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잡이 잭 (Jack the Ripper)

박해진2006.08.11
조회152
칼잡이 잭 (Jack the Ripper)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연속 살인자에 대한 조명- 


 


보스턴 교살자, 버펄로 난도질꾼, 그리고 선셋 살인마와 같은 별명을 가진 연속 살인마들이 여러 곳에서 활개치고 날뛰었지만, 칼잡이 잭은 아직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또는 악명 높은-연속 살인마이다. 이것은 단지 그 별명이 지닌 소름끼치는 생생한 인상 때문이 아니라, 그 살인이 셜록 홈즈가 살던 안개 자욱한 런던에서 일어났고, 또한 앞에서 말한 세 명의 살인마와는 달리 칼잡이 잭의 정체는 여전히 완전한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 가지 또 다른 흥미 있는 사실은, 칼잡이 잭이 그 낱말이 지닌 현대적 의미에 있어 최초의 성폭행 살인자라는 점이다. 성범죄가 1888년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시제(侍祭)를 맡은 소년들을 능욕한 티베리우스와 같은 로마 황제들은 그렇지 않았던가? 질 드 레와 블라드와 뇌제(雷帝) 이반도? 우선 우리가 이들에게 주의해야 할 점은 모두가 통치자였거나 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권태에까지 이르게 할 만한 여가와, 희생자에게 그들의 의지를 강요하기에 충분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순전히 경제적 이유에서 살인이나 강도를 저질렀다. 18세기 말에 런던에서 발간된 범죄사례 편찬서인 "뉴게이트 캘린더"에는 불과 6건의 '성범죄'를 수록하고 있으며, 이것들도 난폭한 성폭행이 아닌, 말하자면 유괴 같은 것이었다. 하류계급의 사람들은 너무 굶주려 '금지된' 성에 대한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고, 상류계급의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얻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강간이란 그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18세기 초에 하나의 두드러진 현상이 일어났다. 포르노의 태동이었다. 주동 역할을 한 사람은 1816년에 정신병원에서 죽은 귀족 사드 후작이었다. 그는 매우 성욕이 강했으나 대부분의 생애를 감옥에서 보냈기 때문에 성에 대한 환상을 펼칠 뿐이었다. 강간과 고문의 소름끼치는 백일몽을 담은 그의 책은 1820년대에 여러 모방자를 야기시켰으나, 매질하고 매를 맞는 그의 취향을 함께 하진 못했으며, 단지 금지된 행위의 허황된 생각에 흥미를 느꼈을 뿐이었다.

칼잡이 잭이 나타나기 전의 20년 동안에는 오늘날 성폭행 살인이라고 부를 만한 몇 가지 범죄가 있었는데, 이것들은 오늘날 같으면 정신병원에 수용될 만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사례였다. 이를테면 병아리를 죽이는 것에서 차차 발전하여 여인의 창자를 들어내어 피를 빨아 마시는 빈센트 베르제니라는 이탈리아 청년이라든지, 어린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데 즐거움을 느껴, 마침내는 두 아이를 살해한 제시 포메로이라는 보스턴의 십대 소년이 저지른 범죄가 그런 것이다.

이런 사례와 비교해 볼 때 칼잡이 잭의 연속 살인은 아주 계산적인 데가 있었다. 그것은 1880년 가을 동부 런던의 화이트채플 지구에서 발생했는데, 병적인 충격과 공포감을 자아내게 했다.



 


칼잡이 잭 (Jack the Ripper)아직도 캄캄한 9월 1일 새벽, 조지 크로스라는 한 운송인부가 버크스 거리를 따라 일터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좁은 자갈길은 다른 한쪽이 큰 소매상점의 벽이었고, 한쪽은 테라스 하우스가 줄지어 있었다. 희미한 빛 속에서 크로스는 방수포 꾸러미 같은 것이 눈에 띄어 다가가서 자세히 보았다. 그것은 허리 위까지 치켜올리고 반듯하게 누워있는 여인이었다. 그로서는 그녀가 술에 취한 것이라 판단하여 다른 통행인이 가까이 오자 말했다. "이 여인을 일으키는 것을 좀 도와주시오." 시장의 운반인부인 그 사람은 의심스런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가 처음 느낀 인상은 그녀가 강간을 당한 후 살해되어 버려졌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차가운 뺨과 손을 만져 보았다. "죽었어요. 경찰에 알리는 것이 좋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며 보기 흉하지 않게 스커트를 끌어내렸다.

