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지갑을여는 공식..

김영종200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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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지갑을여는 공식..

대박영화는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어떤 요소가 1천만 혹은 그에 가까운 관객의 감성을 자극해 그들의 지갑을 열도록 만들었을까.

1천만 고지를 향해 급상승세를 타고 있는 ‘괴물’을 비롯해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친구’ ‘웰컴 투 동막골’ 등 역대 흥행순위 5위에 드는 영화를 대상으로 우리 사회가 함께 감동하는 공통 코드를 추출해본다.

#가족

‘피는 물보다 진하다.’ 가족주의는 실패확률이 가장 적은 안전판이다. 가족 이기주의, 가부장적 권위주의 등 여러 모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 뜨거운 가족애 앞에서 콧날이 시큰해지는 게 한국민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괴물’에서 가족주의는 빛을 발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석(장동건)은 6·25전쟁에 징집된 동생 진태(원빈)를 살리기 위해 전선에 뛰어든다. ‘괴물’의 가족은 괴물에게 잡혀간 딸·손녀·조카인 현서(고아성)를 위해 힘을 합쳐 사투를 벌인다. 미국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동원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 임무는 가족의 손에 맡겨져 있다. 권력과 체제에 대한 불신과 결합된 가족주의는 더욱 극적이고 강력하다. ‘괴물’에서 끝내 딸을 빼앗긴 아버지 강두(송강호)가 고아소년을 거둠으로써 새 가족을 이루는데 이 장치가 그나마 가족주의를 휴머니즘으로 발전시키는 단초를 마련한다. 한때 여성주인공의 불륜영화에 등장했던 개인의 욕망이 가정의 울타리를 부수는 듯했지만 가족주의의 생명력은 잡초처럼 끈질기다.

#국가

민족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었던 시대, 국가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개개인의 삶을 서슴없이 짓밟고 억압할 수 있었던 시대. 그런 시대에 대한 혐오와 부정, 혹은 옹호와 변명은 민주화 이후 팽팽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는 전쟁과 냉전시대의 이면에서 희생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본다. 진석은 국군과 인민군을 오가면서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흩뜨린다. 강인찬(설경구)을 비롯한 ‘실미도’의 684부대원들의 경우 그들이 실제로 맞서 싸운 적은 북한군이 아니라 권력의 핵심인 청와대와 그 체제를 유지하는 군대의 기간병들이다. ‘괴물’ 역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내셔널리즘의 기본명제를 부정한다. 오히려 경찰과 군대는 괴물로부터 현서를 구하고자 하는 가족을 가로막는다. ‘웰컴 투 동막골’은 전쟁의 화염 속에서 인민군 장교 리수화(정재영)와 국군 장교 표현철(신하균)이 함께 평화를 유지하는 유토피아를 그림으로써 국가 이전 부락 공동체의 삶을 회복시킨다. 국가와 권력에 대한 논쟁은 대박영화를 영화 이상의 사회적 의제로 발전시키는데 한몫 했다.

#남성

대박영화에 여성의 자리는 없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영신(이은주)이 치열한 전쟁을 비껴난 과거의 행복을 상징하는 것이나 ‘웰컴 투 동막골’의 여일(강혜정)이 이념으로 갈라진 남성들을 동막골로 안내하는 산골처녀, 즉 자연으로 그려지는 것은 명백히 반여성적이다. ‘친구’는 대표적인 마초영화다. 어린 시절 네 소년이 쌓은 우정은 성년이 된 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남자들에게 일종의 이상향인데 이는 일부 마니아 관객들로 하여금 준석(유오성)이 동수(장동건)를 죽였다는 사실마저 부정하게 만든다. 이 영화의 진숙(김보경) 역시 준석과 상택(서태화) 사이의 물물교환 대상이다. 대박영화의 남성중심주의는 남성관객을 스크린 앞으로 끌어들이는데 기여한 일등공신이다. 단 ‘왕의 남자’는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이라는 두 광대의 동성애를 다룸으로써 이성애에 기반한 주류 질서를 위반한다.

#비주류

‘괴물’에서 강두네 가족은 돈 없고 빽 없는 소시민의 전형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고전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를 연상시키는 강두의 고문 장면은 그의 무기력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자폭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을 박탈당한 ‘실미도’ 부대원들이 역사의 수면위로 떠오른 것도 냉전과 근대화에서 소외된 비주류의 한맺힌 정서를 대변한다. ‘왕의 남자’인 공길과 장생이 부당한 권력과 체제에 희생당하는 내용은 권력놀음 속에서 최소한의 삶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우리 사회 비주류를 떠올리게 한다. ‘친구’의 준석과 동수는 조직폭력배 두목, 장의사라는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정당한 양지의 삶을 살아가기에는 애초부터 부적합한 인물들이다. 비주류의 삶이 영화를 통해 생명력을 얻는 과정은 현대사의 왜곡과 불평등에 대한 잠재적 불만을 반영한다. 이들의 불우한 삶, 그리고 장렬한 패배에서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향수

‘하늘의 별이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던 시대는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현시대에 혼란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과거는 늘 향수의 대상이다. 과거의 추억이란 늘 사후적으로 윤색되는 법이며 거기에는 현재의 열망이 투사돼 있다. ‘친구’의 검정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이 부산시내를 달리는 장면, ‘태극기 휘날리며’의 가족들이 작은 국수집을 운영하는 장면, ‘웰컴 투 동막골’의 인민군과 국군, 그리고 순진하고 인정 많은 마을 사람들이 바깥세상과 상관없이 멧돼지를 잡아다가 바비큐 파티를 벌이는 장면은 한국 영화 관객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다. 영화가 꿈이지만 그 영화 속에서 다시 꿈을 꾼다. 단란했던 가족, 다정했던 친구, 정을 나누는 이웃이 그것이다.

#비극

경박단소의 디지털 사회를 살아가는 관객들이 비극을 선호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완전한 대체물이 아님을 대박영화의 공통된 비장미가 증명한다. ‘태극기를 휘날리며’에서 동생을 살리고자 자신의 몸을 던지는 형, ‘웰컴 투 동막골’에서 마을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폭격 지점을 의도적으로 잘못 유도하는 인민군과 국군 장교, 권력을 쫓기보다는 다시 태어나도 자유로운 광대의 삶을 살고자 하는 ‘왕의 남자’의 두 주인공. 모두 관객이 공감하는 인물의 몰락이 가져오는 비극의 정서를 전하면서 참된 인간을 그리워하는 사회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주인공을 자살에 가까운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극적 상황은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