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에세이]레바논 사태를 보는 기독교인의 생각 - 기독교인들에게

김현준2006.08.12
조회48

※이 글은 8월 4일 오마이뉴스 기사인 "그들과 내가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일까 - [포토에세이]레바논, 새싹처럼 희망으로 피어라"를 읽고 짧게 쓴 글입니다. 기독교인 시각에서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쓴 글이므로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비기독교인분들과 기독교인 사이의 인식의 골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여기에 올려봅니다.

 

"===" 부분 위에는 김민수 기자님의 글이며, 그 밑에는 제 글입니다. 원문 참조를 첨부해놓았으니 저작권 위반은 아닐 것이라 생각되며, 혹시나 제가 다른 분의 글을 저작권을 어기면서 올린 부분이 보이시면 지적해 주세요. 이런 글 처음 이런 데 올려보느라 이런 문제에 좀 예민해졌네요.ㅎ

 

※ 배경지식  : 성경에는 하나님이 택한 민족인 유대 민족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죄를 지으므로 말미암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라는 두 국가로 나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 국가는 지속적인 죄악으로 말미암아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남유다는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하고 맙니다.

 

 

<"그들과 내가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일까

- [포토에세이]레바논, 새싹처럼 희망으로 피어라", 김민수 기자 >

에서 일부 발췌(===윗 부분 까지)

 

원문 참조 : http://life.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50791&ar_seq=

 

 

이스라엘의 악의적인 무차별 공습으로 군인이 아닌 민간인, 어른도 아닌 아이들까지 희생양이 되는 레바논의 현실.

분노를 느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싫어질 때가 있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이라크를 침공하여 평화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미국을 보면서도 분노를 느끼지만, 그 역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서 공허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믿는 신에게 이렇게 기도를 한다.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그들을 벌하여 주옵소서. 지금 당장…."

그러나 응답이 없다.

어떤 이들은 이 두 국가가 기독교 국가이니 당신과 같은 종교를 가진 나라를 지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당신 미친 것 아니냐?"고 한다. 그러면 오히려 그들은 나에게 "미쳤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편으로부터는 전쟁을 일으킨 나라에서 온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로 도매급으로 나쁜 놈 취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선 유구무언이다. 틀린 말도 아니다.

의한 것과 옳지 못한 것,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의 분노는 타협점이 없었다.

결국 예수는 불의한 자들과 위선자들의 합작으로 하나님을 모독한 자,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정치범으로 처형을 당했다.

바꿔 말하면 예수는 죽기까지 그들을 미워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요, 그것은 동시에 작은 것, 즉 소외되고 헐벗은 이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의 이런 메시지는 왜곡되어 버렸다. 강대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예수로, 지배권력의 욕망을 채워주는 예수로 전락했다.

예수가 변하고 타락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이용하는 인간이 타락한 것이다.

예수의 가장 큰 적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된 것이다.

지금 레바논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가 죽어가고 있다. 이라크에서 평화의 이름으로 평화가 갈기갈기 찢어지듯이 말이다.

만일, 오늘 서울에 예수가 온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강대국의 횡포 속에서 분노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런 심정으로 예수의 죽음을 다시 바라보기만 해야 할지도 모른다.

레바논에서는 예수가 죽어가고 있다

 

봄에 옥상을 정리하면서 선인장을 잘라버렸다. 기억에도 사라진 선인장 조각이 새 순을 사이좋게 올렸다. 저렇게 올라왔으니 더 이상 그를 죽일 수가 없다. 새 순은 희망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 후 언론을 통해서 부모들이 어린아이들의 주검을 들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린이들을 죽이는 자들, 그들이 부르는 신과 내가 믿는 신의 이름은 같다. 그들과 나는 같은 신을 믿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쉽게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수없이 하나님의 이름, 예수의 이름을 팔아먹는 이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나도 때론 그 중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은 30냥에 예수를 팔았던 가롯 유다를 비난하지만, 그들 또한 은 30냥도 안되는 추잡한 것을 위해 예수를 파는 일에 너무도 익숙해 있다. 신념을 가지고 하든 요구를 하든, 너무 쉽게 팔고 강요한다. 그나마 소수지만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어 위로를 받는다.

