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캐태스킹(multi tasking). 본디 하나의 CPU(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로 여라개의 작업을 수행한다는 이 말은 , 꼭 컴퓨터 작업이 아니라도 일상생활 가운데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해치운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안그래도 성질 급한 한국 사람들인데, 세상마저 더 많은 일을 최단시간에 하라고 요구하는 '담즙질 사회'로 변해가면서, 점점 멀티태스킹 형 인간이 늘고 있다. 싸이월드나 각종 포털에서는 가끔씩" 회원님은 한 번에 몇가지 일을 할 수 있나요?" 라고 물어보곤 하는데,거기를 크릭해보면 서너 가지를 동시에 하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대여섯 가지도 한다는 수많은 이들의 '간증'이 나열돼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음악을 듣고, 책은 펴놓고 엠에센을 하면서 동시에 건너편에 있는 TV 화면을 보면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은 더 이상 남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번에 한가지씩
사람들은 할 일도 많고, 즐길 것도 많고, 신경 쓸 일도 많은 이세상 에서 몇 가지 일을 동시에 병행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이런 식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다중작업을 하지 않으면 시간이 아깝다고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주어진 한 번의 시간에는 한가지 것에 전념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골 3:23)는 말씀대로 한가지 일에 온 마음과 몸을 다하여 해보라. 그러면 그것에 새로운 신비가 열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배나 묵상, 기도나 찬양만을 주께 하듯 하란 말이 아니다. 교회 봉사나 제자 양육, 해외 선교와 사회 참여만을 주께 하듯 하란 말이 아니다.고맙게도 복음주의 신자들은 이런일들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훈련이 되어 있다. 내가 말하는 바는 특이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그런일들, 정지용의 시 의 한구절을 빌자면"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그런 일과를 주께 하듯 해로라는것이다.
잠시 몇년 전 일기장의 한편을 들춰보도록 하자.
요즘 나의 하루는 이렇게 채워지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수천명을 놓고 말씀을 전하는 것에만 주님이 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소한 일상사 속에 우리 주니이 임하신다. 그러한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내가 모든 일을 주께하듯 하면 기쁜이 넘친다. 아주 작은 일도 지성으로 임하면 삶의 신비를 발견하게 된다. 밥을 먹을 때도 밥먹는 행위에 집중하면 음식물을 추한다는 것자체가 하나의 신비로 다가온다. 반찬의 재로가 된 피조물들의 맛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느껴지고 내 마음은 감사로 가득차게 된다. 대학원 시절 성실이 누나가 주스 마시는 내 모습을 보며 말했듯이 한 잔의 주스를 마셔도 그맛을 만끽하려고 최선을 다하면 그 맛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고 그로 인해 삶이 즐거워진다. 설거지를 해도 물과 세제를 아끼는 노력을 들이며 지서으로 임하면 닦여지는 그릇을 통해서도 기쁨이 충만해진다.
그러므로 밥을 먹을 때에도 주께 하듯 먹어보라. 수저를 들기 전에 잠들어 있는 오감을 일깨워 온몸으로 밥을 먹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린 다음 , 이전에 습관적으로 하던 '밥 먹는 행위 그 자체'를 의식적으로 느끼면서 먹어보라. 그러면 밥 먹는 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감사한 일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수저를 뜰 때마다 벼를 키운 들판의 햇살과 바람이 느껴지고, 베문 김치 한 조각에서 빗소리와 흙냄새가 느껴질 것이다. 자연스레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이 절로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당근 한 족각에 한줌 햇빛과 긂과 땅이 들어 있어으며, 따라서 그것을 먹으면 온 우주와 만나는 것이 라는 틱낫한
(Thich Nhat Hanh)스님의 말 - 책 좀 읽은 복음주의자들이 범신론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경계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 은 허튼 소리가 아니다.
생활 속의 영성, 일상 속의 신비 1
이런 삶의 자세와 태도는 생활 구석구석에 다 옮겨 질 수 있다. 매번 습관적으로 바복하는 일도 '깨어서'(mindful)하면 완전히 달라진다.
