여학생 50명으로 130명이었다. 축구 종목의 선발인원은 30명. 학과시험과 실기시험을 거쳐 문선은 합격했다. 입학하고 보니 정부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교사들도 모두 당시 경기고와 서울고에서 차출한 이들이었다. 그런 교사진에서 분위기가 감지되듯 생활은 엄격함과 철저함 그 이상이었다.

‘아침 6시 기상점호(모든 용어는 군대식이었다). 8시30분부터 12시30분까지 오전수업. 13시까지 중식. 13시부터 15시까지 오후수업. 15시부터 17시30분까지 각자 전공에 따른 운동. 18시에서 19시까지 석식. 20시부터 22시까지 의무적 자율학습. 22시부터 취침점호. 23시 취침.’의 변함없는 생활이 6년간 이어지게 돼 있었다. 숙소는 일본식 다다미방이었고 군용 담요를 덮고 잤다. 군대처럼 개인 관물대를 둔 ‘내무반’생활이었다. 밥은 하지 않았지만 청소·빨래·바느질 등 모든 것을 학생들 스스로 해나가도록 규정돼 있었다.

몽둥이든 주먹이든 학생에 대한 체벌도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매를 맞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학과성적·생활태도·전공실기의 3가지 가운데 한가지라도 규정대로 못하면 가차없이 퇴학 조치가 내려졌다. 매달 학과시험을 치른 결과가 식당 입구에 1등부터 꼴찌까지 대자보로 게시됐다. 특히 다른 사람의 공부나 생활에 방해가 되는 행위는 용서되지 않았다. 수업중 교실 밖으로 불려나가면 그것이 곧 퇴학이었다. 1, 2, 3회 졸업생 수는 마치 그렇게 정해놓은 듯 입학 인원의 절반 정도였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온수가 어디 있어요? 수도 시설이 안돼서 산의 계곡 따라 흐르는 그 차가운 물을 막아 사철 씻고 먹고 했으니까. 특히 취침점호 때는 숨이 콱콱 막혀요. 얼마나 호되게 점호를 하는지. 정말 퇴학당하지 않으려면 죽어라 공부하고 죽어라 운동하고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해야 했죠. 조금만 방심하거나 삐끗하면 끝이었거든. 그때 학교측이 그렇게까지 엄격했던 명분은 그거예요. ‘체육하는 사람이다 하면 사회에서 무슨 주먹잽이나 돌쇠 집단처럼 보는데 너희가 똑바로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거였죠. 육사도 그렇게는 심하지 않았을 거예요. 어리니까 뭣 모르고 시키는 대로 다 했지. 아, 정말 대단했어요.”
육체는 힘들고 정신은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신씨는 그 모교에 대해 ‘대단히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운동선수들이 벌써 중학교만 가도 공부는 팽개치던 시절이었죠. 나 역시 그때 그 학교에 안 갔으면 공부하고는 일찌감치 담 쌓았을 거예요. 나는 그런 점에서 정말 러키(lucky)했어요. 싫든 좋든 죽기살기로 공부에 매달려야 했으니까요. 가령 영어 같은 것을 공부하는데, 아예 그때 교과서 1권을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워야 돼. 그때 ‘모던 잉글리시’라는 교재였는데 1과에서 36과까지 전부 외웠죠. 방학이라고 여름·겨울에 한달씩 주는데 말이 방학이지 놀 수가 있나? 한 1주일 딱 쉬고는 각자 알아서 공부해야지. 좌우지간 그때 우리 1회 졸업생이, 체육특기생으로 말고 시험 쳐서 90%가 대학에 들어갔으니까.”
운동에서도 당시 이 학교 재학생들은 발군(拔群)이었다고 한다.

“단적인 예로 축구를 보면, 고3때 축구쪽에 인재들이 많았어요. 이용수에다 조병득·나 그리고 2학년에는 강신우(현재 TV 해설위원) 같은 선수들이 포진했거든. 그해 우리가 전국대회를 휩쓸었죠. 전국대회인 추계연맹전·‘조선일보’ 선수권·‘부산일보’ 청룡기 그렇게 3관왕을 했어요. 그 기록이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고.(두 주먹을 꽉 쥐어 올려보이며) 하, 참! 그때 ‘20번 신문선’하면 훨훨 날았네, 날았어.‘공부하는 선수들’이라고 해서 장안의 화제가 되고 말이죠.”