실제로 순경 존 닐은 마침 버크스 거리를 순찰했다. 두 사람이 떠난 몇 분 후 휴대용 램프의 불빛으로 순경은 그 여인의 시체가 네덜란드 문 가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앞의 두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 여인의 목은 매우 깊이 베어져 척추골이 드러나 있었다.

한 시간 후 중년여인임이 밝혀진 그 시체는 그 지역 영안실 밖의 뜰에 안치되었다. 이웃의 빈민 수용원에서 온 두 빈민이 옷을 벗기고, 경위 한 사람이 메모를 했다. 그들이 속치마를 벗겼을 때, 경위는 여인의 복부가 늑골 밑바닥에서 골반까지 들쭉날쭉하게 깊이 베어진 사실을 발견했다.

그 여인의 신원은 속치마에 있는 람베스 빈민 수용원의 무늬에 의해 밝혀졌다. 그녀는 빈민지역에서도 최악의 빈민굴인 스롤 가의 간이 숙박소에 살면서 매춘부 노릇을 한 메리 앤 니콜스였다. 죽기 몇 시간 전에 그녀는 비틀거리며 숙박소에 돌아왔다. 그녀는 술에 취해 발음이 분명치 않은 말투로, 하룻밤 숙박비인 4펜스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주인은 그녀를 내쫓았다. "그 돈을 곧 가지고 오겠어,"하고 그녀는 거리로 나갔다. "얼마나 멋진 놈을 낚아채는지 두고 보라구." 그녀는 뒷골목길 보도 위에서 불편한 성행위를 베푼 대가로 숙박비를 제공할 남자를 찾으러 나갔다. 경찰의사가 추측한 바에 의하면, 목에 타박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땅 위에 드러눕자 손님이 그녀의 목을 붙잡아, 의식이 없을 때까지 질식시켰다. 그러고는 거의 목이 잘릴 정도로 두 번이나 힘껏 베어내고, 스커트를 치켜올려 미친 듯이 복부를 난도질했다.

이상하게도 이 사건은 그다지 센세이션을 일으키지 않았다. 창부들의 살해는 런던의 빈민굴에서는 흔한 일이었고, 때로는 보호료를 뜯어내는 갱단에 의해서도 일어났다. 지난 4월에는 엠마 스미스라는 창부가 런던병원에 발을 질질 끌며 와서는, 오스본 가에서 네 사람의 폭력배의 습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들은 뭔가 쇠막대기 같은 것을 힘껏 질 속에 박아 넣어, 그것은 자궁을 뚫고 들어갔다. 그녀는 결국 복막염으로 죽었다. 7월에는 팔다리가 잘린 여인의 시체가 템스 강에 떠올랐다. 그리고 1888년 8월 7일, 마사 타브람이라는 한 창부가 화이트채플의 조지 야드 빌딩 층계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녀는 칼이나 총검으로 39군데나 찔려 있었다. 어떤 가학성 살인광이 창부에게 원한을 가졌던 게 틀림없다. 점잖은 신문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기사도 아니었다.

칼잡이 잭 (Jack the Ripper)그런 태도는 메리 앤 니콜스가 살해된 지 8일 후에 극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한다. 다른 또 하나의 시체가 창자를 드러내며 화이트채플에 있는 한베리 가의 한 이발소 뒤뜰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곳은 흔히 매춘부들이 손님을 끌어들이는 지역이므로, 애니 채프먼이 1888년 9월 8일 토요일 아침 5시 30분 무렵 그곳에서 손님을 만난 것이 분명했다. 한 이웃 사람이 그녀가 초라한 신사복을 입고 사냥모자를 쓴 '외국인 풍모'를 지닌 거뭇한 얼굴의 사나이와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반 시간 후에 존 데이비스라는 숙박인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화장실이 있는 뜰로 나갔다. 그는 한 여인이 스커트를 허리 위까지 올리고, 무릎을 구부려 몸을 울타리에 기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복부가 절개되어 장이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메리 앤 니콜스의 경우처럼 사인은 목에 깊이 파고들은 상처 때문이었다. 살인범은 그 여인의 반지와 몇 개의 동전을 발 밑에, 찢어진 봉투를 머리 언저리에 놓아 두었다. 검시 결과 살인범은 이번에도 자궁과 질 윗부분을 도려낸 것이 판명되었다.