손을 씻을 때에도 손 씻는 행위 자체에 주목하면 흐르는 수돗물 소리도 시냇물 소리처럼 경쾌하게 들리고 "비누는 때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앙리 마쇼(Henri Michaux)의 말 처럼 비누의 존재도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게다가 떠오르면서 말갛게 닦여진 내 손과 얼굴은 어쩜 이리도 아름다운지!
위의 일기에서도 언급됐지만, 설거지도 ' 깨어서 '하면 손과 물과 그릇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신비와 기쁨을 맛보게 된다. 내가 설거지를 좋아하는 까닭이 이것이고, 틱닛한 스님이 미 프린스턴 대학유학시절 설거지를 도맡아 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스님은 접시와 물그리고 손의 움직임 하나한나를 완전히 자각하면서 접시와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진다고 했다. 그는 [깨어있는 마음의 기적]이란 책에서 설거지를 즐길 수 있는 비결에 대해 " 무슨 일을 하든 지 당신의 온 마음과 몸을 다하는것"이라고 했다.(이럴 수가! 우리는 바울이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이 노스님에게서 듣는다. 그런데 왜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에게서는 이말을 생활영성의 맥락에서 들을 수 없는 것일까? 교회 대신 스님에게서라도 이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활영성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보여주는 일이라 잠시 우울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설거지할 때 조차도 기도한다'는 일부 헌신되 그리스도인의 말이 굉장히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는 것같지만, 실은 설거지 하는 동안 머릿속을 다른 기도제목으로 꽉 채우는 것보다는, 설거지 그 자체를 주께 하듯 하는것이 더 깊은 기도요, 더깊은 영성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설거지나 회살 일 같은 일만이 아니라 놀 때에도 온 마음을 다해 놀아보라.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노는 인간'(homo indues)으로 지으셨다는 것, 신나는 놀이 속에 신명을 일으키는 성신이 임하는 것, 그리고 놀이 치료사들이 말하는 놀이 속에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아이들 하고 놀아줄 때도 그저 의무적으로 '놀아주지' 말고 놀이 자체에 몰입해서 아이들보다 더 신나게 놀아보라. 그런 엄마와 압바, 그런 아이들이 유난히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시시해 보이는 놀이를 아이들보다 더 즐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엠에센이나 네이트온에서 채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딴 짓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채팅도 '온맘다해' 해보라.나는 채팅조차도 진지 모드로 일관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엄숙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깃털처럼 가벼운 말들 속에서그 사람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배어나오는 그마디에 배어나오는 그의 관심, 그의 공허함, 그의 영혼에 집중해보라, 온라인을 통해서도 신비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을 만나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할 때에는 내가 더 이상 무슨말을 하겠는가! 사람을 앞에 두고서도 머릿속에 는 온통다른 생각, 다른 걱정으로 꽉 차있다면 어떻게 영혼과 영혼이 맞닿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는가? 어렵게 시간을 내서 사랑하는 이를 만났으면서도 온 정성을 다해 그 사람을 섬기려 하고 편안하게 해주려고 하지 않는 다면 그 만남이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사귀고 교제하고 양육해도 열매가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남녀노소를 떠나 모든 사람은 단 몇 분의 만남이라도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는 사람, 내가 완전히 환영받고 있고 수용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줄 그런 사람을 원하는것이다.
그나마 차을 마실 때만큼은 대부분 차 마시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편이지만, 차의 빛과 행과 맛과 온기에 한결 더자신을 젖어들게 해보라.마시고 있는 찻잎에 듣는 빗방울, 부서진 햇살, 스치는 바람결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 모든 것 뒤에서 미소 짓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가? 만약 차를 마시는 일을 통해서도 이러한 신비를 누릴 수 있다면, 굳이 다도를 선의 경지로 끌어올린 [동다송]까지 읽어 볼 필요가 있겠는가?
생활 속의 영성, 일상 속의 신비2
이렇듯 한 번에 한 가지를 주께 하듯 하는 모노캐스팅 영성은 심지어 가장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걸음'에도 실천될 수 있다. 우리의 오감이 성령에 의해 활짝 열려진 상태로 걷기 그차체를 느끼며 걸을 때 다시 한번 신비를 맛보게 된다. 복음주의자중에 이런 글을 쓴 사람을 찾지 못해 다신 한번 틱낫한 스님의 말을 인용할 수 밖에 없음이 아쉽다.
