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큼 고통에 무방비한 상태는 없으며, 그 사랑을 잃을 때만큼 무기력하게 불행한 경우도 없다
오형탁2006.08.27
조회23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한 바탕 소나기가 내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교회가는 길 지하철을 또 한 발 차로 놓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이럴 때를 대비해서 두 차 분을 일찍 나왔기 때문에 예배에는 세이프.
역시 준비하는 자에게는 시련이 덜하다.
가는 지하철 안, 홍대역을 지날 때 쯤에 루이스vs프로이트를 끝마쳤다. 시간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그만큼 이 책에 빠져있었는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읽혀내려갔다.
책은 훌륭했다. 재미있고, 의미도 있었다. 두 개의 기호를 한꺼번에 만족시키는, 오징어 땅콩이나 짬짜면과 같은 걸작이 나오기가 쉽지는 않듯,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책 또한 드물다.(물론 그 기준은 다분히 개인적이겠지만.) 특히 나처럼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이해할 수 있는 책이 그리 흔치 않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루이스라는 사람을 조금은 알게 되었으며, 뜬구름 잡듯 알고 있던 프로이트의 모습도 조금은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비슷하다면 비슷하달 수 있는 정신적 성장을 했었던 두 사람. 저자는 결국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좀더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했던 유신론자 루이스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같다.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도 루이스보다는 프로이트 쪽이 약점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사실 두 사람이 살았던 '시간차'를 생각해 볼 때, 이 책의 논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한들 반드시 '루이스의 승!'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고.) 비슷한 실력의 격투가가 시합을 할 때, 보통 먼저 공격하는 쪽이 카운터는 먹기 쉽다. 그처럼 먼저 논리를 펼친 프로이트와 그 논리를 기초로 생각해 그를 보완하고 비판한 루이스의 논리를 공정하게 비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재변론의 기회가 없는 한 말이다.(이는 저자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인 듯하다.)
인간은 이기적인 지라 내가 이 책에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나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사랑과 성의 부분의 논리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비로써 설명하는 성과 사랑이라,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이 부분에 관해 나의 수첩에는 네개의 문장이 적혔다. 유신론과 무신론을 떠나 그저 그 문장 자체가 내 안에 남았다. 그것이 프로이스와 루이스의 문장력인지, 번역이 너무나 잘 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개인적으로 감정적이 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제대로 이해도 못했으면서 변죽만 올리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 쪽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뭐 어떨까 싶다. 한 편에 하나씩, 그저 확대 해석 장난질이나 해보고 싶다.
그 첫 번째 문장이다.
"사랑할 때만큼 고통에 무방비한 상태는 없으며, 사랑하는 대상이나 그 사랑을 잃을 때만큼 무기력하게 불행한 경우도 없다."
프로이트가 한 말이다. 정말 공감이 되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에 무방비한가. 이는 두 가지를 뜻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사랑의 플러스 에너지가 웬만한 정도의 고통은 느끼지조차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사랑을 할 때는 고통에 상당히 둔감해진다. 어느 정도의 고통은 행복함에 밀려 발디딜 틈이 없다.(특히 연애 초기에 그렇다.) 또 가끔은 현실의 고통과 시련이 그 사랑의 고결함을 오히려 빛내주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고통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적정한 선에서 아예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고통도 있을 테지만 결국 고통이란 '누적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둘째로는 그 때문에 고통받고 있음에도 그것이 곪기 전까지는 자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하지만 급전으로 '땡겨 쓴' 사천은 나중에 복리 일수 이자로 되돌아 오듯, 결국에는 갚아나아가야 할 몫일 것이다. 무방비한 만큼의 댓가는 각오해야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사랑을 잃었을 때의 좌절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사람에게 있어 사랑의 상실이란 얼마나 큰 고통인가. 최융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스트레스 사유는 '가족'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렇다. 보통 사람은 열 사람의 타인의 부모의 죽음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의 부모 한 사람의 죽음을 더욱 크게 느낀다. 심지어 사람들은 몇 만 Km밖에서의 대량 학살 문제보다 사랑했던 연인과의 슬픈 이별에서 더더욱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이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이기적이며 불공평하게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사랑의 상실이 그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이유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 대상과 자신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진 가장 강한 욕구 중 하나는 자기방어다. 사랑의 대상은 무엇보다 먼저 보호해야할 자신과 너무나 밀착해 있기에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지며(때로는 밀착해 있는 그 자신보다도!), 그 때문에 잃었을 때의 데미지도 크다. 가끔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자기희생적 모습은 아마 이타성이라고 보기보다는 자기애의 변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치하게 현학적인 설명이 되어버렸는데, 쉽게 이야기해서 '그 사람'이 '나'보다 소중해서라기보다 '그 사람'은 '남'이 아니라서는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자신과 '아주 밀착한 타인'은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단어로 인해 쉽게 '자신'과 자리바꿈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내 자신보다 너를 더 생각한다" 는 낯 간지러운 고백은, 100퍼센트의 진실은 아닐지언정 사탕발림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만큼 고통에 무방비한 상태는 없으며, 그 사랑을 잃을 때만큼 무기력하게 불행한 경우도 없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한 바탕 소나기가 내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교회가는 길 지하철을 또 한 발 차로 놓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이럴 때를 대비해서 두 차 분을 일찍 나왔기 때문에 예배에는 세이프.
