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밤에 창문 틈을 비집고 들려오는 외침. 늦은 밤 헛헛한 채로 잠자리에 누운 이들에겐 달콤한 유혹의 소리다.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가 다시 멀어지기 시작하면 결국 참지 못하고 솜이불 속에서 몸을 꺼내 창문 너머로 메밀묵 한 모를 받아든다. 숭덩숭덩 썬 묵 위에 잘게 채 친 김장김치를 올려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내면 한겨울밤의 별미가 된다. 일반적으로 묵이란 소리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일 것이다.
돌이나 환갑잔치처럼 가족.친지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상을 차릴 때는 묵이 빠지지 않는다. 상할 염려가 적어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양념장만 얹어 내면 되기 때문이다. 재료 값도 싸 넉넉하게 쑤어두면 푸짐한 상이 가능한 매력도 작용한 것일 게다. 그러다 보니 밥상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저기 귀퉁이로 밀려다니는 조연급 신세다.
흰 눈 내리는 겨울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 가짓수나 채우는 조연급 반찬으로 인식돼 오던 묵이 요즘 화려하게 변신 중이다. 추운 겨울밤 출출한 속을 달래주던 야식에서 한여름의 더위를 몰아내는 차가운 요리로 업그레이드 됐다. 더 이상 조연급 반찬도 아니다. 주연급 메인 메뉴로 신분이 급상승했다.
구황식품에서 웰빙 슬로 푸드로
25일 오후 3시 서울 자양동에 있는 찜질방 '해피데이' 휴게실. 땀을 흠뻑 흘린 사람들이 식혜나 미역국 대신 묵사발을 한 그릇씩 들고 있다. 도토리묵을 숭덩숭덩 가늘게 썰어 만든 묵국수다. 육수에 얼음이 동동 떠 있고 묵 위에는 새콤하게 익은 김치가 올라가 있다.
땀복이 흥건하게 젖은 채 묵국수를 먹던 김진희(30.서울 자양동)주부는 "땀을 흘린 뒤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 묵만큼 부담 적은 음식이 없다"고 한다. 씹을 필요도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기 때문에 소화기능이 약해도 걱정 없다는 것. 차가운 국물은 땀을 식히는 것과 동시에 몸에서 빠진 수분과 염분을 보충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음식이다.
실제 묵의 재료는 메밀.도토리.녹두 등 곡류나 견과류로, 단백질이나 식물성 지방 등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풍부하다. 식이섬유.비타민.무기질도 많이 함유하고 있어 피로해소나 소화 기능도 탁월하다. 그런데도 열량은 1인분에 35㎉ 정도라 다이어트 건강식으로 손꼽을 만하다.
서울 교대 근처에 있는 '성북동묵밥'은 묵밥 전문점. 국내산 도토리 가루로 묵을 쑤어 시원하게 먹는 묵밥, 따뜻하게 먹는 묵밥 등 다양한 메뉴를 내놓고 있다. 점심시간이면 20~30분은 줄을 서 기다려야 할 정도다. 이리 되자 개점 2년이 채 안 된 이달 초에는 삼풍백화점 옆에 매장 규모를 대폭 키운 2호점을 열었다. 성북동묵밥의 이정희(43)사장은 묵 음식의 인기에 대해 "묵을 쑤는 정성은 요즘 음식의 화두가 되는 슬로 푸드의 대표적인 예"라며 "과거에는 묵이 구황 식품이었지만 지금은 할머니의 손맛을 느끼는 감성 웰빙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요즘은 묵밥.묵국수가 대세
조금만 과거로 돌아가면 묵은 배고팠던 시절 생존을 위해 억지로 먹던 구황 식품이었다. 가을이면 동네 야산에 떨어진 도토리를 다람쥐에 앞서 주워 가루를 만들어 뒀다 끼닛거리가 떨어질 때마다 묵을 쑤어 밥 대신 먹었다. 논농사가 어려운 산간에선 메밀을 심어 쌀의 대용식으로 메밀묵을 쑤었다.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다. 도토리든 메밀이든 물에 불려 떫은 맛을 없앤 뒤 맷돌에 갈아 앙금만을 가려낸다. 이를 풀 쑤듯 끓인 뒤 넓은 그릇에 담아 식히면 굳어 묵이 된다.
