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 밀려오는 것은 가로등이 둥글게 빛을 떨구는 밤의 플랫폼에 내린 시각이다. 0.1초인가, 0.01초인가... 하여간 플랫폼에 한 발이 닿은 찰나, 어떤 낌새가 스쳐 난 아차하고 생각한다.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 어, 나는 이미 고독의 손바닥에 푹 싸여 있 는 것이다. 고독의 손바닥은 크고 차갑고 얇다. 언제나 그렇다. 나는 왠지 모르게 이솝우화의 나그네 의 외투를 연 상하고 만다.3개월에 한번 정도 이런 밤이 찾아온다. 회사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애인과의 관계가 서먹한 것도 아닌 데, 그것은 정말로 불쑥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까맣게 잊고 있어도 착실히, 어김없이 나타난다.'문 주의'라는 스티커가 붙은 문이 열리고, 땀이 밴 이마에 9월의 밤 공기가 닿는 것과, 갈색 단화가 플랫폼의 돌바닥에 닿는 것과, 내가 아차 하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사람의 신경을 후려치는 듯한 기적이 울려퍼지고 등 뒤에서 문이 덜 커덕 닫힌다. 조금전까지 찌그러져 꾸깃꾸깃한 휴지같이 눌려있던 사람들은 플랫 폼에 내려서자마자 바른크기로 부풀어 원래 모습의 확실한 남자와 여자가 되어 발 빠르게 걸어 간다.그들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밤의 플랫폼에 남겨진다. 차갑고 커다란 손바닥에 푹 싸여...아파트에 도착해 나는 어깨에 맨 가방을 내려놓고, 반지, 귀걸이를 빼고, 손목시계를 풀고, 스타킹을 벗는다. 그리고 커튼을 친다. 벗은 옷을 깔끔하게 옷걸이에 걸고 나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다. 몸이 무겁고, 머리도 무거워 빈사상태다. 데굴데굴 굴러본다. 고독은 줄지 않는다. 아앗, 우웃 하고 신음해본다. 고독은 줄지 않는다. 팔다리를 파닥거려 본다. 고독은 1그램도 줄지 않는다." 바보같아. "나는 얼굴에 흩어져내린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올리며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우유팩에 바로 입을 대고 마신다. 제대로 컵에 따라 마시기보다는 고독하지 않은 기분이 들기에.에미는 집에 없었다. 자동 응답기의 깍듯한 말씨의 녹음을 끝까지 듣고나서는 나는 그대로 수화기를 놓았다. 마치코도 집에 없었다. 아이도 집에 없었다. 히로코에게 걸자 두번째 신호에 갑자기 본인이 받아, 나는 황급히 전화를 끊는다. 히로코가 여덟시에 집에 있다니 드문 일이다. 나는 주소록을 뒤적여 다른 아직 귀가하지 않았을 것같은 사람이 없 는지생각한다. 이렇게 전화를 마구 걸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 없는 밤은 누군가와 이야기하면 할수록 고독해지는 것이다.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혼자 방에서 멍하니 TV라도 켜서 떠들썩한 소리를 흘리면 한층 고 독해지는 것과 같다. 누구라도 천지신명에 맹세코 누구라도 타인의 고독은 구원할 수 없 다.세면대에 가서 콘택트 렌즈를 뺀다. 거울에 비친 흐릿한 얼굴. 나는 내뒤에 있는 교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교지는 팔로 나를 감싼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쉰다. 양팔에 힘을 주며 - . 교지는 아직 집에 오지 않았을 것이고, 교지의 자동응답기는 언제나 상당히 재미있다. 배경 음악으로 우에키 히토시의 음악이 나온다. 그렇지만 나는 교지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 이럴 때 애인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 아무런도움도 되지 않는다.젤 타입의 클렌징으로 화장을 지우고, 세심하게 얼굴을 씻으며 나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첨벙첨벙 물을 튀기며, 이따금씩 경련을 일으키듯 오열하면서 나는 언제까지고 얼굴을 계속 씻는다.예컨대, 내가 교지를 더욱 열렬히, 마음 속 깊이, 정말 죽도록 사랑 하고 있으면 문제는 없다. 