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내가 있었네

전보경200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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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조선일보 김한수 기자] “산다는 일이 싱거워지면 나는 들녘으로 바다로 나간다. 그래도 간이 맞지 않으면 섬 밖의 섬 마라도로 간다. 거기서 며칠이고 수평선을 바라본다. 마라도에선 수평선이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이다.(…) 산다는 것이 싱겁다, 간이 맞지 않는다,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마음의 장난이다.” 이 책은 제주도에 반해 ‘제주도의 모든 것을 찍겠다’고 작심하고 85년부터 현지에서 살고 있는 사진작가 김영갑(47)씨의 20년 삶을, 사진과 글로 정리한 일기다. 김씨는 끼니는 굶을망정 매년 한 차례씩 빼놓지 않고 개인전을 열어왔다. 지난 2002년에는 한라산 자락 문 닫은 초등학교를 개조, ‘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한라산의 옛이름)’을 열었다. 그 고생의 와중에 루게릭병을 얻어 지금 5년째 투병 중이다. 그래서 지금은 사진을 촬영하지 못한다. 그동안 매스컴도 많이 탔다. 그러나 작가라면 누구나 어느 순간에는 남들이 씌워놓은 아우라를 걷고 자신의 맨몸뚱이를 보여주고 싶은 법. 이 책은 그런 김씨의 마음을 오롯이 담았다. 책의 1부 ‘섬에 홀려 사진에 미쳐’에는 제주도로 건너와 사진을 하던 정착기 풍찬노숙의 시절을 읊었다. ‘먹여살릴 처자식도 없이 사진만 찍고 있으니 팔자 좋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실제로는 라면조차 살 돈이 없어 굶으면서도 필름과 인화지 값을 아끼던 시절 이야기가 절절하다. ‘수상한’ 노총각에게 섬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간첩으로 몰려 지서에 불려가기 십상이었고 그럴 때마다 어렵사리 구한 셋방을 빼야 했다. 울적할 때면 바느질을 해 커튼이며 이불보를 손수 만든다. 수해로 마을이 온통 물에 잠겨 진흙에 빠져버린 필름을 들고 망연자실한 저자에게 동네 이장이 피해 상황을 묻는다. “인화지, 필름…” 할 때쯤이면 이장은 말을 자른다. “사진이야 다시 찍으면 되지만 주민들 끼니가 걱정”이라며 돌아선다. 물론 고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머니 속에 ‘사랑해요 아저씨!’로 시작하는 쪽지를 쏙 집어넣고 얼굴 빨개져서 뛰어가는 마라도 꼬맹이 아가씨들, “자네 고잔가?”라며 미혼으로 나이먹는 자신을 걱정해주던 노인네들은 살아갈 힘을 준다. 거기에 더해 바다, 바위, 바람, 안개, 비에 관한 이야기와 서정적 사진작품들은 우리가 잘 모르는 제주도의 속살을 우리 앞에 선보인다. 그의 사진은 담백하다. “바다 사진을 찍을 때 배, 새, 바위, 비행기, 사람 그 어떤 것도 끼어들게 하지 않는다”는 고집처럼 바다는 텅 비어있고, 그래서 “제주도에 이런 곳도 있었나” 싶게 느껴지는 ‘김영갑표 사진들’이다. 2부 ‘조금은 더 머물러도 좋을 세상’은 늘 필름과 인화지의 유통 기한만 신경쓰다 덜컥 삶의 유효 기간을 선고받은 후에 보는 세상 이야기다. 어느 날 열어놓은 창으로 날아든 동박새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던 외로움, ‘몸을 움직일 수 있는데 놀고먹는 것은 죄악’이라며 새벽밥 먹고 일 나가는 제주 노인들의 억척을 보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몸을 이끌고 갤러리를 일군 마음가짐이 새겨져 있다. 가장 마지막에서 썼을 듯한 ‘시작을 위한 이야기’에서 저자는 이렇게 절규한다. “이젠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다. 필름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형편이 좋아졌다. 그런데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다. 병이 깊어지면서 삼 년째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다. 끼니 걱정 필름 걱정에 우울해 하던 그때를, 지금은 다만 그리워할 뿐이다. 그때는 몰랐었다. 파랑새를 품안에 끌어안고도 나는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다.” 새삼 내 품에 안고 있는 파랑새를 돌아보게 만드는 아름다운 사진과 글들에 가슴이 저릿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