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이 헤어진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던 무언가가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엔 이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땐 너무 어렸으니까, 단순히 인간관계에 능숙하지 못해서였을지도…. 나는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것으로 그와 나의 관계는 성립되었고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알았다. 나는 그때 서로 사이에 아무런 틈새도 없던 막역한 사이라도 언제든지 멀어지고 헤어질 수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바보였다. 틈새가 보이지 않는 사이라면 멀어질 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나는 조그만 틈새조차 없던 사이라서 언젠가 반드시 헤어지게 될 거라는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헤어졌을 때 당시에 정신 못 차리고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건 내가 바보라서 그런 건가. 언제 어디서 한 번쯤 마주치면 좋겠다…. 라고 생각은 많이 했었지만 정작 이렇게 마주치면 할말이 없다. 난 워낙 멍청해서 ‘안녕’같은 간단한 인사도 못한다. 그 말이 입가에서 뱅뱅 돌다가 침을 삼키니까 같이 목 뒤로 넘어가 버린다. 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 “잘 있었어?” 우스워라. 헤어질 때 겨울이었고 지금도 겨울이니까 헤어진 지 한 1년 쯤 됐다. 나한테 그 1년은 그에게 인사라던가 안부를 묻는 그런 평범한 대화 따위도 못하게 만들 만큼 거대한 압력이었다. 요컨대 복잡하게 꼬여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실 뭉치 같은 것. 하지만 그에겐 그런 거대한 압력 따위 요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1년 전 까지는 나도 그에게 반가운 표정과 말투와 행동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 정도는 우스웠는데. 거대한 실 뭉치에 깔려 허우적대느라 다 잊어버렸나보다. 날 깔아뭉개던 실 뭉치가 그에게는 가지 않았는지 그는 어제도 그저께도 일 년 전부터 매일 매일 계속해서 나를 만나왔던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인사를 건넨다. “응…….” 그는 반가운 인사에 응…….하고 대답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내게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누구든 거대하고 풀 수 없는 실 뭉치 따위에 깔려서 1년 쯤 허우적대다 보면 이렇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가 나의 거대한 실 뭉치를 알아주길 바라는 건 또 아니 라서 거대한 실 뭉치를 감출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멍청한 고민을 하느라 애꿎은 하늘만 올려다봤다. 하늘이 꼭 방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도화지처럼 군데군데 파란 빛이 물들다 말았다. “추워 보인다.” “응?” 쓰미마셍? 어이가 없다. 실 뭉치가 눈앞에서 뱅글뱅글 돈다. ‘1년씩이나 됐으면 좀 풀어라!!’라고 다그치는 걸까. 내일이면 새싹이 돋아나는 3월인데 춥기는 무슨, 게다가 난 목도리까지 맸는데. “목도리를 맸어도 이렇게 코가 빨갛잖아.” 라고 하며 목도리를 눈 밑까지 치켜 올려준다. “…….” 난 멍청해서 이런 우스운 상황에 눈물이 핑 돈다. 할 말이 없다. 그와 내가 헤어졌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변하지 않고 똑같을 수가 있을까. “울보.” 그가 변하지 않은 것 보다 내가 변하지 않은 게 더 괘씸하다. 눈물을 닦아주느라 내 볼에 닿은 손이 차가운 게 낯설지가 않다. 울보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 싫지 않다. 난 정말 멍청하다. “나랑 만난 게 그렇게 감격이야?” “흥.” 다시 마주친 것뿐이지 다시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왜 내가 그와 나는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고 믿었을까. 그와 내가 영원히 살 수 없는 것만큼 당연한 일인데. 영원히 살 수도 없는 주제에 영원히 사랑하길 바란 것 자체가 뻔뻔한 거다. 그럼 잘 생기고, 이해심도 깊고, 다정하고, 자상한 그가 언제나 나를 사랑하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던 게 뻔뻔한 거였을까. 남이 뻔뻔한 거라면 그런 거겠지만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 건 아니잖아. 누구나 살다보면 한 번쯤은 뻔뻔해지잖아. 내 경우엔 남에게 피해주는 뻔뻔함도 아니니까 괜찮잖아. “사실 지금 바빠서.” “그렇구나.” 그가 시계를 흘끗 들여다보더니 그런다. 나는 그의 시간을 빼앗은 걸까.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에서 상대방의 시간을 빼앗는 건 대단한 민폐다. 그가 그러면 내가 미안해지게 된다. “많이 바쁜 건 아니야. 맞다, 핸드폰 번호 좀.” “옛날 번호 그대로야.” “아, 내가 핸드폰을 바꿔서. 번호가 뭐더라?” 그러셔. 뭔가 상당히 언짢다. “010 6323 0121” “고마워라. 나중에 연락할게~” 라고 말한 그는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 인사한 뒤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없었던 듯 재빠르게 사라진다. 1년 만에 내 핸드폰 번호조차 잊어먹을 정도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나봐. 하고 괜히 소심한 척 해본다. 나는 핸드폰을 바꾸었다는, 1년 전의 입장에서 라면 아주 사소한 그것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그와 나 사이에는 틈새가 벌어졌으므로 그런 사소한 걸 모르더라도 꼭 멍청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멍청한 건 아니라는 얘기.