"그냥 대지 위를 천천히 걸어라. 차가운아스팔트가 아니라 아름다운 지구별 위를 걷는다고 생각하라. 다음, 생각을 놓아버리고 그냥 존재하라. 숨을 들이쉬면서 마음에는 평화, 숨을 내쉬면서 얼굴에는 미소, 그대 발걸음마다 바람이 일고, 그대 발걸음마다 한 송이 꽃이 핀다. 나는 느낀다.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경이로운 순간임을,당신은 이미도 도착했다.
티낫한 스님은 '당신은 이미 도착했다'고 할때 득도와 해탈을 염두에 두었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신비 속에 도착한 것으로 이해하면 큰 거부감없이 그의 '걸음의 영성'을 받아 들일 수 있다.
걷는 것조차 신비가 될 수 있다면 하물며 청소를 하는 것, 기저귀를 갈아주는것, 음악을 듣는 것 , 채소를 키우는 것, 전철을 타고 가는것,사진을 찍는 것,책을 읽는것,영화를 보는 것, 전화를 하는 것,싸이질을 하는 것, 그리고 입맞추는 것에서 신비를 누릴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이러한 모노태스킹 생활영성으로 충만하게 되면 "내가 온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하려 함이라"(요 10:10)는 말쓰미 종교적으로 의미 없어 보이던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피어나는지 보게 된다.
이런 점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하라"는 말씀은 멀티태스킹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너무나 위대한 말씀이다. 알고 보면 이 말씀은 주님을 위한 말씀이 아니고 우리를 위한 말씀이다. 지극히 작은 일 하나, 습관적으로 하는 일 하나라도, 그 일 자체를 자각하는 가운데 온 몸과 정서을 다해 주께 하듯 한다면, 살아가는 매 순간이 신비요, 기도요 , 묵상이 된다. 우리가 이러한 삶의 양식을 빚어나간다면, 5월에 창조영성의 추구가 소비대중문화시대의 강력한 항체가 될수 있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모노태스킹 영성 역시 보암직한 새 상품을 향한 무차별적 지름신의 강림과 대중문화가 유일한 감동의 출처가 되는 빈곤한 생활을 너끈하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예상되는 반론
근데 어디선가 이런 반론이 들리는 것 같다."매 순간 오감을 다 자각하며 열과 성을 다해 한가씩 해내갈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나역시 이러한 훈련에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이라 그 말에 동감한다. 몸에 배지 않은 채 모든 일을 그렇게 하려고 하면 쉽게 지칠 수 도 있고, 차라리 이전처럼 아무생각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하지만 그것은 모든 일을 지성으로 할 때 우리가 누리는 전인(whole-being)의 만족함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다. 훈련된 생활 영성을 통해 전인적인 기쁨을 누리게 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힘이 솟아나게 되고, 그 힘을 길어 다시 다른 일을 주께 하듯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아직 체험해보지 못해서 모른다 치더라손, 설마 하나님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명하셨겠는가?
예상되는 또 하나의 반론은, 한 번에 한가지씩만 하자는 것은 할 일만은 이사회에서 능률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일을 능률,즉 투입된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얼마만큼의 결과물을 얻었느냐는 경제성만을 놓고 따지자면 , 도저히 멀티캐스팅을 따를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날 지식이나 정보가 모자라서 사람들이 헤매고 있는게 아니잖은가. 노랫말이 모자라서, 책이 부족해서,설교가 희귀해서 사람들이 헤매고 있는 게 아니잖은가. 단 한 곡을 쓰더라도 혼을 담은, 단 한 줄을 쓰더라도 삶을 부어낸, 단 한마디를 하더라도 진실을 담은, 단 한 사람을 먹이더라도 목숨을 다하는,그런 노래, 그런 글,그런 설교자, 그런 몾가 없기
때문에 이 따에 감동이 없고, 삶에 변화가 없고, 우리에게 기적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글을 쓰면서 나 역시 반성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빚고 숨을 불어넣으실 때처럼 그렇게 전부를 불어넣지 않은 말과 글을 얼마나 많이 내 뱉고 써왔는지를 말이다.
