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후에오는것들-츠지히토나리

지현경2006.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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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아래 펼쳐진 서울의 조감도는 정밀한 반도체 기판,

마치 집적회로 같은 미래 도시를 연상케 한다.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도시는 훨씬 거대하고

그 중심을 흐르는 한강은 에너지를 이동시키는 대동맥 같다.

출국 직전 칸나는 내 등에 대고, 그 사람 만날 거지, 하고

참고 있던 말을 터뜨렸다.

내 머릿속에 그 사람의 고개 숙인 듯한 얼굴이 되살아난다.

 

그날 마음의 벽에 후회라는 상처를 새겼다.

그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바라보며 칠 년을 보냈다.

그런 내게 그 사람이 오늘을 살고 있는 한국을 방문함은

마음 편한 여행이라고 할 수 없다.

 

지금이란 시간은 홍이와 헤어진 순간에 멈춘 채

오늘까지 연연히 이어진 시간의 쇠사슬이 만들어 낸 매듭이다.

이 짧은 여행 중에 그 매듭을 풀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지 않는다.

평생이 걸려도 풀 수 없는 올가미 속에 나와 홍이가 있다.

 

"거짓말, 그 사람 잊지 못했으면서."

칸나의 목소리는 진실을 꿰뚫는다.

도대체 누가 후회라는 말을 만들어 냈을까.

신은 사람에게 후회하게 함으로써 무엇을 배우게 하려는 것일까.

무겁게 짓눌리는 시간의 쇠사슬을 등에 지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날 홍이와 나는 이토카시라 공원 호수에 놓인

다리 중간에서 만났다.

몇 초였을까,시간의 쇠사슬이 우리는 옭아매었다.

크게 뜬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보았을까.

 

기내에 겨울 햇살이 스며든다.

비행기의 선회에 따라 빛 줄기가 칠 년이라는 세월을 되돌아보듯

기내를 가로지른다.

빛의 자락을 찾아 창밖을 내다본다.

태양과 시선이 부딪친다.

부딪친 햇살에 눈이 부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만다.

감은 눈 뒤편에 그저 아무 말 없이 달리는 하얀 옷의 그녀,

최홍이 있다.

어째서 홍이는 그렇게 달려야만 했을까.

이제는 그 이유를 조그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어째서 홍이의 외로움을 좀 더 이해해주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녀 입장에 서서 생각할 수 없었을까.

착륙하는 순간 기체가 흔들렸다.

서울에 도착했다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하네다를 출발해 겨우 두 시간 반밖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시차도 없다.

칠 년 동안, 어째서 나는 서울에 올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가까운 나라인데.

혹은 너무 가까운 나라여서였을까.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는 걸 믿어?"

연신 내리는 빗속에서 홍이와 나는 우산 속에 갇혀

이야기를 나누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어려운걸.

 하지만 분명 어딘가엔 있을 거야."

홍이는 이노카시라 공원 호수면을 바라보며,

어딘가에?그게 어딜까?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어딘가지, 하고 말하려다 그만 두었다.

수면에는 빗방울이 만드는 무수한 원들이

그려졌다 금세 사라져 갔다.

 

수하물 수취대에서 작은 트렁크를 찾아 도착 로비로 발을 옮겼다.

마중 나온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현대적인 로비의 눈부신 공간 끝에서 시선이 매듭을 만든다.

갑자기 소리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기억이 단번에 칠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모세가 바다를 둘로 나눈 것처럼 시야를 가르는 길이 생기더니,

그 끝에 홍이가 있었다.

우리는 시간의 쇠사슬을 움켜쥔 채 서로 아무 말 없이 

그저 멍하니 한강의 용이 가져다 준 기적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이제껏 기적이라든지 우연이라든지 하는 말을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일이 실제로 눈앞에서 일어나면

놀라움에 앞서 사고가 정지되고 만다.

 

기적적인 재회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일까.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진 것일까?

아니면 결정적인 마지막을 가져올 전조일까?

 

그날 나는 슬픔으로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커다란 실연의 아픔을 짊어지고

고개를 떨군 날들을 지내고 있었다.

수업을 빠지고 공원을 거닐며 상처입은 마음을 달래면서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노카시라 공원의 벚꽃이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절절이 지난 벚꽃잎이 눈처럼 날리던 날이었다.