집에 돌아와서 계속 핸드폰만 보고 있다. 옷도 안 갈아입고 계속 그러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내가 계속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실 뭉치가 풀릴 듯 말 듯. 어쩌면 그와 나는 우연히 만난 것이고 우연히 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니면 모조리 다 꿈인 것일지도. 그를 만난 시점부터 지금 까지가 모조리 꿈인 것이 나을까 꿈이 아닌 것이 나을까. 멍청하니까 몰라도 되는 걸까. 그건 좀 아닌데. 만약 그를 만난 시점부터 지금까지가 모조리 꿈이라면 난 풀리지 않는 거대한 실 뭉치 따위 안고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거다. 대신 막역한 사이었던 그와 내가 막연한 사이가 되는 것. 아, 커피 마시고 싶다. 실 뭉치가 더 복잡하게 꼬인다. 엄청나게 크고 풀 수 없는 실 뭉치가 뇌를 감싸고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머리가 아프다. 나 혹시 버림받은 걸까. 버림받아서. 어릴 때 종종 가지고 놀던 인형을 내다버린 것과 같이 그 역시 가지고 놀던 인형을 버리는 것처럼 나를 버린 건 아닐까. 아무래도 버린 건 금방 잊기 마련이니까.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을 1년 씩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핸드폰 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나.” “아아.” “아직 이사 안 갔지?” “응, 왜.” 날 버렸어? “아직 치즈 케이크 좋아하지?” “응. 왜.”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 집에 있지.” “응. 왜” 나는 네 일상에 영향을 안 준거야? “나 너네집 앞인데.” 사실 뻔뻔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 좀 열어 줘.” 결국은 이런 뻔한 이야기. 치즈 케이크는 헤어지고 나서 1년 동안 일부러 한 번도 안 먹었는데. 정말 바보같이 하필이면 치즈케이크 같은 거를. 전화를 끊으면서 밖을 보니 비가 온다. 많이 온다. 아주 많이많이. 처음 만났을 때도 두 번째 만났을 때도 세 번째 만났을 때도 헤어질 때도, 그는 비가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비를 맞고 자주 감기 걸리는 그를 보면서 그가 감기 걸리는 게 썩 싫지 않아 비 오는 걸 싫어하진 않았다. 감기 걸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줄 때 기분이 좋았다. 그는 그런 목소리가 참 좋았다. “안 젖었네.” “응. 우산 쓰고 왔어.” 우산을 쓰고 왔다면서 자랑스럽게 우산을 보여준다. 나는 비가 많이많이 오길래 그가 많이많이 젖었을 거 같아서 수건을 들고 있는데. 너 왜 우산 쓰고 왔니. 니가 우산을 쓰고 와서 수건을 들고 있는 내 손이 바보가 됐잖아. 그럼 내가 멍청한 게 티 나버리잖아. “저녁 먹었어?” “아니 아직.” “그럼 케이크 먹으면 되겠다.” 그런 거 먹고 싶은 기분 아닌데. 너 재수 없어. 니가 사온 건 안 먹을 거야. “응. 그럼 되겠다.” 이런. 자기 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우리 집 소파에 앉는 그를 보며 나는 당황스러워졌다. “마실 거 좀 주라.” “우유랑 물 밖에 없는데.” 만약 그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면, 나를 조금이라도 닮았을까, 닮지 않았을까. 나를 조금이라도 닮았으면 그게 위안이 될까. 아니면 더 비참해질까. “물 주세요.” “넹.” 내가 따라 준 물을 마시는 그의 모습이 너무 영화 같았다.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영화 보고 싶다.” “무슨 영화?” “아무거나. 그냥 영화.” “내가 가서 빌려올까?” “아냐.” 그럴 필요 까지는. 하지만 갑자기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티비를 켰다. 여기저기 돌리다가 볼 만한걸 찾았다. 난 오늘 이걸 끝까지 봐야겠다. “난 니가 로맨스 같은 거 보고 싶어 할 줄 알았어.” “불만이야?” “아니.” 니가 불만이어도 난 이걸 볼 거야. EBS에서 하는 영화. 소리도 안 나오고 흑백이다. “안 본 사이에 고상해 졌구나.” “흥.” “케이크 먹어.” “응 먹을 거야.” 제대로 좀 보려고 하는데 거의 마지막 장면인가보다. “이거 다 끝나 가는 거 같은데.” “그래도 볼 거야.” “알았다니깐. 누가 못 보게 한다니.” 내가 사는 세상과 좀 많이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아. 저 영화의 일상과 나의 일상의 차이가 클까, 그의 일상과 나의 일상의 차이가 클까. 소리가 없는 세상의 이질적이란. 그렇대도 그의 일상과 나의 일상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날 버린 사람. 그렇지. 이런 삽질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그’ 이니까.