전복적 세계관으로서의 묵상
능률과 효율을 최고로 치는 오늘날의 가치체계와는 달리 모노테스킹의 영성은 성취보다 관계를, 양보다 질을 중시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은 전자를 후자보다 더 중시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에 - 특히 여자들에 비해 관계보다 성취를 중시하는 남자들에게는 - 멀티태스킹 생활 양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든,길가의 들꽃 한송이를 묵상하든,'묵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영성방법론이 아니라 오늘날의 가치관과 세계관 전체에 반하는 전복적 세계관이요. 대안대조 적인 삶의 양식임을 알게된다. 그러니 우리가 큐티진을 펴서 묵상을 한다는 것이 얼만나 큰 사회변현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일인가!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해방적 측면에서 무지몽매하고 정치사회적 참여를 주저해왔던 우리 보수복음주의자들이 다 른 사람들에게"큐티가 얼마나 큰 사회적 책임을 갖고 있는데"라고 말한다면 그들로부터 조롱만 받게 될것이다. 큐티가 갖고 있는 사회성을 공개적으로 밝히려면 최소한 성서한국대회 에서 언급된 수준의 실천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온 맘과 뜻과 힘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우리는 주님의 입에서 직접, 가장음뜸가는 계명이자 율법을 모두 요약한 것이 바로'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가 '이웃을 제몸처럼 사랑하는 것'임을 들어 잘 알고 있다. 오늘 우리는 '맘과 목숨과 뜻과 힘을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이 바로 '맘과 목숩과 뜻과 힘을 다해' 매순간을 살아가는 일임을 생각해본다.
한 번에 한 가지씩만하라.
멀티캐태스킹(multi tasking). 본디 하나의 CPU(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로 여라개의 작업을 수행한다는 이 말은 , 꼭 컴퓨터 작업이 아니라도 일상생활 가운데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해치운다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안그래도 성질 급한 한국 사람들인데, 세상마저 더 많은 일을 최단시간에 하라고 요구하는 '담즙질 사회'로 변해가면서, 점점 멀티태스킹 형 인간이 늘고 있다. 싸이월드나 각종 포털에서는 가끔씩" 회원님은 한 번에 몇가지 일을 할 수 있나요?" 라고 물어보곤 하는데,거기를 크릭해보면 서너 가지를 동시에 하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대여섯 가지도 한다는 수많은 이들의 '간증'이 나열돼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음악을 듣고, 책은 펴놓고 엠에센을 하면서 동시에 건너편에 있는 TV 화면을 보면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은 더 이상 남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번에 한가지씩
사람들은 할 일도 많고, 즐길 것도 많고, 신경 쓸 일도 많은 이세상 에서 몇 가지 일을 동시에 병행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이런 식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다중작업을 하지 않으면 시간이 아깝다고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주어진 한 번의 시간에는 한가지 것에 전념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라"(골 3:23)는 말씀대로 한가지 일에 온 마음과 몸을 다하여 해보라. 그러면 그것에 새로운 신비가 열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배나 묵상, 기도나 찬양만을 주께 하듯 하란 말이 아니다. 교회 봉사나 제자 양육, 해외 선교와 사회 참여만을 주께 하듯 하란 말이 아니다.고맙게도 복음주의 신자들은 이런일들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훈련이 되어 있다. 내가 말하는 바는 특이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그런일들, 정지용의 시 의 한구절을 빌자면"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그런 일과를 주께 하듯 해로라는것이다.
잠시 몇년 전 일기장의 한편을 들춰보도록 하자.