고려대 ‘빳다’ 무서워 연세대로

신씨는 “그때 6년 동안 공부한 체육철학과 소양, 그리고 이런저런 학문적인 기초가 뒤에 대학에 가고 사회에 나가고 했을 때 정말 큰 도움이 됐다”고 덧붙인다. 그때 생활습관 가운데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들도 있다. 신씨는 지금도 매일 11시에 ‘취침’해 아침 5시에 ‘기상’한다. 바깥 일이나 행사가 없는 날 저녁에는 반드시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쓴다.

그는 대학 시절 부전공으로 삼았던 경영학 공부를 계속해 지금은 박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준비중(세종대)이다. 석·박사 학위 과정을 이어오는 동안 외국에서 중계방송이 있을 때 말고는 수업시간을 한번도 빼먹은 일이 없다. 신문·잡지 등 여기저기 글을 쓰는 것도 “내 손으로 직접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공짜로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체육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말로 그는 자신의 청소년기를 정리한다.

문선 군이 체육학교를 졸업하던 1977년 무렵 대학축구는 전통의 연세대와 고려대가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교축구 전국대회를 휩쓸던 체육학교의 스트라이커였던 만큼 문선에게는 고2 때부터 여러 대학과 기업체(포스코)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있었다. 당시 문선의 부친은 싸전에서 목재업으로 사업 종목을 바꿨다가 실패해 집안이 주저앉은 상황이었다.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학교들 중에서 문선은 고려대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생각을 접어놓은 터였다.

“우연히 고려대 선수들이 단체로 ‘빳다’ 맞는 장면을 봤어요. 정말 되게 때리대. 그래서 어린 마음에 아이쿠, 무서워 안되겠다, 당장 그런 생각이 든 거죠. 순진했죠. 나중에 연세대에 들어가고 나서야 거기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당장 고려대를 먼저 봤으니까. 어쨌든 그래서 고려대는 안 가겠다 하고 일찌감치 생각을 굳히고 있었죠.”

어디로 갈까,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교 졸업 시즌을 맞았다. 고3 2학기때 문선은 동대문운동장에서 있었던 청소년대표 선수 최종 선발전에 나갔다. 협회에서 각 학교에서 추려낸 선수들을 한데 모아 두팀으로 나눠 시합을 갖게 한 것이었다. 그곳 식당에서 점심을 먹던 문선은 우연히 당시 연세대 축구팀 감독이던 김지성(작고) 씨와 마주쳤다. 김감독이 “너 어느 학교로 가기로 했느냐”고 물었다. 문선이 “결정하지 않았다”고 하자 김감독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네 진로를 누구와 의논하면 되겠냐”고 물어왔다. 이윽고 김감독은 문선의 큰형님을 만나 담판을 지었고 문선은 연세대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일단 연세대로 간다고 결정하고 본고사를 보러 갔어요. 학력고사 성적으로는 내가 그때 연세대 경영학과에 지원할 수 있었거든요. 또 내가 경영학과를 좋아해서 그쪽으로 시험을 쳤어요. 특기생이 아니더라도 시험만으로도 붙었죠. 그래서 면접을 하게 됐는데 그때 체육과의 강필승(전 연세대 체육부장) 교수가 호통을 치는 거예요. ‘야, 이눔아! 너는 축구선수가 웬 경영학과야? 무조건 체육과로 가’였죠. 대학 축구가 그때 연세대와 고려대가 주축인데 이미 고려대는 안 가기로 했으니. 할 수 없이 체육과로 가게 됐죠.”