버려지다와 버리다의 차이는 엄청나게 큰 거다. 누구든 버리는 건 쉽게 할 수 있으니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만 버려지는 건 굉장히 큰일이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그에게 매달려야 할까, 버려지지 않은 것처럼 멀쩡한 모습으로 다녀야 할까를 가지고 고민해야 하는 것부터가 힘든 일이다. 언짢고 성가시며 귀찮기도 하다. 난 그 둘 사이에서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헤맸다. 날 버린 사람이 날 잊는 것만큼 비참한 게 또 있을까. 생각해보니 버린 것 자체가 잊겠다는 거 아닌가. 그가 날 잊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버린 게 아닌 걸까. 아님 버리고 나서 잊지 않은 걸지도 모르고. 둘 다 싫다. 그냥 전부 다 꿈이면 좋겠다. “안 바뻐?” “응.” “너 아깐 바쁘다며.” “일 다 끝내고 왔어.” 그가 어깨를 으쓱 하고 들어 보인다. “언제 갈 거야?” “나 갈까?” “응.” 좀 가주면 좋겠다. 좀 가주라. 니 얼굴 보니까 머릿속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잘 있어.” 그런 표정으로 웃지 좀 말지. “응. 잘 가.” 쾅, 하고 문이 닫혔다. 뭔가가 쾅 하고 덜컥 내려앉는다. 1년 만에 만난 사람한테 빨리 가라고 하는 내게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아무 미련 없이 가겠다고 일어선 그에게 문제가 있었던 걸까. 물어보려고 한 것도 많았었는데 그런 거 하나도 못 물어 보고 그냥 가라고 하다니. 아까 거기 왜 지나간 거였어? 내 핸드폰 번호 왜 물어 봤어? 그 치즈 케이크 어디에서 샀어? 오늘 우리 집에 왜 왔어? 아직도 그 강아지 길러? 새로운 연인 같은 게 생겼어? 그 사람 나와 조금이라도 닮았어?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왜 나를 버렸어? 나한테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래? 아직도 그 회사 다니나보다. 내 핸드폰 번호 정말 까먹어서 물어 본 거겠지. 전에 그의 회사 앞에 있는 빵집에서 종종 케이크 사왔었는데, 그 집 케이크인걸지도. 오늘 우리 집에 온건 심심해서..... 또는 할 일이 없어서. 아님 할 일이 없어 심심해서. 강아지 정말로 귀여웠는데, 아직 기르겠지.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면 왜 오늘 나를 찾아왔으며, 혹시 그 혹은 그녀가 나와 조금이라도 닮았는지. 아니 생겼었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헤어진 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새로운 연인 따위 아직 없다면, 1년 전에 우린 왜 헤어진 건지. 나를 사랑하긴 했을 거라고 철썩 같이 믿는다. 왜냐하면 우린 그 때 조금의 틈새도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었으며, 혹시나 그렇다고 해도, 그가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실 뭉치는 미친 듯이 더더욱 커질 테니까. 나를 버린 건 아니겠지. 그냥 우린 헤어진 거니까.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 이별한 거니까. 그런 쓸데없는 감상적인 우울함에 빠지지 말자. 소파 앞 탁자에 얌전히 올려 져 있는 치즈 케이크가 매우 기분 나빴다. 치즈 케이크가 그인 것 같았다. 던져버리고 싶다. 대체 뭐야. 기분 나빠. 짓뭉개고 싶다. 지근지근 밟아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싶을 만큼 매우 기분 나쁘다. 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렇게 얌전하게 있고 싶니?! 아무렇지도 않냐구. 멀쩡해? 1년 동안 나를 한 번도 안 봤으면서. 난 널 1년 동안 안 봤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조금쯤 당황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그랬는데, 넌 아무렇지도 않잖아. 난 그해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넌 그런 것 따위 없었다는 듯이 나를 대하니까 몇 대쯤 때려주고 싶었어.
