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은 38선의 분기점이자 전곡읍과 청산면을 나누는 경계로 양 지역을 굽이쳐 도도
히 흐르는 청아하고 경관이 좋기로 유명한 강이다.
특히 한탄강의 특징은 물이 맑고 시원함은 물론 강 양편에 깍아지른 듯 한 절벽이 양
측면에 병풍을 친 것 같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는 반듯이 분지의 형상을 이룬 평야를
형성하고 있어 마치 태고적에는 강 건너 저쪽과 이쪽이 한곳에 맞닿아 있던 지형이 지
진과 같은 작용에 의해 양쪽으로 갈라져 그 계곡이 강으로 형성된 것 같은 감을 느끼
게 하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한탄강의 유래는 갖가지 많은 전설과 설화를 지니고 역사의 흐름인양 하여 그 맑음과
경관을 자랑하며, 오늘도 말없이 흐르고 있다. 한탄강은 본래 "한 여울"이라고 불렀
다. 그래서 지금도 나이 많은 노인들은 간혹 옛 이름 그대로 "한 여울"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도상의 명칭도 "한 여울"이라 표기(表記)된 것도 있다.
한 여울의 "한"자와 "여울"은 순수한 우리 말로써 "한"자는 "한 아름", "한껏", "한밭
(大田)"등과 같이 "크다"는 의미와 그 형상이 마치 하늘의 "은하수"같이 아름답고 넓
고 깊다하여 "은하수 한"자의 "漢"자로 표기했으며, 그 형태가 계곡과 절벽을 굽이쳐
흐르는 "여울"이라 하여 "여울 탄"자인 "灘"자를 써서 오늘날의 한탄강(漢灘江)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탄강"은 즉 "한 여울"은 "큰 여울"이라는 뜻으로 불려졌다.
지금도 청산면(靑山面) 초성리 마을에 "열 두 개울"이라는 세천(細川)이 있으며, 이곳
역시 그 흐름이 계곡과 계곡의 열 두 계곡을 돌고 돌아 여울져 흐른다 하여 "열 두 여
울" 또는 "열 두 개울"이라고 불린다.
이렇듯 한탄강은 급류의 "큰 여울"임에 틀림없다.
6·25 이전에는 한강 하류인 강화(江華)에서 생선과 새우젓, 생필품 등을 실은 상선이
임진강을 거쳐 한탄강을 따라 이곳 전곡읍 마포리의 "도감포(都監浦)"나 지금의 전곡
읍 고능리 사기점에 들어와서 이곳 특산물인 사기 및 옹기, 그릇, 콩, 쌀 등과 생필품
인 석유, 의류, 비누, 신발류 등을 물물교환 하거나 사고 파는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한
다.특히 일제시대에는 그 상황이 활발했다 하나 한탄강의 수심이나 강수량이 상선의 출
입이 용이하리 만큼 충분했다는 점으로 보아 "큰 여울"임에 틀림없었던 것 같다. 이러
한 어원적 의미의 표기로 "한 여울"은 큰 강이며, 아름다운 뜻의 "한탄강"이라고 불려
지게 되었다. 이러한 한탄강은 역사적 흐름과 심판에 의해 조국의 비운과 함께 그 운명
을 같이 했으니 1945년 조국광복과 더불어 미소(美蘇)에 의해 민족의 한이 서린 38선
이 한탄강을 경계로 그어지게 되자 북으로는 공산치하, 남으로는 자유한국이 되어 반도
의 경계선이며, 아픔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밤이면 수 많은 월남민이 북쪽의 공산치하
의 학정에 견디다 못해 헤어진 가족과 만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한탄강을 도강하
다가 한맺힌 최후를 마친 피 맺힌 사례가 허다하며, 6·25때는 이 강이 괴뢰군과의 치
열한 격전장이기도 하여 남과 북의 양쪽 병사의 시체와 붉은 피가 인근 산하를 뒤덮었
다. 이와같이 남과 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의 "한(恨)"이 서린 강이라하여 "恨歎江"이
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1977년 3월부터 국민관광지로 지정하여 수도권 주민의 귀중한 휴식처가 되었으나 현재
는 오염이 심해 관광객이 줄어드는 형편이다.