새싹처럼, 꽃몽우리처럼 레바논도...


 

이런 상황에서 꽃 타령이나 하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아파 그들이라도 보지 않으면 삶의 의욕 자체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서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그래, 이렇게 작은 새싹처럼, 꽃 몽우리처럼 피어나는 거야. 그들에게 미래가 있어 희망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지금 그 모습 그대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머물기만 하는 것 같은데 하루하루 다르게 자라는 그들, 피어나는 그들을 보면서 삶의 힘을 얻는 것이다.

새싹과 꽃 몽우리를 보면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레바논, 새싹처럼, 꽃 몽우리처럼 피어나소서!"

보기만 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명구가 떠오르는 꽃, 지금 이스라엘로 인해 레바논은 더럽혀졌지만 이내 그 곳에 아름다운 꽃 피어나듯 레바논의 평화가 피어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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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예레미야(성서의 한 책, 남유다의 멸망을 예언하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책)를 읽으면서, 불의한 유다 왕국을 벌하시는 주님의 참뜻과 그것이 나타나는 수단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이방신을 들여와 섬겼던 유다를 주님께서는 바빌로니아를 통해 그야말로 '무참히' 파괴하게 하셨다. 거기에서는 주님의 수단이 때로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분명 제한 조건같은 단서를 주셨다.

 

우선 유다에게 수십 수백명의 선지자들을 통해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안 돌아오자 여러가지 예언을 통해 미리 심판을 예언하셨다.

게다가 그 심판의 뜻을 굳힌 이후에서도 다시 돌아온다면 철회하신다고 하셨지만

이미 유다 백성들이 전적으로 돌아선 마음을 보시고 절대로 철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폭력이나, 비폭력이나

주께서 그분의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시며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가끔 주님의 "뜻" 과 주님의 "계획"을 혼동한다.

그리고 방법론에 매여 이런 전쟁 역시 주님의 "뜻" 운운하면서 정당화하며, 오히려 같은 방법으로 우리의 민족을 통일하자는 극소 그러나 힘이 센 목사님들도 계신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뜻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 주의 공의를 실천하는 것, 오직 나사렛 예수만이 인류의 구원인 복음을 믿고 전파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풍성히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주님의 경륜은 때로는 달고 때로는 쓰다. 그것은 각 상황에 있어서 우리의 약함과 주님께서 심어놓으신 인류의 양심(비신자)과 믿음(신자)의 분량에 따라 주신다. 결국 목적은 주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주님의 "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욱 현실적이며 더욱 효과적으로 유동적이다.

 

그래서 인간이 주님의 이름으로 일으킨 폭력을 무조건 주님의 뜻이라고 높이 세워서는 안 된다. 분명 다른 방법으로도 일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주님과의 충분한 교제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조국을 다루시는 주님의 방법이 "폭력"일 수 밖에 없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주님의 마음은

떠오르는 강대국 바빌로니아의 국익을 좋아해서도 아니다.

오직 하나의 이유였다. 그의 선민을 다시 주님께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였다.

 

이라크 사태, 레바논 사태를 보면서 하나님 없는 허무한 인문주의적 평화를 논하기는 싫다.

하지만 그들을 옥죄는 몇 '축복받은 국가'들의 행태와 의도를 생각해보면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 맞다고 감히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자국의 국익이 우상이 되어서, 자본주의가 우상이 되어서, 자신식의 민주주의가 우상이 되어서 일방적인 행태로 부수는 그들을 볼 때

 

그런 무수한 행동들이 정의 운운한 자국의 이익추구였다는 것을 생각해 볼때...