아이들 웃음소리에 뒤를 돌아보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흰옷에 훌쩍 큰 키 때문에 눈에 띄었다.

사내아이 하나가 홍이와 부딪쳐 그녀가 들고 있던 뭔가를

떨어뜨렸다. 모든 것이 순간의 일이었으나,

그때 두 사람 사이에서 춤을 추며 흩날리던 벚꽃의 우아한 움직임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홍이의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 지나가는 바람 냄새,

나무다리 위에 굴러 떨어진 휘파람 부는 소년 인형 등을 

아직 기억한다.

나는 얼른 인형을 주워 흰옷을 입은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던 소년 인형은 소녀 인형 곁으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돌아갔다.

 

낮게 드리운 구름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던 벚꽃이

바람결에 흩어지며 꽃보라를 만들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벚꽃 예쁘죠? 하고 자랑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홍이가 말했다.

"한국에는 이런말이 있어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한국에서 왔군요."

빤히 들여다보는 눈길에 나는 허둥댔다.

불순하게도 입 맞추는 순간이 연상되어 동요하고 말았다.

"일본에서 살아요? 아니면 여행?"

"모르겠어요.

살아야 할지 스쳐 지나가야 할지,

여기가 좋아질지 아닐지.............."

"스쳐 지나갈 건지 머무를 건지 빨리 결정해야 해요."

홍이는 그때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단어들을 짜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똑바로 쳐다볼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지금 생각한 건데

어쩌면 사는 쪽으로 결정할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옆에 앉아 있는 홍이에게 뭔가 말을 걸어야 한다.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 필요하다.

칠 년이라는 세월이 방해한다.

갑갑하리만큼 입은 무겁게 닫힌 채

좀처럼 말을 자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날 나는 이노카시라 공원의 호수 주변을 걷고 있었다.

벚꽃이 지고 공원에는 무성해진 파란 잎들이 웃고 있었다.

봄날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

나는 상쾌한 바람과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살 속을 걷고 있었다.

멀리서 분명 나를 향해 달려오는 여자가 있었다.

한 달 전 나무다리 위에서 이야기를 나눈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홍이는 이미 내 앞에 와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밀고는 이거 받으세요,

하고 거침없이 말했다. 그녀가 내민 건 지난번 다리 위에서

내가 주워 준 휘파람 부는 소년 인형이었다.

"받아도 돼요?"

홍이는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웃음이 나게 하죠? 쓸쓸할 때 이걸 보고 있으면 기운이 나요.

당신 곁에 두면 좋겠어요."

 

'베니, 너는 어째서 지금 여기 있는 거니?'

하려던 말을 삼켰다. 몸을 구부려 차창 너머로 남산을 올려다보며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몰래 한숨을 토해 낸다.

자동차가 조용히 신라호텔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회전문 앞에 섰다. 도어맨이 달려와 재빨리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들어 와 

기억들이 차례차례 얼어붙어 간다.

 

그냥 사랑할 수 없게 된 것뿐이야, 하고 칸나가 남긴 말은

몇 번이고 헤아려 보았지만, 도저히 그녀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에는 남을 믿지 못하게 됨으로써 자심을 망가뜨려 갔다.

첫사랑이었기에 마음의 크기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몰랐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나는 칸나가 떠났다는 것보다 그 자리에 있던 것,

말하자면 난생처음 알게 된 사랑의 기쁨이 느닷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오히려 당황하고 허둥댔던 것이다.

 

최홍의 등장으로 상처 입은 내 마음은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아,

눈부신 봄 햇살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기운을 회복해 갔다.

홍이는 미워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지금 신라호텔 카페테리아에서 신문사 취재를 받고 있다.

옆에는 최홍이 내 일본어를 한국어로,

기자의 한국어를 일본어로 통역하고 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 걸까.

기자의 질문이 잠시 끊어진 틈을 타,

사사에 히카리가 나라는 걸 알고 이 일을 맡았느냐고 물어보았다.

홍이는 손에 든 노트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설마 하고 재빨리 대답했다.

낮은 목소리로 소리 죽여 말했지만 강

한 부정에 거절의 의사가 배어있다. 

    

기자가 이어 질문을 했다.

"그분은 아직 일본에 계십니까?"

"아뇨. 지금은 한국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겁니다."