지금 교지의 회사에 전화하면 분명 함께 식사하자고 할거다. 교지는 좋은 사람이지만 왜 열렬히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왜, 둘 다 고독이 짙어지곤 하는 것일까.가령 내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욱 사랑하고 있으면 좋겠다. 더 솔직한, 더 착한 딸이면 좋겠다. 집까지는 전철로 30분. 전화로 운좋게 동생을 붙잡으면 차로 데리러 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리운 식탁에 서 네명이서 식사할 수 있다. 왜일까? 도대체 왜, 그게 이렇게 싫은거지? 지긋지긋하다. 넌더리가 난다. 농담이 아니다. 혼자 있는 게 아직은 더 낫다.뺨의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얼굴을 씻고, 두툼한 수건에 얼굴을 묻 으며,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는 그런 다음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 다.이런 밤은 파를 썬다. 잘게, 잘게, 정말로 잘게. 그러면 아무리 울어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해결된다. 파의 색, 파의 모양, 파의 냄새, 손 끝에 보들보들하게 느껴지는 파 표면의 감촉. 파를 써는데 다시 눈물이 밀려온다. 눈앞이 엷은 녹색으로 흐려진다. 나는 울면서 파를 썬다. 밥솥의 스위치를 켜고 파를 썰고, 된장국을 끓이며 파를 썰고, 두부 를 자르고 또 파를 썬다. 일심불란하게 마치 기도인지 뭔지처럼. 누군가에게 혼이나면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을까? 난 마음을 고쳐먹고 싶은 것일까?뭘 어떻게.작은 식탁을 차리며 나의 고독은 나만의 것이라 생각했다. 흐느끼며 젓가락을 놓고 간장 종지를 꺼낸다. 산더미처럼 썬 파를 된장국에 잔뜩 넣고, 찬 날두부에도 잔뜩 끼얹 는다. 내일이 되면 상쾌한 얼굴로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회사에 갈 것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나는 울음을 그치고 밥을 먹는다.
파를썰다<단편>-에쿠니가오리
고독이 밀려오는 것은 가로등이 둥글게 빛을 떨구는 밤의 플랫폼에
내린 시각이다.
0.1초인가, 0.01초인가... 하여간 플랫폼에 한 발이 닿은 찰나, 어떤
낌새가 스쳐 난 아차하고 생각한다.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 어, 나는 이미 고독의 손바닥에 푹 싸여 있
는 것이다.
고독의 손바닥은 크고 차갑고 얇다.
언제나 그렇다. 나는 왠지 모르게 이솝우화의 나그네 의 외투를 연
상하고 만다.
3개월에 한번 정도 이런 밤이 찾아온다.
회사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애인과의 관계가 서먹한 것도 아닌
데, 그것은 정말로 불쑥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까맣게 잊고 있어도 착실히, 어김없이 나타난다.
'문 주의'라는 스티커가 붙은 문이 열리고, 땀이 밴 이마에 9월의 밤
공기가 닿는 것과, 갈색 단화가 플랫폼의 돌바닥에 닿는 것과, 내가
아차 하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사람의 신경을 후려치는 듯한 기적이 울려퍼지고 등 뒤에서 문이 덜
커덕 닫힌다.
조금전까지 찌그러져 꾸깃꾸깃한 휴지같이 눌려있던 사람들은 플랫
폼에 내려서자마자 바른크기로 부풀어 원래 모습의 확실한 남자와
여자가 되어 발 빠르게 걸어 간다.
그들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밤의 플랫폼에 남겨진다.
차갑고 커다란 손바닥에 푹 싸여...
아파트에 도착해 나는 어깨에 맨 가방을 내려놓고, 반지, 귀걸이를
빼고, 손목시계를 풀고, 스타킹을 벗는다.
그리고 커튼을 친다.
벗은 옷을 깔끔하게 옷걸이에 걸고 나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진
다.
몸이 무겁고, 머리도 무거워 빈사상태다.
데굴데굴 굴러본다. 고독은 줄지 않는다.
아앗, 우웃 하고 신음해본다. 고독은 줄지 않는다.
팔다리를 파닥거려 본다. 고독은 1그램도 줄지 않는다.