‘빳다가 무서워’ 고려대를 피해 연세로 갔던 그의 순진한 생각은 첫날부터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축구부실에 갔더니 그때 방송에서만 보고 듣던 허정무·조광래 선배가 딱 포진하고 있더라고요. 두 양반이 최고참인데 라이벌 관계여서 서로 안 지려고 하는 거라. 그러니 노상 분위기가 살벌한 거라. 첫날부터 꼬투리를 안잡히려고 신병(新兵)처럼 애를 썼지만 그게 되나? 되게 터졌지. 나는 오랫동안 운동 끝나면 공부하는 게 습관이 돼 있잖아요?그래서 첫날 운동 끝나고 책가방 챙겨 선배들한테 ‘도서관에 가 보겠습니다’했죠. 그랬더니 선배들이 갑자기 와르르 웃더라고. 그리고는 더 무슨 말이 필요했겠어요? 곧바로 ‘엎드려’였지. 그리고는 거의 매일, 이유야 붙이면 되는 거니까, 그야말로 ‘빳다’없는 날이 거의 없었죠.”

사람의 몸뚱아리란 신기하기 짝이 없다. 문선은 금방 이골이 나서 “빳다를 안 맞으면 엉덩이가 근질거릴 정도”가 됐다. 정작 문선의 마음을 파고들며 내내 고통과 번민을 준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대학 축구부에서 처음으로 ‘사회’라는 것을 목격했고 그것이 정말 괴로웠다”고 한다. “뭐 오래 전 일이고, 오늘 숨길 것 없이 다 얘기하기로 했으니까”라면서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나를 연세대로 데려온 김감독은 내가 입학하고 나서 얼마후 다른 데로 가고 후임으로 C감독이 왔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웬일인지 그 양반이 나를 되게 멀리 하는 거예요. 노골적으로 미워해. 그거야 그렇다쳐도 1학년, 2학년 다 가도록 내가 대표팀에 뽑히지 않더라는 말이죠. 거 왜 선수마다 실력은 뻔히 드러나잖아요? 그런데 누가 봐도 나보다 한참 실력이 떨어지는 친구도 턱턱 대표팀에 들어가는데 나는 안되더라 이 말이죠. 감독이 나를 미워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으로 한번은 내가 다들 보는 데 보따리를 싸들고 축구부실을 확 나와 버렸어요.”


대학 축구부에서 처음 ‘사회의 이면’을 겪다

축구선수로 대성할 줄 알았던 막내아들이 짐을 싸들고 들어와서는 농성하듯 한달 동안이나 칩거하자 집에서는 화들짝 난리가 났다. 이유를 다그치는 가족에게 문선은 “감독이 너무 나를 미워해서 나왔다”고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때 영남대 교수로 있던 큰형님이 이런 얘기를 듣고는 문선을 밖으로 불러냈다. 문선은 충격적인 얘기를 들어야 했다. “전에 C감독이 너를 대표팀에 넣어주겠다며 나한테 돈을 달라고 해서 내가 대판 싸운 일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문선은 분노, 그리고 오기가 발동했다. “그렇다면 내가 축구부를 나올 이유가 없다. 들어가서 맞서야겠다”며 문선은 그날로 다시 짐보따리를 들고 축구부 숙소로 갔다.

“기가 막혀서. 감독이 ‘다시 들어올 필요 없다’면서 숙소에 안 받아주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 저를 아끼던 축구부 동문 선배들에게 하소연해서 감독에게 압력을 가했어요. 그랬더니 마지못해 받아주더군요. 그렇게 축구부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얼마나 참, 그 박대가 심했겠어요? 내 포지션이 본래 라이트윙이잖아요? 그런데 풀백을 시키더라고. 나만 그렇게 ‘찍힌’ 것이 아니드만요. 허(정무)선배도 그렇게 찍혀서, 본래 그때 대학가 최고의 공격수였는데 역시 풀백으로 돌려졌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선수생활을 했으니….”

3학년이 되고서야 문선은 유니폼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평소 그를 눈여겨봤던 해병대팀 감독 박세학씨가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문선을 즉각 발탁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1981년 ‘엽기적인 곡절’로 육군 충의팀에 들어갈 때까지 문선은 2년 동안 국가대표 상비군에 적(籍)을 둔 상태로 선수생활의 전성기를 맞는다.
10·26 뒤끝과 각지의 민주화 시위 등으로 사회가 어수선하던 1980년 봄. 연세대 축구팀은 그 무렵 벌어진 전국 대학·실업리그전에서 우승을 거둔 것을 필두로 승승장구했다. 당시 결승전 상대는 육군 대표인 충의팀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4학년생인 신문선·정해원 등이 이끌던 연세대는 그해 대학·실업축구계를 거의 평정하다시피 각종 대회를 휩쓸었다.