그가 나간 현관문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탁자 위의 케이크를 엎어버렸다. 바닥에 떨어져버린 치즈 케이크를 모조리 발로 밟아버렸다. 자근자근 밟혀져서 원래의 모습 따위 찾아볼 수 없게 된 모양이 조금은 불쌍하기도 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처참하게 뭉개져버린 치즈 케이크 같은 것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을 만큼 피폐해진 내 현재 상태가 꼴사납고 언짢고 기분 나쁘고 슬프고 화나고 또 가슴이 아프다. 울고 싶다. 정말로 울고 싶다.
그래서 울었다. 울고 싶어서 큰 소리로 우는 게 대체 얼마만일까. 그와 헤어졌을 때도 이렇게 울지는 않았는데. 처음에 울기 시작한 것은 뭉개진 케이크가 슬퍼서였는데 울다 보니 어릴 때 기르던 조그만 강아지가 아파서 죽었던 것도 생각나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생각나고, 중학교 때 엄마랑 아빠가 매일 밤 지치도록 싸우다가 이혼 했던 것도 생각나고……. 그와 헤어지던 날도 생각이 났다. 그와 나는 큰 소리로 싸우거나 다투지도 않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후에 약간은 웃으면서 헤어졌다. 대체 거기서 뭐가 잘못 된 거 길래. 한 시간 쯤 큰 소리로 울고 나니 나는 지쳐버렸고, 치즈 케이크가 뭉개진 바닥에 그대로 누워서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꿈을 꾸었는데, 거대하고 풀 수 없는 실 뭉치가 희미해지더니 어떤 날카로운 것에 잘려지는 것을 보고 있는 꿈이었다. 깨고 나서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렸다. 그래서 다시 잠들어 버렸고, 또 다시 잠에서 깼을 때 애초에 실 뭉치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상식적으로 그런 게 있었을 리가 없다. 풀리지 않는 거대한 실 뭉치는 그와 헤어진 후에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다. 나는 그 때 그와 나의 사이를 이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그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았던 거고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것은 쉽게 풀 수 있는 단순한 실 뭉치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풀어져버리면 그와 나의 사이도 풀어져 버릴 것으로 겁 먹어버리고 그 것을 꼭꼭 숨겨두고 거대하고 풀 수 없는 실 뭉치로 만들어버렸던 거다. 쉽게 풀 수 있는 단순한 실 뭉치는 눈덩이가 불어나듯이 점점 커지고, 결국에는 거대하고 풀 수 없는 실 뭉치가 되어버렸다. 손 댈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실 뭉치는 쉽게 풀 수 있는 단순한 실 뭉치에 비해 열두 배 쯤 더 큰 압력이었다. 나는 그것이 쉽게 풀 수 있는 단순한 실 뭉치일 때 보다 그것 옆으로 가는 것에 대해 열두 배 쯤 더 겁을 먹었다. 그래서 그와 헤어지고 1년 동안 거대한 실 뭉치를 가지고 풀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당황하고 있었던 거다. 그게 애초에 허상이었건 실재였건. 나는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도 잊은 채 거대하고 풀 수 없는 실 뭉치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나를 속여 작년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뒤늦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 풀어보려고 했을 땐 그것이 이미 손목 까지 타고 올라와 칭칭 감아버려 나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멍청이로 만들어 버렸다. 멍청이가 되고 싶어서 멍청이가 되는 사람은 없다. 주변의 이러저러한 상황, 혹은 사람, 계절, 아님 한 통의 전화라도 무언가 조건이 된다면 그것은 어렵지 않게 그 사람을 멍청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고, 그건 그 사람으로서는 불가항력인 것이다. 내게 그해 겨울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나를 멍청이로 만들어버렸고, 작년 겨울이 간다면 내가 멍청이가 아니게 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거다. 현실이라고 믿고 있던 실 뭉치가 허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에서 작년 겨울을 보내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간단한 사실을 1년씩이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탓할 필요도 없다. 겨울을 보내는 것은 그걸로 끝난 거다. 더 이상 뭐라고 부연 설명할 것도 없으며, 설령 있더라도 그게 무슨 소용인가.
