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깊은 가을 ― 바람, 비, 그리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첫번 석탄을 샀다. 따뜻한 속바지와...... 곧, 따끈한 군밤을 파는 할아버지의
구르마가 레오폴드 가에 보일 것이다. 새빨간 사과가 4파운드에 85페니, 버터, 배가
3파운드에 85페니, 레기나 포도가 2파운드에 1마르크 10페니......
올해는 실과의 풍년이다.
결혼이란 확실이 인간을 좁힌다. 벽난로 앞의 단란과, 의*식*주의 안정과,
안락 이외에 아무 엠비션도 안 남기고 만다. 둘만의 평안과 행복,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남기고 만다.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인류의 미래, 원자(Atom),
비행기, 달 로켓, 대만의 앞날, Papst의 서거...... 이 모든 것이 의식의 가장
바깥을 가깝게 스쳐 지나가 버리고 아무것도 안 남고 만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리고 나는 그것을 결코 자랑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쿠션 위에 길게 몸을 펴고 누워 있고 싶어하는 고양의 본능 이외에
무엇이라! 이기(Ego) ― 여자의 작고 비소한 이기심 ― 날카로운 손톰과 교태.
자기 자신에게도 교태와 분장 없이는 허할 수 없는 비본질적인 존재가 여자다.
여자의 생은 모방이지, 참생(生)은 아니다. 여자는 자기를 잊을 수도, 초월할 수도
없으므로 위대함에는 부적당하다. 커다란 우(愚), 위대한 무심, 부작위가 너무나
여자에게는 결핍되어 있다. 생활에의 작은 기술에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참과는
더 멀어지고 본질을 등지게 되는 것이 여자다.
따라서 위대한 사랑조차도 여자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기를 타인 속에
초극하고 또 세계 속에 초극해 가야 하는 것이 참사랑이면,
여자는 사랑에는
너무 본능이 앞서는 종족인 것 같다.
나 자신 속에서 발견한 여자가 나를 절망케 한다.
일생에 한 번. 한 개라도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
그것을 위해서 살아나간다.
모래를 씹는 것 같은,
또는 폭풍우가 아프게 뼈까지 때리는 것 같은......,
그러나 때로는 은빛 안개에 잠긴 낙엽에 깔린 아침 길과 같은,
또는 파란 하늘에
둥둥 분홍 구름이 떠 있는 황혼과도 같은......,
이런 여러 개의 수많은 순간들로
구성돼 있는 나의 삶은 결코 쉽지만도 또는 즐겁지만도 않다.
그러나 나는 이제
죽음을 부르게 할 생각은 없다.
싹이 트고 있는 나무의 기둥처럼 나의 몸에는 생의 의지,
아니 단순한 생이
시작되었다.
밤에 문득 달 로켓을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언제까지든 실패하기를 빈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고,
또 침묵에 갇혀 있는 달이기 때문에 이처럼 사람들이
동경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저 차가운 은빛의 월광(月光), 창백한 얼굴의 달을
보라, 나에겐, 그리고 누구에게도 영원히 신비롭게 남아 있어 주길!
과학이란
쓸데 없는 간섭을 하고 기계를 주무르며
인간의 꿈을 파괴하고 만다는 대명사인가!
나는 알고 싶지도 않다. 달나라에 가고 싶지도 않다.
그저 그리워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꿈을 갖고 싶다.
10월 20일
암흑의 장막이 하늘을 덮고 비가 그칠 새 없이 창문을 두들긴다. 벽난로의
불은 꺼지고 말았다. 독서에 피곤해진 눈을 쉬게 하려고 책상 앞에 하염없이
앉았노라니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절절한 고독감뿐. 이웃 방에서 도란도란 들려
오는 독일어도 나의 쓸쓸한 심정을 한층 복돋을 뿐이다. 마치 두더쥐가 땅속의
온기를 탐내듯, 인간은 한 줌의 친절함과 인정의 필요를 느끼는 생물이었던가,
모든 것이 나에게 무관심하구나, 하는 생각은 아무래도 견디기 어려운 서러움이다. 따스함을, 이해를, 건강을 갖고 싶다. 살고 싶은 의욕을 갖고 싶다.
10월 21일
볼가강
루이 앙드레 살로메
너 비록 멀리 있어도 난 너를 볼 수 있다.
너 비록 멀리 있어도 넌 내게 머물러 있다.