축구쪽은 승승장구였지만 문선의 집안 형편은 극도로 어려웠다. 부친의 사업 실패 후유증은 오래 갔다. 형들도 아직 공부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가계(家計)는 회복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밀려 문선은 졸업을 훨씬 앞두고 대우축구단과 일찌감치 입단 계약을 맺었다. 한 학기 대학 등록금이 50만원 하던 시절 그는 초봉 40만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선수들 중에서도 특급 계약조건으로 대우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무슨 악연일까. 앞서 문선과 갈등을 빚었던 연세대의 C감독이 문선의 대우 입단 두달후 대우 감독으로 온 것이 아닌가.

“그래도 그때는 입장이 바뀐 상태여서 다행이었죠. 감독이 인정받으려면 경기 성적이 좋아야 하고, 그러려면 밉든 곱든 잘하는 선수가 필요하잖아요? 선수 한 명이 아쉬운 판인데 그 양반이 오자마자 내가 대놓고 ‘나 축구 안하겠다’고 들이댔어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C감독이 잘해 보자고 줄곧 애스크(ask)하는 입장이 되더라고요. 껄끄러웠지만 일단 그렇게 넘어갔죠.”
그때나 지금이나 전성기의 운동선수들은 군(軍)복무 문제로 고민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문선에게는 그 고민이 없었다. 일찍이 어깨를 다쳐 큰 수술을 했는데 그것이 군 면제 사유에 포함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축구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군복무를 해야 했다. 간단히 말해 육군 대표, 곧 충의팀에서 신선수를 ‘잡아간’ 것이었다. 신씨도 나중에서야 그 전말을 알게 됐지만, 발단은 앞서 1980년에 있었던 충의팀과의 경기였다.


안갔어도 될 군대, 축구 때문에…

“벌써 그 경기에서 충의팀 단장(윤태균 준장)이 ‘연세대 7번’ 그러니까 나를 눈여겨봤던 겁니다. 그런데 1년뒤 내가 대우팀에 들어가고 나서 충의팀 하고 다시 붙을 기회가 있었어요. 1981년 춘계실업리그였죠. 그때 우리 대우팀이 이겼거든요. 윤준장이 또 신문선 때문에 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신문선이를 잡아오라’ 그렇게 됐던 거죠.”
1981년 6월 대우팀은 도쿄에서 열린 한·일 실업팀 정기전을 갖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신선수는 공항 안에서 자신의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헌병 둘이 그에게 다가와서는 다짜고짜 ‘함께 가자’는 것 아닌가. 그때가 어떤 시절인가. 가방도 찾지 못한 채 신선수는 헌병차에 실려 태릉의 육사로 연행(?)돼 갔다. 당시 충의팀은 육사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곧바로 교장실로 데려가더군요. 김복동씨가 교장이었어요. 제가 들어가자 그 양반이 ‘용돈 써라’ 하면서 봉투를 탁 줘요. 나중에 보니까 40만원 들었어. 어쨌든 그러면서 ‘자네는 이제부터 육군 대표선수야’하고는 ‘군에 왔으니 머리부터 밀어야겠네’ 그래요. 그게 다야. 벌써 윤준장하고 얘기가 다 돼 있었던 거죠. 당하는 사람이야 기가 막히죠. 어쨌든 그곳 육사에서 밖에 연락도 못하고 1주일을 꼬박 갇혀 있었으니까. 그러니 대우팀에서는 난리가 났죠. 선수가 갑자기 헌병한테 끌려가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두절이니 말입니다. 딱 1주일 뒤에 육사 헌병대장이 나를 데리고 대우팀으로 갔어요. 감독한테 ‘신문선은 우리가 데리고 있으니 그리 알고 이해해 달라’하고는 ‘곧 복귀시켜라’하고 놔줬어요”