사람과 사람이 헤어진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를 연결
사람과 사람이 헤어진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하던 무언가가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엔 이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땐 너무 어렸으니까, 단순히 인간관계에 능숙하지 못해서였을지도…. 나는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 것으로 그와 나의 관계는 성립되었고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알았다. 나는 그때 서로 사이에 아무런 틈새도 없던 막역한 사이라도 언제든지 멀어지고 헤어질 수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바보였다. 틈새가 보이지 않는 사이라면 멀어질 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나는 조그만 틈새조차 없던 사이라서 언젠가 반드시 헤어지게 될 거라는 건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헤어졌을 때 당시에 정신 못 차리고 이리저리 헤매고 다닌 건 내가 바보라서 그런 건가. 언제 어디서 한 번쯤 마주치면 좋겠다…. 라고 생각은 많이 했었지만 정작 이렇게 마주치면 할말이 없다. 난 워낙 멍청해서 ‘안녕’같은 간단한 인사도 못한다. 그 말이 입가에서 뱅뱅 돌다가 침을 삼키니까 같이 목 뒤로 넘어가 버린다. 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안녕…….
“잘 있었어?”
우스워라. 헤어질 때 겨울이었고 지금도 겨울이니까 헤어진 지 한 1년 쯤 됐다. 나한테 그 1년은 그에게 인사라던가 안부를 묻는 그런 평범한 대화 따위도 못하게 만들 만큼 거대한 압력이었다. 요컨대 복잡하게 꼬여서 도저히 풀 수 없는 실 뭉치 같은 것. 하지만 그에겐 그런 거대한 압력 따위
요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1년 전 까지는 나도 그에게 반가운 표정과 말투와 행동으로 인사를 건네는 것 정도는 우스웠는데. 거대한 실 뭉치에 깔려 허우적대느라 다 잊어버렸나보다.
날 깔아뭉개던 실 뭉치가 그에게는 가지 않았는지 그는 어제도 그저께도 일 년 전부터 매일 매일 계속해서 나를 만나왔던 사람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인사를 건넨다.
“응…….”
그는 반가운 인사에 응…….하고 대답하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내게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누구든 거대하고 풀 수 없는 실 뭉치 따위에 깔려서 1년 쯤 허우적대다 보면 이렇게 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가 나의 거대한 실 뭉치를 알아주길 바라는 건 또 아니 라서 거대한 실 뭉치를 감출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에 대한 멍청한 고민을 하느라 애꿎은 하늘만 올려다봤다. 하늘이 꼭 방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도화지처럼 군데군데 파란 빛이 물들다 말았다.
“추워 보인다.”
“응?”
쓰미마셍? 어이가 없다. 실 뭉치가 눈앞에서 뱅글뱅글 돈다.
‘1년씩이나 됐으면 좀 풀어라!!’라고 다그치는 걸까. 내일이면 새싹이 돋아나는 3월인데 춥기는 무슨, 게다가 난 목도리까지 맸는데.
“목도리를 맸어도 이렇게 코가 빨갛잖아.”
라고 하며 목도리를 눈 밑까지 치켜 올려준다.
“…….”
난 멍청해서 이런 우스운 상황에 눈물이 핑 돈다. 할 말이 없다. 그와 내가 헤어졌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변하지 않고 똑같을 수가 있을까.
“울보.”
그가 변하지 않은 것 보다 내가 변하지 않은 게 더 괘씸하다. 눈물을 닦아주느라 내 볼에 닿은 손이 차가운 게 낯설지가 않다. 울보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 싫지 않다. 난 정말 멍청하다.
“나랑 만난 게 그렇게 감격이야?”
“흥.”
다시 마주친 것뿐이지 다시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왜 내가 그와 나는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고 믿었을까. 그와 내가 영원히 살 수 없는 것만큼 당연한 일인데. 영원히 살 수도 없는 주제에 영원히 사랑하길 바란 것 자체가 뻔뻔한 거다. 그럼 잘 생기고, 이해심도 깊고, 다정하고, 자상한 그가 언제나 나를 사랑하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던 게 뻔뻔한 거였을까. 남이 뻔뻔한 거라면 그런 거겠지만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 건 아니잖아. 누구나 살다보면 한 번쯤은 뻔뻔해지잖아. 내 경우엔 남에게
피해주는 뻔뻔함도 아니니까 괜찮잖아.
“사실 지금 바빠서.”
“그렇구나.”
그가 시계를 흘끗 들여다보더니 그런다. 나는 그의 시간을 빼앗은 걸까. 별로 친하지 않은 사이에서 상대방의 시간을 빼앗는 건 대단한 민폐다. 그가 그러면 내가 미안해지게 된다.
“많이 바쁜 건 아니야. 맞다, 핸드폰 번호 좀.”
“옛날 번호 그대로야.”
“아, 내가 핸드폰을 바꿔서. 번호가 뭐더라?”
