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김시민 장군

김홍래200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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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인 1592년 4월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적 왜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가 3개 있는데 이순신장군의 한산 도 대첩,

권율장군의 행주산성대첩 그리고 김시민장군의 진주성대첩이 그것으로써

이를 일컬어 임란 3대첩(壬亂三大捷)이라 한다. 이 가운데 일본   이 역사책에

「 임진란 때 진주에서만 대패했다. 」 라고 기록할 정도로 참 패했던 전투가

바로 진주성 전투였는데, 3,800여명의 소규모 군대로 그 8배에 가까운

3만여명의 정예 왜군을 패퇴시켰기 때문이다   출생  

충무공 김시민 장군

김시민장군은 1554년(이조 명종 9년, 甲寅年)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3일)에 충청도 목천현백전촌(木川縣 栢

田村)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

서 부 김충갑(金忠甲)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

김충갑의 자는 서초(恕初)요 호는 구암(龜岩)이며 고려

충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2세손이다

 

 

김시민장군의 관향은 안동(安東, 구안동김씨)이며 자

는 면오(勉吾)라 불렀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

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

였다. 8살 때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천안군수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 하자

“한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 할 수 있느냐”고 호

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 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

 

 

9살 때 일이다. 백전부락 입구는 백전천(지금의 병천

천)이 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 백전천가에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속에 큰 굴이 하나 있었으며 이 굴

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면서 수시 출몰사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때 장난

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 퇴치를 궁리하였다. 뱀

은 뽕나무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잡는다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개울가로 가서 이무기 뱀을 나타

나게 한 후 활로 쏘아 없애 버렸다 한다.

 

과거급제 및 관직근무

 

충무공 김시민 장군

장군은 25세때인 1578년(선조 11년)무과에 응시하여 급

제하였다. 급제하자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제수 받

아 봉직하였다. 부임해 보니 군기(軍器)는 녹슬고 군기

(軍紀)는 해이하여 일조유사시에는 쓸만한 병기와 군인

이 없음을 개탄하여 마지 않았다. 이를 본 장군은 이대

로 두었다가는 언젠가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

방의 최고책임자인 병조판서를 찾아 뵙고 「소관이 훈

련원에 몸담아 보니 군기가 녹슬고 군인의 기강이 해이

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국가에 변란이라도 생긴다

면 속수무책이 될 터이니 대책을 강구하셔야 됩니다.」라고 건의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지금같이 태평성대에

군기를 보수하고 훈련을 강화하라니 올바른 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만약 훈련원 군사들을 조련하고 병장

기를 만들면 백성들을 두려움속에 몰아 넣는 결과가 되

리니 망언이로다.」하면서 젊은 혈기에 분별없는 소리

를 한다고 질타하는 것이었다. 장군은 사리를 따져 재차

간곡히 건의 하였으나 병조판서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질책으로 일관하였다.

 

장군은 올바른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수모만 당하자 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군모를 벗

어 병조판서가 보는 앞에서 발로 짓밟아 버리고 사직서

를 써서 던져 버린후 훌훌히 일어서서 나왔다.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러해 동안 불우한 세

월을 보냈다. 1583년 이탕개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후 다시 벼슬길에 나가 군기(軍器)시 판관(判官)이 되

었으며 1591년에는 진주판관으로 나가게 되었다. 장군

은 부임하여 행정의 공명정대함이 먹줄과 같았고 덕의

(德義)를 베풀어 위엄을 세우니 예하 장졸과 관속들은

두려워 하나 백성들은 감복하면서 평화스럽게 지낼 수

있었다.

      임진왜란 활약상  

충무공 김시민 장군



장군이 진주판관에 부임한지 1년후인 1592년(선조25

년) 임진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진주목사 이경

이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진주목사 대

행에 임명된 장군은 병기를 수리하고 성지를 구축하는

한편 수성군을 모집하여 진주성을 사수하고자 했다.

장군은 모집된 수성군에게 맹훈련을 시켰음은 물론 병

기와 자재를 정비하고 양곡을 비치하였는데 염초 510

근 제조 및 총통 170여자루를 제작하였다.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호남에 이르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만약 이곳이 무너지면 왜적은 바로 호남지역을

휩쓸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장군은 의병장 김면의 요청에 따라 거창으로 나

가 사랑암 부근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이 공로로 1

592년 7월 26일 진주목사에 정식으로 임명됨).