요즘 시중 음식점에서 묵은 주로 '묵밥' '묵국수'란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묵밥은 멸치장국으로 만든 국물에 갖은 양념을 하고 도토리묵이나 메밀묵을 숭덩숭덩 썰어 넣어 만든다. 묵부터 건져먹은 뒤 밥을 말아 먹거나 국처럼 밥을 함께 말아 즐기기도 한다. 묵국수는 묵을 보다 가늘게 썰어 냉면처럼 찬 육수에 말아낸 것이다. 고명으로 신 김치, 삶은 계란, 오이 채 등이 오르고 바다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김가루도 얹어진다.
국물 부어 먹는 인스턴트 제품도
백화점이나 수퍼마켓의 식품매장에도 단순한 묵 제품이 아닌 가공 묵요리가 등장하고 있다. ㈜풀무원의 '바로 먹는 도토리묵채 냉(冷)국'이 대표적인 예. 이 제품은 바쁜 현대인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국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도록 제품화했다. 맛은 쇠고기 동치미맛과 가다랑어 장국맛 등 두 종류. 열량도 인스턴트 라면의 5분의 1 정도인 100~105㎉다.
묵의 화려한 이미지 변신에 대해 음식연구가 박연경(42)씨는 "미니스커트와 핫팬츠 등의 노출 패션이 급부상하면서 올 여름 유난히 저칼로리 건강 음식들이 사랑을 받고 있다"며 "묵 요리가 식감이나 모양새는 다소 떨어지지만 이 같은 사회 분위기를 타고 한동안 인기를 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글=유지상 기자 yjsang@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yjsang@joongang.co.kr
*** 묵 맛집, 바로 여기!
■ 정말 국내산이라니깐 성북동묵밥
서울 강북에서 강남으로 넘어온 '잘나가는' 묵집이다. 주인 부부가 100% 국내산 도토리 가루만을 쓴다고 강조한다. 도토리묵으로 시원한 묵밥, 따뜻한 묵밥, 새싹비빔묵밥 등 다양한 메뉴를 낸다. 값은 각각 6000원. 02-3472-0383.
■늦게 오시면 묵 구경도 못해요 궁중냉면묵밥
묵 쑤는 일이 힘들어 하루에 두 번만 쑨단다. 해물로 뽑은 장국에 도토리묵을 말아 낸다. 냉면도 함께 파는데 오후 5시쯤이면 준비해놓은 묵이 떨어져 묵밥을 먹기 쉽지 않다. 숭인동 창신초등학교 건너편. 5000원. 02-744-4701.
■묵요리로 반세기, 전통의 명가 미진
반세기가 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전통 묵집. 강원도 평창산 메밀로 묵을 쑨 메밀묵밥이 인기 메뉴. 먹기 좋게 채 썬 묵 위에 신 김치와 오이, 김 등 고명을 얹고 육수를 자작하게 부어 낸다. 광화문 뒷골목에 위치. 5000원. 02-730-6198.
■'찜질방 = 미역국'은 편견 해피데이 찜질방
묵국수란 메뉴로 찜질방의 투톱 메뉴인 식혜와 미역국을 밀어내고 원톱을 구축한 곳. 동치미국물이 들어간 장국에 도토리묵을 가늘게 썰어 넣은 뒤 다진 김치와 오이채 등의 고명을 올려 낸다. 5000원. 지하철 구의역 인근. 02-452-5656.
■마을 전체가 묵집 구즉마을
호남고속도로 북대전 인터체인지에서 신탄진을 향하는 변두리 마을은 온통 묵집이다. 1980년대 초 할머니 한 분이 생계 수단으로 시작한 묵장사가 동네를 바꿔 놓은 것. 도토리묵을 도톰하게 채쳐서 따뜻한 멸치장국에 말아낸다. 잘게 썬 김치와 들깨, 김을 고명으로 얹고 삭힌 풋고추로 간을 해 먹기도 한다. 값은 4000?p>
밥 열량의 반의 반의 반 다이어트식 묵이 뜬다
[중앙일보 유지상.권혁재]
"메미일~무욱~."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밤에 창문 틈을 비집고 들려오는 외침. 늦은 밤 헛헛한 채로 잠자리에 누운 이들에겐 달콤한 유혹의 소리다.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가 점점 커졌다가 다시 멀어지기 시작하면 결국 참지 못하고 솜이불 속에서 몸을 꺼내 창문 너머로 메밀묵 한 모를 받아든다. 숭덩숭덩 썬 묵 위에 잘게 채 친 김장김치를 올려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려 내면 한겨울밤의 별미가 된다. 일반적으로 묵이란 소리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일 것이다.