역시 준비하는 자에게는 시련이 덜하다.
가는 지하철 안, 홍대역을 지날 때 쯤에 루이스vs프로이트를 끝마쳤다. 시간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그만큼 이 책에 빠져있었는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읽혀내려갔다.
책은 훌륭했다. 재미있고, 의미도 있었다. 두 개의 기호를 한꺼번에 만족시키는, 오징어 땅콩이나 짬짜면과 같은 걸작이 나오기가 쉽지는 않듯,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책 또한 드물다.(물론 그 기준은 다분히 개인적이겠지만.) 특히 나처럼 지식의 부족으로 인해 이해할 수 있는 책이 그리 흔치 않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루이스라는 사람을 조금은 알게 되었으며, 뜬구름 잡듯 알고 있던 프로이트의 모습도 조금은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비슷하다면 비슷하달 수 있는 정신적 성장을 했었던 두 사람. 저자는 결국 인생의 터닝포인트에서 좀더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했던 유신론자 루이스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같다.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도 루이스보다는 프로이트 쪽이 약점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사실 두 사람이 살았던 '시간차'를 생각해 볼 때, 이 책의 논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한들 반드시 '루이스의 승!'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고.) 비슷한 실력의 격투가가 시합을 할 때, 보통 먼저 공격하는 쪽이 카운터는 먹기 쉽다. 그처럼 먼저 논리를 펼친 프로이트와 그 논리를 기초로 생각해 그를 보완하고 비판한 루이스의 논리를 공정하게 비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재변론의 기회가 없는 한 말이다.(이는 저자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인 듯하다.)
인간은 이기적인 지라 내가 이 책에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나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사랑과 성의 부분의 논리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유신론과 무신론의 대비로써 설명하는 성과 사랑이라,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이 부분에 관해 나의 수첩에는 네개의 문장이 적혔다. 유신론과 무신론을 떠나 그저 그 문장 자체가 내 안에 남았다. 그것이 프로이스와 루이스의 문장력인지, 번역이 너무나 잘 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개인적으로 감정적이 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제대로 이해도 못했으면서 변죽만 올리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 쪽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뭐 어떨까 싶다. 한 편에 하나씩, 그저 확대 해석 장난질이나 해보고 싶다.
그 첫 번째 문장이다.
"사랑할 때만큼 고통에 무방비한 상태는 없으며, 사랑하는 대상이나 그 사랑을 잃을 때만큼 무기력하게 불행한 경우도 없다."
프로이트가 한 말이다. 정말 공감이 되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에 무방비한가. 이는 두 가지를 뜻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사랑의 플러스 에너지가 웬만한 정도의 고통은 느끼지조차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사랑을 할 때는 고통에 상당히 둔감해진다. 어느 정도의 고통은 행복함에 밀려 발디딜 틈이 없다.(특히 연애 초기에 그렇다.) 또 가끔은 현실의 고통과 시련이 그 사랑의 고결함을 오히려 빛내주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고통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적정한 선에서 아예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고통도 있을 테지만 결국 고통이란 '누적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둘째로는 그 때문에 고통받고 있음에도 그것이 곪기 전까지는 자각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하지만 급전으로 '땡겨 쓴' 사천은 나중에 복리 일수 이자로 되돌아 오듯, 결국에는 갚아나아가야 할 몫일 것이다. 무방비한 만큼의 댓가는 각오해야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사랑을 잃었을 때의 좌절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사람에게 있어 사랑의 상실이란 얼마나 큰 고통인가. 최융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스트레스 사유는 '가족'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렇다. 보통 사람은 열 사람의 타인의 부모의 죽음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의 부모 한 사람의 죽음을 더욱 크게 느낀다. 심지어 사람들은 몇 만 Km밖에서의 대량 학살 문제보다 사랑했던 연인과의 슬픈 이별에서 더더욱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이 인간에게 있어 얼마나 이기적이며 불공평하게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사랑의 상실이 그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이유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 대상과 자신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진 가장 강한 욕구 중 하나는 자기방어다. 사랑의 대상은 무엇보다 먼저 보호해야할 자신과 너무나 밀착해 있기에 무엇보다 소중하게 느껴지며(때로는 밀착해 있는 그 자신보다도!), 그 때문에 잃었을 때의 데미지도 크다. 가끔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자기희생적 모습은 아마 이타성이라고 보기보다는 자기애의 변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치하게 현학적인 설명이 되어버렸는데, 쉽게 이야기해서 '그 사람'이 '나'보다 소중해서라기보다 '그 사람'은 '남'이 아니라서는 아닐까 싶다는 것이다. 자신과 '아주 밀착한 타인'은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단어로 인해 쉽게 '자신'과 자리바꿈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내 자신보다 너를 더 생각한다" 는 낯 간지러운 고백은, 100퍼센트의 진실은 아닐지언정 사탕발림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