"이번 방한 기간에 만나실 생각인지요?"

"제가 필명으로 소설을 써와서 상대방은 아마 모를 겁니다."

기자가 이어 뭔가 질문을 했다. 홍이는 다시 아무 말이 없다.

이번엔 긴 침묵이 흘렀다. 참다못한 이연희가 지금도 그사람을

좋아하느냐고 기자가 물어요,하고 떠듬거리는 일본어로 설명한다.

후회에 등을 떠밀리듯 칠 년 동안 한 번 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하지만 커다란 한숨에 실려 나온 말은 가냘프다.

뒤를 쫓아 한국에 가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홍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자신에게

이 같은 변명이 허락될 리 없다.

 

"베니,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하지만 지금은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분명 네게는 닿지 않겠지.

이 우연한 재회가 마지막 찬스란 것은 알아.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어."

 

안녕히 가세요, 하고 홍이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녕히 가세요, 하고 답한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번져 가는 시야 저편에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다.

 

나는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져 놓고 무릎에 손을 짚으며 일어났다.

창가로 다가가 오른쪽 저편에 펼쳐진 빛의 보석을 바라본다.

남산 위에서 홍이와 함께 내려다본 서울의 야경이 다시 마주했다.

"홍, 넌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렸니................."

한숨에 창이 뿌예졋다.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홍이란 한자를 적어본다.

글씨가 점점 옅어지더니 우주 속으로 녹아 사라졌다.

 

그날 나와 홍이는 결혼을 약속했다.

칸나에게 홍이를 새 연인이라고 선언한 다음이었다.

그리고 막 동거를 시작했을 때였다.

엄밀히 말하면 결혼이라는 단여를 썼던 건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언젠가 우리가 하나가 될 거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 역시 눈부신 아침이었다. 행복한 잠에서 깨어난 우리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쭉 이렇게 함께 눈을 뜰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주저할 것이 없었다.

둘 사이에는 한장의 천도,

둘사이를 가르는 문도,

세상을 차단하는 높은 벽도,

끝없는 국경선도 없었다.

"평생 이렇게 눈을 뜨게 될거야.

누구도 우리의 미래를 방해 할 순 없을 테니까."

순간 홍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윤오, 약속이야!"

그 티 없이 웃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두려움 따윈 없었다.

우리에게는 모든것을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믿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어떠한 장애도

어떠한 적대감도 어떠한 불평등도 없었다.

나는 홍이를 힘껏 끌어안고 행복에 젖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슬픈 인생을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홍이와 함께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행복과 같은 양만큼의 불안도 있었다.

그 불안을 뛰어넘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행복의 질에 달려 있다.

그날 내 곁의 홍이는 틀림없이 행복안에 있었다.

행복은 평생 이어지는 것이라고

그날의 우리 두 사람은 믿으려 했다.

 

두 사람은 여느 사람들보다 더더욱 앞만 바라보고 있었던 탓에

밝은 미래만을 이야기했지만,

모든 인식에서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실제로는 모든 것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을 것이다.

그 미묘한 어긋남이 후에 커다란 어긋남이 되어

두 사람의 발밑을 뒤 흔들게된 것이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 했던 문제가,그 애매함이, 혹은 눈속임들이

결국엔 눈덩이가 되어 두 사람에게 덮친 것이다.

하지만 행복의 최고의 순간에 있던 우리가

현실의 무서움을 알 턱이 없었다.

그때 우리는 그저 티 없이 맑게 빛나는 쌍둥이별이었다.

 

"그런데 어제 통역해 주신 분은 서울에 사세요?"

용기를 내어 물어본다.  내 걱정과는 달리 이연희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툰 일본어로 대답한다. 

"분당이라는 교외에 사세요.

집이 호수 근처에 있다고 들었는데 가본 적은 없어요."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일본과 한국 사이에 시차가 없다니

거짓말 같지,하고 화제를 바꾸려고 중얼거린다.

"시차?"

칸나는 코웃음을 웃고나서 말한다.

"추억이 아닌, 지금을 살고 있는 나를 봐줘."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 주지 않으면

 난 앞으로 살기 힘들 거야."

내 간절한 호소에 칸나는 잘라 말했다.

"널 사랑할 수 없게 된 것뿐이야. 더 이상의 이유는 없어."