표백될 수 없는 현재처럼, 나의 풍경(風景)처럼,
내 생명을 감싸고 있구나.
네 기슭에서 내 한번도 쉬지 않았더라도
네 광막함을 난 알 것만 같다.
꿈결(Traumeflut)은 항상 네 거대한 고독에
날 상륙시킬 것만 같다.
울기는 쉽지
루이스 휘른베르크
울기는 쉽지, 눈물을 흘리기야
날아서 날아나는 시간처럼 쉽지.
그러나 웃기는 어려운 것.
찢어지는 가슴 속에 웃음을 짓고
이를 꼭꼭 악물고
그리고 돌과 먼지와 벽돌 조각과
끝없이 넘쳐나는 눈물의 바다 속에서
웃음 짓고 믿으며
우리가 짓는 집에 방을 만들어 나가면,
그리고 남을 믿으면,
주위에서 지옥은 사라진다.
웃음은 어려운 것.
그러나 웃음은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처럼 위대한 것.
전혜린의 그림
11월 5일
돈이 떨어지다. 배는 다소 고프지만 나는 즐겁다.
오늘은 가을 하늘이 멋이 있었고,
나의 머리는 니체와 루 생각으로 가득 찼으니까......
나의 텅 빈, 추운 방에서 나는 벌레처럼 틀어박혀서 나의 꿈을
기르고 싶다.
닫힌 문과 마음속에 끝없이 펼쳐 가는 환상의 세계의 크기와! 니체, 루, 릴케,
튜린, 질스 마리아......
11월 13일
밤!
신경이 불협화음의 심포니를 쉴 새 없이 연주하고 있다.
보들레르의 의
시에도 표현되지 않았던 그 닥치는 대로 부수고 싶은 심정이다.
암흑 속에서
메피스토(Mephisto)에서 오는 무드인가. 틀림없이......
'모든 불행의 시초는 부모 자식이 된 인연에서 시작된다'는 아쿠타가와(芥川)의
말이 머리속을 맴돈다.
그러나 나는? 나는?
내가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자격이 있을까?
내겐 이미 없다.
전혜린
Drugs
by Oliver Scarff
울기는 쉽지
10월 15일 깊은 가을 ― 바람, 비, 그리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첫번 석탄을 샀다. 따뜻한 속바지와...... 곧, 따끈한 군밤을 파는 할아버지의 구르마가 레오폴드 가에 보일 것이다. 새빨간 사과가 4파운드에 85페니, 버터, 배가 3파운드에 85페니, 레기나 포도가 2파운드에 1마르크 10페니...... 올해는 실과의 풍년이다. 결혼이란 확실이 인간을 좁힌다. 벽난로 앞의 단란과, 의*식*주의 안정과, 안락 이외에 아무 엠비션도 안 남기고 만다. 둘만의 평안과 행복,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남기고 만다.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인류의 미래, 원자(Atom), 비행기, 달 로켓, 대만의 앞날, Papst의 서거...... 이 모든 것이 의식의 가장 바깥을 가깝게 스쳐 지나가 버리고 아무것도 안 남고 만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리고 나는 그것을 결코 자랑으로는 생각지 않는다. 쿠션 위에 길게 몸을 펴고 누워 있고 싶어하는 고양의 본능 이외에 무엇이라! 이기(Ego) ― 여자의 작고 비소한 이기심 ― 날카로운 손톰과 교태. 자기 자신에게도 교태와 분장 없이는 허할 수 없는 비본질적인 존재가 여자다. 여자의 생은 모방이지, 참생(生)은 아니다. 여자는 자기를 잊을 수도, 초월할 수도 없으므로 위대함에는 부적당하다. 커다란 우(愚), 위대한 무심, 부작위가 너무나 여자에게는 결핍되어 있다. 생활에의 작은 기술에 익숙하면 익숙할수록 참과는 더 멀어지고 본질을 등지게 되는 것이 여자다. 따라서 위대한 사랑조차도 여자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기를 타인 속에 초극하고 또 세계 속에 초극해 가야 하는 것이 참사랑이면, 여자는 사랑에는 너무 본능이 앞서는 종족인 것 같다. 나 자신 속에서 발견한 여자가 나를 절망케 한다. 일생에 한 번. 한 개라도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 그것을 위해서 살아나간다. 