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구하기가 여려운 관계로 "칼 폰 클라우제비츠"께서 만든"전쟁론"의 표지로 대체하였습니다.
이분은 제 맹목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 외 다수中)
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6월 1일 태어나 1831년 11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클라우제비츠의 할아버지는 할레대학의 신학교수였으며 아버지는 7년전쟁에 참전했던 프로이센 장교였다. 할아버지로부터는 탁월한 정신과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버지로부터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장교들을 보면서 생활할 수 있었던 기회를 얻었다.
1792년 12세에 군에 입대하여 1793년 13세에 사관생도로서 프랑스군을 라인란트에서 축출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마인츠 전투에 참전하였다. 1795년에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프로이센이 제1차 대프랑스동맹에서 탈퇴하고 바젤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패배할 때 까지 11년간 요새방어부대에 근무하면서 대위로 진급하였다.
1801년 베를린 전쟁학교에 입교하여 3년간 전쟁학교에 다녔으며 이 때 교장이었던 사른호르스트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샤른호르스트는 클라우제비츠에게 전쟁연구에 매진하도록 하였으며 클라우제비츠의 운명을 바꾼 인물이었다. 1804년 전쟁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황태자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된다. 이 때 나폴레옹이 1804년 황제로 등극할 때까지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1806년 클라우제비츠는 아우구스트황태자와 함께 아우어슈테트전투에 잠전하여 패배하게 된다. 그 후 프랑스의 포로가 되어 1807년까지 10개월간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었다.
1807년 탈지드 평화조약으로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르스트의 보좌관으로 프로이센군를 개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1908년 부터 1816년까지 클라우제비츠는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프로이센 패배의 원인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게 된다. 이 때 전쟁론의 기초가 닦아진다. 1809년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군에 복귀하였으며 샤른호르스트의 추천으로 장군참모장교로 임명되었으며 1810년 20월 30일 소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그리고 베를린의 전쟁학교 교관이면서 황태자와 그의 동생-빌헤름 1세-에게 전쟁학을 강의하는 임무를 맞게 되고 같은 해에 마리와 결혼하게 된다.
1812년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자 프로이센을 떠나 러시아군에 복무하게 된다. 1812년에는 러시아군의 대령이자 참모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된다. 프랑스가 모스크바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는 동안의 참사를 직접 지켜 보게 된다.
1813년 3월 대 프랑스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프로이센군에 복귀를 원했으나 프리드리히 벨헤름 3세는 이것을 거부하게 된다. 1813년에 다국적군 발모덴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한직이었다.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복귀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자 클라우제비츠는 제3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100일 천하로 끝난 뒤 1818년 38세의 나이에 소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1819년 보수반동세력의 득세로 한직으로 밀려나 베를린 전쟁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젊은 장군이었던 클라우제비츠는 이 때 전쟁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였으며 1806년 이후의 프랑스 역사,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역과 워털루 전역의 역사, 정치 관련 문제 등을 주제로 하여 많은 논문을 썼다. 클라우제비츠는 51세 되던 1831년 11월 16일 브레슬라우에서 콜레라로 사망하였다.
그는 당시 폴란드가 러시아 황제의 통치에 반대하여 봉기한 사건이 일어난 후 1831년 초 71세의 나이에 프로이센 포젠지역의 감시군 총시령관 이었던 그나이제나우의 참모장으로서 있었다. 그나이제나우 역시 1831년 8월 23일 콜레라로 사망하게 된다.
클라우제비츠의 사망이후 그의 아내이면서 전쟁론 집필에 동참했던 아내인 마리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전쟁론은 3부 8편 125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클라우제비츠의 사망 후인 1832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전쟁론은 미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6월 1일 태어나 1831년 11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클라우제비츠의 할아버지는 할레대학의 신학교수였으며 아버지는 7년전쟁에 참전했던 프로이센 장교였다. 할아버지로부터는 탁월한 정신과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버지로부터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장교들을 보면서 생활할 수 있었던 기회를 얻었다.
1792년 12세에 군에 입대하여 1793년 13세에 사관생도로서 프랑스군을 라인란트에서 축출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마인츠 전투에 참전하였다. 1795년에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프로이센이 제1차 대프랑스동맹에서 탈퇴하고 바젤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패배할 때 까지 11년간 요새방어부대에 근무하면서 대위로 진급하였다.