어째서 사랑할 수 없게 되었느냐고 추궁했다.

칸나는 겨우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유는 나도 몰라. 갑자기 식어 버렸어.

더 이상 널 사랑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든 것뿐이야.

그런 느낌 또한 진실이고."

"그건 말이 안돼."

"그래, 준고. 말이 안 돼, 이런 건 이유가 없으니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또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 사람은 지금 뭐 해?"

레스토랑을 나와 탄 택시 안에서 고바야시 칸나가 묻는다.

내가 그사람, 누구? 하고 딴청을 부리자, 칸나는

"당신이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나와 헤어진 다음에 사귄  한국여자." 하고 돌려 말했다.

글쎄, 하고 나는 도망친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준고한테는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그게 정리될 때까지 사랑을 할 수 없다고."

그랬었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얼버무린다.

 

이틑날 창으로 쏟아지는 눈부신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당이라는 지명이 언제까지고 목에 걸려 있을 뿐이다.

눈을 비비며 햇살에 익숙해질 때까지 속으로 몇번이고

분당이라는 이름을 반복해 본다.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콜택시를 부탁했다.

처음부터 오늘 일정에 들어 있는 것처럼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주소 같은건 없습니까?"

거울에 운전기사 얼굴이 언뜻 보였다.

목소리로 받은 인상과 달리 훨씬 젊은 사람이었다.

"아뇨, 주소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호수가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찾는 사람이 그 호수 주변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호수요?"

 

"있군요. 이 근처에 큰 호수가 있어요."

운전기사의 목소리에 조금 생기가 돈다.

"그럼 거기로 부탁합니다."

"꽤 넓은 호수인데 어느 쪽을 갈까요?"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거기서 홍이를 기다릴 생각 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와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완만한 비탈길을 내려간다.

호수 주변을 야트막한 언덕들이 둘러싸고 있다.

막상 내려와 보니 호수는 생각보다 꽤 넓었다.

 

역시 어리석은 도박이었을까.

호숫가를 둘러싸고 있는 산책로 저편을 바라보다

갑자기 기억이 뒤흔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알 수는 없지만,

뇌보다 반사신경이 먼저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숨이 멎고 시선을 얼어붙었으며 소리도 사라졌다.

기억속에 살아있던 한 점이 차차 사람의 형태로 부풀어 오르더니

이윽고 달리기를 하는 홍이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그날 홍이는 붉어진 얼굴로 미안하다고 한마디면 되잖아,

하고 항의 했다.

그날 홍이는 달릴 때는 아무 생각 안해도 되니까 좋아,

하고 중얼 거렸다.

그날 홍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일본 사람이 아니면 안되나요?

하고 서툰 일본어로 물었다.

그날 내가 받쳐 든 우산속에서 홍이는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는 걸 믿느냐고 물었다.

그날,그날,그날............................

모든 것이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 순간의 연속속에 모든것이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있다고 깨닫기도 전에

한순간은 사라지고 말았다. 

순간은 영원이다. 영원이 순간이듯이.

 

홍이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다른 궤도에서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같은 궤도를 돌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이미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수백 년을 한순간에 살아 낸 사람처럼 에너지를 소진한 나는

내내 그 자리에 못 박여 있다.

갈대가 조용히 흔들리고 있는 산책로를 멍하니 바라보며.

 

"아니. 나는 그렇게 거창한 일을 하려고 쓴 게 아니에요."

내 목소리는 너무 작아 두 사람에게는 닿지 않았다.

단지 내 마음을 홍이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일본과 한국, 양국의 우호 관계를위해 쓴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한사람을 향한 후회와 지울 수 없는 추억때문에 쓴 것이다...

독자 마음에는 제대로 닿았는데 어째서 최홍에게는 닿지 못한걸까.

혹시 홍이는 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이 아닐까.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기 위해

이런 작품과는 거리를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우리 둘은 뜻하지 않은 이별을 맞이했다.

그건 느닷없이 들이닥친 것이 아니라 쌓이고 쌓인

고독과 오해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의 마지막 날은 기정사실로 두 사람 앞에 다가온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곳에 와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벌어진 틈을 다시 좁힐 수 있다고 믿었다.