요즘 나의 하루는 이렇게 채워지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수천명을 놓고 말씀을 전하는 것에만 주님이 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소한 일상사 속에 우리 주니이 임하신다. 그러한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내가 모든 일을 주께하듯 하면 기쁜이 넘친다. 아주 작은 일도 지성으로 임하면 삶의 신비를 발견하게 된다. 밥을 먹을 때도 밥먹는 행위에 집중하면 음식물을 추한다는 것자체가 하나의 신비로 다가온다. 반찬의 재로가 된 피조물들의 맛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느껴지고 내 마음은 감사로 가득차게 된다. 대학원 시절 성실이 누나가 주스 마시는 내 모습을 보며 말했듯이 한 잔의 주스를 마셔도 그맛을 만끽하려고 최선을 다하면 그 맛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고 그로 인해 삶이 즐거워진다. 설거지를 해도 물과 세제를 아끼는 노력을 들이며 지서으로 임하면 닦여지는 그릇을 통해서도 기쁨이 충만해진다.
그러므로 밥을 먹을 때에도 주께 하듯 먹어보라. 수저를 들기 전에 잠들어 있는 오감을 일깨워 온몸으로 밥을 먹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린 다음 , 이전에 습관적으로 하던 '밥 먹는 행위 그 자체'를 의식적으로 느끼면서 먹어보라. 그러면 밥 먹는 것이 얼마나 신비롭고 감사한 일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수저를 뜰 때마다 벼를 키운 들판의 햇살과 바람이 느껴지고, 베문 김치 한 조각에서 빗소리와 흙냄새가 느껴질 것이다. 자연스레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이 절로 터져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당근 한 족각에 한줌 햇빛과 긂과 땅이 들어 있어으며, 따라서 그것을 먹으면 온 우주와 만나는 것이 라는 틱낫한
(Thich Nhat Hanh)스님의 말 - 책 좀 읽은 복음주의자들이 범신론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며 경계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 은 허튼 소리가 아니다.
생활 속의 영성, 일상 속의 신비 1
이런 삶의 자세와 태도는 생활 구석구석에 다 옮겨 질 수 있다. 매번 습관적으로 바복하는 일도 '깨어서'(mindful)하면 완전히 달라진다.
손을 씻을 때에도 손 씻는 행위 자체에 주목하면 흐르는 수돗물 소리도 시냇물 소리처럼 경쾌하게 들리고 "비누는 때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앙리 마쇼(Henri Michaux)의 말 처럼 비누의 존재도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게다가 떠오르면서 말갛게 닦여진 내 손과 얼굴은 어쩜 이리도 아름다운지!
위의 일기에서도 언급됐지만, 설거지도 ' 깨어서 '하면 손과 물과 그릇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신비와 기쁨을 맛보게 된다. 내가 설거지를 좋아하는 까닭이 이것이고, 틱닛한 스님이 미 프린스턴 대학유학시절 설거지를 도맡아 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스님은 접시와 물그리고 손의 움직임 하나한나를 완전히 자각하면서 접시와 보내는 시간이 즐거워진다고 했다. 그는 [깨어있는 마음의 기적]이란 책에서 설거지를 즐길 수 있는 비결에 대해 " 무슨 일을 하든 지 당신의 온 마음과 몸을 다하는것"이라고 했다.(이럴 수가! 우리는 바울이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이 노스님에게서 듣는다. 그런데 왜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에게서는 이말을 생활영성의 맥락에서 들을 수 없는 것일까? 교회 대신 스님에게서라도 이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활영성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보여주는 일이라 잠시 우울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설거지할 때 조차도 기도한다'는 일부 헌신되 그리스도인의 말이 굉장히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는 것같지만, 실은 설거지 하는 동안 머릿속을 다른 기도제목으로 꽉 채우는 것보다는, 설거지 그 자체를 주께 하듯 하는것이 더 깊은 기도요, 더깊은 영성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설거지나 회살 일 같은 일만이 아니라 놀 때에도 온 마음을 다해 놀아보라.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노는 인간'(homo indues)으로 지으셨다는 것, 신나는 놀이 속에 신명을 일으키는 성신이 임하는 것, 그리고 놀이 치료사들이 말하는 놀이 속에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아이들 하고 놀아줄 때도 그저 의무적으로 '놀아주지' 말고 놀이 자체에 몰입해서 아이들보다 더 신나게 놀아보라. 그런 엄마와 압바, 그런 아이들이 유난히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는 시시해 보이는 놀이를 아이들보다 더 즐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엠에센이나 네이트온에서 채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딴 짓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채팅도 '온맘다해' 해보라.나는 채팅조차도 진지 모드로 일관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엄숙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깃털처럼 가벼운 말들 속에서그 사람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배어나오는 그마디에 배어나오는 그의 관심, 그의 공허함, 그의 영혼에 집중해보라, 온라인을 통해서도 신비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을 만나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할 때에는 내가 더 이상 무슨말을 하겠는가! 사람을 앞에 두고서도 머릿속에 는 온통다른 생각, 다른 걱정으로 꽉 차있다면 어떻게 영혼과 영혼이 맞닿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는가? 어렵게 시간을 내서 사랑하는 이를 만났으면서도 온 정성을 다해 그 사람을 섬기려 하고 편안하게 해주려고 하지 않는 다면 그 만남이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사귀고 교제하고 양육해도 열매가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남녀노소를 떠나 모든 사람은 단 몇 분의 만남이라도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는 사람, 내가 완전히 환영받고 있고 수용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줄 그런 사람을 원하는것이다.