이제 갑자기 언론계는 이 오리무중의 살인범이 가학적 미치광이라는 사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지는 석간에서 '화이트채플에서 일어난 최근의 끔찍한 살인'을 머리기사로 다루었다. 남부 런던의 블랙프라이어즈에 사는 메리 버리지 부인은 그 기사를 읽고 졸도하여 '발작'으로 죽었다.

훗날 범죄수사국(CID) 국장이 된 멜빌 맥노튼 경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 해 가을 런던에 살았던 사람은 누구나 이 살인사건이 일으킨 공포를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 안개 낀 저녁을 회상할 수 있으며, 신문 판매 소년들이 또 다른 끔찍한 살인, 살인, 토막사건, 화이트채플이라고 쉰 목소리로 외쳐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오늘날의 대량폭행 시대에는 당시의 살인사건이 빚은 충격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중에 그 범죄를 보도한 한 언론인은 통속 팸플릿에서 그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오늘날 수록된 긴 범죄 목록 중에서 1888년 후반기에 화이트채플에서 저지른 일련의 불가사의한 살인사건만큼 인간성의 영역을 어둡게 하고 인간의 보다 착한 천성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한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인간의 보다 착한 천성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한' 이 사실이 런던 시민을 갑자기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마치 잔인한 괴물, 일종의 악마 같은 것이 거리 사냥을 나선 듯이 보였다. 히스테리가 온 나라를 휩쓸었다. 그것과 버금가는 것은 1811년의 래드클리프 노상강도 살인사건 이후 일찍이 없었다. 그 사건은 당시 두 가족이 이스트 런던에서 무참히 살해된 것을 말하며, 그 때문에 온 영국 세대주들은 밤이면 문 밖에 바리케이드를 쳤다고 한다.

1888년 9월 29일 센트럴 뉴스 통신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친애하는 사장님. 경찰이 나를 붙잡았다는 소식을 늘 듣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도 나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글도 있었다. "나는 매춘부들을 못 살게 굴어 쇠고랑을 찰 때까지 잡아찢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내 장난의 소식을 곧 듣게 될 것이오." 거기에는 칼잡이 잭이라고 서명이 되어 있었는데, 이 이름이 사용된 것은 처음이었다. 또 그는 이러한 부탁을 했다. "이 편지를 보관했다가, 사건이 더 일어났을 때 발표하시오." 센트럴 뉴스 통신사는 그의 충고를 따랐다.

칼잡이 잭 (Jack the Ripper)토요일 그날 밤, 그 '칼잡이'는 또다시 사람을 죽였다-이번엔 하나가 아닌 두 사람의 매춘부였다. 일요일 새벽 한 시에 루이스 딤슈츠라는 행상인이 버너 가에 있는 노동자 클럽 뒤뜰에 짐마차를 들여놓고 있었다. 말이 뒷걸음치자 딤슈츠는 말의 다리 앞에 무언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여인의 시체였다. 칼잡이 잭은 그때 뜰 안에 있었거나, 아니면 짐마차가 다가오는 소리를 듣고 막 그 자리를 떠난 후였을 것이다. 딤슈츠가 얼마 후 촛불을 들고 돌아와 보니 여인의 목이 칼로 베어져 있었다. 귀를 자르려고 했던 흔적도 있었다. 그 여인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라는 이름의 스웨덴 출신 알코올 중독 매춘부였다.

칼잡이 잭 (Jack the Ripper)살인마는 방해를 받았으나 기가 죽지는 않았다. 그는 급히 버너 가를 떠나 코머셜 거리를 지나-이 살인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멀리 벗어나서 이루어졌다-하운즈디치에 이르러, 때마침 10분 전에 비숍스게이트 경찰서에서 석방된 한 매춘부를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캐더린 에도위즈로,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운 죄로 몇 시간 동안 유치되었었다. 그녀를 설득하여 불과 수백 야드 밖에 있는, 창고로 둘러싸인 작은 마이터 광장까지 함께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경관이 15분마다 그 광장을 순찰했지만, 1시 반에 통과했을 때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1시 45분에 그 경관은 광장 한 구석에 여인의 시체가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반듯이 누워 있었고, 옷은 허리까지 치켜 올려졌으며 얼굴에도 난도질한 자국이 있었다. 시체는 늑골 아랫부분에서 음부까지 깊이 베어져 있었으며, 목도 잘려 있었다. 그후에 있었던 검시 결과, 신장이 없어졌고, 한쪽 귀의 일부가 잘려나간 사실이 밝혀졌다.