1801년 베를린 전쟁학교에 입교하여 3년간 전쟁학교에 다녔으며 이 때 교장이었던 사른호르스트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샤른호르스트는 클라우제비츠에게 전쟁연구에 매진하도록 하였으며 클라우제비츠의 운명을 바꾼 인물이었다. 1804년 전쟁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황태자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된다. 이 때 나폴레옹이 1804년 황제로 등극할 때까지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1806년 클라우제비츠는 아우구스트황태자와 함께 아우어슈테트전투에 잠전하여 패배하게 된다. 그 후 프랑스의 포로가 되어 1807년까지 10개월간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었다.
1807년 탈지드 평화조약으로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르스트의 보좌관으로 프로이센군를 개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1908년 부터 1816년까지 클라우제비츠는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프로이센 패배의 원인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게 된다. 이 때 전쟁론의 기초가 닦아진다. 1809년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군에 복귀하였으며 샤른호르스트의 추천으로 장군참모장교로 임명되었으며 1810년 20월 30일 소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그리고 베를린의 전쟁학교 교관이면서 황태자와 그의 동생-빌헤름 1세-에게 전쟁학을 강의하는 임무를 맞게 되고 같은 해에 마리와 결혼하게 된다.
1812년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자 프로이센을 떠나 러시아군에 복무하게 된다. 1812년에는 러시아군의 대령이자 참모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된다. 프랑스가 모스크바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는 동안의 참사를 직접 지켜 보게 된다.
1813년 3월 대 프랑스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프로이센군에 복귀를 원했으나 프리드리히 벨헤름 3세는 이것을 거부하게 된다. 1813년에 다국적군 발모덴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한직이었다.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복귀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자 클라우제비츠는 제3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100일 천하로 끝난 뒤 1818년 38세의 나이에 소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1819년 보수반동세력의 득세로 한직으로 밀려나 베를린 전쟁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젊은 장군이었던 클라우제비츠는 이 때 전쟁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였으며 1806년 이후의 프랑스 역사,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역과 워털루 전역의 역사, 정치 관련 문제 등을 주제로 하여 많은 논문을 썼다. 클라우제비츠는 51세 되던 1831년 11월 16일 브레슬라우에서 콜레라로 사망하였다.
그는 당시 폴란드가 러시아 황제의 통치에 반대하여 봉기한 사건이 일어난 후 1831년 초 71세의 나이에 프로이센 포젠지역의 감시군 총시령관 이었던 그나이제나우의 참모장으로서 있었다. 그나이제나우 역시 1831년 8월 23일 콜레라로 사망하게 된다.
클라우제비츠의 사망이후 그의 아내이면서 전쟁론 집필에 동참했던 아내인 마리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전쟁론은 3부 8편 125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클라우제비츠의 사망 후인 1832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전쟁론은 미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추가 : 현대전쟁의 기반을 만들었던 "전쟁론"의 저자로 위의 설명을 잘 읽어보셨지만 프로이센의 출신이었습니다. 즉 현재의 "독일"입니다. 요즘에서의 "전쟁론"은 "육군사관학교"나 "해군사관학교"생들이라면 필독할정도로 "필독서"로 불립니다. 그 외에는 전쟁이나 전술에 관심이 많은 매니아층 위주로 많이 읽히지만 이 "전쟁론"은 구하기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죠.. 직접구하자면 서울의 유명서점에 가야 있을정도이고 지방에 있는 대형서점이라도 이책은 없습니다. 전술에 관심이 있으신분들이라면 필독하면 좋을정도로 손자병법과 쌍웅을 이룰정도로 불리우는 전술서입니다. 이러한 기반을 만들어 내었던 분이 바로 "칼 폰 클라우제비츠"이구요. 아참 이분의 스승은 "샤른호르스트"로 모 게임에서는 동일인물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스승이자 "샤른호르스트"또한 상당한 전술가로 불리우던 인물입니다.
칼 폰 클라우제비츠
사진은 구하기가 여려운 관계로 "칼 폰 클라우제비츠"께서 만든"전쟁론"의 표지로 대체하였습니다.