그러셔. 뭔가 상당히 언짢다.
“010 6323 0121”
“고마워라. 나중에 연락할게~”
라고 말한 그는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 인사한 뒤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없었던 듯 재빠르게 사라진다. 1년 만에 내 핸드폰 번호조차 잊어먹을 정도로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나봐. 하고 괜히 소심한 척 해본다. 나는 핸드폰을 바꾸었다는, 1년 전의 입장에서 라면 아주 사소한 그것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그와 나 사이에는 틈새가 벌어졌으므로 그런 사소한 걸 모르더라도 꼭 멍청한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멍청한 건 아니라는 얘기.
집에 돌아와서 계속 핸드폰만 보고 있다. 옷도 안 갈아입고 계속 그러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내가 계속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실 뭉치가 풀릴 듯 말 듯. 어쩌면 그와 나는 우연히 만난 것이고 우연히 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니면 모조리 다 꿈인 것일지도. 그를 만난 시점부터 지금 까지가 모조리 꿈인 것이 나을까 꿈이 아닌 것이 나을까. 멍청하니까 몰라도 되는 걸까. 그건 좀 아닌데. 만약 그를 만난 시점부터 지금까지가 모조리 꿈이라면 난 풀리지 않는 거대한 실 뭉치 따위 안고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거다. 대신 막역한 사이었던 그와 내가 막연한 사이가 되는 것. 아, 커피 마시고 싶다. 실 뭉치가 더 복잡하게 꼬인다. 엄청나게 크고 풀 수 없는 실 뭉치가 뇌를 감싸고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머리가 아프다. 나 혹시 버림받은 걸까. 버림받아서. 어릴 때 종종 가지고 놀던 인형을 내다버린 것과 같이 그 역시 가지고 놀던 인형을 버리는 것처럼 나를 버린 건 아닐까. 아무래도 버린 건 금방 잊기 마련이니까.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을 1년 씩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핸드폰 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나.”
“아아.”
“아직 이사 안 갔지?”
“응, 왜.”
날 버렸어?
“아직 치즈 케이크 좋아하지?”
“응. 왜.”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 집에 있지.”
“응. 왜”
나는 네 일상에 영향을 안 준거야?
“나 너네집 앞인데.”
사실 뻔뻔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문 좀 열어 줘.”
결국은 이런 뻔한 이야기. 치즈 케이크는 헤어지고 나서 1년 동안 일부러 한 번도 안 먹었는데. 정말 바보같이 하필이면 치즈케이크 같은 거를. 전화를 끊으면서 밖을 보니 비가 온다. 많이 온다. 아주 많이많이. 처음 만났을 때도 두 번째 만났을 때도 세 번째 만났을 때도 헤어질 때도, 그는 비가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비를 맞고 자주 감기 걸리는 그를 보면서 그가 감기 걸리는 게 썩 싫지 않아 비 오는 걸 싫어하진 않았다. 감기 걸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줄 때 기분이 좋았다. 그는 그런 목소리가 참 좋았다.
“안 젖었네.”
“응. 우산 쓰고 왔어.”
우산을 쓰고 왔다면서 자랑스럽게 우산을 보여준다. 나는 비가 많이많이 오길래 그가 많이많이 젖었을 거 같아서 수건을 들고 있는데. 너 왜 우산 쓰고 왔니. 니가 우산을 쓰고 와서 수건을 들고 있는 내 손이 바보가 됐잖아. 그럼 내가 멍청한 게 티 나버리잖아.
“저녁 먹었어?”
“아니 아직.”
“그럼 케이크 먹으면 되겠다.”
그런 거 먹고 싶은 기분 아닌데. 너 재수 없어. 니가 사온 건 안 먹을 거야.
“응. 그럼 되겠다.”
이런. 자기 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우리 집 소파에 앉는 그를 보며 나는 당황스러워졌다.
“마실 거 좀 주라.”
“우유랑 물 밖에 없는데.”
만약 그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면, 나를 조금이라도 닮았을까, 닮지 않았을까. 나를 조금이라도 닮았으면 그게 위안이 될까. 아니면 더 비참해질까.
“물 주세요.”
“넹.”
내가 따라 준 물을 마시는 그의 모습이 너무 영화 같았다.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영화 보고 싶다.”
“무슨 영화?”
“아무거나. 그냥 영화.”
“내가 가서 빌려올까?”
“아냐.”
그럴 필요 까지는. 하지만 갑자기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티비를 켰다. 여기저기 돌리다가 볼 만한걸 찾았다. 난 오늘 이걸 끝까지 봐야겠다.