그나마 차을 마실 때만큼은 대부분 차 마시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편이지만, 차의 빛과 행과 맛과 온기에 한결 더자신을 젖어들게 해보라.마시고 있는 찻잎에 듣는 빗방울, 부서진 햇살, 스치는 바람결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 모든 것 뒤에서 미소 짓고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가? 만약 차를 마시는 일을 통해서도 이러한 신비를 누릴 수 있다면, 굳이 다도를 선의 경지로 끌어올린 [동다송]까지 읽어 볼 필요가 있겠는가?
생활 속의 영성, 일상 속의 신비2
이렇듯 한 번에 한 가지를 주께 하듯 하는 모노캐스팅 영성은 심지어 가장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걸음'에도 실천될 수 있다. 우리의 오감이 성령에 의해 활짝 열려진 상태로 걷기 그차체를 느끼며 걸을 때 다시 한번 신비를 맛보게 된다. 복음주의자중에 이런 글을 쓴 사람을 찾지 못해 다신 한번 틱낫한 스님의 말을 인용할 수 밖에 없음이 아쉽다.
"그냥 대지 위를 천천히 걸어라. 차가운아스팔트가 아니라 아름다운 지구별 위를 걷는다고 생각하라. 다음, 생각을 놓아버리고 그냥 존재하라. 숨을 들이쉬면서 마음에는 평화, 숨을 내쉬면서 얼굴에는 미소, 그대 발걸음마다 바람이 일고, 그대 발걸음마다 한 송이 꽃이 핀다. 나는 느낀다.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경이로운 순간임을,당신은 이미도 도착했다.
티낫한 스님은 '당신은 이미 도착했다'고 할때 득도와 해탈을 염두에 두었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의 신비 속에 도착한 것으로 이해하면 큰 거부감없이 그의 '걸음의 영성'을 받아 들일 수 있다.
걷는 것조차 신비가 될 수 있다면 하물며 청소를 하는 것, 기저귀를 갈아주는것, 음악을 듣는 것 , 채소를 키우는 것, 전철을 타고 가는것,사진을 찍는 것,책을 읽는것,영화를 보는 것, 전화를 하는 것,싸이질을 하는 것, 그리고 입맞추는 것에서 신비를 누릴 수 있음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이러한 모노태스킹 생활영성으로 충만하게 되면 "내가 온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하려 함이라"(요 10:10)는 말쓰미 종교적으로 의미 없어 보이던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피어나는지 보게 된다.