어렸기에 무모할 정도로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터무니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마저

곧 원래 상태로 회복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입구에서 나를 맞아 준 홍이의 아버지 최한은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던 모습 그대로 였따.

사에키 시즈코가 그렇게 팬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은

풍채 좋은 신사였다.

 

최한의 안내로 내일출판사를 둘러본다.

영업부, 디자인부, 그리고 편집부.

편집부는 넓은 응접실을 사용하고 있었고 편집자들의 책상에는

대나무로 짠 멋진 파티션이 쳐 있었다.

그 책상들 중에서 나는 인형을 발견했다.

내 방에서 홍이가 가져간 닥종이 인형이다.

"이 휘파람 부는 소년 인형은 누구 겁니까?"

최한이 미간에 주름을 지으며 이건, 하고 말했다.

최한을 대신해 이연희 과장이,

"그건 최홍 실장님 거예요." 하고 대답한다.

"인사를 드렸으면 하는데.." 내 말에 최한은,

"조금 전까지는 있었는데.."하며 홍이를 찾으러 간다.

나는 인형을 집어들고 살펴본다.

그날 홍이가 가져간 소년 인형이 틀림없다.

어째서 다른 한쪽은 남겨 두고 갔을까.

왜 홍이는 이 소년 인형만 가지고 갔을까.

내 마음이 다시 혼란스러워진다.

 

최한이 홍이를 데리고 돌아왔다. 분당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분위기도 공기도 달랐다.

혼이 빠진 인형 같은 얼굴로 아버지 곁에 서 있다.

"오늘 사사에 씨와 함께 회식이 있다."

홍이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소년 인형을 그녀에게 내밀며 이거 당신 건가요,하고 물었다.

홍이는 잠시 인형에 떨어뜨렸던 시선을 거두고

아뇨, 하고 힘없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그건 한때 제가 좋아했던 사람과 추억이 깃든 겁니다."

 

그때 홍이가 방으로 들어왔다.

이연희 과장이 자리를 비켜 그녀를 아버지 옆에 앉게 한다.

곧이어 종업원이 커다란 접시를 들고 들어와 내 앞에 놓으려 했다.

이연희 과장이 무슨 말을 하자 종업원이 놓던 접시를 다시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홍이가 이를 말리며 뭐라고 했다.

접시에 담긴 음식을 본 적이 있다.

그건 홍이가 기치조지 내 아파트에서

몇 번이나 만들어 준 적이 있는 오징어볶음이다.

 

홍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나를 위해 오징어볶음을 만들었을 때였다.

마음처럼 되지 않았는지 시무룩해 있던 홍이는

언젠가 준고 생일에 맛있는 오징어볶음을 먹게 해줄게,

하고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이 내 서른 번째 생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홍이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흔들렸다.

음식으로 젓가락을 가져간다.

홍이가 만든 음식을 먹는 것 같아

나도 몰래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고마워요."

복받쳐 오는 기쁨이 눈물이 되어 흐르지 않도록

꾹참으며 인사를 한다.

"고맙습니다.실은...예전에 정말 좋아했던 한국 여자가 있었어요.

하지만 내가 그녀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 버렸지요."

 

가위로 가슴 한쪽을 잘라 낸 것 같은 아픔이 남았다.

홍이는 내게 희미하나마 희망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그 희망이 채 부풀기 전에 다시 떠나려고 한다.

그렇다. 그녀의 약혼자 곁으로. 그의 포르포즈를 받기 위해.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한다.

최한이 일본과 한국의 출판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애써 듣는 척하지만 마음은 그곳에 없었다.

그 한국 청년이 홍이에게 프로포즈하는 장면만이 뇌리를 스쳤다.

알을 부화시키는 어미 새처럼 따뜻한 온돌방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나 자신에게 어처구니 없어하면서.

어째서 뛰어나가 그녀를 막지 못하는지.

어째서 또다시 겁쟁이가 되려고 하는지!

 

홍이가 내 생일을 기억해 준 것이 기뻤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지금까지 보내온 이 칠 년을 보상받은 것 같았다.

홍이가 그 남자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일지는 그녀가 결정할 일이다.

내가 이러쿵저러쿵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칠 년이란 세월이 지났는데도

내 생일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준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매년 이날에 홍이가 나를 생각해 주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내가 매년 구월 십삼일.