선수와 감독이 냉가슴이 돼 끙끙 고민에 빠졌다. 궁리 끝에 신선수가 갑자기 다리를 다친 것으로 꾸미기로 했다.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려간 그들은 병원측과 짜고 신선수의 멀쩡한 오른쪽 다리에 칭칭 깁스를 감았다. 그리고는 입원시켜 버렸다. 그러나 웬걸, 당장 그날 저녁으로 육사에서 다시 군인들이 입원실로 찾아와서는 “당신은 군인인데 왜 민간병원에 입원했느냐”면서 육군병원으로 신선수를 데려갔다.
“그러니 방법이 없잖아요? 내가 윤장군을 만나 사정했어요.‘우리 집이 어려워 내가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노릇을 해야 한다. 내가 입대하면 집이 아주 곤란하다’ 그랬죠. 그랬더니 윤장군이 거꾸로 저에게 당부하는 거예요. ‘너 더도 말고 딱 365일만 군인 해라’하는 겁니다. 결국 제가 졌죠. 그래서 1981년 7월11일부터 이듬해 같은날까지, 딱 1년 동안 충의팀에서 군복무를 했어요. 총 한방 안 쏘고 군대 갔다온 사람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

제대후 신씨는 대우팀으로 복귀했다. 대우에서는 그가 돌아올 것을 감안해 신씨가 군복무(?)하던 1년 동안도 그가 전에 받던 봉급의 절반을 꼬박꼬박 지급해온 터였다. 그러나 6개월쯤 뒤 국내 프로축구가 발족하면서 신씨는 대우를 떠나 유공(현 부천SK)으로 가기로 했다. 프로축구 출범 직전인 1982년 12월 신선수는 유공측과 비밀리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
“사회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대우에서 뛰는 것도 괜찮았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늘 C감독과의 구원(舊怨)이 걸렸거든요. 또 마침 그때 유공팀의 창단감독 L씨가 저에게 적극적으로 오라고 해서 그쪽 계약서에 서명했죠. 뒤늦게 그같은 사실을 알게 된 대우측에서 ‘무효다, 말도 안된다’며 펄펄 뛰었습니다. 당장 대우의 C감독과 유공의 L감독은 원수지간처럼 등을 돌리게 됐고 말이죠. 문제는 프로리그 개막이 다가오는데 대우쪽에서 제 소행이 괘씸하다며 사표를 수리해 주지 않는 거예요. 어쨌든 그때까지도 내 선수 등록은 대우쪽으로 돼 있었으니까요.”

사표가 수리되기를 기다리던 끝에 결국 신씨는 대우 구단의 설모 단장을 찾아갔다. 그는 신씨의 연세대 선배이기도 했다.
“설단장 앞에 무릎을 꿇고 그때서야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대학 시절 C감독과의 악연을 소상히 털어놨어요. 그 양반도 얘기를 다 듣고 나더니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네가 떠나갈 수 있도록 해줄 테니 앞으로 어디를 가든 떳떳하게, 훌륭한 선수로 성공하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사표를 수리해 주셨죠.”


본격 ‘공부의 길’로

프로선수 생활은, 1983년 초부터 1985년 12월까지 딱 3년 했다. 1985년의 프로축구 후기리그를 마지막으로 신씨는 17년간의 현역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7세로 아직 더 뛸 수도 있었지만 그는 “좀더 긴 길을 생각해” 은퇴를 결심했다. 축구보다 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이었다. 마침 자신이 다니던 교육대학원 석사과정 논문학기이기도 했다.

“체육학과 경영학을 죽 공부했는데, 중·고교 시절의 관성(慣性)으로 대학에서도 운동중에 공부는 열심히 했어요. 공부를 그냥 그렇게 끝내기가 아쉽더라고. 그래서 1981년 대우팀에 들어가면서 동시에 경영대학원에 진학했어요. 군에 있을 때도 계속 공부는 했고요. 그렇게 해서 1983년 대학원을 마쳤어요. 그런데 전공인 체육학에도 미련이 남아요. 그래서 다시 체육학쪽 공부를 하려고 길을 찾아 보니 교육대학원에 가야 가능해요. 그래서 프로선수로 뛰는 동안 한편으로는 시험 준비를 해서 1984년 교육대학원에 들어갔어요. 학과 과정을 다 마치고 논문을 써야 되는데 운동을 계속해서는 도저히 시간이 안나더라고요. 그래서 공부쪽을 택하기로 하고 은퇴했죠. 그리고 나서 6개월 뒤에 논문을 마쳤죠.”