한탄강 계곡의 절경
한탄강은 38선의 분기점이자 전곡읍과 청산면을 나누는 경계로 양 지역을 굽이쳐 도도 히 흐르는 청아하고 경관이 좋기로 유명한 강이다. 특히 한탄강의 특징은 물이 맑고 시원함은 물론 강 양편에 깍아지른 듯 한 절벽이 양 측면에 병풍을 친 것 같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는 반듯이 분지의 형상을 이룬 평야를 형성하고 있어 마치 태고적에는 강 건너 저쪽과 이쪽이 한곳에 맞닿아 있던 지형이 지 진과 같은 작용에 의해 양쪽으로 갈라져 그 계곡이 강으로 형성된 것 같은 감을 느끼 게 하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한탄강의 유래는 갖가지 많은 전설과 설화를 지니고 역사의 흐름인양 하여 그 맑음과 경관을 자랑하며, 오늘도 말없이 흐르고 있다. 한탄강은 본래 "한 여울"이라고 불렀 다. 그래서 지금도 나이 많은 노인들은 간혹 옛 이름 그대로 "한 여울"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도상의 명칭도 "한 여울"이라 표기(表記)된 것도 있다. 한 여울의 "한"자와 "여울"은 순수한 우리 말로써 "한"자는 "한 아름", "한껏", "한밭 (大田)"등과 같이 "크다"는 의미와 그 형상이 마치 하늘의 "은하수"같이 아름답고 넓 고 깊다하여 "은하수 한"자의 "漢"자로 표기했으며, 그 형태가 계곡과 절벽을 굽이쳐 흐르는 "여울"이라 하여 "여울 탄"자인 "灘"자를 써서 오늘날의 한탄강(漢灘江)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탄강"은 즉 "한 여울"은 "큰 여울"이라는 뜻으로 불려졌다. 지금도 청산면(靑山面) 초성리 마을에 "열 두 개울"이라는 세천(細川)이 있으며, 이곳 역시 그 흐름이 계곡과 계곡의 열 두 계곡을 돌고 돌아 여울져 흐른다 하여 "열 두 여 울" 또는 "열 두 개울"이라고 불린다. 이렇듯 한탄강은 급류의 "큰 여울"임에 틀림없다. 6·25 이전에는 한강 하류인 강화(江華)에서 생선과 새우젓, 생필품 등을 실은 상선이 임진강을 거쳐 한탄강을 따라 이곳 전곡읍 마포리의 "도감포(都監浦)"나 지금의 전곡 읍 고능리 사기점에 들어와서 이곳 특산물인 사기 및 옹기, 그릇, 콩, 쌀 등과 생필품 인 석유, 의류, 비누, 신발류 등을 물물교환 하거나 사고 파는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한 다.특히 일제시대에는 그 상황이 활발했다 하나 한탄강의 수심이나 강수량이 상선의 출 입이 용이하리 만큼 충분했다는 점으로 보아 "큰 여울"임에 틀림없었던 것 같다. 이러 한 어원적 의미의 표기로 "한 여울"은 큰 강이며, 아름다운 뜻의 "한탄강"이라고 불려 지게 되었다. 이러한 한탄강은 역사적 흐름과 심판에 의해 조국의 비운과 함께 그 운명 을 같이 했으니 1945년 조국광복과 더불어 미소(美蘇)에 의해 민족의 한이 서린 38선 이 한탄강을 경계로 그어지게 되자 북으로는 공산치하, 남으로는 자유한국이 되어 반도 의 경계선이며, 아픔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밤이면 수 많은 월남민이 북쪽의 공산치하 의 학정에 견디다 못해 헤어진 가족과 만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한탄강을 도강하 다가 한맺힌 최후를 마친 피 맺힌 사례가 허다하며, 6·25때는 이 강이 괴뢰군과의 치 열한 격전장이기도 하여 남과 북의 양쪽 병사의 시체와 붉은 피가 인근 산하를 뒤덮었 다. 이와같이 남과 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의 "한(恨)"이 서린 강이라하여 "恨歎江"이 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1977년 3월부터 국민관광지로 지정하여 수도권 주민의 귀중한 휴식처가 되었으나 현재 는 오염이 심해 관광객이 줄어드는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