모래를 씹는 것 같은, 또는 폭풍우가 아프게 뼈까지 때리는 것 같은......, 그러나 때로는 은빛 안개에 잠긴 낙엽에 깔린 아침 길과 같은, 또는 파란 하늘에 둥둥 분홍 구름이 떠 있는 황혼과도 같은......, 이런 여러 개의 수많은 순간들로 구성돼 있는 나의 삶은 결코 쉽지만도 또는 즐겁지만도 않다. 그러나 나는 이제 죽음을 부르게 할 생각은 없다. 싹이 트고 있는 나무의 기둥처럼 나의 몸에는 생의 의지, 아니 단순한 생이 시작되었다. 밤에 문득 달 로켓을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언제까지든 실패하기를 빈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고, 또 침묵에 갇혀 있는 달이기 때문에 이처럼 사람들이 동경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저 차가운 은빛의 월광(月光), 창백한 얼굴의 달을 보라, 나에겐, 그리고 누구에게도 영원히 신비롭게 남아 있어 주길! 과학이란 쓸데 없는 간섭을 하고 기계를 주무르며 인간의 꿈을 파괴하고 만다는 대명사인가! 나는 알고 싶지도 않다. 달나라에 가고 싶지도 않다. 그저 그리워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꿈을 갖고 싶다. 10월 20일 암흑의 장막이 하늘을 덮고 비가 그칠 새 없이 창문을 두들긴다. 벽난로의 불은 꺼지고 말았다. 독서에 피곤해진 눈을 쉬게 하려고 책상 앞에 하염없이 앉았노라니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절절한 고독감뿐. 이웃 방에서 도란도란 들려 오는 독일어도 나의 쓸쓸한 심정을 한층 복돋을 뿐이다. 마치 두더쥐가 땅속의 온기를 탐내듯, 인간은 한 줌의 친절함과 인정의 필요를 느끼는 생물이었던가, 모든 것이 나에게 무관심하구나, 하는 생각은 아무래도 견디기 어려운 서러움이다. 따스함을, 이해를, 건강을 갖고 싶다. 살고 싶은 의욕을 갖고 싶다. 10월 21일 볼가강 루이 앙드레 살로메 너 비록 멀리 있어도 난 너를 볼 수 있다. 너 비록 멀리 있어도 넌 내게 머물러 있다. 표백될 수 없는 현재처럼, 나의 풍경(風景)처럼, 내 생명을 감싸고 있구나. 네 기슭에서 내 한번도 쉬지 않았더라도 네 광막함을 난 알 것만 같다. 꿈결(Traumeflut)은 항상 네 거대한 고독에 날 상륙시킬 것만 같다. 울기는 쉽지 루이스 휘른베르크 울기는 쉽지, 눈물을 흘리기야 날아서 날아나는 시간처럼 쉽지. 그러나 웃기는 어려운 것. 찢어지는 가슴 속에 웃음을 짓고 이를 꼭꼭 악물고 그리고 돌과 먼지와 벽돌 조각과 끝없이 넘쳐나는 눈물의 바다 속에서 웃음 짓고 믿으며 우리가 짓는 집에 방을 만들어 나가면, 그리고 남을 믿으면, 주위에서 지옥은 사라진다. 웃음은 어려운 것. 그러나 웃음은 삶.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처럼 위대한 것. 전혜린의 그림 11월 5일 돈이 떨어지다. 배는 다소 고프지만 나는 즐겁다. 오늘은 가을 하늘이 멋이 있었고, 나의 머리는 니체와 루 생각으로 가득 찼으니까...... 나의 텅 빈, 추운 방에서 나는 벌레처럼 틀어박혀서 나의 꿈을 기르고 싶다. 닫힌 문과 마음속에 끝없이 펼쳐 가는 환상의 세계의 크기와! 니체, 루, 릴케, 튜린, 질스 마리아...... 11월 13일 밤! 신경이 불협화음의 심포니를 쉴 새 없이 연주하고 있다. 보들레르의 의 시에도 표현되지 않았던 그 닥치는 대로 부수고 싶은 심정이다. 암흑 속에서 메피스토(Mephisto)에서 오는 무드인가. 틀림없이...... '모든 불행의 시초는 부모 자식이 된 인연에서 시작된다'는 아쿠타가와(芥川)의 말이 머리속을 맴돈다. 그러나 나는? 나는? 내가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자격이 있을까? 내겐 이미 없다. 전혜린 Drugs by Oliver Scar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