노력한 덕분에 신씨는 체육학과 경영학 2개의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신씨는 이번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리더십’(공저)이라는 책을 써냈다. 마케팅 측면에서 히딩크의 리더십을 어떻게 분석할 수 있는지, 나아가 히딩크의 리더십을 마케팅쪽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가를 다뤘다. 처음 기획에서 출간까지 석달 남짓 걸렸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그의 체육학과 경영학에 대한 소양이 어느 정도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현역 은퇴 이후 한일그룹(프로스펙스)에 입사해 마케팅쪽에서 일한 것도 그의 경영학 실력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그는 한일그룹 창사 이래 최연소 부장으로 홍보·광고·판촉 등 3개 분야를 총괄 지휘하는 팀장 보직을 맡아 일했다. 거꾸로 이같은 직장 경력은 그가 병행했던 방송 해설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회사에서 그가 맡았던 일 가운데 남들 앞에서 조리있게 제품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던 덕분이다.

선수생활을 그만두었는데도 일상은 오히려 더 바빠졌다. 은퇴후 신씨는 차츰 1인4역을 감당해야 했다. 먼저 공부, 석사논문에 매달려야 했다. 앞에서 본 것처럼 회사에서도 중책(重責)을 맡아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실업­프로­대표선수 출신으로 대한축구협회 홍보이사직도 수행해야 했다. 여기에다 뜻밖에 축구 중계방송 해설과 신문 칼럼 기고 등 ‘언론활동’까지 하게 됐다. 이 모든 것이 1986년 상반기에 동시다발로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 것 하나도 헐렁하게 할 수 없었어요. 일들의 성격도 그렇고 제 성격도 또 그렇고요. 네가지 일을 모두 열정적으로 해냈죠. 가령 협회 홍보이사 업무라고 해야 크게 힘든 일은 아니지만 정색을 하고 일을 해보자 하면 할 일이 정말 많거든요. 그나마 술·담배를 안하고, 오랜 습관으로 잠을 조금만 자도 체력 유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신씨는 사회에서 자신이 맡고 있는 역할을 “부러지되 휘어지지 않는 축구계의 신문고가 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런 그인 만큼 주어진 일에 모두 욕심을 냈다. 그는 현재 자신이 소속된 SBS에서의 2년을 포함해 올해로 중계방송 해설만 15년째 해왔다. 방송뿐 아니라 신문과 잡지에도 기자들이 무안할 만큼 줄기차게 기명 칼럼과 기사를 써왔다. 그것 역시 방송 해설과 비슷한 연륜을 축적하고 있다. 축구라는 주제를 가지고 다변(多辯)과 다작(多作)의 열정적인 언론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1994년 축구협회와 결별하면서 그쪽 일이 덜어졌다. 다시 1998년 한일그룹을 퇴사하면서 다시 한가지 일이 더 줄었다. 지금은 박사과정 공부(이것도 논문 쓰기를 남겨놓고 있다)와 방송 해설, 이 두가지 일을 축으로 신문 기고와 저술에 전념하고 있다.

多辯·多作, 치열한 言論활동

그가 해온 공부와 회사(한일그룹)일은 항용 일반인이 겪어 나가는 일상과 비슷했다. 그러나 방송과 협회 일은 서로 비벼지고 섞이면서 그에게 숱한 우여곡절을 겪게 했다. 두가지를 각기 분리해 정리하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먼저 방송(과 언론)쪽 얘기부터 풀어보자. 그가 방송과 인연을 맺은 것은 현역 은퇴 직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방송인력이 많이 필요할 때였다.
“축구와 관련된 이런저런 방송 원고를 쓰는 일을 간간이 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MBC 라디오에서 축구경기 중계방송 해설을 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방송사에서 옳다 싶었던 모양이에요. 곧바로 해설자 계약 같은 것을 하자더군요. 그것이 시작이었죠.”

