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개인전작품중에서

김정수200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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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개인전작품중에서

일반적으로 어린이의 발가벗은 몸은 성적 대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의 저 음습한 성적 유희의 장에서는 어린이가 성적 학대의 대표적인 대상이었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순진무구함의 표상으로 사용되어왔던 어린 아이들의 몸. 아마도 우리는 그들의 천난만한 정신세계에 집중하여 어린 아이들의 몸이 내포하고 있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사회성을 은폐하거나 감추려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어린 아이들의 몸은 그렇게 일방적인 표상에 멈추어져 있지 않다. 이 이중성에 대해 작가는 어린 아이들의 몸을 성적 대상으로 환기시키며 오히려 한 술 더 떠 관상용으로 우리 앞에 내놓고 있다. 누가 이 작품 앞에서 예술이 늘 현실의 양지를 지향하며 성이 아름답다고만 말할 것인가.

예술은 잠든 사회의 새벽을 깨우고 에로티시즘은 포장된 사회의식의 번지르한 외피에 파열구를 뚫는다. 그 역할을 무시하거나 축소한다면 안으로 곪아 들어가는 각종 사회병리는 법이라는 이름과 도덕이라는 허울로 위장되어 썩어갈 뿐이다. 예술에서 에로티시즘이 늘 예민한 사회적 문제제기의 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상적인 미국식 어린이의 외형을 하나의 전형으로 보이면서, 아이들의 몸이 남성과 여성의 성적으로 충만한 뉘앙스를 대신하게끔 조작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쿤스는 미국 사회의 성에 대한 이중성, 아니 그 다중인격을 향해 직격탄을 날리고 싶어 한다.

왜 이러한 작품과 그 방법론에 정성을 쏟아 부어야 했으며 그리하여 마침내 들고 나와 세상에 대하여 보여주려고 하고 있을까 ?
그는 이를 통하여 미술이 아름다운 것 ,숭고한 것 ,영원불변한 진리의 한쪽 만을 줄기차게 추구 해왔음에 대하여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진실은 그러한가 ? 존재는 그 구조에 있어 동전의 양면처럼 상대적 쌍 대립구조< 음과 양, 선과 악, 명과 암, 생과 사, 남과 여, 고정과 유동성, 있음과 없음, 양극과 그 사이에 있을 틈새, 기쁨과 슬픔, 나옴과 ,들어감 등 >를 띄고있기 때문에 양의 < + >세계 뒤에 감추어 있을 < 늬글 늬글하고 육질적 충동의 가리워 진 또 다른 에너지 > 필연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작품은 직접 드러내기 보다 작품을 보고 뒤로 돌아서서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 더욱 미적 매력이 아닌가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작품이 암시하고 있는 세계가 중요시되어야 되어야 하고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이다 .
< 성에대한 새로운 해석 > 그것은 그것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쉽게 언어가 가지고 있는 표면적 표현에 대한 관념적 해석이기 쉽기 때문에 보다 해석층위가 심층적 구조를 띄워야 하며 새롭고 밀도 있는 표현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20 세기에 와서 미술에서 성의 문제는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그 동안 성의 문제가 직접적 표현이 터부시되고 뒤에 감춰진 진실로서 직접 미술의 문제로 거론하기를 꺼려해 왔다.
동양에서는 음양오행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우주를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세계관은 성에대한인식을 관념화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성(性)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표면화되면서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등장하여 문학, 미술, 영화, 광고 등 에로티즘이 예술표현의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현대는 성을 대상으로 은유와 암시의 표현뿐만 아니라 직설적이고 충격적으로 이 사회에 던저져 예술 표현의 새로운 이슈로 등장하여 새로운 충격을 주고 있다.

에로티시즘이라 하면 자신도 모르게 입이 조금 벌어지면서 약간의 침이 입안에 고이고 눈이 초롱거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뭔가 재미있고 짜릿한 자극이 자신의 몸을 사르겠거니 하면서 막연한 기대조차 몸에 꽉 끼는 옷처럼 답답하지만 긴장이 싫지 않은 몸의 반응을 즐기게 된다?

하지만 에로티시즘은 사물을 보는 관점에 대해 의아심을 가지면서 시작된다. 같은 대상을 바라볼 때 상극의 입장을 동시에 견지하게 되는 것이 에로티시즘의 시각일 것이다. 여기에다 이데올로기의 차이와 도덕에 대한 상이한 태도가 곁들여지면 에로티시즘에 대한 시각은 마치 청룡열차의 오르고 내리는 사이의 짜릿함처럼 넘실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에로티시즘은 단순하게 놀자고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독하게 몰입하여 대상의 실체를 바라보게 요구한다. 그래서 미술작품, 아니 모든 시각물들을 에로티시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 알맹이가 어느 새 스르륵 우리 앞에 다가서게 된다.

에로티시즘은 정체성을 확인시킬 뿐 아니라 기본적인 개념의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성 또는 여성성과 관련된 여러 오브제들에게 갖게 되는 일반적인 접근방식이나 태도 그리고 선입관을 유사하게 외형화시켜 표현하게 된다. 또한 이런 표현은 관념의 지층을 두텁게 만들면서 구체적인 행동으로까지 유도하는 심리의 근간으로 자리잡게 된다.

우리는 ''여성성''이란 곧 여성의 생식기와 몸의 특징으로 우선 이해하려 하며, 사회적 관습에 의해 여성 관련 오브제의 신체성을 강하게 느끼고 그 느낌을 사실로 간주하는 습관이 있다.

성에 대한 편견과 함께 공존하는 것이 성에 대한 폭력적 집착이다. 우리는 사회 규범을 들어 편견을 조장하거나(청소년보호법 같은) 최소한 편견의 정당성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많은 사회 비용을 쓰고 있다. 하지만 폭력적 집착은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다. 그러나 폭력적 집착은 일반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남성적이고(남근주의에 맞추어져 얼마나 많은 성의 소비와 집착이 정당화되고 있는가) 특수 집단의 동질성을 확인시키는 사회 행위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