 

분명 레바논 사태가 일어나게 한 헤즈볼라의 끈질긴 annoyance에 대한 폭발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미 복수의 형량의 균형을 잃어버린 그들의 동물적 폭력성을 볼 때

 

"어정쩡한 평화보다 근본적 뿌리를 발본색원한다"라는 힘있는 나라의 외교 담당자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사람의 마음의 상처는 인간 그 누구도 치유하지 못한다."라는 사실을 떠올려 볼때,

 

감히 그들을 판단해 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을 상대하는 방법 역시 그들과 같아서는 안 되는 것이며, 살 수 있으셨는데도 죽으셨고, 부실 수 있으셨는데도 먼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 마음속에 일하시는 능력을 믿어야 함을...

 

비록 주님의 계획이 어떤 지역에 대한 심판이라 할 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에 대해 재앙과 폭력과 자신들의 우월성을 자랑하게 되면 그것 역시 교만의 죄이다. 

크리스쳔이그런 안타까운 지역에 대해 취할 행동은 이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셔 올라가시면서, 인간을 동역자로 선택하시며 주신 "자유롭게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이 회복되는 정의와 사랑의 세상"의 소명을 예수님의 방법으로 실천하며, 그곳에서 되도록이면 평화로운 방법론으로 더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해 들을 기회를 늘리는 것이다. 그것은 평화로운 중재와 친인권적인 권고 또는 인도적 지원과 복구활동 원조 등을 통한 사람 살리기인 것이다.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선교를 위한 환경을 만들어 나가 인간과 하나님사이의 다리를 놓으신 예수님을 알게 하는 방법일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자국의 이익에 봉사하여 유다를 부신 바빌로니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강자의 억압이란 부정의의 피해를 입은 남유다는 어떻게 되었을까?

 

70년의 바빌로니아점령의 고난의 시기를 통해 유다는 주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주님께 다시 돌아왔고, 결국 예루살렘 제건으로서 주님의 뜻으로 다시 회복되었으며

 

약자를 침범한 악을 품은 것이 명백한 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라는 또 다른 강대국에 의해 망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결코 강자 또는 한 나라의 이익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나 주님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절대화시키고 맹신할 때, 결국 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레바논이 주님의 심판을 받았다."라는 명제에 대해, 이미 일어난 사태를 볼 때 부인하기는 힘들 것 같다.(그렇다고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난 잘 모르겠다.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감히 말하지만

그것을 주님의 의 운운하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실행하였던 미국과 이스라엘의 행정부 역시 주님의 심판을 피하기는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조심스런 추측을 해 본다.

 

미국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로는 무조건 강성대국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미국은 전 세계 최고의 채무국 중의 하나이며

(한, 중, 일 3국이 힘을 합처 각자 가진 미국 국채의 돈을 회수하기를 요구하는 날은, 인류의 '마지막 그날'일 수도 있을 정도로 미국에 엄청난 경제 불황이 올 것이라는 추측이 난무하다.)

나름대로 "다양한" 국가들에 의해 산업의 열위를 확보(?)하고 있다.

결국 결론은, 미국도 교만할 경우 주님의 심판을 피하기 힘들 것이라는 것이다.

역사 무수한 강대국들이 그랬듯이...

 

그저 기도해본다.

 

미국이, 그 나라를 세운 주님의 참 뜻을 이해하기를

그들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정착하여 헐벗고 굶주린 약자일 때, 토착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작물 심는 방법을 배우고 첫 수확을 기념하는 날이 "추수감사절"임을(칠면조 먹는 날이 아니다)

 

그리고 또 다른 주님의 공의가 회복되어야 할 동아시아의 "그리스도의 계절"을 꿈꾸는 많은 청년들이, 단순히 힘 있는 극히 일부 그러나 힘있는 목사님들의 해석을 그대로 받기 보다, 나름대로 이 문제에 대해서 기도해보고, 토론하고, 같이 고민하며 주님의 뜻을 확실히 알아보자는 생각을 해 본다.

 

그 누구도 주님의 뜻을 완벽히 아는 사람은 없기에 같이 고민하고 기도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모르면서 기독교라면 그런 극히 일부의 목사님들을 보고 판단하는 완전 비신자들, 또는 방 민족들에게 다가가는 출발점이며 이 동아시아가 그리스도의 꿈이 실현되는 역사의 장이 될 수 있음을 감히 도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