" 바보같아. "
나는 얼굴에 흩어져내린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올리며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우유팩에 바로 입을 대고 마신다.
제대로 컵에 따라 마시기보다는 고독하지 않은 기분이 들기에.
에미는 집에 없었다. 자동 응답기의 깍듯한 말씨의 녹음을 끝까지
듣고나서는 나는 그대로 수화기를 놓았다.
마치코도 집에 없었다. 아이도 집에 없었다.
히로코에게 걸자 두번째 신호에 갑자기 본인이 받아, 나는 황급히
전화를 끊는다.
히로코가 여덟시에 집에 있다니 드문 일이다.
나는 주소록을 뒤적여 다른 아직 귀가하지 않았을 것같은 사람이 없
는지생각한다.
이렇게 전화를 마구 걸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 없는 밤은 누군가와
이야기하면 할수록 고독해지는 것이다.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혼자 방에서 멍하니 TV라도 켜서 떠들썩한 소리를 흘리면 한층 고
독해지는 것과 같다.
누구라도 천지신명에 맹세코 누구라도 타인의 고독은 구원할 수 없
다.
세면대에 가서 콘택트 렌즈를 뺀다.
거울에 비친 흐릿한 얼굴.
나는 내뒤에 있는 교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교지는 팔로 나를 감싼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쉰다. 양팔에 힘을 주며 - .
교지는 아직 집에 오지 않았을 것이고, 교지의 자동응답기는 언제나
상당히 재미있다.
배경 음악으로 우에키 히토시의 음악이 나온다.
그렇지만 나는 교지에게 전화를 걸 수 없다.
이럴 때 애인은 사태를 악화시킬 뿐, 아무런도움도 되지 않는다.
젤 타입의 클렌징으로 화장을 지우고, 세심하게 얼굴을 씻으며 나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첨벙첨벙 물을 튀기며, 이따금씩 경련을 일으키듯 오열하면서 나는
언제까지고 얼굴을 계속 씻는다.
예컨대, 내가 교지를 더욱 열렬히, 마음 속 깊이, 정말 죽도록 사랑
하고 있으면 문제는 없다.
지금 교지의 회사에 전화하면 분명 함께 식사하자고 할거다.
교지는 좋은 사람이지만 왜 열렬히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왜, 둘 다 고독이 짙어지곤 하는 것일까.
가령 내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욱 사랑하고 있으면 좋겠다.
더 솔직한, 더 착한 딸이면 좋겠다.
집까지는 전철로 30분. 전화로 운좋게 동생을 붙잡으면 차로 데리러
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리운 식탁에 서 네명이서 식사할 수 있다.
왜일까? 도대체 왜, 그게 이렇게 싫은거지?
지긋지긋하다. 넌더리가 난다. 농담이 아니다.
혼자 있는 게 아직은 더 낫다.
뺨의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얼굴을 씻고, 두툼한 수건에 얼굴을 묻
으며, 나는 잠시 숨을 멈추고는 그런 다음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
다.
이런 밤은 파를 썬다. 잘게, 잘게, 정말로 잘게.
그러면 아무리 울어도 나를 잃어버리지 않고 해결된다.
파의 색, 파의 모양, 파의 냄새, 손 끝에 보들보들하게 느껴지는 파
표면의 감촉.
파를 써는데 다시 눈물이 밀려온다.
눈앞이 엷은 녹색으로 흐려진다.
나는 울면서 파를 썬다.
밥솥의 스위치를 켜고 파를 썰고, 된장국을 끓이며 파를 썰고, 두부
를 자르고 또 파를 썬다.
일심불란하게 마치 기도인지 뭔지처럼.
누군가에게 혼이나면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을까?
난 마음을 고쳐먹고 싶은 것일까?
뭘 어떻게.
작은 식탁을 차리며 나의 고독은 나만의 것이라 생각했다.
흐느끼며 젓가락을 놓고 간장 종지를 꺼낸다.
산더미처럼 썬 파를 된장국에 잔뜩 넣고, 찬 날두부에도 잔뜩 끼얹
는다.
내일이 되면 상쾌한 얼굴로 아무일도 없었다는듯 회사에 갈 것이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나는 울음을 그치고 밥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