“난 니가 로맨스 같은 거 보고 싶어 할 줄 알았어.”
“불만이야?”
“아니.”
니가 불만이어도 난 이걸 볼 거야. EBS에서 하는 영화. 소리도 안 나오고 흑백이다.
“안 본 사이에 고상해 졌구나.”
“흥.”
“케이크 먹어.”
“응 먹을 거야.”
제대로 좀 보려고 하는데 거의 마지막 장면인가보다.
“이거 다 끝나 가는 거 같은데.”
“그래도 볼 거야.”
“알았다니깐. 누가 못 보게 한다니.”
내가 사는 세상과 좀 많이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아. 저 영화의 일상과 나의 일상의 차이가 클까, 그의 일상과 나의 일상의 차이가 클까. 소리가 없는 세상의 이질적이란. 그렇대도 그의 일상과 나의 일상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날 버린 사람. 그렇지. 이런 삽질을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 바로 ‘그’ 이니까.
버려지다와 버리다의 차이는 엄청나게 큰 거다. 누구든 버리는 건 쉽게 할 수 있으니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만 버려지는 건 굉장히 큰일이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그에게 매달려야 할까, 버려지지 않은 것처럼 멀쩡한 모습으로 다녀야 할까를 가지고 고민해야 하는 것부터가 힘든 일이다.
언짢고 성가시며 귀찮기도 하다. 난 그 둘 사이에서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헤맸다. 날 버린 사람이 날 잊는 것만큼 비참한 게 또 있을까. 생각해보니 버린 것 자체가 잊겠다는 거 아닌가. 그가 날 잊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버린 게 아닌 걸까. 아님 버리고 나서 잊지 않은 걸지도 모르고. 둘 다 싫다. 그냥 전부 다 꿈이면 좋겠다.
“안 바뻐?”
“응.”
“너 아깐 바쁘다며.”
“일 다 끝내고 왔어.”
그가 어깨를 으쓱 하고 들어 보인다.
“언제 갈 거야?”
“나 갈까?”
“응.”
좀 가주면 좋겠다. 좀 가주라. 니 얼굴 보니까 머릿속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잘 있어.”
그런 표정으로 웃지 좀 말지.
“응. 잘 가.”
쾅, 하고 문이 닫혔다. 뭔가가 쾅 하고 덜컥 내려앉는다. 1년 만에 만난 사람한테 빨리 가라고 하는 내게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아무 미련 없이 가겠다고 일어선 그에게 문제가 있었던 걸까. 물어보려고 한 것도 많았었는데 그런 거 하나도 못 물어 보고 그냥 가라고 하다니.
아까 거기 왜 지나간 거였어?
내 핸드폰 번호 왜 물어 봤어?
그 치즈 케이크 어디에서 샀어?
오늘 우리 집에 왜 왔어?
아직도 그 강아지 길러?
새로운 연인 같은 게 생겼어?
그 사람 나와 조금이라도 닮았어?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
왜 나를 버렸어?
나한테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래?
나한테 왜 이래?
아직도 그 회사 다니나보다. 내 핸드폰 번호 정말 까먹어서 물어 본 거겠지. 전에 그의 회사 앞에 있는 빵집에서 종종 케이크 사왔었는데, 그 집 케이크인걸지도. 오늘 우리 집에 온건 심심해서..... 또는 할 일이 없어서. 아님 할 일이 없어 심심해서. 강아지 정말로 귀여웠는데, 아직 기르겠지.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면 왜 오늘 나를 찾아왔으며, 혹시 그 혹은 그녀가 나와 조금이라도 닮았는지. 아니 생겼었는데 나와 마찬가지로 헤어진 건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새로운 연인 따위 아직 없다면, 1년 전에 우린 왜 헤어진 건지. 나를 사랑하긴 했을 거라고 철썩 같이 믿는다. 왜냐하면 우린 그 때 조금의 틈새도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었으며, 혹시나 그렇다고 해도, 그가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실 뭉치는 미친 듯이 더더욱 커질 테니까. 나를 버린 건 아니겠지. 그냥 우린 헤어진 거니까.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 이별한 거니까. 그런 쓸데없는 감상적인 우울함에 빠지지 말자.