이런 점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하라"는 말씀은 멀티태스킹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너무나 위대한 말씀이다. 알고 보면 이 말씀은 주님을 위한 말씀이 아니고 우리를 위한 말씀이다. 지극히 작은 일 하나, 습관적으로 하는 일 하나라도, 그 일 자체를 자각하는 가운데 온 몸과 정서을 다해 주께 하듯 한다면, 살아가는 매 순간이 신비요, 기도요 , 묵상이 된다. 우리가 이러한 삶의 양식을 빚어나간다면, 5월에 창조영성의 추구가 소비대중문화시대의 강력한 항체가 될수 있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모노태스킹 영성 역시 보암직한 새 상품을 향한 무차별적 지름신의 강림과 대중문화가 유일한 감동의 출처가 되는 빈곤한 생활을 너끈하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예상되는 반론
근데 어디선가 이런 반론이 들리는 것 같다."매 순간 오감을 다 자각하며 열과 성을 다해 한가씩 해내갈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나역시 이러한 훈련에 익숙해지지 않은 사람이라 그 말에 동감한다. 몸에 배지 않은 채 모든 일을 그렇게 하려고 하면 쉽게 지칠 수 도 있고, 차라리 이전처럼 아무생각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하지만 그것은 모든 일을 지성으로 할 때 우리가 누리는 전인(whole-being)의 만족함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다. 훈련된 생활 영성을 통해 전인적인 기쁨을 누리게 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힘이 솟아나게 되고, 그 힘을 길어 다시 다른 일을 주께 하듯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아직 체험해보지 못해서 모른다 치더라손, 설마 하나님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명하셨겠는가?
예상되는 또 하나의 반론은, 한 번에 한가지씩만 하자는 것은 할 일만은 이사회에서 능률이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일을 능률,즉 투입된 시간과 노력에 비해 얼마만큼의 결과물을 얻었느냐는 경제성만을 놓고 따지자면 , 도저히 멀티캐스팅을 따를 수가 없다. 하지만 오늘날 지식이나 정보가 모자라서 사람들이 헤매고 있는게 아니잖은가. 노랫말이 모자라서, 책이 부족해서,설교가 희귀해서 사람들이 헤매고 있는 게 아니잖은가. 단 한 곡을 쓰더라도 혼을 담은, 단 한 줄을 쓰더라도 삶을 부어낸, 단 한마디를 하더라도 진실을 담은, 단 한 사람을 먹이더라도 목숨을 다하는,그런 노래, 그런 글,그런 설교자, 그런 몾가 없기
때문에 이 따에 감동이 없고, 삶에 변화가 없고, 우리에게 기적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글을 쓰면서 나 역시 반성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빚고 숨을 불어넣으실 때처럼 그렇게 전부를 불어넣지 않은 말과 글을 얼마나 많이 내 뱉고 써왔는지를 말이다.
전복적 세계관으로서의 묵상
능률과 효율을 최고로 치는 오늘날의 가치체계와는 달리 모노테스킹의 영성은 성취보다 관계를, 양보다 질을 중시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은 전자를 후자보다 더 중시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에 - 특히 여자들에 비해 관계보다 성취를 중시하는 남자들에게는 - 멀티태스킹 생활 양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든,길가의 들꽃 한송이를 묵상하든,'묵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영성방법론이 아니라 오늘날의 가치관과 세계관 전체에 반하는 전복적 세계관이요. 대안대조 적인 삶의 양식임을 알게된다. 그러니 우리가 큐티진을 펴서 묵상을 한다는 것이 얼만나 큰 사회변현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 일인가! (그렇다고 해서 복음의 해방적 측면에서 무지몽매하고 정치사회적 참여를 주저해왔던 우리 보수복음주의자들이 다 른 사람들에게"큐티가 얼마나 큰 사회적 책임을 갖고 있는데"라고 말한다면 그들로부터 조롱만 받게 될것이다. 큐티가 갖고 있는 사회성을 공개적으로 밝히려면 최소한 성서한국대회 에서 언급된 수준의 실천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온 맘과 뜻과 힘과 정성과 목숨을 다해
우리는 주님의 입에서 직접, 가장음뜸가는 계명이자 율법을 모두 요약한 것이 바로'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가 '이웃을 제몸처럼 사랑하는 것'임을 들어 잘 알고 있다. 오늘 우리는 '맘과 목숨과 뜻과 힘을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이 바로 '맘과 목숩과 뜻과 힘을 다해' 매순간을 살아가는 일임을 생각해본다.
-출처 -QTzine에서중 저자 박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