돌이나 환갑잔치처럼 가족.친지들이 한꺼번에 모이는 상을 차릴 때는 묵이 빠지지 않는다. 상할 염려가 적어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양념장만 얹어 내면 되기 때문이다. 재료 값도 싸 넉넉하게 쑤어두면 푸짐한 상이 가능한 매력도 작용한 것일 게다. 그러다 보니 밥상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저기 귀퉁이로 밀려다니는 조연급 신세다.
흰 눈 내리는 겨울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 가짓수나 채우는 조연급 반찬으로 인식돼 오던 묵이 요즘 화려하게 변신 중이다. 추운 겨울밤 출출한 속을 달래주던 야식에서 한여름의 더위를 몰아내는 차가운 요리로 업그레이드 됐다. 더 이상 조연급 반찬도 아니다. 주연급 메인 메뉴로 신분이 급상승했다.
구황식품에서 웰빙 슬로 푸드로
25일 오후 3시 서울 자양동에 있는 찜질방 '해피데이' 휴게실. 땀을 흠뻑 흘린 사람들이 식혜나 미역국 대신 묵사발을 한 그릇씩 들고 있다. 도토리묵을 숭덩숭덩 가늘게 썰어 만든 묵국수다. 육수에 얼음이 동동 떠 있고 묵 위에는 새콤하게 익은 김치가 올라가 있다.
땀복이 흥건하게 젖은 채 묵국수를 먹던 김진희(30.서울 자양동)주부는 "땀을 흘린 뒤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 묵만큼 부담 적은 음식이 없다"고 한다. 씹을 필요도 없이 부드럽게 넘어가기 때문에 소화기능이 약해도 걱정 없다는 것. 차가운 국물은 땀을 식히는 것과 동시에 몸에서 빠진 수분과 염분을 보충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음식이다.
실제 묵의 재료는 메밀.도토리.녹두 등 곡류나 견과류로, 단백질이나 식물성 지방 등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풍부하다. 식이섬유.비타민.무기질도 많이 함유하고 있어 피로해소나 소화 기능도 탁월하다. 그런데도 열량은 1인분에 35㎉ 정도라 다이어트 건강식으로 손꼽을 만하다.
서울 교대 근처에 있는 '성북동묵밥'은 묵밥 전문점. 국내산 도토리 가루로 묵을 쑤어 시원하게 먹는 묵밥, 따뜻하게 먹는 묵밥 등 다양한 메뉴를 내놓고 있다. 점심시간이면 20~30분은 줄을 서 기다려야 할 정도다. 이리 되자 개점 2년이 채 안 된 이달 초에는 삼풍백화점 옆에 매장 규모를 대폭 키운 2호점을 열었다. 성북동묵밥의 이정희(43)사장은 묵 음식의 인기에 대해 "묵을 쑤는 정성은 요즘 음식의 화두가 되는 슬로 푸드의 대표적인 예"라며 "과거에는 묵이 구황 식품이었지만 지금은 할머니의 손맛을 느끼는 감성 웰빙 음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요즘은 묵밥.묵국수가 대세
조금만 과거로 돌아가면 묵은 배고팠던 시절 생존을 위해 억지로 먹던 구황 식품이었다. 가을이면 동네 야산에 떨어진 도토리를 다람쥐에 앞서 주워 가루를 만들어 뒀다 끼닛거리가 떨어질 때마다 묵을 쑤어 밥 대신 먹었다. 논농사가 어려운 산간에선 메밀을 심어 쌀의 대용식으로 메밀묵을 쑤었다.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다. 도토리든 메밀이든 물에 불려 떫은 맛을 없앤 뒤 맷돌에 갈아 앙금만을 가려낸다. 이를 풀 쑤듯 끓인 뒤 넓은 그릇에 담아 식히면 굳어 묵이 된다.