파격이었다. 그때까지 축구 중계방송 해설은 50대, 60대 원로급 축구인들이 주로 맡는 것이 방송가 안팎의 관행이었다. 그런 터에 20대, 그야말로 새파란 ‘29살짜리’가 턱하니 마이크를 잡은 것이었다.
“처음부터 다르게 해야 한다고 작정했죠. 당일 경기하는 팀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자료 준비는 기본이고 제가 오랫동안 공부한 축구과학과 축구에 얽힌 일화들, 현역에서의 경험에 바탕한 순간적인 상황분석 등을 입이 쉴새없이 쏟아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어요. 그만큼 준비도 하고 말이죠.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때까지의 ‘해설문화’를 확 바꿨죠. 가령 지금은 아주 일반화됐는데 공을 차는 발 말고 땅에 딛고 있는 발을 디딤발이라고 하잖아요? 그 말도 제가 처음 퍼뜨린 거죠. 선수의 동작에서 팀 전체의 움직임과 전술, 경기의 흐름까지 짚어 전달하려고 했어요. 흥분할 때는 흥분도 하고 말이죠. 그게 축구팬들에게 받아들여진 모양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인기가 급상승했지만 ‘노는 물’은 별로 좋지 않았다. 두가지, 하나는 MBC의 경우 그때까지도 야구가 지배하는 분위기였고, 다른 하나는 그런 분위기였던 만큼 설사 축구 해설자가 인기를 끈다고 해도 거기에 걸맞은 대우는 ‘불모’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축구는 KBS, 야구는 MBC라는 전통이 불문율처럼 돼 있을 때였죠. MBC에서 프로야구단 ‘청룡’까지 운영했을 정도였잖아요? 좌우지간 TV 축구중계는 KBS가 독점하고 있었고, 그것이 축구계나 방송계에서 모두 당연시되던 시절이었으니까. 회사 분위기가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축구 해설을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잘해 봐야 대우가 신통할 리 없고 말이죠. 이것은 안되겠다 싶어서 그때 뜻이 맞는 허모 PD와 약속하고, 말하자면 ‘MBC 축구 활성화 운동’에 적극 매달렸어요.”
이들 두 사람이 발이 부르트게 프로 구단과 축구협회와 관계인사들을 찾아 다닌 끝에, 그렇게 해도 3년이 넘게 걸렸지만, 비로소 MBC와 KBS 간에 축구 중계방송을 놓고 중계권, 시청률 등 경쟁이 붙게 됐다. 1990년대 들어오면서 KBS의 축구중계 독점 전통이 허물어졌다. 그러면서 신씨는 자신의 처우 문제 해결에도 나섰다.

“1990년에 처음 그 문제를 꺼냈는데 그것 때문에 MBC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어요.”
그때까지도 여전히 야구 정서가 강했던 MBC는 야구 해설자 허구연씨와는 거액의 연봉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축구쪽은 아니었다. “한 경기 해설을 하면 몇만원,하는 식”이었다. 신씨는 “축구인의 자존심을 내걸고” 회사측에 야구쪽과 같은 연봉계약을 요구했다. 무슨 시청률조사 같은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축구 해설을 잘 한다’는 평판을 업고 덜컥 그같은 요구를 내놓은 것이었다. 회사측의 답변은 “예산이 잡혀 있지 않아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대신 그때 스포츠국장과 스포츠쪽 PD들이 힘을 써서 축구쪽 해설자들에게 특별보너스 형식으로 몇백만원을 지급하겠다, 그렇게 방침을 세운 모양이더군요. 내가 그렇게는 받기 싫다며 거절했죠. 다른 해설자들도 섭섭했겠지만 특히 나를 배려해준 스포츠본부장이 괘씸해 해서 ‘신문선이 말고 다른 해설자 찾아’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이틀 뒤 그 양반이 인사발령을 받아 지방으로 가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됐죠.”
연봉 문제는 그로부터 몇년이나 지난 뒤에야 제도적으로 정착됐다. 연봉 제도만 정착됐을 뿐 액수는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신씨는 “1994년 시청률 조사때 보니 MBC 축구 중계방송이 KBS를 앞질렀는데, 그래도 야구 해설자와 비교해 축구쪽 연봉 액수는 밝히기가 창피할 정도였다”면서 “야구와 축구간 연봉 액수가 뒤집힌 것이 1997년에 와서였다”고만 말한다. 그가 MBC에서 쫓겨날 뻔했던 위기상황은 또 있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벌어진 우리 대표팀의 평가전 때였다.