홍이의 생일에 먼 하늘을 바라보며 홍이를 그리워한 것처럼.

 

고바야시 칸나가 내 뒤를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이름이 뭐였지? 나 다음에 사귀었던 한국 여자.."

나는 칸나의 시선을 더듬어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한쪽에서 연주하는 밴드가 보일 뿐이다.

나는 다시 칸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이 당신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네.

 나는 잊고 있었는데..."

칸나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상상해 보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 맞아. 그 사람과 우연히 만났어."

"우연히?"

"그래 우연히.그녀가 내일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어.

 거기 사장님 딸이야."

칸나는 눈을 감고 잠시 아무 말 없이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고 다시 내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좀 전에 그 사람이........"

"뭐라고?"

"당신을 찾으러 여기까지 왔었어. 나를 노려보고는 가버렸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칸나도 같이 일어났다.

"가지 마."

"미안해"

나는 칸나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뛰쳐나왔다.

나는 로비를 뛰어다니며 홍이를 찾았다.

로비 어디에서도 홍이를 찾을 수가 없어 이번에는 주차장으로 나가

그녀의 파란 줄리엣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역시 홍이는 없었다.

로비로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넋을 놓고 서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놀라 뒤를 돌아보니 호텔 여직원이 크림색 꽃다발을 들고 서 있다.

"조금 전에 어떤 여자 분께서

사사에 선생님께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크림색 장미 꽃다발을 받아 든다. 꽃다발에 꽂힌 카드에는 일본어로

생일 축하해요,홍이가, 라고 적혀 있었다.

홍이는 왜 날 찾아온 걸까.

그 남자에게 프로포즈를 받았다면 그의 곁에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홍이는 고바야시 칸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래전에 불과 몇분간 마주쳤을 뿐인데.

그만큼 홍이에게 칸나는 마음에 걸리는 존재였단 말인가.

홍이는 내 앞에 앉아 있는 칸나를 보고

그대로 발검음을 돌린 것이다.

홍이는 내게 무슨 말을 하러 왔던 걸까.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홍이가 집을 떠나고 처음 찾아온 가을부터였다.

나는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학교로 돌아갔으며

그리고 나머지 시간, 예전에는 홍이를 위해 썼던 시간에

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원고지의 한 칸 한 칸을 채워가며 그곳에서 내 존재 이유를 찾았다.

글을 씀으로써 치유되고, 그을 씀으로써 구원을 받던 날들...........

 

 

이미 학생이 아니었고 제대로 된 직업도 없이

사회적인 책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그저 묵묵히 소설을 향해 걸었던 나. 퇴고를 거듭한 작품이

어느 정도의 가치와 의미가 있으며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채

중력도 인력도 없는  우주 한가운데에서 나는 소설을 썼다.

또한 그러한 내가 도대체 누구인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나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홍이와 헤어진 후 나는 글을 씀으로써

나 자신을 매어 둘 수 있었다.

직업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였다.

친구들의 호응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때까지의 모든 관계를 끊고

오직 홍이와의 내 자신의 이야기를 써갔다.

 

벨보이가 택시 문을 열고 칸나의 작은 가방을 트렁크에 싣고서야

겨우 내 얼굴을 바라본다.

"준고. 넌 너무 말수가 없지만,

그 사람한테는 제대로 네 마음을 전해야해.

눈을 바라보고 거짓 없는 네 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거야.

그럼 반드시 그 사람도 네 진심을 알아줄 거야.

오랜 세월의 오해도 자연스럽게 풀릴 거고."

칸나가 미소를 지었다.

놀란 나는 그래, 하고 대답하고는 다음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꼭 행복해야 해. 준고가 행복하길 빌어 줄게."

칸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택시를 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수가 없다.

조용히 닫힌 문이 우리 앞을 막았다. 당황한 나는 차창을 두드린다.

칸나가 차창을 내린다. 그리고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힘내. 꼭 네 마음을 말과 성의를 다해 전하는 거야."

고바야시 칸나를 태운 택시가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한다.

칸나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흔든다. 가늘고 흰 손가락 끝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어떤 얼굴로 어떤 마음으로 그녀가 손을 흔들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맨다.

까만 택시 차창으로 내민 흰손이 내게 작별을 고한다.

안녕, 안녕, 하고 손이 말한다.

'고맙다, 칸나.'