9월에는 진해에서 왜군장수 평소태(平小泰)를 생포하

여 의주 행재소에 보내 조정의 사기를 높여 주었으며

(이로인해 경상우병사에 임명), 연이어 고성, 창원까지

진격하여 왜군을 무찌르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진주성대첩과 그 기여도

 

충무공 김시민 장군

왜군은 김해, 고성, 창원 등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연패

하자 경상우도의 조선군 주력부대가 진주성에 주둔하

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세만회를 위해 이를 일거에 함

락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왜군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등원랑(藤元郞), 평조신(平調信)등을 주축으로 부

산, 동래, 김해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정예병 3만여명을

동원하여 1592년 10월 5일 진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 제1차 진주성전투는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계속

 

한편 진주성에는 김시민 목사의 본성군사 3,700명과 곤

양군수 이광악의 100명등 도합 3,800명의 군사가 있었

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병이라기 보다는 새로 모집한

장정들이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민들의 필

사적인 단결과 곽재우·최강·이달 등 각처 의병들의 열

렬한 성원에 고무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진주성을 사수

키로 결심한후 화살하나 탄환 한발이라도 낭비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10월 5일 아침부터 왜군은 신식무기인 조총을 주무기

로 3개부대로 나누어 공격을 감행하였다. 김시민장군

은 적군의 화력을 최대한 소모시키고자 일정한 거리에

올때까지 대적하지 않고 성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위장하는 한편, 직접 성내를 순회하면서 임전태세를

점검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등 장병위에 군림하기 보다

는 자신도 병사와 같이 동고동락하면서 솔선수범 하였

다.이와 같이 장군의 실천궁행 노력에 감복한 군사들

은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무릎쓰고  싸우게되었다.

 

장군은 소수병력으로 대병을 맞아 싸움에 있어 필승하

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예를 들면 다음

과 같다.

 

 - 성밖에 있는 아군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여 야간을

 이용해 화살 등 무기를 몰래 반입
   하였다.

 - 성밖에 있는 의병들로 하여금 산발적인 적 측후방공

격 및 교란작전, 횃불시위 등을
   전개하여 아군의 사기진작 및 적군의 혼란을 유도하

였다.

 - 성안의 노약자와 부녀자에게 남장을 하도록 하여 군

사가 많아 보이게 하였다.

 - 야간에 악공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하여 왜군의 심

리를 교란시켰다.

 - 차대전, 현자총통, 질려포, 비격진천뢰, 화약등 당시

조선군의 신식무기를 적절히
   활용하였다.

 - 왜군에게 잡혀있다 탈출한 민간인들을 통해 적정을

소상히 파악하여 적의 공격에
   적절히 대처하였다.

 - 성민들로 하여금 돌·기와·집단 등을 가져와 투척하게

하는 등 민·관·군 총력전을
   전개하였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결국 제1차 진주성전투는 의병들의 적극적인 성원에

힘입은 김시민장군의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술, 그리고

진주성내의 모든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 항전한 결과 3만의 왜병중 2만여명을 죽

거나 다치게 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임진전란사에

3대첩의 하나로 찬연히 기록되기 되었다.               

충무공 김시민 장군

김시민장군은 전투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인 10월 9일

전투지역을 순시하던 중 죽은체 하고 숨어 있던 왜병

의 저격에 의해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치료받다

가 며칠후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운명하였다.

 

장군의 사망일자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리는데 음력

10월 18일(임진잡록)과 12월 26일(족보)이 있다. (규명

필요)

 

그후 조정에서는 장군의 공을 높이사 선조때에 선무공

신(宣武功臣) 2등과 상락군에 추록하였으며, 숙종때에

는 정1품인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상락부원군(上

洛府院君)에 추봉하였다.

 

 

역사적평가

 

충무공 김시민 장군

충무공 김시민 장군 김시민장군은 비록 39세의 젊은 나이에 진몰(陳沒)

하였으나 그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훈련원 판관 재

직시 낡고 녹슨 병기(兵器)와 해이된 군기(軍紀)를 보

고 일조유사시 국가에 큰 화가 닥칠 것을 예견하고 상

관인 병조판서에게 충심으로 이의 시정을 건의하였으

나 묵살되자 분연히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등 자신

의 정당한 의사를 밝히고 관철시키려 한 올곧은 선비

정신이 뛰어났으며

 

충무공 김시민 장군 위난에 처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함에

있어 병사와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등 솔선수범

하였고

 

충무공 김시민 장군 3,800명의 적은 군사로 8배에 가까운 왜병 3만여명을

맞아 다양한 전략전술로 적을 격퇴시킨 위대한 군사

전략가였으며

 

충무공 김시민 장군 전투가 소강상태였으나 적의 저격 등 위험이 농후한

상황에서 예하장수를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전장을

둘러보며 부하장병들을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리

케 한 것은 위험을무릎쓰고 맡은바 소임을 완수하려는

투철한 사명의식과 책인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

던것이며

 

충무공 김시민 장군 또한 총탄에 맞아 쓰러져서도 싸워 이기겠다는 일념

으로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하여 절하고 눈물을

짓는 등 국가와 임금에 대한 애국충절의 정신이 남달

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