소파 앞 탁자에 얌전히 올려 져 있는 치즈 케이크가 매우 기분 나빴다. 치즈 케이크가 그인 것 같았다. 던져버리고 싶다. 대체 뭐야. 기분 나빠. 짓뭉개고 싶다. 지근지근 밟아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리고 싶을 만큼 매우 기분 나쁘다. 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렇게 얌전하게 있고 싶니?! 아무렇지도 않냐구. 멀쩡해? 1년 동안 나를 한 번도 안 봤으면서. 난 널 1년 동안 안 봤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조금쯤 당황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그랬는데, 넌 아무렇지도 않잖아. 난 그해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넌 그런 것 따위 없었다는 듯이 나를 대하니까 몇 대쯤 때려주고 싶었어.
그가 나간 현관문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치미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탁자 위의 케이크를 엎어버렸다. 바닥에 떨어져버린 치즈 케이크를 모조리 발로 밟아버렸다. 자근자근 밟혀져서 원래의 모습 따위 찾아볼 수 없게 된 모양이 조금은 불쌍하기도 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처참하게 뭉개져버린 치즈 케이크 같은 것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을 만큼 피폐해진 내 현재 상태가 꼴사납고 언짢고 기분 나쁘고 슬프고 화나고 또 가슴이 아프다. 울고 싶다. 정말로 울고 싶다.
그래서 울었다. 울고 싶어서 큰 소리로 우는 게 대체 얼마만일까. 그와 헤어졌을 때도 이렇게 울지는 않았는데. 처음에 울기 시작한 것은 뭉개진 케이크가 슬퍼서였는데 울다 보니 어릴 때 기르던 조그만 강아지가 아파서 죽었던 것도 생각나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생각나고, 중학교 때 엄마랑 아빠가 매일 밤 지치도록 싸우다가 이혼 했던 것도 생각나고……. 그와 헤어지던 날도 생각이 났다. 그와 나는 큰 소리로 싸우거나 다투지도 않고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후에 약간은 웃으면서 헤어졌다. 대체 거기서 뭐가 잘못 된 거 길래. 한 시간 쯤 큰 소리로 울고 나니 나는 지쳐버렸고, 치즈 케이크가 뭉개진 바닥에 그대로 누워서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꿈을 꾸었는데, 거대하고 풀 수 없는 실 뭉치가 희미해지더니 어떤 날카로운 것에 잘려지는 것을 보고 있는 꿈이었다. 깨고 나서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렸다. 그래서 다시 잠들어 버렸고, 또 다시 잠에서 깼을 때 애초에 실 뭉치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상식적으로 그런 게 있었을 리가 없다. 풀리지 않는 거대한 실 뭉치는 그와 헤어진 후에 내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다. 나는 그 때 그와 나의 사이를 이어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그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았던 거고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것은 쉽게 풀 수 있는 단순한 실 뭉치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풀어져버리면 그와 나의 사이도 풀어져 버릴 것으로 겁 먹어버리고 그 것을 꼭꼭 숨겨두고 거대하고 풀 수 없는 실 뭉치로 만들어버렸던 거다. 쉽게 풀 수 있는 단순한 실 뭉치는 눈덩이가 불어나듯이 점점 커지고, 결국에는 거대하고 풀 수 없는 실 뭉치가 되어버렸다. 손 댈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실 뭉치는 쉽게 풀 수 있는 단순한 실 뭉치에 비해 열두 배 쯤 더 큰 압력이었다. 나는 그것이 쉽게 풀 수 있는 단순한 실 뭉치일 때 보다 그것 옆으로 가는 것에 대해 열두 배 쯤 더 겁을 먹었다. 그래서 그와 헤어지고 1년 동안 거대한 실 뭉치를 가지고 풀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당황하고 있었던 거다. 그게 애초에 허상이었건 실재였건.
나는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도 잊은 채 거대하고 풀 수 없는 실 뭉치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나를 속여 작년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뒤늦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 풀어보려고 했을 땐 그것이 이미 손목 까지 타고 올라와 칭칭 감아버려 나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멍청이로 만들어 버렸다. 멍청이가 되고 싶어서 멍청이가 되는 사람은 없다. 주변의 이러저러한 상황, 혹은 사람, 계절, 아님 한 통의 전화라도 무언가 조건이 된다면 그것은 어렵지 않게 그 사람을 멍청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고, 그건 그 사람으로서는 불가항력인 것이다.
내게 그해 겨울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나를 멍청이로 만들어버렸고, 작년 겨울이 간다면 내가 멍청이가 아니게 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거다. 현실이라고 믿고 있던 실 뭉치가 허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에서 작년 겨울을 보내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간단한 사실을 1년씩이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탓할 필요도 없다. 겨울을 보내는 것은 그걸로 끝난 거다. 더 이상 뭐라고 부연 설명할 것도 없으며, 설령 있더라도 그게 무슨 소용인가.
이미 나는 작년 겨울을 보내버렸는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