호텔앞에 혼자 남겨진 나는 마음으로부터

칸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무엇을 해도 머릿속에서 홍이가 떠나지 않는다.

목욕 가운을 걸치고 남은 포도주를 마시며

어두워진 남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프런트 직원이 최홍이라는 분의 전화입니다, 연결해 드릴까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 수화기 저편에서 홍이의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준고....."

그 다음에 들려오는 건 숨결뿐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고쳐쥐고 홍이의용기를 붙들기 위해

"전화해 줘서 고마워." 하고 가능한 한 부드럽게 말했다.

홍이가 응, 하고 대답한다.

"내일 돌아가지? 배웅은 못할 것 같아서 전화로라도 인사하려고.."

"내일, 아니 지금이라도 만날 수 없을까?"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나는 단어를 골라가며 묻는다.

홍이는 잠시 망설이다 아니, 미안해, 하고 거절한다.

 

"고마워. 조심해서 가."

"그래, 그럴게. 홍, 행복해라."

말문이 막혔다. 칸나처럼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 수가 없다.

당장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나는 금방 주저앉아 울것 같다.

눈물이 제멋대로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숨을 멈추고 감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참는다.

"꼭 행복해야 된다."

말을 끝내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남산을 돌아보며 아무 주저 없이 울었다.

 

이는 새로운 아침의 시작인 동시에

지나간 시간의 종말이기도 했다. 

커튼을 치지 않고 잔 탓에 나는 또다시 아침 햇살에 잠을 깼다.

어젯밤에는 얕은 잠 속에서

꿈과 현실 사이를 무수히 오가느라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반나절 동안 이용할 콜택시를 부탁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망원경도 함께 부탁했다.

이대로 홍이를 만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얼굴을 마주 보고 분명하게  내 마음을 전해야 한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다.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다.

 

평온한 시작이었으나, 그 작은 만남 뒤에 두 나라를 걸친

운명적인 사랑과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번의 기적이 둘을 만나게 한 것처럼 또 몇 번의 기적이

더해져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이것이 신의 못된 장난인지,아니면 예정된 운명인지

나는 지금 그것을 확인하려 한다.

빛이 차창을 흐른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멈출 수 있는 건 신 뿐이다.

나는 운명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다.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홍이가 살고 있는 분당에 도착했다.

 

율동공원이다.

호수면을 떠도는 옅은 안개가 부드러운 겨울 햇살을 받아

빛을 발하고 있어 마치 커다란 구름이 호수 위에서

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기분전환을 위해 나는 차 밖으로 나간다.

목을 돌리고 기지개를 켠다. 운전기사가 밖으로 나와 아직이네요,

하며 졸린 듯 한 목소리로 말한다.

"네. 그렇지만 이렇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합니다.

 이 순간은 줄곧 그녀를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운전기사가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는 저, 하며

먼 곳을 가리킨다. 뒤돌아보니 산책로 끝에 사람이 보였다.

그 모습은 작지만 낯익었다. 나는 서둘러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왔습니다......................."

홍이가 바람을 가르며 경쾌하게 달려온다.

그녀의 발이 규칙적으로 땅을 차고 오를 때마다

내 감정도 격렬하게 흔들렸다.

망원경을 차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재킷을 벗어 티셔츠 차림이

된다. 아래는 청바지와 운동화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함께 달릴 겁니다."

"네? 뭐라고요?"

"같이 달릴 겁니다. 지금부터."

나는 대답을 남기고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홍이는 갈대밭은 지나쳤다.

나는 그녀를 뒤쫓지 않고 그녀와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홍이와는 호수 반대편에서 스칠 계산이었다.

 

칠 년 동안 홍이를 생각하며 달려왔다. 그동안 몸은 준비가 되었다.이제는 정신이 따라와 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몸을 풀면서 조금씩 속도를 올려간다. 이 길의 끝에 홍이가 있다.

나를 발견하고 홍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햇살이 내가 달릴 길을 비춘다. 호수면이 눈부셔 눈을 가늘게 뜬다.

이 괴로움을 닦아 내기 위해 나는 지금 달리고 있다.

내 영혼과 정신은 오직 한 사람, 최홍을 향하고 있다.

 

끝까지 달렸을 때

나는 비로소 홍이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날의 홍이는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아직 내안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