외국 선수를 소개하는데 공교롭게 그 선수가 그날 따라 자기 배번(背番) 유니폼을 입지 않고 다른 번호를 달고 출전했다. 중계석에서는 선수 얼굴이 거의 안보이고 배번으로 구분하는 까닭에 신씨는 선수 이름을 틀리게 소개했다. 방송국에서 TV를 보던 스포츠부국장이 “어떻게 해설자가 선수가 누구인지도 모를 수 있느냐”고 전화로 질책했다. 사정을 설명했지만 부국장은 꼬장꼬장 질책을 그치지 않았다. 신씨도 화가 났다. “내가 당장 그만둘 테니 능력 있는 해설자를 구하라”고 버럭 맞고함을 질렀다. 사태는 서로 육두문자가 오가는 상황까지 번졌다. 부국장은 “당장 신문선이를 잘라야 한다”며 노발대발했다. 그런 그를 스포츠국장이 “해설자 한 사람 키우는 것이 쉽지 않다”며 달래 겨우 무마됐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13년을 있으면서 축구의 불모지대 같던 MBC에 축구 분위기를 띄우고 중계 경쟁력도 키우고 했으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죠. 나는 MBC에 대해 정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고, 어떻게 보면 내가 거기서 축구문화를 뿌린 장본인이라는 생각으로 MBC를 정말 사랑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인터뷰가 진행되던 방 벽면을 가득 장식한 감사패·공로패 등을 가리키며) 보세요. 단 몇달을 MBC와 함께 무슨 일을 해도 감사패나 공로패 같은 것을 해주는 것이 MBC거든요. 그런데 13년을 일한 저한테는 그 감사패조차 하나 없어요. 서글픈 일이죠.”


MBC 떠나는 계기 된 강원도 비하 舌禍사건

신씨가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MBC를 떠나 SBS로 적을 옮기기로 했다는 사실은 당시 큰 뉴스로 언론에 보도됐다. 축구 해설자가 ‘스카우트’된 사례가 없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만큼 신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졌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당시 언론이 보도한 가장 큰 ‘이적의 이유’는 연봉, 말하자면 신씨가 거액의 연봉을 받고 SBS로 이적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돈에 팔렸다는 얘기였다. 그런 보도에 대해 당시 신씨는 가타부타 아무런 배경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SBS로 갔다. 그렇다면 신씨는 왜 자신의 잔뼈가 굵은 MBC를 떠났을까. 정말 돈 때문이었을까. 신씨는 “얘기가 길다”고 했다.

“발단을 찾자면 1998년에 열린 올림픽 대표팀과 청소년 대표팀 간의 평가전 때의 설화(舌禍) 사건이 문제였어요. 그때 후반에 청소년팀이 내리 3골을 먹은 거예요. 그것을 보고 내가 청소년팀 수비수들을 가리켜 ‘강원도 촌에서 올라온 선수들 같다’고 그랬죠. 별뜻 없이 그냥 수비가 허술하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인데 공교롭게도 거기 강원도가 턱 걸렸네. 그런데 같이 중계하던 캐스터가 또 그 말을 받는다는 것이 ‘강원도 사람들이 서울 와서 길을 못찾듯…’운운한 거예요. 어쨌든 캐스터나 나나 아무런 생각 없이, 방송을 마쳤어요.”

이튿날 신씨의 휴대폰으로 ‘그냥 축구팬’이라며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 중계방송 해설하다 강원도 얘기 했느냐”는 질문이었다. 생각도 않고 있던 신씨는 기억을 되살려 “아마 그랬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강원도가 발칵 뒤집혔노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강원일보’ 1면 톱으로 ‘신문선 강원도 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