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관련 자료들, 그의미있는 커밍아웃

최용일200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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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과천시는 2일 기자회견을 갖고 일본 도쿄에 거주하고 있는 후지즈카 아키나오(藤塚明直·94)로부터 추사 관련 자료 일체를 기증받았다며 이 중 일부를 공개했다. 후지즈카 씨가 기증한 유물과 자료들은 일제강점기 추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던 그의 부친 후지즈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가 평생 모은 것이니 일본인 부자(父子)의 한국 문화재 사랑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 관련 유물의 잇단 고국 귀환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번에 기증 받은 자료는 ▲서화류 70여점 ▲서적 2,500여 책 ▲사진·유리원판 등 300여점으로 나뉜다. 서화류 70여점 가운데에는 추사의 친필 편지 20여점을 비롯해 추사가 옹방강, 완원 등 청대 학자들로부터 받은 편지와 서화들이 포함돼 있다.

 

 

후지즈카 씨는 “이번에 기증한 추사 관련 유물은 선친의 일생이 담겼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도 소중한 자료지만 여생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내가 눈을 감으면 이렇게 귀중한 자료를 어떻게 보존하나’ 하는 고민을 하다 기증을 결심했다. 유물들은 앞으로 유물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갖고 영원히 살아 나갈 것이다. 귀중한 유물들이 자기 나라로 무사히 돌아가게 된 것을 아버지도 아주 기쁘게 생각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버지는 평생을 한국, 중국 문화 연구에 바친 분이다. 어느 민족이나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있고 거기에는 그 민족 고유의 정신이 담겨 있으며 학자는 그런 문화에서 배우고 자료를 모아 이를 후세에 널리 전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신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유물을 기증함으로써 나도 기쁘고, 아버님도 기뻐하실 텐데 이처럼 큰 기쁨을 얻고도 그냥 자료만 주는 것으로 끝내자니 무언가 미흡하다는 느낌이 들어서…”라는 말과 함께 추사 연구에 써 달라며 200만 엔(약 2000만 원)도 함께 기탁했다.


후지즈카 씨의 부친은 1926년 경성제국대(서울대의 전신) 중국철학 교수로 부임한 후 추사의 학문 세계에 매료돼 중국 베이징의 고미술 거리와 한국의 인사동 등지를 돌며 추사 관련 자료를 구입했다. 특히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된 추사의 대표작 ‘세한도(歲寒圖)’를 갖고 있던 그는 이 작품을 돌려 달라는 서예가 손재형(孫在馨)의 설득에 따라 일본 패망 직전에 한국으로 돌려보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추사의 친필 서한 20여점이다. 모두 미공개 자료인 데다 추사가 40~60대에 쓴 편지가 고루 들어 있어 추사체 변천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날 언론에 공개된 추사 친필자료는 20여점 가운데 2점으로 추사가 1827-28년에 40대 초반 명희과 상희 두 동생에게 편지 13통을 묶은 간찰첩 ‘기양제첩(寄兩弟帖)’ 1점과 말년의 과천시절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보낸 편지 2통을 묶은 간찰첩 1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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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양제첩(寄兩弟帖)이라는 제목의 간찰집


두 아우에게 보낸 기양제첩의 편지들은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가기 전에 쓴 것으로 추사체가 확립되기 전의 추사 글씨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추사의 제자이자 ‘세한도’의 주인공인 이상적에게 보낸 간찰은 전형적인 추사체로 쓰여 있으며 사제 간의 은근한 정이 잘 드러나 있는데, 특히 추사가 66세 때인 1852년 함경도 북청 유배지에서 풀려나 경기 과천에 머물 때 보낸 편지 ‘기우선(寄藕船·우선에게)’에는 정쟁에 휘말려 만년에 유배지를 전전해야 했던 노 선비의 외로운 심경이 절절히 녹아난다.



‘…추위에 대한 고통이 북청에 있을 때보다도 더하네. 밤이면 한호충(寒號蟲·산박쥐)이 밤새 울어 대다가 아침이 돼서야 날아간다. 저무는 해에 온갖 감회가 오장을 온통 휘감고 돌아 지낼 수가 없네….’과천시는 추사 서거 150주년을 기념해 11월 열릴 국제학술대회에 후지즈카 씨의 초청을 추진하다 자료를 기증받게 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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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함께 공개된 고모의 손자 민태호에게 보낸 편지도 추사의 필체는 물론, 추사가 예서를 배울 때 주의할 점을 전하는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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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번에 공개된 청대 학자들이 쓴 서화는 추사와 그 제자 이상적, 그리고 동시대의 실학자 박제가, 유득공 등이 받은 것이 주류를 이룬다. 청대 학자 왕희손(汪喜孫)이 추사에게 보낸 ‘왕희손서첩’, 청대의 학자 장목, 이장욱, 주당 등이 추사의 동생 김명희와 제자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 등에게 보낸 서한을 묶은 ‘청대학자서간첩’, 추사의 스승 옹방강의 제자 오숭량이 김명희에게 써준 ‘오숭량서첩’, 추사가 귀국할 때 청나라 학자들로부터 받은 전별서화첩 ‘증추사동귀시도임모’와 ‘국화도’ 등은 추사를 비롯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청대 지식인과 활발히 교류했음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 그 의미가 크다.

 

김정희와 교유했던 청나라 학자들이 쓴 저서들역시 추사 학문연구에 필수자료이다. 기증 자료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서적류는 추사의 금석학과 경학연구가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중 ‘해동금석영기’는 추사의 스승 옹방강이 조선의 학자들로부터 전해받은 금석문에 대한 내용과 연구 과정을 친필로 기록한 자료로 중국은 물론 일본에도 없는 유일본이다. 추사 이외에 홍현주, 신위 등 금석문을 제공한 조선의 학자들의 이름이 보이는데 추사의 견해를 별도로 기록한 게 많아 옹방강과 추사의 교류관계가 긴밀했음을 보여준다.


또 추사와 함께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한 조인영이 쓴 ‘해동금석존고’, 김명희·조인영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엮은 ‘해동금석원’도 기증자료 목록에 들어 있다. 이와 함께 추사의 스승이자 청대의 대표적 경학가인 완원이 저술한 학술총서 ‘황청경해’는 모두 680책이나 되는 거질로, 완원은 이 책의 초판이 인쇄되자마자 바로 추사에게 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사진·유리원판 등은 후지즈카 지카시가 추사와 청대 학자들의 학문을 연구할 때 수집한 자료를 촬영해 놓은 것으로 추사 영정, 박제가 초상화 등 귀중 자료가 대거 포함돼 있다. 사진 속의 실물은 상당수 유실돼 추사 연구에는 없어서는 안될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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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년 2월 한양으로 돌아가는 추사를 위해 청나라 학자들이 마련한 전별연의 모습을 그린 ‘증추사동귀도(贈秋史東歸圖). 청나라의 화가 주학년의 작품을 일제시대 이한복이 그대로 베낀 임모그림이다. 오른쪽이 추사의 초상화다.



과천시는 현재 건립을 추진 중인 종합문화회관에 후지즈카 지카시 자료관을 마련하는 한편 자료 번역, 전시회, 국제학술대회 개최 등을 통해 학계에 자료를 공개할 방침이다.

 

자료를 설명한 추사연구회 연구위원 김영복씨는 “그간 국내의 추사 연구는 서예, 인물 등에 치중돼 있을 뿐 추사의 학문에 대한 연구는 미진했었다”면서 “이번 자료는 추사의 금석학·경학의 전모를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