이분은 제 맹목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충무공 이순신장군 외 다수中)
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6월 1일 태어나 1831년 11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클라우제비츠의 할아버지는 할레대학의 신학교수였으며 아버지는 7년전쟁에 참전했던 프로이센 장교였다. 할아버지로부터는 탁월한 정신과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버지로부터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장교들을 보면서 생활할 수 있었던 기회를 얻었다.
1792년 12세에 군에 입대하여 1793년 13세에 사관생도로서 프랑스군을 라인란트에서 축출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마인츠 전투에 참전하였다. 1795년에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프로이센이 제1차 대프랑스동맹에서 탈퇴하고 바젤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패배할 때 까지 11년간 요새방어부대에 근무하면서 대위로 진급하였다.
1801년 베를린 전쟁학교에 입교하여 3년간 전쟁학교에 다녔으며 이 때 교장이었던 사른호르스트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샤른호르스트는 클라우제비츠에게 전쟁연구에 매진하도록 하였으며 클라우제비츠의 운명을 바꾼 인물이었다. 1804년 전쟁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황태자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된다. 이 때 나폴레옹이 1804년 황제로 등극할 때까지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1806년 클라우제비츠는 아우구스트황태자와 함께 아우어슈테트전투에 잠전하여 패배하게 된다. 그 후 프랑스의 포로가 되어 1807년까지 10개월간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었다.
1807년 탈지드 평화조약으로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르스트의 보좌관으로 프로이센군를 개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1908년 부터 1816년까지 클라우제비츠는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프로이센 패배의 원인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게 된다. 이 때 전쟁론의 기초가 닦아진다. 1809년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군에 복귀하였으며 샤른호르스트의 추천으로 장군참모장교로 임명되었으며 1810년 20월 30일 소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그리고 베를린의 전쟁학교 교관이면서 황태자와 그의 동생-빌헤름 1세-에게 전쟁학을 강의하는 임무를 맞게 되고 같은 해에 마리와 결혼하게 된다.
1812년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자 프로이센을 떠나 러시아군에 복무하게 된다. 1812년에는 러시아군의 대령이자 참모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된다. 프랑스가 모스크바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는 동안의 참사를 직접 지켜 보게 된다.
1813년 3월 대 프랑스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프로이센군에 복귀를 원했으나 프리드리히 벨헤름 3세는 이것을 거부하게 된다. 1813년에 다국적군 발모덴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한직이었다.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복귀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자 클라우제비츠는 제3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100일 천하로 끝난 뒤 1818년 38세의 나이에 소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1819년 보수반동세력의 득세로 한직으로 밀려나 베를린 전쟁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젊은 장군이었던 클라우제비츠는 이 때 전쟁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였으며 1806년 이후의 프랑스 역사,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역과 워털루 전역의 역사, 정치 관련 문제 등을 주제로 하여 많은 논문을 썼다. 클라우제비츠는 51세 되던 1831년 11월 16일 브레슬라우에서 콜레라로 사망하였다.
그는 당시 폴란드가 러시아 황제의 통치에 반대하여 봉기한 사건이 일어난 후 1831년 초 71세의 나이에 프로이센 포젠지역의 감시군 총시령관 이었던 그나이제나우의 참모장으로서 있었다. 그나이제나우 역시 1831년 8월 23일 콜레라로 사망하게 된다.
클라우제비츠의 사망이후 그의 아내이면서 전쟁론 집필에 동참했던 아내인 마리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전쟁론은 3부 8편 125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클라우제비츠의 사망 후인 1832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전쟁론은 미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6월 1일 태어나 1831년 11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클라우제비츠의 할아버지는 할레대학의 신학교수였으며 아버지는 7년전쟁에 참전했던 프로이센 장교였다. 할아버지로부터는 탁월한 정신과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버지로부터는 다양한 성향을 지닌 장교들을 보면서 생활할 수 있었던 기회를 얻었다.
1792년 12세에 군에 입대하여 1793년 13세에 사관생도로서 프랑스군을 라인란트에서 축출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마인츠 전투에 참전하였다. 1795년에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프로이센이 제1차 대프랑스동맹에서 탈퇴하고 바젤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패배할 때 까지 11년간 요새방어부대에 근무하면서 대위로 진급하였다.