요즘 시중 음식점에서 묵은 주로 '묵밥' '묵국수'란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묵밥은 멸치장국으로 만든 국물에 갖은 양념을 하고 도토리묵이나 메밀묵을 숭덩숭덩 썰어 넣어 만든다. 묵부터 건져먹은 뒤 밥을 말아 먹거나 국처럼 밥을 함께 말아 즐기기도 한다. 묵국수는 묵을 보다 가늘게 썰어 냉면처럼 찬 육수에 말아낸 것이다. 고명으로 신 김치, 삶은 계란, 오이 채 등이 오르고 바다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김가루도 얹어진다.
국물 부어 먹는 인스턴트 제품도
백화점이나 수퍼마켓의 식품매장에도 단순한 묵 제품이 아닌 가공 묵요리가 등장하고 있다. ㈜풀무원의 '바로 먹는 도토리묵채 냉(冷)국'이 대표적인 예. 이 제품은 바쁜 현대인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 국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도록 제품화했다. 맛은 쇠고기 동치미맛과 가다랑어 장국맛 등 두 종류. 열량도 인스턴트 라면의 5분의 1 정도인 100~105㎉다.
묵의 화려한 이미지 변신에 대해 음식연구가 박연경(42)씨는 "미니스커트와 핫팬츠 등의 노출 패션이 급부상하면서 올 여름 유난히 저칼로리 건강 음식들이 사랑을 받고 있다"며 "묵 요리가 식감이나 모양새는 다소 떨어지지만 이 같은 사회 분위기를 타고 한동안 인기를 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글=유지상 기자 yjsang@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yjsang@joongang.co.kr
*** 묵 맛집, 바로 여기!
■ 정말 국내산이라니깐 성북동묵밥
서울 강북에서 강남으로 넘어온 '잘나가는' 묵집이다. 주인 부부가 100% 국내산 도토리 가루만을 쓴다고 강조한다. 도토리묵으로 시원한 묵밥, 따뜻한 묵밥, 새싹비빔묵밥 등 다양한 메뉴를 낸다. 값은 각각 6000원. 02-3472-0383.
■늦게 오시면 묵 구경도 못해요 궁중냉면묵밥
묵 쑤는 일이 힘들어 하루에 두 번만 쑨단다. 해물로 뽑은 장국에 도토리묵을 말아 낸다. 냉면도 함께 파는데 오후 5시쯤이면 준비해놓은 묵이 떨어져 묵밥을 먹기 쉽지 않다. 숭인동 창신초등학교 건너편. 5000원. 02-744-4701.
■묵요리로 반세기, 전통의 명가 미진
반세기가 넘도록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전통 묵집. 강원도 평창산 메밀로 묵을 쑨 메밀묵밥이 인기 메뉴. 먹기 좋게 채 썬 묵 위에 신 김치와 오이, 김 등 고명을 얹고 육수를 자작하게 부어 낸다. 광화문 뒷골목에 위치. 5000원. 02-730-6198.
■'찜질방 = 미역국'은 편견 해피데이 찜질방
묵국수란 메뉴로 찜질방의 투톱 메뉴인 식혜와 미역국을 밀어내고 원톱을 구축한 곳. 동치미국물이 들어간 장국에 도토리묵을 가늘게 썰어 넣은 뒤 다진 김치와 오이채 등의 고명을 올려 낸다. 5000원. 지하철 구의역 인근. 02-452-5656.
■마을 전체가 묵집 구즉마을
호남고속도로 북대전 인터체인지에서 신탄진을 향하는 변두리 마을은 온통 묵집이다. 1980년대 초 할머니 한 분이 생계 수단으로 시작한 묵장사가 동네를 바꿔 놓은 것. 도토리묵을 도톰하게 채쳐서 따뜻한 멸치장국에 말아낸다. 잘게 썬 김치와 들깨, 김을 고명으로 얹고 삭힌 풋고추로 간을 해 먹기도 한다. 값은 40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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