살인범은 분명히 경찰이 걸어오는 소리를 듣고는, 북쪽으로 통하는 골목길을 통해 서둘러 그 광장을 떠났을 것이다. 이 골목길에는 하수구가 있어 그는 유유히 그의 손과 아마도 칼에서 핏자국을 씻었을 것이다. 십 분 거리의 굴스턴 거리에서 그는 피묻은 피해자의 앞치마 조각을 버렸다. 그것을 발견한 경관은 가까운 벽에 분필로 갈겨쓴 글을 보았다. "유대인이 비난을 받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치안국장 찰스 워렌 경은 사진을 먼저 찍어야 한다는 지역 범죄 수사국원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그 글을 지우도록 명령했다. 그는 화이트채플에 살고 있는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맥노튼은 훗날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했다. "9월 30일의 이중살인이 발생했을 때 범인을 찾지 못한 것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칼잡이 잭 (Jack the Ripper)'칼잡이 잭'의 편지가 공개되자 살인범은 이내 그 별명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월요일 이른 아침 센트럴 뉴스 통신사는 또 한 통의 편지-이번에는 우편엽서로-를 칼잡이 잭으로부터 받았다. "내가 정보를 제공한 것은 사장님을 농락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소. 당신은 이 멋진 잭의 업적에 대해 내일 듣게 될 것이오. 이번엔 이중살인이었소. 첫번째 것은 비명소리를 약간 질렀소. 즉시 끝낼 수가 없었소. 경찰에 줄 귀를 절단할 시간이 없었소. 일을 다시 시작할 때까지 지난번 편지를 보관해 주어 감사하오."

대중의 분노는 폭발했다. 경찰을 성토하는 모임이 거리마다 열렸다. 찰스 워렌 경의 사임이 요구되었다. 살인범이 의사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검은 가방을 든 사람들은 밖에 걸어다니기가 위험했다. 경찰은 블러드하운드 탐색견을 써보려 했으나 개들은 이 오염지대에서는 맥도 못추었다.

칼잡이 잭 (Jack the Ripper)그러나 아무런 살인도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10월이 지나가자, 공포는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1월 9일 이른 아침, 칼잡이 잭은 여태껏 보지 못한 가장 극적인 범죄를 저지른다. 메리 자넷 켈리는 도셋 가의 변두리에 있는 밀러즈 코트의 싸구려 하숙방에 살고 있던 24세밖에 되지 않은 아일랜드 출신의 매춘부였다. 새벽 2시경에 그녀는 텁수룩한 콧수염을 기른 거무스름한 사나이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는 잘 차려입고 금시계 쇠줄을 달고 있는 듯 했다. 둘은 그녀의 하숙집 13호실로 통하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10시 45분에 관리인이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으나 대답이 없었다. 그는 창문의 부서진 유리창 사이로 손을 넣어 커튼을 젖혔다. 방 안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 그는 쏜살같이 경관을 부르러 달려갔다.

칼잡이 잭은 전보다 훨씬 능숙하게 해치웠다. 시체는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는데, 시체의 절단에 오랜 시간-한 시간 내지 그 이상 동안-이 걸렸음이 분명했다. 한쪽 손은 파헤친 위장 속에 있었다. 머리는 사실상 잘려져 있어, 왼쪽 팔과 마찬가지로 외피에 의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유방과 코는 잘려나갔고 다리의 외피는 벗겨져 있었다. 심장은 베개 위에 놓여졌고, 장의 일부가 그림 언저리에 축 늘어뜨려져 있었다. 벽난로 안의 불이 아직 남아 있는 걸로 보아, 칼잡이 잭이 그것을 촛불 대신 이용한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검시 결과 내장의 어느 것도 살인자가 가지고 간 흔적이 없었다. 그의 오랜 절단 작업이 그의 기묘한 가학적 쾌감을 충족시킨 것이 분명했다.

이 살인이 모두에게 최대의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경찰 책임자는 마침내 사임했다. 여론의 함성은 어느 때보다도 거세었다. 빅토리아 여왕조차 살인마를 체포할 방법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메리 켈리의 살해는 칼잡이 잭의 마지막 범죄였다. 그 이상의 잔학행위 없이 여러 주와 달이 지나자, 경찰은 그 살인마가 자살을 했거나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듬해 정월 초에 자살을 한 의사의 시체가 강에서 발견되자, 스코틀랜드 야드 형사들은 이것이 칼잡이 잭의 시체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결코 확인할 길이 없었다.


:: 콜린 윌슨과 대먼 윌슨의 세계 불가사의 백과 Ⅱ Unsolved Mysteries Past and Present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