1801년 베를린 전쟁학교에 입교하여 3년간 전쟁학교에 다녔으며 이 때 교장이었던 사른호르스트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샤른호르스트는 클라우제비츠에게 전쟁연구에 매진하도록 하였으며 클라우제비츠의 운명을 바꾼 인물이었다. 1804년 전쟁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프로이센의 아우구스트 황태자의 전속부관으로 발탁된다. 이 때 나폴레옹이 1804년 황제로 등극할 때까지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1806년 클라우제비츠는 아우구스트황태자와 함께 아우어슈테트전투에 잠전하여 패배하게 된다. 그 후 프랑스의 포로가 되어 1807년까지 10개월간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었다.
1807년 탈지드 평화조약으로 클라우제비츠는 샤른호르스트의 보좌관으로 프로이센군를 개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1908년 부터 1816년까지 클라우제비츠는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그는 프로이센 패배의 원인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게 된다. 이 때 전쟁론의 기초가 닦아진다. 1809년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군에 복귀하였으며 샤른호르스트의 추천으로 장군참모장교로 임명되었으며 1810년 20월 30일 소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그리고 베를린의 전쟁학교 교관이면서 황태자와 그의 동생-빌헤름 1세-에게 전쟁학을 강의하는 임무를 맞게 되고 같은 해에 마리와 결혼하게 된다.
1812년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자 프로이센을 떠나 러시아군에 복무하게 된다. 1812년에는 러시아군의 대령이자 참모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된다. 프랑스가 모스크바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는 동안의 참사를 직접 지켜 보게 된다.
1813년 3월 대 프랑스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프로이센군에 복귀를 원했으나 프리드리히 벨헤름 3세는 이것을 거부하게 된다. 1813년에 다국적군 발모덴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지만 한직이었다. 1815년 3월 1일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복귀하면서 상황이 급변하자 클라우제비츠는 제3 군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100일 천하로 끝난 뒤 1818년 38세의 나이에 소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1819년 보수반동세력의 득세로 한직으로 밀려나 베를린 전쟁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젊은 장군이었던 클라우제비츠는 이 때 전쟁론을 집필하기 시작하였으며 1806년 이후의 프랑스 역사,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전역과 워털루 전역의 역사, 정치 관련 문제 등을 주제로 하여 많은 논문을 썼다. 클라우제비츠는 51세 되던 1831년 11월 16일 브레슬라우에서 콜레라로 사망하였다.
그는 당시 폴란드가 러시아 황제의 통치에 반대하여 봉기한 사건이 일어난 후 1831년 초 71세의 나이에 프로이센 포젠지역의 감시군 총시령관 이었던 그나이제나우의 참모장으로서 있었다. 그나이제나우 역시 1831년 8월 23일 콜레라로 사망하게 된다.
클라우제비츠의 사망이후 그의 아내이면서 전쟁론 집필에 동참했던 아내인 마리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전쟁론은 3부 8편 125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으며 클라우제비츠의 사망 후인 1832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전쟁론은 미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추가 : 현대전쟁의 기반을 만들었던 "전쟁론"의 저자로 위의 설명을 잘 읽어보셨지만 프로이센의 출신이었습니다. 즉 현재의 "독일"입니다. 요즘에서의 "전쟁론"은 "육군사관학교"나 "해군사관학교"생들이라면 필독할정도로 "필독서"로 불립니다. 그 외에는 전쟁이나 전술에 관심이 많은 매니아층 위주로 많이 읽히지만 이 "전쟁론"은 구하기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죠.. 직접구하자면 서울의 유명서점에 가야 있을정도이고 지방에 있는 대형서점이라도 이책은 없습니다. 전술에 관심이 있으신분들이라면 필독하면 좋을정도로 손자병법과 쌍웅을 이룰정도로 불리우는 전술서입니다. 이러한 기반을 만들어 내었던 분이 바로 "칼 폰 클라우제비츠"이구요. 아참 이분의 스승은 "샤른호르스트"로 모 게임에서는 동일인물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스승이자 "샤른호르스트"또한 상당한 전술가로 불리우던 인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